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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전투, ‘차원의 거울’ (3)
* * *
절벽으로 둘러싸인 고립된 공터 한 가운데.
원진圓陣을 형성한 채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는 백여 명의 천군天軍들.
이안은 적당히 긴장한 채로 언제든 활시위를 당길 준비를 하고 있었고, 잠시 후 적막 속에 시스템 메시지가 울려 퍼졌다.
-전투가 시작됩니다.
-페이즈 1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신호로, 고요하던 공터 곳곳에서 요란한 공명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우웅- 우우웅-!
-‘차원기병次元奇兵’들이 소환됩니다.
메시지를 확인한 이안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전장을 훑어보았다.
갈수록 전개가 흥미진진했기 때문이었다.
‘차원기병이라…….’
그런데 이어서 나타난 적들을 확인하고 나자, 이안의 얼굴은 의아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푸른빛과 함께 맵의 곳곳에 소환된 적들은, 아무리 봐도 마계와는 거리가 있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차원기병/Lv. 10(초월)
‘분명 마계와 싸운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된 거지?’
온통 푸른빛으로 둘러싸여 있는 하늘빛 갑주의 병사들.
얼핏 보기에도 이들은 마족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마족의 상징은 까무잡잡한 피부와 특유의 적갈색 머릿결인데, 피부만 봐도 까맣기는커녕 하얗다 못해 창백했으니 말이다.
물론 피부가 하얀 마족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냥 분위기 자체가 너무 달랐다.
하지만 더 이상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적들이 엄청난 속도로 진영을 향해 몰려왔기 때문이었다.
둥- 둥- 둥-!
천군의 진영 최후방에서, 커다란 전고戰鼓 소리가 울려 퍼졌다.
“온 힘을 다해 저들을 멸하라! 성왕께서 함께하신다!”
“와아아!”
중대장 ‘파커’의 전령이 떨어지자 온 세상이 떠나갈 듯 커다란 함성 소리와 함께 천군들도 일제히 몰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안이 속한 7소대의 가장 선두에는 어느새 리챠오가 서 있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마크 올리버가 씨익 웃으며 이안을 향해 말했다.
“우리도 가만 있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이안 또한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짧은 대화를 마친 두 사람은 동시에 지면을 박차고 튀어 올랐다.
그리고 다음 순간.
위이잉-!
이안의 주변으로 소환수들이 일제히 소환되었다.
캬아아오-!
크릉- 크르릉-!
으르렁거리며 전장을 향해 뛰어나가는 라이와 할리부터 시작해서, 커다란 입을 쩍 벌린 채 포효하는 카르세우스와 뿍뿍이.
또, 어둠의 날개를 활짝 펼친 까망이와 중급 화염의 정령 마그비까지.
단숨에 할리의 등에 올라탄 이안은, 빠르게 활시위를 당겨 대었다.
핑- 피피핑-!
그러자 언제나 그랬듯, 이안의 활시위를 떠난 화살들은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쭉쭉 뻗어 나갔다.
퍽- 퍼퍼퍽-!
그리고 쏘아 낸 화살들이 적들에게 명중한 순간, 이안은 재빨리 시스템 메시지들을 확인하였다.
-‘차원기병’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차원기병’의 생명력이 195만큼 감소합니다.
-‘차원기병’의 생명력이 177만큼 감소합니다.
-‘차원기병’의 생명력이 212만큼 감소합니다.
‘차원기병’이라는 녀석들은 이안이 완전히 처음 상대해 보는 상대였다.
때문에 녀석의 전투력이 어느 정도인지, 어떤 정도의 피해를 입혀야 처치할 수 있는지, 이안에게는 아무런 정보도 없었다.
이안이 정령 마법을 사용하지 않고 평범한 화살을 날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정령 마력과 속성 저항력 등 여러 가지 수식이 복잡하게 섞여 대미지가 산출되는 정령 마법과는 달리, 일반 공격은 단순 물리 공격력과 물리 방어력으로만 대미지가 결정되니 말이다.
수식이 간단한 일반 공격으로 얼마 정도의 대미지가 박히는지를 확인해 보면, 대략적인 상대의 전투력을 측정해 볼 수 있었다.
‘음……. 초월 레벨은 죄다 10정도인데, 사실상 전투력은 조금 더 위라고 봐야겠군.’
물론 계산이 완벽히 정확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여러 가지 변수가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애초에 이안의 목적은 어느 정도의 ‘감’을 잡는 것이었으니.
그 정도는 충분히 달성했다 할 수 있었다.
‘용사의 마을 난이도가 이 정도라면, 예상했던 것보단 좀 쉬운데?’
이안이 판단하기에, 차원기병들의 전투력은 대략 초월 레벨 12~13정도의 일반 몬스터들과 비슷했다.
그리고 이 정도 수준이라면, 오염된 광산과 비교해도 훨씬 쉬운 난이도였다.
물론 장비를 제대로 완비하지 못한 이안도 그때와 비교해 많이 약해진 상태기는 했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해볼 만 한 수준인 것이다.
‘뭐, 이제 첫 번째 페이즈니까 아직 방심하기 이르긴 하지.’
“흣차-!”
할리의 등을 박차고 뛰어올라 핀에게 올라탄 이안은, 힘차게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차원기병들 중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녀석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더 이상 지상에 머무를 이유가 없어졌다.
끼아아오오-!
이안을 태운 채, 순식간에 십 수 미터를 솟아오른 핀.
이안이 고삐를 잡아당기자 핀은 측면을 향해 급속도로 선회하였다.
그리고, 그 사이.
이안의 손에는 새빨간 화염이 피어올랐다.
마그비의 힘을 빌어 정령 마법을 발동시킨 것이다.
화르륵-!
-‘지옥의 화염시’ 정령 마법을 발동시켰습니다.
이어서 이안의 화염장궁은, 강렬한 불길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쏘아 보냈던 초라한 나무화살과는 격이 다른, 홍염에 둘러싸인 시뻘건 불화살이었다.
강렬한 화염의 힘을 머금은 불화살들이, 차원기병들을 향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피핑- 핑- 핑-!
* * *
띠링-!
-초월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초월 9레벨을 달성하셨습니다.
최근 일주일 동안, 훈이의 기분은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이안으로부터 생각지도 못했던 선물을 받은 덕에, 엄청난 속도로 초월 9레벨을 달성했기 때문이었다.
“후후, 하찮은 고철덩어리들. 어둠의 힘 앞에 모두 무릎 꿇어라! 크하하핫!”
본인의 키보다도 더 큰 시커먼 스태프를 치켜 든 채, 광소(?)를 터뜨리는 훈이.
한참 나르시즘에 빠져 9레벨 달성의 기쁨을 만끽하던 훈이는, 조심스런 손길로 스태프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스태프의 양 끝에서, 시커먼 어둠과 보랏빛 광채가 뒤섞인 묘한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어둠술사 데시트의 스태프/유일(초월)
-고대의 사악한 어둠술사 데시트가 사용하던 스태프입니다. 강력한 어둠의 힘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스태프의 등급은 무려 ‘유일(초월)’등급이었다.
이안조차도 아직 유일(초월)등급의 장비가 없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야말로 놀랍기 그지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아직 본격적으로 중간계 콘텐츠를 진행해 보지도 못한 훈이가, 이런 귀한 아이템을 직접 얻었을 리는 없었다.
훈이의 사랑을 듬뿍 받는 중인 이 스태프는 다름 아닌 이안이 그에게 준 선물이었다.
그리고 이안에게 갑작스런 선물을 받은 사람은, 훈이뿐만이 아니었다.
지금 훈이와 함께 사냥 중인 유신 또한, 이안에게서 받은 가죽 갑옷을 착용 중이었으니 말이다.
“야, 훈아.”
“왜 형?”
“이안이는 대체 이 템들 어디서 얻은 걸까?”
“오다 주웠다잖아.”
“그걸 믿냐?”
“이안갓의 말이라면, 뭔들 믿지 못하리.”
잠시 감상에 젖은 훈이는 그날의 기억을 떠올려보았다.
-훈이, 이거 너 가져라.
-어, 스태프? 이거 좋은 거야?
-오다 주웠다.
-아씨, 오다 주운 걸 왜 나한테 줘?
-싫음 말든가. 다른 길드원 줘야지.
-자, 잠깐! 그래도 옵션은 한번 확인해 보고!
스태프의 위쪽에 새겨져 있는 해골 문양을 만지작거리던 훈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형한테 이걸 받지 않았더라면 이번 주까지도 9레벨은 무리였겠지…….”
훈이의 중얼거림을 들은 유신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크, 내가 받은 것도 좋긴 하지만, 확실히 그 스태프는 진짜 어마어마한 것 같아.”
훈이가 받은 스태프와 달리, 유신이 받은 가죽갑옷은 희귀(초월)등급이었다.
물론 그것만 해도 충분히 대단한 아이템이기는 하지만, 유일(초월)등급인 훈이의 스태프와는 엄연한 격차가 존재하는 것이 사실.
그렇다면 이안은, 귀한 무기들을 이들에게 왜 나눠 준 것일까?
만약 경매장에 올렸다면, 모르긴 몰라도 최소 수천만 원 이상을 호가할 만한 아이템을 말이다.
누구보다도 두 사람을 아끼는 마음에?
아니면 그 정도 아이템은 이안에게 별것 아니라서?
당연히 그런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이안이라고 해도, 수천. 아니 억 단위를 호가할지도 모를 아이템들을 그냥 넘겨줄 정도는 아니었으니 말이다.
이안이 훈이에게 이 귀한 아이템을 준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지금같이 콘텐츠 경쟁이 심한 상황에 이런 고급 무기가 다른 길드에 들어간다면, 여러 모로 길드 입장에서 좋을 게 없기 때문에 팔 수 없었던 것뿐이었다.
하지만 단순하기 그지없는 훈이와 유신이, 그렇게 고차원적인 사고를 할 수 있었을 리 없다.
그저 이안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감격할 따름이었다.
이안의 충복 1호(?)로 유명한 훈이의 충심은, 이번 일을 계기로 더욱 견고해졌다.
“크으, 이안갓! 찬양합니다! 충성충성!”
존경심 가득어린 눈빛으로 이안을 떠올리는 훈이!
스태프의 아이템 정보 창을 다시 한 번 읽어 보는 훈이의 두 눈에는, 하트가 가득히 담겨 있었다.
그렇다면 이안은, 대체 이런 아이템들을 언제 얻은 것일까?
사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이 장비들은 절대로 오다 주운(?)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 두 개의 장비는, 이안의 슬픈 사연이 담긴 아이템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안이 정령의 도장 15층을 깨고 얻었던 두 개의 초월 장비상자.
그것을 오픈해서 얻은 아이템들이었으니 말이다.
이게 뭐가 슬픈 사연이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이안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슬플 만한 사건이었다.
못해도 상자 두 개 중에 하나 정도는, 소환술사 전용 장비가 나올 것이라 기대했으니까.
게다가 본인에게도 없는 유일 등급이 흑마법사 전용 아이템으로 나왔을 때는, 배가 아프다 못해 허탈한 수준이었다.
어쨌든 이안 덕에, 순식간에 초월 9레벨에 도달한 훈이와 유신이었다.
“유신 형, 지금 우리 이럴 때가 아니야.”
“응?”
“빨리 10렙 찍고 이안 형 도우러 가야지.”
“그래, 이렇게 쉬고 있는 걸 알면 이안이가 실망할 거야.”
의지를 불태우며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다음 사냥터를 향해 바삐 걸음을 옮겼다.
* * *
퍼엉-!
-‘차원기병’을 성공적으로 처치하셨습니다.
-영웅의 마을 ‘공적치’를 1포인트만큼 획득하셨습니다.
-‘7소대’의 공헌도가 10포인트만큼 증가합니다.
-영웅 점수를 2만큼 획득하셨습니다.
이안의 손에 소멸한 차원기병 하나가, 새하얀 잔상을 남기며 허공으로 바스라진다.
그리고 첫 번째 차원기병을 처치한 이안은 떠오르는 시스템 메시지들을 유심히 살폈다.
‘공적치에 영웅 점수라……. 소대의 공헌도는 소대승격과 관련이 있는 거겠지. 역시 경험치는 오르지 않는 것 같고…….’
그런데 잠시 후, 이안의 두 눈동자에 이채가 어렸다.
이안의 손에 부서져 허공으로 흩어진 차원기병의 형체가, 새하얀 빛과 함께 어디론가 향해 빨려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스하아아-!
처치된 차원기병을 빨아들인 것은, 다름 아닌 ‘차원의 거울’.
그런데 차원의 거울이 빨아들인 것은 이안이 처치한 차원기병 뿐만이 아니었다.
전장에서 처치된 모든 차원기병들은, 차원의 거울을 향해 순차적으로 빨려 들어갔으니 말이다.
더해서 거울을 향해 빨려 들어간 차원기병의 영혼들은, 거울에 반사되어 한 데 모이더니 어디론가 날아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것을 발견한 이안은, 머리를 열심히 굴리기 시작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손발은 열심히 움직이면서 말이다.
‘뭐지? 저 거울이 처치된 차원기병들을 왜 빨아들이는 걸까? 그리고 어디로 보내는 거지?’
이안의 시선이 차원거울의 바로 아래 있는 금속판을 향했다.
그곳에는, 다음과 같은 간단한 문구가 떠올라 있었다.
-남아 있는 차원기병 : 95
-남아 있는 천군 : 99
‘지금까지 다섯을 처치했고, 하나가 사망했다는 건가 보군.’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우우웅-!
전장의 하늘에 커다란 파동이 생기더니 어디선가 시뻘건 빛줄기가 날아와 차원의 거울에 부딪쳤다.
그리고 거울에 부딪힌 그 빛줄기는 갈래갈래 갈라져 전장의 곳곳을 향해 쏘아졌다.
위잉- 위이잉-!
이어서 그 자리에는, 새로운 차원기병들이 소환되었다.
“엇?”
이안은 당황했다.
이 일련의 상황들만 가지고는 도무지 거울이 무슨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방금 소환된 차원기병들로 인해 전투는 원점으로 돌아와 버렸다.
-남아 있는 차원기병 : 100
-남아 있는 천군 : 99
‘아니, 원점은 아닌가? 아군이 하나 사망했으니…….’
이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안이 발견한 것이라곤, 사체를 흡수할 때는 하얀 빛이 내려오며 새로운 차원기병이 소환될 때는 붉은 빛이 내려온다는 차이 정도였다.
게다가 이런 식으로 전투가 진행된다면, 결국 천군은 전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계속해서 처치한 만큼 새로운 차원기병들이 생겨난다면 말이다.
‘뭐지? 계속 이런 식이면 전투가 끝이 없잖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아리송한 표정이 된 이안!
하지만 처치한 만큼 새로 생긴다는 것은, 이안의 착각이었다.
대략 5분 정도가 더 지났을 무렵 금속판에는, 이해할 수 없는 숫자가 떠올라 있었으니 말이다.
-남아 있는 차원기병 : 101
-남아 있는 천군 : 92
남아 있는 차원기병의 숫자가 오히려 처음보다 한 기 늘어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