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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의 길 (1)
간밤의 달조차도 서쪽으로 채 넘어가지 못한, 어스름이 깔려있는 이른 새벽.
정령산 어귀에 있는 한 공터에서는, 경쾌하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 다들 모인 것 맞지?”
마치 새벽부터 물 뜨러 약수터에 모인 아저씨들처럼 졸린 눈을 부비며 공터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인원들.
그들의 정체는 당연히, 로터스 길드의 정예 멤버들이었다.
“으, 너무 졸려. 살려 줘…….”
“난 어제 일찍 자서 졸립진 않은데, 앞으로의 일정이 두렵네.”
“나도 동감.”
반쯤 눈이 감긴 채 캐릭터의 상태를 점검 중인 로터스의 랭커들은, 한 무리의 좀비 집단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좀비들의 우두머리(?)만큼은, 어쩐지 생생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업데이트 전까지 전원 8레벨이 목표야. 다들 알겠지?”
그리고 우두머리의 말이 울려 퍼지자, 여기저기서 불만이 쏟아져 나왔다.
“아니, 우린 지금 막 시작하는 건데 그건 불가능한 계획 아닌가요, 이안 님?”
“와, 7레벨도 아니고 8레벨? 아직 초월 8레벨 찍은 사람도 없다던데…….”
하지만 좀비들의 불만은, 우두머리의 한마디에 그대로 묵살되었다.
“8레벨 찍은 사람이 왜 없어? 내가 9레벨인데.”
“…….”
“거 참, 형은 논외로 칩시다.”
이렇게 약간의 소란이 있기는 했지만, 어찌 되었든 로터스 정예들은 금방 정비를 마치고 도열하였다.
말로는 구시렁거릴지라도, 그들 또한 최상위의 랭커.
업데이트 전까지 최대한 초월 레벨을 올려 두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정도는, 이미 모두가 인지하고 있는 상태였다.
누구보다 빨리 용사의 마을에 들어가 콘텐츠를 선점해야 하니 말이다.
때문에 길드원들의 마음가짐 또한 당연히 남달랐다.
한차례 길드원들을 둘러본 헤르스가 주먹을 꾹 말아 쥐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기필코 길드 세계 랭킹 1위에 로터스의 이름을 박아 넣겠어.’
이번 대규모 업데이트인 ‘용사의 마을’ 업데이트는, 지금까지 카일란에 존재해 왔던 그 어떤 업데이트보다도 중요하다.
지금까지의 대규모 업데이트는 결국 각 서버 내에서 경쟁하는 구도였으나, 이번 업데이트는 전 세계의 유저들이 처음으로 경쟁하게 되는 시발점이니 말이다.
소란이 잦아들고 모두가 전투 준비를 마치자, 이안이 황금빛 창을 번쩍 치켜들며 입을 열었다.
“자, 한번 시작해 봅시다.”
* * *
진정한 생사의 경계를 나누는 강이자, 명계에서 가장 유명한 강인 아케론강.
이 아케론강이 명계에서 가장 유명한 이유는 간단했다.
아직 이안을 제외한 어떤 유저도, 이 아케론강 외에 다른 강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케론 강을 건넌 유저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안이 명왕에게 사망하여 아케론강을 건넜듯, 명계 안에서 사망하여 본의 아니게 아케론강을 건넌 유저들은 제법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안과 달리 차원의 게이트를 열 수 없었고, 그런 상황에서는 당연히 에레보스 깊숙한 곳까지 들어갈 수 없었다.
때문에 두 번째 강인 코퀴토스를 본 것은, 사실상 이안 혼자뿐이었다.
어찌 되었든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 가장 유명해져 버린, 명계의 아케론 강.
이 아케론강의 주변에는 지금, 수많은 랭커들과 길드들이 초월 레벨을 올리기 위해 진을 치고 있었다.
초월 9~10레벨의 언데드들이 등장하는 아케론강 인근의 사냥터가, 현존하는 사냥터들 중 가장 초월 경험치를 많이 주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명계가 엄청나게 넓으며 이 아케론 강이 끝도 없이 길다는 점이었다.
세계 서버들의 수많은 길드 파티가 명계에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사냥터가 부족하여 다투는 일은 아직 없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타이탄 길드의 랭커들은 전부 이 아케론 사냥터에 자리 잡고 있었다.
또, 타이탄 길드의 초월 레벨은 전 서버를 통틀어 수위권이라 할 수 있었다.
이 명계의 사냥터에 가장 먼저 자리 잡은 길드가 바로 타이탄 길드였으니 말이다.
아케론강의 강변에 휘날리는 타이탄 길드의 깃발.
그리고 그 아래, 타이탄의 수뇌부들이 모여 회의를 하고 있었다.
“에밀리, 로터스 쪽 정보는 좀 알아왔나?”
“그렇습니다, 마스터.”
“후후, 아마 지금쯤 발등에 불이 떨어졌을 텐데……. 로터스 정예들은 지금 어디에 있지?”
샤크란의 물음에, 에밀리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들은 오늘 아침, 서둘러 정령계의 사냥터로 간 것 같습니다.”
“그래? 명계가 아닌 정령계라…….”
“아무래도 가장 많은 랭커들이 몰려 있는 명계보다는, 사람이 비교적 적은 정령계의 사냥터를 선택하는 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그렇군.”
샤크란은 최근 기분이 좋았다.
갑작스런 대규모 업데이트 소식으로 인해 로터스를 앞지를 수 있는 기회가 왔기 때문이었다.
‘후후, 이안, 이번엔 네 녀석 판단이 틀렸구나.’
명계가 열린 이후, 며칠 동안 함께 명계에서 사냥하던 로터스의 길드원들은 어느 순간부터 인간계로 다시 내려가 버렸다.
그리고 타이탄에서 알아본 결과, 그것은 이안의 지시 때문이었다.
초월 레벨을 올리기에 앞서, 먼저 인간계의 레벨을 올리라는 이안의 지령.
‘덕분에 우리가 더욱 수월하게 초월 레벨을 올릴 수 있었지. 가장 좋은 사냥터 위주로 독식할 수 있었으니 말이야.’
처음 그 사실을 접한 샤크란은 살짝 불안한 마음도 들었었다.
이안이 어떤 꿍꿍이로 그런 지령을 내렸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지상계의 콘텐츠는 이미 지난 것이고, 중간계의 콘텐츠가 새로 나온 것인데, 어째서 지상계의 레벨을 우선으로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조금 더 정보를 파 본 결과, 그 이유까지도 알아낼 수 있었다.
-어차피 지금 열린 중간계는 초월 10레벨까지밖에 올릴 수 없는 ‘체험판’에 불과하니, 먼저 지상계의 레벨을 올리는 것이 현명하다.
처음 이 정보를 알아낸 샤크란은 적잖이 고민했다. 이안과 로터스의 선택이, 제법 합리적으로 보였으니 말이다.
게다가 지상계에서의 레벨이 많이 벌어진다면, 국가전이 일어났을 때의 전력 차이도 신경이 쓰였다.
그러나 결국 샤크란과 타이탄 길드는, 계속해서 명계에 남기로 결정했다.
오히려 초월 레벨을 10까지밖에 올릴 수 없기 때문에, 그 레벨을 먼저 만들어 놓는 것이 우선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샤크란은 언제든 업데이트가 되어 그 이후의 콘텐츠가 뚫린다면, 곧바로 진입할 수 있도록 세팅해 놓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결국 내 판단이 옳았고 말이야.’
기분 좋은 웃음을 지은 샤크란이 에밀리를 향해 다시 물었다.
“그래서 에밀리, 로터스 길드 정예들 초월 레벨은 얼마나 파악한 거야?”
샤크란의 물음에, 에밀리가 즉각 대답하였다.
“우선 마지막으로 확인했던 이안의 초월 레벨은 5정도. 아마 지금쯤 7~8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사실 알아볼 것도 없었습니다. 초월 레벨 3레벨인 헤르스를 제외하고는, 죄다 초월 1레벨이었으니까요.”
에밀리의 대답에, 샤크란은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후후, 그래. 그렇겠지.”
“아, 그런데……. 조금 의외의 인물이 하나 있었습니다.”
“의외라면……?”
“그, 로터스 길드의 요리사 클래스 유저 있지 않습니까.”
“아, 알고 있지. 하린이라는 이름이었던 것 같은데…….”
“맞습니다.”
“그 친구는 왜?”
“그 유저의 초월 레벨이 5나 되어서 조금 놀랐습니다. 다른 유저들은 전부 1레벨인데, 어떻게 그녀 혼자만 5레벨을 찍을 수 있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요.”
에밀리의 말에, 샤크란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후후, 확실히 의아한 부분이기는 하군. 하지만 신경 쓸 건 없잖아? 지금 우리 타이탄 길드 정예 중 6레벨 못 찍은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말이지.”
“그건 그렇습니다, 마스터.”
타이탄 길드의 회의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로터스라는 가장 큰 경쟁 상대가 한참 뒤로 밀려나 있으니, 전략을 세우기도 무척이나 수월하였던 것이다.
“그럼 결과적으로 한국 서버 내에서 경계해야 할 유저들은 사실상 마계 쪽 랭커들뿐이겠군.”
“그렇습니다, 마스터. 림롱의 초월 레벨이 8레벨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직 확인은 못했지만 말입니다.”
“림롱이라……. 확실히 위협적인 친구야.”
“사실상 마계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이 림롱이니까요.”
업데이트 날까지의 대략적인 계획을 확립한 타이탄 길드의 수뇌부는, 깔끔하게 회의를 종료하였다.
이제 대략적인 계획도 만들어졌으니, 업데이트 날까지는 잠을 줄여 가며 미친 듯이 사냥하는 일만이 남았다.
‘이번이 어쩌면 로터스를 다시 넘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이안을 떠올린 샤크란은, 한쪽 입꼬리를 미세하게 말아 올렸다.
가장 먼저 초월 10레벨을 찍고 용사의 마을에 들어갈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샤크란 자신이 될 것이라 생각하며 말이다.
* * *
늦은 저녁, 야근에 한창인 카일란 기획 3팀의 사무실.
항상 야근이 많은 기획 팀이라고는 하지만, 최근에는 그 정도가 좀 심했다.
대규모 업데이트가 이제 일주일밖에 남지 않은 데다 유저들의 콘텐츠 소모 속도가 생각보다 빨라서, 일을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밤 10시가 다 되어 감에도 불구하고, 기획 3팀의 팀원들은 아무도 퇴근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팀장님, 우리 혹시 정령계 쪽에 기획 오류 발견된 거 있어요?”
쩌렁쩌렁 울리는 홍지운 대리의 목소리에, 나지찬은 화들짝 놀라며 대꾸했다.
“아, 진짜 홍 대리, 목소리 좀 어떻게 안 돼? 이러다가 심장 떨어지겠어.”
“타고난 목소리가 이런 걸 어떡합니까?”
“후우, 조심하는 척이라도 좀…….”
“어쨌든 그게 지금 중요한 게 아닙니다, 팀장님. 지금 고객지원 팀 쪽에서, 컴플레인이 들어왔어요.”
콧방귀도 끼지 않으며 할 말을 잇는 홍지운 대리를 보며, 나지찬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딱히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 시간까지 남아서 근무 중인 팀원들이 안쓰러울 뿐이니 말이다.
‘후, 이번 프로젝트 끝나면 법카 들고 다 같이 한우라도 뜯으러 가야겠어.’
속으로 실없는 생각을 중얼거린 나지찬이 홍지운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뭐, 컴플레인? 그런 건 어지간하면 네 선에서 처리하라고 했잖아.”
“그러니까 ‘어지간하면’이라고 하셨잖아요.”
“그, 그랬지…….”
“그런데 이건 뭔가, 제가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서요.”
“음……?”
홍지운 대리의 말에, 나지찬은 순간적으로 불길함이 엄습하는 걸 느꼈다.
‘뭐지? 또 무슨 큰 문제가 생긴 건가?’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안감을 억누르며, 나지찬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 문제가 뭔데?”
나지찬이 되묻자, 홍지운이 재빨리 다시 말을 이었다.
“그 지난주에 이안이 트라이하던 정령의 도장 아시죠? 기획 팀에서 홍보 영상 뽑아 갔던…….”
“그래, 정령의 도장. 그걸 내가 모를 리 없지.”
“요 며칠 사이, 새로 정령계에 진입한 유저들이 도장 트라이를 제법 많이 했나 봐요.”
“그……래서?”
“그 정령의 도장 밸런스 문제로, 오늘만 컴플레인이 열 개가 넘게 들어왔대요.”
홍지운의 말에, 나지찬은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오히려 불안감은 많이 사라진 상태였다.
어쨌든 정령의 도장 밸런스라면, 아무 문제가 없음이 확실했으니 말이다.
바로 지난주, 이안이 전투하는 장면을 직접 모니터링했으니까.
“그래? 정령의 도장 밸런스라면 문제될 일이 없는데……. 내가 직접 모니터링도 했고 말이지.”
“그……래요?”
나지찬이 살짝 표정을 찌푸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그거, 한 놈이 지속적으로 떼쓰는 거 아니야?”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컴플레인 들어온 아이피들이, 세계 각국에 퍼져 있거든요.”
“그……래?”
홍지운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내용은 다 한결같아요.”
“요약해 봐.”
“요약할 것도 없어요. 그냥 9층 난이도가 너무 어려워서, 기획 팀에서 실수한 게 분명하다는 내용이니까요.”
“응……?”
어이없는 표정이 된 나지찬은 곧바로 컴퓨터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현재 정령 도장의 9층에 세팅되어 있는 NPC의 정보를 불러오기 위해서였다.
그것만 확인하면, 진짜 밸런스에 문제가 있는 건지 바로 알아낼 수 있으니 말이다.
타탁- 타타탁-!
순식간에 키보드를 두들겨, 해당 정보를 모니터에 불러온 나지찬.
그리고 잠시 후, 나지찬은 벙 찐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
말을 잃은 채 멍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응시하는 나지찬을 보며 홍지운이 대답을 재촉하였다.
“뭔데요 팀장님. 진짜 클레임 들어온 것처럼 밸런스 붕괴 맞아요? 문제가 있는 게 맞는 건가요?”
하지만 홍지운의 물음에도, 나지찬은 아무 말 없이 모니터만을 응시했다.
그리고 곧 허탈한 표정이 된 나지찬이 힘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밸런스 붕괴는 맞고, 문제가 있는 건 아니야.”
나지찬의 목소리를 들은 기획 3팀 전체가 혼란에 빠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이렇게 카일란 기획 3팀의 사무실의 하루는 오늘도 평화롭게 흘러갔고, 그렇게 하루 이틀이 지나 대망의 ‘용사의 마을’ 업데이트 날이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