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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준비 (4)
* * *
정령의 도장 15층의 대기실.
도장의 모든 층의 뒤편에는 대기실이 존재하지만, 그중에서도 15층의 대기실 구조는 특별했다.
15층의 관문지기인 ‘도장 사범’이, 이 대기실 한편에 마련되어 있는 방에 기거하기 때문이었다.
도장 15층을 지키는 도장 사범인 샬리온.
그리고 그의 방에 들어온 이안은 기분 좋은 표정으로 샬리온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흐흐, 제가 긴장해야 할 거라고 말했죠?”
“난 충분히 긴장했고, 진지하게 자네를 상대했다네.”
“후후.”
“완벽한 나의 패배야. 첫 번째 명예도관이 된 것을 축하하네.”
쓴웃음을 지은 샬리온은, 이안에게 목패를 내밀었다.
그것은 샬론에게 받았던 목패와 비슷한 질감과 크기를 가진 작은 물건이었다.
띠링-!
-‘명예 도관의 증표(초급)’ 아이템을 획득하셨습니다.
-최초로 ‘명예 도관’이 되셨습니다.
-‘샬론의 심부름’ 퀘스트를 성공적으로 클리어하셨습니다!
-명성이 50만 만큼 증가합니다.
-‘고랄’종족과의 친밀도가 영구적으로 10만큼 상승합니다.
-‘수호자의 가면’ 아이템을 획득하셨습니다.
퀘스트 완료 메시지와 함께 연이어 떠오르는 보상을 보며, 이안은 히죽히죽 흘러나오는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명예 도관의 증표’라는 잡화 아이템도, 생각했던 것보다는 괜찮은 옵션을 가진 아이템이었으니 말이다.
-명예 도관의 증표(초급)
분류 : 잡화
등급 : 희귀(초월)
정령산 남쪽, 프뉴마 마을에 있는 정령의 도장의 ‘명예도관’이 되었음을 증명하는 증표입니다.
이 증표를 지니고 있다면, 중간자들로부터 최소한의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또, 언제든 정령의 도장에 재도전할 시, 16층부터 도전이 가능합니다.
*옵션
통솔력 : +10(초월)
모든 전투 능력 : +10(초월)
초월 명성 : +50(봉인)
(봉인된 옵션은 ‘중간자’의 위격을 얻어야 활성화됩니다.)
*유저 ‘이안’ 에게 귀속된 아이템입니다.
다른 유저에게 양도하거나 팔 수 없으며 캐릭터가 죽더라도 드롭되지 않습니다.
‘초월 통솔력 10에 올스텟 10. 게다가 초월 명성이라…….’
초월 명성이라는 개념은 이안도 처음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게 어떤 스텟인지는 그 이름만 봐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중간계에서 적용되는 명성 스텟이 따로 있나 보네. 어쩐지, 내 명성이 1천만 단위가 넘는데 여기 NPC들한텐 무시당하더라니…….’
그리고 괄호 안에 쓰여 있는 설명을 통해 추가 정보를 하나 더 알 수 있었다.
‘초월 명성’이라는 스텟은 ‘중간자’가 된 이후부터 오픈되는 능력치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명예 도관의 증표는 ‘의외의 수확’이라는 점에서 고무적인 것일 뿐, 진짜 이안이 행복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흐흐, 이게 이젠 정말 내 아이템이라는 말이지.’
이안은 얼굴에 쓰고 있던 하얀 가면을 만지작거렸다.
이제부터 이 가면은, 이안의 정령술에 커다란 힘이 되어 줄 것이었다.
기분이 더욱 좋아진 이안이, 샬리온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가면은 정말 잘 쓰겠습니다, 샬리온. 덕분에 귀한 아이템을 얻었네요.”
그리고 이안의 감사 표시에, 뭔가 씁쓸해 보이던 샬리온의 표정도 조금 더 밝아졌다.
“아닐세. 역시 기물에는 그에 맞는 주인이 있는 법.”
샬리온의 시선이 수호자의 가면을 향해 고정되었다.
그리고 그의 말이 다시 천천히 이어졌다.
“앞으로 그 가면을 썼다면, 누군가에게 패배하지 마시게. 그게 우리 고랄족의 명예를 지키는 일이니까 말이야.”
사뭇 진지한 샬리온의 표정에, 이안은 피식 웃으며 농담을 건네었다.
“알겠습니다, 샬리온. 질 것 같으면 가면 벗을게요.”
“…….”
어쨌든 화기애애해진 분위기 속에서 이안은 샬리온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충족되었다는 ‘숨겨진 조건’이 뭔지도 알 수 있었다.
“그나저나 자네, ‘명예도관’이 어떤 의미인지 혹시 알고 있는가?”
“음, 글쎄요…….”
샬리온의 말을 들은 이안의 두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은근한 그의 목소리로 보아 지금부터 중요한 이야기가 시작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잠시 뜸을 들인 샬리온이 다시 입을 열었다.
“우선 ‘도관’의 개념부터 설명해야겠군.”
샬리온의 설명은 제법 길게 이어졌다.
그러나 그 내용은 간단하게 요약할 수 있었다.
첫째, ‘도관’이란, 이 정령의 도장 각 층을 지키고 있는 모든 수련생을 의미한다.
하지만 도관은 오로지 ‘고랄’종족만이 될 수 있다.
둘째, ‘명예 도관’이란, ‘고랄’종족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인정할 만한 실력자가 있다면 도관의 직책을 줄 수 있도록 만들어진 제도이다.
셋째, ‘명예 도관’에게 ‘도관’의 의무와 특권이 전부 주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도장 사범이 허락한다면 진정한 도관의 역할을 할 수도 있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자네도 우리 정령 도장의 진정한 도관으로 임명하겠다는 이야기일세. 사실 중간자가 아닌 존재에게 도관의 역할을 맡긴 사례는 없지만, 자네라면 가능할 것 같아서 말이야.”
샬리온의 설명을 다 듣고 난 이안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뭔가 흥미로운 콘텐츠인 것 같기는 했지만, 그로 인해 생기는 제약이 너무 크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샬리온, 저도 이제 다른 수련생들처럼 이 도장을 지켜야 한다는 건가요?”
“바로 그렇다네.”
이안은 더욱 당황한 표정이 되어 말을 이었다.
“365일 여기 상주하면서 도전자를 받아야 된다는……. 그런 말을 하시는 거죠?”
당황한 이안의 표정을 보며, 샬리온의 주름진 입가에 실소가 맺혔다.
이안이 어떤 오해를 하고 있는지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후후, 자네가 뭘 걱정하는지는 잘 알겠지만, 그건 아니니 염려 말게.”
“음……?”
“자네, 지금껏 나 외에 다른 수련생들과 혹시 한마디라도 나눈 적 있는가?”
이안은 기억을 한차례 더듬어 보았다.
그리고 금세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아, 아뇨. 없는 것 같네요.”
샬리온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설명을 이어 갔다.
“그래. 당연하겠지. 그들은 사실, 정령의 힘으로 복제된 허상일 뿐이니 말이야.”
“아하!”
눈치 빠른 이안은 이 시스템을 순식간에 이해할 수 있었고, 샬리온이 깔끔하게 한 번 더 정리해 주었다.
“자네는 이제부터 다른 수련생들처럼 하나의 층을 지키는 도관이 될 것이네. 정확히 말하자면, 정령의 힘으로 재현된 자네의 허상이 말이지.”
“이해했습니다, 샬리온.”
“어디 보자……. 자네는 9층의 도관이 될 수 있겠군. 어때, 한번 해 보겠는가?”
“네, 그러죠, 그럼.”
샬리온의 제안에, 이안은 생각할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직접 여기 있어야 되는 것도 아니고 뭐, 밑져야 본전이니까.’
그리고 샬리온과의 대화가 끝나자, 이안의 눈앞에는 새로운 시스템 메시지들이 떠올랐다.
띠링-!
-정령의 도장의 ‘관문지기’로 임명되었습니다.
-초월 레벨이 ‘9레벨’이므로, 9층의 관문지기가 되었습니다.
-현재 상태의 모든 능력치를 복제하여, ‘정령의 형상’을 생성합니다(캐릭터의 레벨이나 스텟이 상승하더라도, 정령의 형상에 반영되지는 않습니다).
-당신의 ‘정령의 형상’이 도전자를 상대로 승리할 때 마다 9포인트의 영웅 점수를 획득합니다.
-당신의 ‘정령의 형상’이 유저에게 패배한다면, ‘관문지기’로서의 자격이 박탈당합니다.
-‘관문지기’로서의 자격을 다시 획득하려면, 해당 구간을 관장하는 도장 사범을 찾아가야 합니다.
메시지를 전부 읽은 이안은, 살짝 아쉬운 표정이 되었다.
‘쳇, 생각보다 보상이 짜네.’
9라는 영웅 점수를 모으는 것은, 사실 너무 쉬운 일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일회성 보상은 아니다.
하지만 이안이 생각하기에, 이 도장에 도전하는 도전자의 숫자 자체가 너무 적었다.
정령계에 올 수 있는 유저 숫자부터가 말할 것도 없이 적었으며, NPC도전자는 본 적도 없었으니 말이다.
더해서 유저에게 한번이라도 지면 관문지기 자격이 박탈되니, 사실상 보상을 서너 번이나 받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뭐, 밑져야 본전이니까…….’
마음 편히 생각한 이안은, 샬리온과 작별 인사를 하였다.
“수고 많으셨어요, 샬리온. 저는 이제 가 볼게요.”
이안의 인사에, 샬리온은 의외라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패널티를 가진 채로 자신을 이긴 이안이라면 20층 정도 까지는 올라갈 수 있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오호, 16층에는 도전 않고 그냥 가실 겐가?”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이제부터 좀 해야 할 일들이 많거든요. 16층부터는 좀 나중에 도전하려고요.”
“아하, 바쁜 일이 있었구먼.”
아쉬워하는 샬리온의 표정을 보며, 이안은 피식 웃었다.
그 또한 16층 이상에 대한 욕심을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 버렸다.
‘곧바로 로그아웃해서 잠 들어도 5시간밖에 못 자겠네.’
길드원들과 재충전 후 12시간 뒤에 만나기로 했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샬론의 심부름’ 퀘스트로 인해 7시간을 보내 버렸기 때문이다.
‘얼른 로그아웃해서 잠이나 보충하자. 어차피 30층까지 깰 수 있는 거 아니면 급히 도전할 필요는 없으니까.’
생각을 정리한 이안은, 미련 없이 도장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곧바로 게임을 종료하였다.
* * *
“그렇지, 체스크! 엄호사격 좋았어!”
“이 정도는 껌이지!”
“이니스코, 퇴로 차단해!”
“알겠어, 형!”
의문의(?) 도전자 때문에 바스라진 멘탈을 치유하기 위해, 잠을 충분히 보충하고 온 랄프 일행들.
그들은 ‘파죽지세’라는 말이 어울리는 속도로, 도장을 클리어하고 있었다.
띠링-!
-수련생을 상대로 승리하셨습니다!
-정령의 도장 6층을 성공적으로 클리어하셨습니다.
-이미 클리어한 구간으로, 추가 보상을 획득할 수 없습니다.
-영웅 점수 5점을 획득하셨습니다.
……중략……
-정령의 도장 7층을 성공적으로 클리어하셨습니다.
-정령의 도장 8층을 성공적으로 클리어하셨습니다.
그리고 푹 쉬고 온 덕분인지, 그들의 전투력과 팀워크는 확실히 이전보다 나아진 듯했다.
“좋았어, 체스크. 진작 이렇게 해 줬어야지!”
“하핫, 어제는 진짜 컨디션이 말이 아니었다니까.”
“그러게, 체스크 형. 어제랑 피지컬이 완전히 다르네. 진작 쉬고 와서 트라이할 걸 그랬어.”
한껏 흥이 오른 랄프 일행은, 8층의 대기실에 입장하자마자 곧바로 다음 층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어차피 12~3층까지는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도 어렵지 않게 클리어했던 구간이었고, 지금의 기세라면 14층까지도 순식간에 클리어가 가능할 것 같았으니 말이다.
리더인 랄프가 9층에 발을 딛자, 세 사람의 눈앞에 동시에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띠링-!
-‘정령의 도장 9층’에 입장하셨습니다.
-파티원의 숫자가 세 명이므로, 그에 맞춰 도관의 능력치가 상향 조정됩니다.
-잠시 후, 전투가 시작됩니다.
메시지를 확인한 랄프 일행은 의욕적인 표정으로 전방을 응시했다.
“9층이 뭐였더라? 그 광전사형 전사 클래스였나?”
“맞아, 형. 진짜 이젠 층별로 어떤 놈인지 싹 다 외워 버렸네.”
“까다로울 거 없었던 녀석이니까, 순식간에 해치워 버리자고!”
“오케이!”
다시 의욕을 불태운 세 사람은, 금방이라도 달려 나갈 듯 자세를 잡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우우웅-!
공명음과 함께 결투장 반대편에 나타난 실루엣을 보며, 세 사람은 동시에 굳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
“어떻게 된 거야?”
“이거 지금…… 실화?”
너무도 익숙한, 아니, 익숙함을 넘어서 도저히 잊어버릴 수 없는 실루엣.
처음 보는 가면 같은 것을 머리에 쓰고 있기는 했지만, 세 사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들의 눈앞에 나타난 이 녀석이 바로, 그들의 멘탈을 가루로 만들었던 그 괴인임을 말이다.
가장 먼저 평정을 찾은 랄프가 체스크와 이니스코를 다독였다.
“자, 쫄지 말자고. 실루엣이 확실히 비슷하긴 하지만……. 같은 녀석이 아닐 수도 있잖아?”
“으음…….”
“그리고 설령 같은 놈이라 하더라도, 이번엔 우리 최고 컨디션이잖아. 그때랑 달리 생명력도 전부 최대까지 차 있는 상태고 말이야.”
랄프의 설명을 들은 두 사람은, 다시 의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의 설명처럼, 그때와는 확실히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그래. 그때는 14층에서 힘 다 뺀 뒤에 싸워서 힘들었던 거야.’
‘좋아. 기왕 이렇게 된 거, 설욕전 한번 해 보자고……!’
묵묵히 카운트를 기다리고 있는 괴인과는 달리, 의욕을 활활 불태우는 랄프 3인방.
하지만 이 세 사람이 하나 간과한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마주한 괴인(?) 또한 그때와 그들이 상대했던 수준의 스펙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9층에 입장하자마자 세 사람의 눈앞에 떠올랐던 한 줄의 메시지.
-파티원의 숫자가 세 명이므로, 그에 맞춰 도관의 능력치가 상향 조정됩니다.
지금 그들의 눈앞에 있는 이안의 형상은, 최소 두 배는 뻥튀기된 스텟을 가진 복제품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