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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모한 도전자 (2)
* * *
이안은 눈썰미가 좋은 편이다.
때문에 결투장에 입장하자마자 랄프 삼인방의 정체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뭐야, 누군가 했더니……. 이 바보들이었어?’
전사 하나에 궁사 하나, 마지막으로 소환술사까지.
사실 모든 정보가 블라인드 처리되어 있는 데다, 외형까지 까만 그림자처럼 변형된 이 전장에서 전사인 랄프와 궁사인 체스크의 정체를 확신하는 것은 이안으로서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과 달리 소환술사인 이니스코에게는, 정체를 짐작할 수 있을만한 단서가 너무도 많았다.
다른 모든 것들을 떠나서, 그가 데리고 있는 소환수들이 흔치 않은 녀석들이기 때문이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이니스코의 메인 소환수인 그리핀 킹.
이 녀석은 서버에 단 하나뿐인 고유한 소환수이다.
카르세우스나 엘카릭스처럼 각 서버마다 하나씩밖에 존재하지 않는 소환수가 바로 ‘그리핀 킹’인 것이다.
하여 이러한 모든 정황을 감안했을 때, 이안은 세 그림자들의 정체를 랄프 일행이라고 확신하였다.
‘후후, 이 친구들이라면 한번 해볼 만하지.’
만약 모든 정보를 다 까 놓은 상태에서 이안과 랄프 일행이 전투를 벌인다면, 그로서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어쨌든 그들은 미국 서버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강력한 랭커들이었고, 아무런 트릭 없이 수적 열세를 극복하는 것은 쉽지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안은 삼인방에 대해 알지만, 그들은 이안에 대해 모른다.
아니 모를 것이다.
‘마지막까지도 날 기사인 줄 알았으니……. 뮤엘 님이 까발린 것만 아니라면 알 길이 없겠지.
반면에 이안은, 이들의 전력에 대해 아주 빠삭하게 알고 있다.
‘랄프만 먼저 잡고 시작하면 돼. 체스크도 딜량이 제법 되긴 하지만, 들러붙는 랄프만 없으면 눈먼 화살이야 피할 수 있으니…….’
랄프와 체스크를 한 차례 응시한 이안의 시선이, 그 왼쪽에 있는 이니스코를 향한다.
그리고 이안의 입에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니스코였나? 저 얼간이는 한 트럭쯤 데려와도 상대해 줄 자신이 있으니까.’
랄프와 체스크의 인간계 레벨은, 이안과 거의 비등한 수준일 것이다.
하지만 이안이 느꼈던 이니스코는, 이안보다 한참 레벨이 낮은 느낌이었다.
사실 ‘소환술사’ 클래스이면서 이안에 비등한 레벨을 만든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부분인지도 몰랐다.
게다가 소환술사의 전투 매커니즘을 이안만큼 잘 이해하는 유저도 없었다.
때문에 지금의 이안에게 가장 만만한 것은 이니스코였다.
그렇다면 이쯤 해서 한 가지 의문점이 생길 것이다.
정체를 숨기기 위해 모든 소환수를 소환 해제한 상태로 나타난 이안과 달리, 어째서 이니스코는 소환수들을 죄다 소환한 채 전장에 나타난 것일까?
이니스코가 도전자를 경시해서?
아니면 이니스코의 머리가 나빠서?
당연히 둘 다 아니었다.
이것은 ‘정령의 도장’ 콘텐츠가 애초에 도전자에게 유리하도록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전투 중에 강제로 소환되어 어쩔 수 없이 모든 전투 장비와 소환수들이 세팅되어 있는 랄프 일행과는 달리, 이안은 대기실에서 입장하였으니 말이다.
쉽게 말해, 이안에게는 전투를 준비할 시간이 있었고 랄프 일행에게는 없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후후. 내 클래스가 소환술사라고는……. 쉽게 예측하지 못하겠지?’
짧은 시간 안에 머릿속에 떠오른 수많은 정보들을 분석한 이안.
이어서 그의 눈앞에, 새로운 시스템 메시지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띠링-!
-‘결투의 방’에 입장하셨습니다.
-잠시 후 결투가 시작됩니다.
-모든 종류의 ‘귀환’ 스킬과 아이템 사용이 금지되며, 전투가 끝나기 전까지 전장을 이탈할 수 없습니다. (로그아웃 불가)
-5초 후, 전투가 시작됩니다.
-4초 후, 전투가…….
메시지를 확인한 이안은 양손을 한차례 쥐었다 폈다.
전투가 시작되는 순간,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하면서 말이다.
‘시작은 궁수다, 이것들아.’
그리고 전투가 시작된 순간.
“마그비, 소환!”
이안의 손에는 어느새, 활활 타오르는 화염의 장궁이 들려 있었다.
* * *
‘이, 이게 무슨……?’
도전자 NPC(?)에게 달려들던 랄프는, 생각지도 못했던 공격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당연히 마법사 클래스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상대가 갑자기 활을 쏴 댔으니 말이다.
물론 마법사 클래스의 스킬 중에도 마법장궁을 소환하여 마법화살을 쏘는 마법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저 미친놈처럼, 캐스팅 시간도 없이 소환할 수 있는 마법장궁은 존재하지 않았다.
‘뭐지? 궁사였어? 그럼 저 옆에 떠 있는 이상한 불덩이는 또 뭐고?’
혼란스러운 표정을 한 채, 화살을 피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랄프였다.
조금만 더 침착하게 생각해 보면 정령 마법을 떠올려볼 수도 있었겠지만, 랄프에게는 그럴 정신이 없었다.
날아드는 이안의 화살이, 결코 녹록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핑- 피핑- 핑-!
마치 랄프의 움직임을 예측하기라도 한 듯, 그가 몸을 피하는 곳에 어김없이 불화살이 날아들었다.
그것은 마치 유도 화살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으아아……!”
퍼퍽-!
-‘도전자 ???’로부터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습니다!
-생명력이 789만큼 감소합니다!
-‘도전자 ???’로부터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습니다!
-생명력이 452만큼 감소합니다!
-생명력이 688만큼 감소합니다!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연달아 깎여 나가는 랄프의 생명력 게이지.
‘미친, NPC 주제에 명중률이 왜 이래?’
랄프는 입술을 앙다문 채, 침착한 표정으로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살짝 안도할 수 있었다.
녀석의 엄청난 활 솜씨와는 별개로, 대미지는 생각보다 조금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크음, 이정도의 딜량이면 그냥 피하는 걸 포기하고 거리를 좁혀 보는 것도 괜찮……!’
그러나 그것이 착각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어서 날아온 화살에 등짝을 내어 준 순간, 뒤편에서 어마어마한 충격이 밀려왔기 때문이었다.
콰아앙-!
-‘지옥불’ 표식이 폭발하였습니다.
-생명력이 4,179만큼 감소합니다.
-‘지옥불’ 표식이 폭발하였습니다.
-생명력이 3,897만큼 감소합니다.
“……?”
랄프의 초월 생명력은, 대략 15만 정도의 수준이다.
하지만 그것은 생명력이 가득 차 있을 때의 이야기이고, 한창 전투 중에 소환당한 그의 생명력은 절반도 채 남아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지금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채 30초도 지나기 전에 1만이 넘는 피해를 입어 버렸다.
만약 놈에게 같은 페이스로 계속해서 공격을 허용한다면, 2~3분 안에 게임 아웃당할 상황인 것이다.
‘미친! 뭐야! 갑자기 이게 뭔 딜이야?’
기겁을 한 랄프의 시선이, 체스크와 이니스코를 향했다.
본인의 오더가 처음부터 꼬여 버렸으니, 두 사람이 어떤 움직임을 보이고 있을지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 * *
LB사의 카일란 모니터링실은, 본사 건물의 지하 깊숙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이곳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통제구역이었다.
그것은 당연한 부분이었다.
카일란 모니터링실에 있는 PC들에는, 모든 유저의 개인 영상을 자유롭게 볼 수 있는 권한이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곳에 전 직원이 어렵지 않게 들락거릴 수 있다면, 유저들의 개인 정보가 외부로 유출될 수도 있을 터.
하여, 평소에 모니터링실에 들락거릴 수 있는 것은, 모니터링 팀과 몇몇 기획 팀뿐이었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 항상 예외는 있었다.
요즘같이 대규모 업데이트를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는, 마케팅팀의 일부 인원에게도 모니터링실 이용 권한을 주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마케팅 팀에서 홍보 영상에 사용할 소스들을 직접 골라가야 하니 말이다.
물론 기획 팀이나 모니터링 팀에서 구해 줘도 되지만, 그것은 무척이나 비효율적이었다.
그들이 마케팅 팀에서 사용할 영상 소스들을 입맛에 맞게 잘 찾아주지도 못할뿐더러, 기획 팀과 모니터링 팀도 나름의 업무가 바쁘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그러한 이유로, 지금 모니터링실 구석에는 마케팅팀에서 내려온 디자이너 두 명이 앉아 있었다.
그들 중 한 명은 예전부터 마케팅 팀의 모니터링 업무를 맡아 온 박기훈 대리였고, 다른 한 명은 그의 부사수인 신입사원 김소영이었다.
“보자……. 이제 자잘한 영상들은 다 구한 것 같지, 소영 씨?”
“예, 대리님. 해당 유저들에게 양해를 구하는 작업이 필요하긴 하겠지만, 딱히 어려울 건 없어 보이네요.”
“좋았어. 그럼 이제 메인 소스를 한번 찾아 보자고.”
“옙! 알겠습니다!”
“눈 똑바로 뜨고 집중해야 해, 소영 씨. 메인 소스 세 개 중에 적어도 두 개는 오늘 내로 구해야 하니까.”
박기훈 대리의 말에, 김소영의 눈이 살짝 확대되었다.
비록 신입사원이기는 하지만, 그녀는 모니터링 작업이 얼마나 고되고 힘든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네에? 모니터링할 게 산더미인데, 그게 가능할까요? 전 오늘 내로 한 개나 찾으면 다행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소영의 말에, 박기훈 대리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후후, 소영 씨.”
“예, 대리님.”
“내가 입사하고 나서 지금까지 이 짓을 총 몇 번쯤 했을 것 같은가?”
“이 짓이라면…….”
뒷머리를 긁적이는 그녀를 향해, 기훈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콘텐츠 업데이트, 홍보 영상 소스 만드는 작업 말이야.”
“아, 그거라면……. 한 열 번쯤 하시지 않았을까요?”
기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열 번은 무슨, 못해도 스무 번은 넘을 걸?”
“그, 그렇군요. 그런데 그건 왜……?”
의아한 표정으로 묻는 소영을 향해, 기훈이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왜긴 왜겠어. 그동안 쌓아 온 나의 노하우를 지금부터 보여 주겠다는 거지.”
“……!”
“일단 1시간 내로, 기가 막히는 영상 하나 먼저 뽑아 볼까?”
기훈의 자신감 넘치는 말에, 소영의 두 눈이 크게 확대되었다.
그의 장담이 사실이라면, 소영으로서는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되는 노하우였기 때문이었다.
수많은 카일란 유저들의 영상을 뒤져서, 메인 홍보 영상으로 쓸 만한 소스를 찾아내는 일.
이 고된 업무를 단축시켜 줄 팁을 배울 수 있다면, 그녀는 오늘 퇴근하지 않을 용의도 있었다.
탁- 타탁- 탁-!
모니터링 PC의 검색엔진을 오픈한 기훈이, 빠르게 키보드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기훈의 모니터에는 한 유저의 플레이 타임별 영상들이 주르륵 떠올라 있었다.
영상들을 확인한 소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이안? 이 사람, 소환술사 랭킹 1위 맞죠?”
“그렇지. 역시, 게임 안 하는 소영 씨도 이안갓 아이디는 아는군.”
“뭐, 제가 입사한 지 얼마 되진 않았지만, 지금까지 사무실에서 가장 많이 들어 본 유저 이름이 이안이니까요.”
“후후, 뭐 그거야 당연하겠지.”
고개를 주억거린 김기훈이, 마우스를 움직여 영상 하나를 오픈하였다.
그리고 그 영상의 상단에는, 영상에 대한 간략한 정보가 떠올라 있었다.
User ID : 이안
User IP : KR/453.217.11.375
User condition : Online(접속 중)
Play Time : One hour ago~Currently(1시간 전~현재까지)
View Point : The third person(3인칭 시점)
이어서 모니터링실의 커다란 스크린에, 한 남자의 그림자가 가득 메워졌다.
그리고 그의 주변에 또 다른 세 명의 유저가 힘없이 쓰러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