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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의 노가다꾼 (1)
화염의 하급 정령이었던 아그비의, 생각지도 못했던 진화.
물론 대자연의 구슬로 인해 처음부터 절반 이상의 정령력이 채워져 있던 아그비였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이번 진화 타이밍은 엄청나게 빠른 것이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이안은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나중에 생각해 볼 문제고…….’
아그비가 중급 정령인 ‘마그비’로 진화하면서 이안의 전력은 훨씬 더 강력해졌다.
마그비의 전투력이 거의 두 배 가까이 상승하기도 했지만, 그와 동시에 화염 속성의 정령 마법인 ‘지옥의 화염시’의 위력도 배가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 괴랄한 합체로봇을 이길 수 있다고 단정 짓는 것은 무리였다.
원래가 상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면, 이제는 좀 비벼볼만한 상황이 된 수준이랄까?
여전히 벅찬 상대인 것만은 매한가지라고 할 수 있었다.
‘마그비의 화염의 기운을 충전시켜주는 데 최대한 포커싱해야 돼.’
지금 이안에게 캘리클롭스의 강력한 광역 공격을 막아 낼 방법은 오로지 마그비의 고유 능력인 ‘홍염의 방패’뿐이었다.
때문에 이안은, 지금까지와 전투 포지션을 조금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그비의 컨트롤에 좀 더 신경을 써야겠어.’
지금까지 마그비의 주된 역할은 후방에서 이안을 보조해 주는 것이었다.
어차피 이안이 화염시를 날려 치명타를 터뜨릴 때마다 마그비의 고유 능력인 ‘불의 악마’가 발동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달라질 필요가 있었다.
정령술사의 마법을 재현하는 ‘불의 악마’ 고유 능력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마그비의 평타까지도 최대한 많이 꽂아 넣어야 했으니 말이다.
그래야 ‘홍염의 방패’ 고유 능력의 충전 시간이 조금이라도 빨라질 테니까.
“마그비, 좀 더 앞으로!”
-그러도록 하지, 주인.
확실히 진화 전보다 나아진 어휘를 구사한 아그비가 전방을 향해 좀 더 앞으로 이동했다.
화염구를 던지는 마그비의 평타는 화염시의 사정거리보다 많이 짧았다.
때문에 조금 위험하더라도 근거리까지 붙어서 싸워야만 했다.
“내 화살이 박히는 곳에 최대한 공격을 집어넣어. 할 수 있겠지?”
이안이 화살을 박아 넣는 곳은 ‘약점 포착’으로 확인한 캘리클롭스의 약점일 것이다.
때문에 마그비가 그 위치에 정확히 공격을 맞추기만 한다면, 거의 대부분의 공격에 치명타가 터지리라.
마그비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물론이다, 주인아. 난 뛰어나다.
“…….”
아직까지는 뭔가 어색한 마그비의 어투에 이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그것을 기점으로 전투가 다시 시작되었다.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나운 표정으로 몸을 일으킨 캘리클롭스가 커다랗게 포효했다.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캘리클롭스의 거대한 그림자가 이안과 마그비를 덮쳐 왔다.
* * *
나지찬이 일전에 언급했었던, ‘지옥의 화염시’ 정령 마법의 특장점.
그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크,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네, 기가 막혀.”
모니터링실 소파에 편한 자세로 걸터앉은 나지차은 실실 웃으며 스크린을 시청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스크린에는, 이안의 전투 장면이 송출되고 있었다.
“아무리 이안갓이라도 한 번 정도는 실패해 줄 줄 알았는데……. 여기서 이렇게 또 운이 따라주는군. 아니, 완전히 운이라고 할 수는 없으려나?”
감자칩을 오물거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나지찬.
그의 옆에 있던 여사원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향해 물었다.
“팀장님, 완전히 운이라고 할 수 없다니요? 이건 어떻게 봐도 운인걸요?”
그리고 그 말을 들은 나지찬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
“김덜렁, 조금만 더 생각해 봐. 내가 이안갓 팬이기는 하지만, 사실까지 왜곡하는 삐뚤어진 팬심은 없다고.”
“음…….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왜곡된 팬심…….”
“후우…….”
한숨을 푹 내쉰 나지찬이 김덜렁, 아니, 김지연 주임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너 그때 ‘지옥의 화염시’ 기획하던 때, 김의환 팀장님 밑에 있지 않았었나?”
“그랬었죠.”
“그럼 이안갓이 쓰는 저 스킬, 누구보다 잘 알 거 아냐.”
김지연이 뿌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당연하죠. 저거 제가 처음 기획했던 스킬인데요.”
“…….”
살짝 어이없다는 표정이 된 나지찬의 입이 다시 열렸다.
“그럼 김 주임.”
“예, 팀장님.”
“저 스킬의 최대 장점이 뭐였어?”
“그야 당연히, 유저 실력에 따른 DPS 증가폭이 엄청나다는 거죠.”
“그리고 또?”
“음, 또요? 으음…….”
생각에 잠긴 김지연을 향해 나지찬이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 스킬 최대 장점이, 스텍만 잘 쌓으면 재사용 대기 시간 거의 없이 계속해서 쓸 수 있다는 거잖아.”
“그게 제가 말한 장점에 포함되는 얘기잖아요.”
“시끄럽고, 일단 듣기나 해.”
“칫.”
김지연이 입술을 삐죽이건 말건, 나지찬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자, 김 주임. 정령의 정령력을 쌓기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 뭐지?”
“그야, 해당 정령의 힘을 이용해 정령 마법을 쓰는 거죠.”
“그렇지? 그런데 이안처럼 정령 마법을 미친 듯이 쓴다고 생각해 봐.”
“……!”
“같은 시간 내에 남들보다 정령 마법을 거의 다섯 배는 많이 쓰는 것 같은데, 아그비의 정령력이 빨리 오를 수밖에 없지 않겠어?”
“그, 그러네요?”
“게다가 하나 더.”
“음……?”
“김 주임도 잘 생각해 보면 아마 기억날 텐데……. ‘지옥의 화염시’ 정령 마법만의 특장점.”
힌트를 던져 놓은 나지찬은 씨익 웃으며 김지연을 응시하였다.
“아!”
그리고 잠시 후, 뭔가가 기억났는지 지연이 손뼉을 딱 하고 치며 일어섰다.
“김의환 팀장님이 마지막에 추가하셨던 비공개 옵션!”
“그래, 바로 그거야. 그거 덕분에 지금, 저 화염의 정령이 벌써 중급이 되어 버린 거 아냐.”
나지찬의 말에, 김지연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의했다.
“맞네요. 정말 그것까지 생각하니까 이 타이밍에 정령이 진화한 게 운만은 아니었네요.”
혀를 내두른 김지연은 다시 화면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화면 안에서 미친 듯이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이안이 한층 더 대단해 보이기 시작했다.
확실히 그 비공개 옵션까지 생각해 보면, 이안이 위기를 모면한 것을 100퍼센트 운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화면을 보는 두 사람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김의환 팀장님이 이거 아시면, 배 아파서 쓰러지시겠네…….’
카일란의 개발 단계부터 기획 팀에 있었던 김의환은, ‘야근 제조기’ 이안을 극도로 증오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애증’의 감정에서 증오의 비중이 훨씬 더 높은 느낌이랄까.
그런데 그런 김의환이 본인이 기획한 스킬과 옵션으로 이안이 꿀을 쪽쪽 빠는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아니, 그 스킬을 이용해 본인의 야근을 ‘제조’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아마 혈압이 올라서 쓰러지시겠지.’
나지찬과 김지연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스크린 속의 전투도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보스 몬스터인 ‘캘리클롭스’의 생명력은 아직 제법 남아있었지만, 어차피 저 녀석을 처치하는 건 불가능했다.
애초에 정령계의 시나리오상 캘리클롭스와 찰리스가 이곳에서 처치당할 일은 없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전투의 마지막을 보며, 나지찬이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김 주임…….”
“예, 팀장님.”
“저 영상 보면서 뭐 생각나는 거 없어?”
김지연이 한숨을 푹 쉬며 대답하였다.
“하나 있네요. 그만 쉬고 일이나 하러 가야겠다는 거요.”
“그래. 우리 가슴 아픈 영상은 그만 시청하고 제안서나 마무리하러 올라가자고.”
“큽…….”
슬픈 대화를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터덜터덜 기획 팀 사무실을 향해 걸음을 떼었다.
하여 아무도 남지 않은 모니터링실에는 ‘지옥불’ 표식이 터져 나가는 폭발음만이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펑- 퍼펑-!
그리고 바로 이 ‘지옥불’ 표식.
두 사람이 말하는 ‘지옥의 화염시’ 정령 마법의 숨겨진 옵션이 바로 이 표식 안에 숨어 있었다.
*지옥불’ 표식이 터질 때마다 화염의 힘을 빌려준 정령의 정령력이 1포인트씩 상승합니다.
* * *
콰쾅- 콰콰쾅!
연달아 지옥불 표식이 터져 나가며, 마그비의 진화로 인해 더욱 강력해진 폭발음이 던전 내부에 크게 울려 퍼졌다.
그리고 폭발로 인해 자욱이 피어오른 연기 사이로 거대한 캘리클롭스의 팔뚝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콰득- 콰앙-!
이안을 공격하기 위해 기습적으로 팔을 내뻗는 캘리클롭스.
하지만 이안의 신형은, 아슬아슬하게 녀석의 공격 범위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어림없지.”
그리고 이안이 어그로를 끈 사이, 캘리클롭스의 뒤쪽으로 돌아 들어간 마그비가 연달아 화염구를 집어던졌다.
퍼펑- 펑-!
그리고 화염구 터지는 소리에 맞춰 이안의 눈앞에 시스템 메시지가 연달아 생성되었다.
띠링-!
-화염의 정령 ‘마그비’가 ‘캘리클롭스’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마그비가 가진 ‘홍염의 구슬’에, 화염이 충전됩니다. (현재 충전량 : 98.75/100)
-화염의 정령 ‘마그비’가 ‘캘리클롭스’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마그비가 가진 ‘홍염의 구슬’에, 화염이 충전됩니다. (현재 충전량 : 99.95/100)
-‘홍염의 구슬’의 충전이 완료되었습니다.
-‘홍염의 방패’ 고유 능력이 활성화됩니다.
지금 이안의 전투 패턴에서 ‘홍염의 방패’는 그야말로 하나의 ‘보험’과도 같은 것이었다.
홍염의 방패가 활성화되는 순간, 여벌의 목숨이 하나 생기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때문에 홍염의 구슬이 전부 충전되었다는 메시지는 이안의 플레이를 좀 더 과감하게 만들어 주었다.
‘녀석이 인장을 소환할 때까진 아직 2분 정도 남았어. 그 안에 최대한 극딜한다!’
계산을 마친 이안의 신형이 빠르게 허공으로 튀어올랐다.
지금까지는 이안이 어그로를 끌며 마그비가 주로 공격하였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홍염의 방패가 활성화된 이상, 어떻게든 DPS를 올리는 게 가장 중요했으니 말이다.
화르륵-!
어느새 이안의 손에 소환된 화염의 장궁이 연신 불을 뿜기 시작했다.
이어서 이안의 시선이 자연스레 캘리클롭스의 머리 위로 향했다.
남아 있는 생명력 게이지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으, 징한 놈.’
그리고 캘리클롭스의 생명력 게이지를 확인한 이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전투가 시작된 지 벌써 2~3시간은 지난 것 같은데, 이제야 녀석의 생명력 게이지가 깜빡이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이안이 판단하기에 이 녀석은, 아무리 봐도 A++수준 난이도의 보스가 아니었다.
만약 이 녀석이 제대로 된 아이템을 드롭하지 않는다면, 이안은 진심으로 열이 뻗칠 것 같았다.
“흐아압!”
한차례 기합성을 내지른 이안이 화염시를 빠르게 난사했다.
‘홍염의 방패’라는 보험이 있는 지금이, 녀석의 생명력을 최대한 깎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타이밍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열심히 활시위를 당기던 이안은 잠시 후 공격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
캘리클롭스의 주변에서 1시간 전쯤 보았던 똑같은 이펙트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뭐야, 설마 한 번 더 변신하고 그런 건 아니겠지?’
이안이 쏘아 낸 화살이, 또다시 알 수 없는 기운에 가로막힌 것이다.
그런데 잠시 후, 심란한 표정이 된 이안의 귓전에 칼칼한 ‘찰리스’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건방진 인간……. 내가 이 자리에 없었던 것을 다행으로 알도록.
전혀 예상치 못했던 찰리스의 대사에, 이안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게 무슨 개뼉다구 같은 소리야?”
찰리스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정령 에너지가 조금만 더 있었더라도 네 녀석을 처단할 수 있었을 것인데…….
역시나 이안으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찰리스의 한마디.
-연구실이 아깝기는 하지만, 여기서 물러나야겠군.
이안이 뭔가 입을 열기도 전에 모든 대사를 쏟아낸 찰리스, 아니, 캘리클롭스는 돌연 바닥을 향해 두 주먹을 내리찍었다.
쿠쿵-!
그러자 다음 순간, 캘리클롭스가 밟고 있던 석면에서 복잡한 마법진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우웅- 우우웅-!
그리고 그 일련의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이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오랜만에 AI가 이안의 신체를 통제하는 것인지, 몸을 전혀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쿠쿠쿵-!
던전은 계속해서 요란하게 진동했고, 마법진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은 더욱 강렬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촤아아-!
마법진에서 터져나온 섬광이 엄청난 밝기로 빛나더니, 캘리클롭스의 거구를 그대로 집어삼켰다.
이어서 이안의 눈앞에, 새로운 시스템 메시지가 울려 퍼졌다.
띠링-!
-‘찰리스의 마법진’이 발동합니다.
-기계 문명의 모든 기관이 작동을 멈췄습니다.
-‘정령산의 오염된 광산 (에픽)(히든)’퀘스트 클리어 조건을 충족하셨습니다.
-‘찰리스의 연구실 (돌발)(히든)’ 퀘스트를 성공적으로 클리어하셨습니다.
그리고 섬광이 사라진 자리에 어마어마한 규모의 기계 공장이 모습을 드러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