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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성의 방 (2)
* * *
“자, 레미르 누나, 부탁해!”
“알았어. 간다!”
오늘도 평화롭게 사냥 중인 로터스의 길드 파티.
처음에는 유피르 산맥의 외곽지대만을 돌며 사냥 중이던 로터스의 길드 파티는, 이제 제법 깊숙한 곳까지 진입해 있었다.
그동안 레벨이 오르면서 파티의 전력이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콰쾅- 콰콰쾅-!
전장에 연속해서 폭발음이 울려 퍼지면서, 속박 스킬에 발이 묶인 트롤들이 까맣게 그을려졌다.
크워어어!
캬아아악!
훈이의 광역 속박 기술과 레미르의 광역 화염 마법이 연계되며, 강력한 시너지가 발동된 것이다.
그리고 레미르가 소환한 화염 폭발이 끝나자마자, 각종 광역 마법들이 전장을 수놓았다.
쩌정- 쩌저정-!
그중 가장 돋보이는 건 피올란이 구사하는 빙계 마법 스킬인 프로즌 헬.
겉으로 보이는 위력이야 레미르의 마법보다 떨어졌지만, 사실 지금 사냥에서는 이 마법이 핵심이라 할 수 있었다.
프로즌 헬의 부가 옵션인 ‘한기 중독’ 효과가, 트롤들을 상대하는 데 무척이나 유용했기 때문이었다.
*한기 중독
-강력한 한기를 뿜어내어 대상을 중독시키고, 지속 시간 동안 이동속도와 공격 속도를 50퍼센트만큼 떨어뜨립니다. 또, 상태 이상이 풀리기 전까지 대상의 생명력 회복 속도가 90퍼센트만큼 감소합니다.
한기 중독 효과는 수많은 상태 이상 효과 중에서도 상위 티어에 속하는 옵션이었다.
디버프의 위력이 그 어떤 상태이상과 비교해도 강력한 수준이기 때문이다.
특히 ‘생명력 회복 속도 90퍼센트 감소’라는 효과가 트롤들에게는 재앙이라 할 수 있었다.
트롤들의 가장 큰 무기가 엄청난 재생력이기 때문이다.
이 유피르 산맥에 있는 만렙 트롤들의 경우, 빈사 상태로 만들어 놔도 20초 정도면 생명력을 전부 회복해 버린다.
그런데 이 회복 속도를 90퍼센트나 억눌러 놓을 수 있으니, 그야말로 하드 카운터인 것이다.
쩌정- 쩌저정-!
회오리처럼 뿜어져 나간 얼음의 파편들이 트롤들의 전신을 난자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한기 중독’ 상태 이상에 걸린 트롤들의 피부색이 파랗게 변하였다.
“피올란 님, 나이스!”
“자, 이제 마무리!”
거의 빈사상태가 된 다섯 마리의 트롤들을 향해 파티원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만랩 트롤들의 공격력은 엄청나서 마법사나 궁사의 경우 한 대만 잘못 맞아도 사망할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한기 효과가 지속되는 동안은 공격에 맞아 줄 이유가 없었다.
몽둥이를 거의 굼벵이 수준으로 느리게 휘두르니 말이다.
“유신, 맨 뒤에 있는 놈부터 자르자!”
“알겠어! 맡겨만 달라고!”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트롤들을 향해 신이 나서 공격을 퍼붓는 로터스의 딜러들.
한기중독의 효과는 10초 정도 지속되니, 그 안에만 전부 처치하면 전투는 끝날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뿌우우우-!
전장 뒤쪽에 있는 숲속 어딘가에서, 커다란 뿔피리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
“미친, 왜 하필 지금!”
그리고 그 소리를 들은 파티원들의 얼굴은 흙빛이 되고 말았다.
뿔피리가 울려 퍼졌다는 건 트롤 제사장이 나타난다는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제기랄! 빨리 조져!”
“레미르 누나, 쿨 돌아온 광역기 없어?”
“없어! 방금 전에 다 퍼부었다고!”
트롤 제사장이 무서운 이유는 녀석의 전투 능력 때문이 아니었다.
녀석이 까다로운 이유는 다른 트롤들을 서포팅해 주기 때문이었다.
각종 강력한 버프들을 걸어 주기도 하고 생명력을 회복시켜 주기도 하며, 심지어는 걸려 있는 디버프를 전부 해제시켜 버리기도 하니 말이다.
그리고 지금 만약 녀석이 한기 중독을 해제해 버린다면, 전세는 완전히 역전된다.
“젠장, 아무래도 빼야겠지?”
파티장인 헤르스가 이를 악물며 중얼거렸다.
만약 지금 후퇴한다면 파티에 피해는 없겠지만, 지금까지 깎아 놓은 트롤들의 생명력이 너무 아까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헤르스의 뒤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약한 소리를 하는군, 헤르스 대공.”
누구의 목소리인지를 곧바로 깨달은 헤르스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럼 이 상황에서 어쩔 건데, 카이자르. 아무리 너랑 헬라임이라고 해도 지금 상황에선…….”
하지만 헤르스는 말을 더 이을 수 없었다.
갑자기 파티의 뒤쪽에서, 몇 구의 그림자가 튀어 나갔기 때문이다.
“……!”
그리고 그들을 발견한 헤르스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정체는 바로, 이안이 맡겨 놓고 간 가신들.
자신이 따로 오더를 내리지 않았는데 그들이 나서는 상황은, 헤르스로서도 처음 겪었기 때문이었다.
“어, 어어……?”
다른 파티원들 또한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누가 봐도 빼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NPC들이 무리한 공격을 감행하는 것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심지어 그중에서도 가장 당황스러운 부분은…….
“까망이, 쟤는 왜 저기 있는 거야?”
지금까지 쩔을 받고 있던 까망이가 가장 선두에 있다는 점이었다.
“이제 갓 300레벨이 여기서 뭘 하겠다고?”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까망이의 뒷모습을 응시하는 훈이.
하지만 잠시 후, 파티원들의 ‘당황’은 곧 ‘경악’으로 바뀌었다.
촤아악-!
새카맣고 거대한 날개를 펼친 까망이가 엄청난 어둠의 기운을 뿜어내며 전방으로 쇄도했기 때문이었다.
쐐애애애액-!
양쪽으로 날개를 길게 펼친 까망이는 순식간에 다섯 마리의 트롤들을 훑고 지나갔다.
그리고 까망이의 그림자가 지나간 자리에는…….
펑- 퍼퍼펑-!
거대한 어둠의 폭발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며 트롤들을 집어삼켰다.
“……!”
트롤들의 생명력 게이지를 보고 있던 헤르스의 두 눈이 커다랗게 확대되었다.
‘말도 안 돼……!’
고작 300레벨 정도밖에 되지 않는 까망이의 광역 공격이, 트롤들에게 유의미한 대미지를 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15퍼센트 정도 남아 있던 트롤들의 생명력 게이지가 10퍼센트 정도로 줄어든 정도였지만, 레벨 차이를 생각하면 정말 상식을 벗어난 수준의 위력.
헤르스의 시선이 바쁘게 전장을 훑었다.
까망이가 제법 많은 피해를 입히긴 했지만, 아직도 트롤들의 생명력은 제법 남아 있었다.
이러나저러나 제사장이 등장하는 순간 도로아미타불이 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대단하긴 하지만, 이젠 어쩔 건데……?’
헤르스는 이안의 가신들이 가진 고유 능력들을 정확히 모른다.
그들과 파티플레이를 많이 해 봤기 때문에 어떤 종류의 스킬을 쓰는지 정도는 알았지만, 정확한 발동 조건이나 소모 값 같은 것들을 모른다는 의미다.
그래서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연계될지 짐작이 되질 않았다.
‘젠장, 진성이 가신들 두고 뒤로 빠질 수도 없고…….’
너무도 애매한 상황에, 쉽게 오더를 내리지 못하고 있는 헤르스.
하지만 다음 순간, 헤르스의 고민은 그대로 사라졌다.
콰앙-!
허공으로 뛰어오른 헬라임의 신형이 어둠 속으로 스며들더니, 트롤들의 머리통을 깨부수기 시작했으니까.
쾅-!
-파티원 ‘헬라임’이, 고유능력 ‘다크 비젼 (Dark Vision)’을 발동합니다.
-‘헬라임’이 ‘포레스트 트롤’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포레스트 트롤’의 생명력이 전부 소진되었습니다.
-‘포레스트 트롤’을 성공적으로 처치하였습니다!
콰쾅-!
-‘포레스트 트롤’의 생명력이 전부 소진되었습니다.
-‘포레스트 트롤’을 성공적으로 처치하였습니다!
콰콰쾅-!
-‘포레스트 트롤’을 성공적으로 처치하였습니다!
-‘포레스트 트롤’을 성공적으로 처치하였습니다!
헬라임의 고유 능력인 다크비전은, ‘어둠 속성’의 피해를 받은 대상에게로 순간이동하며 발동이 가능하다.
그리고 다크비전에 의해 적이 사망하면, 곧바로 재사용 대기 시간이 초기화된다.
까망이의 광역 공격으로 인해 트롤들에게는 전부 어둠 속성의 피해가 묻어 버렸고, 생명력은 10퍼센트 수준까지 떨어져 내렸다.
하여 다크비전으로 연속해서 순간이동 공격을 하며, 싹 쓸어 버릴 수 있는 그림이 나온 것이다.
그 사이 카이자르는 제사장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고 말이다.
쿠웅-!
거대한 트롤들의 신형이 무너져 내림과 동시에.
척-!
헬라임이 검은 망토를 휘날리며 지면에 착지하였다.
그리고 그 광경을 멍하니 보고 있던 훈이가 자괴감에 빠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 형은 무슨……. 없는 데서도 캐리하네.”
* * *
한편 같은 시각.
‘바위의 방’에 갇혀 있는 이안은 삐질삐질 땀을 흘리며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자리에 없는 가신들을 아쉬워하면서 말이다.
‘젠장! 카이자르나 헬라임 중 하나만 데려왔어도 훨씬 할 만했을 텐데!’
이안은 그야말로 이를 악문 채, 미친 듯이 활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DPS를 극대화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바위괴물들의 숫자는 줄어들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젖 먹던 힘까지 끌어올린 끝에, 겨우 젠 되는 속도와 처치 속도의 균형을 맞춘 수준.
‘조금만 더 힘내자! 이 고비만 넘기고 나면, 남은 방들은 수월할 거야.’
쉼 없이 손을 놀린 탓에 팔 근육이 다 얼얼할 지경이었지만, 이안은 멈출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느슨해지는 순간, 더 많은 바위괴물이 쌓일 테니 말이다.
지금도 전투 공간이 부족한 마당에, 한 마리라도 더 누적되면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을 것이 분명했다.
“아그비, 왼쪽부터!”
-알겠다, 주인.
짧게 대답한 아그비가 화염의 구체를 연속으로 날려댄다.
그러자 아그비의 고유 능력 ‘도깨비불’이 발동되며, 불덩이가 옆으로 튕겨 나갔다.
이어서 이안이 바위괴물들의 생명력 게이지를 빠르게 살폈다.
‘지금이야!’
이안의 시선이 고정된 곳은, 측면에 몰려 있는 두 마리의 바위괴물들.
녀석들은 둘 다 거의 빈사상태에 빠져 있었고, 이안은 한 번에 두 놈을 전부 터뜨릴 생각이었다.
‘화염폭발을 중첩시키면 충분히 가능해.’
표식이 터지면서 일어나는 폭발은, 일정 범위 안에 피해를 입히는 광역공격이다.
바위괴물들의 덩치가 큰 탓에 두 마리 이상을 범위 안에 집어넣기는 쉽지 않았지만, 지금이라면 가능할 것 같았다.
아그비와 함께 열심히 녀석들을 구석으로 몰아넣은 탓에, 두 녀석이 거의 1미터 이내의 거리에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안의 활시위를 떠난 화염시들이 두 마리 바위괴물들의 몸통에 연달아 틀어박혔다.
그리고 화살이 다 떨어지기 직전.
-‘지옥불’ 표식의 중첩이 Maximum이 되었습니다.
-‘지옥불’ 표식의 중첩이 Maximum이 되었습니다.
기다렸던 시스템 메시지 두 줄이, 동시에 떠올랐다.
콰콰쾅-!
두 개의 표식이 동시에 터지자, 장내에 굉음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이안의 예상대로 두 마리 바위괴물의 생명력이 전부 소진되었다.
-‘리프로봇’의 생명력이 전부 소진되었습니다.
-‘리프로봇’을 성공적으로 처치하셨습니다!
-‘리프로봇’을 성공적으로 처치하셨습니다!
-초월 경험치를 107만큼 획득하였습니다.
-초월 경험치를 112만큼 획득하였습니다.
이안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쓰러진 두 녀석의 사체를 향해 뛰어갔다.
‘제발……!’
이제 남아있는 바위괴물들 중 열쇠를 목에 건 녀석은 단 두 마리.
방금 두 마리를 터뜨림으로 인해 여덟 마리 중 여섯 마리를 처치한 것이니, 이제는 열쇠가 나올 때도 되었다고 생각했다.
타탓-!
달려드는 바위괴물의 어깨를 밟고 튀어 오른 이안이, 두 마리의 사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이안의 눈앞에 새로운 시스템 메시지들이 떠올랐다.
띠링-!
-16아스테르를 획득하였습니다.
-18아스테르를 획득하였습니다.
-‘바위의 중급 영혼 결정’ 아이템을 획득하셨습니다.
-‘바위의 열쇠’ 아이템을 획득하셨습니다.
-‘고장 난 암호 해독기’ 아이템을 획득하셨습니다.
‘됐어!’
바위의 열쇠라는 문구를 본 순간, 이안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정말 극한의 상황까지 몰린 끝에 겨우 획득할 수 있었던 아이템이었기에, 어지간한 득템보다 가슴이 벅차오르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
그 아래 쓰여 있는 또 하나의 문구를 확인한 이안은 묘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고장 난 암호 해독기라고?’
순간 이안의 머릿속에, 한 가지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