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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정령을 얻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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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일란에도 우연적 요소는 분명히 있다.
하지만 메인 에피소드와 관련된 퀘스트 만큼은 우연히 진행되는 경우가 없다.
즉, 모든 사건과 상황에는 분명한 인과관계가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당연한 얘기겠지만, 오직 이안에게만 숨겨진 퀘스트가 발동한 이유도 분명히 있었다.
‘역시 카일란에서 쓸모없는 잡템이란 존재하지 않아.’
탁자에 올려진 어린아이 주먹 만 한 크기의 작은 쇳조각.
이것은 이안에게 처치당한 ‘기계파수꾼’이 드롭한 아이템인 ‘고대의 쇳조각’이었다.
그리고 이안은 알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이 고대의 쇳조각은 얻기 쉬운 물건이 아니다.
기계파수꾼을 최초로 처치한 파티에서 가장 기여도가 높은 유저에게만 드롭되도록 설계되어 있던 아이템인 것이다.
수호자 샬론은 이안이 꺼내 놓은 쇳조각을 조심스레 살피고 있었으며, 이안은 그 모습을 흥미로운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무슨 퀘스트가 등장하려나…….’
이미 숨겨진 퀘스트가 발동한다는 메시지가 뜬 이상, 히든 퀘스트가 생성될 것임은 확실하다.
다만 어떤 종류의 어떤 보상을 줄 퀘스트가 생성될지, 그것이 이안의 관심사였다.
이안이 기분 좋은 상상을 하는 사이 쇳조각을 관찰하는 것을 끝낸 샬론이 묵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 물건…… 어찌 얻은 것인가.”
“심연의 계곡, 돌풍의 협곡 안에 있던 기계파수꾼으로부터 얻었습니다.”
잠시간의 정적이 흐른 후, 샬론은 진중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크흐음, 설마 녀석을 처치한 겐가?”
“그렇습니다.”
“그리 쉽게 상대할 수 있는 녀석이 아니었을 텐데…….”
이안은 살짝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심연의 계곡이 정화되었다는 건, 당연히 기계파수꾼을 누군가 처치했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지금 샬론은 기계파수꾼이 처치되었다는 사실 자체에 놀라고 있었다.
심연의 계곡 정화와 기계파수꾼 처치를 별개의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니, 뭔가 이상한 것이다.
궁금증이 생긴 이안이 그를 향해 되물었다.
“녀석을 처치하지 않고 심연의 계곡을 정화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까?”
“뭐, 녀석을 처치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기는 하네만, 사실 다른 방법도 있기는 하지.”
“그게 뭡니까?”
“제단이 계곡을 정화하는 동안, 녀석이 다가오지 못하게 시간만 끌어도 되는 일이니 말이야.”
“아하.”
탁자에 놓여 있던 쇳조각을 집어 든 샬론이 다른 손에 들고 있던 구슬을 향해 그것을 가져다 대었다.
우우웅- 우우우웅-!
그러자 강렬한 공명음이 울려 퍼지며, 구슬의 주변에 휘감긴 회백색의 빛이 거세게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샬론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믿기 힘들지만, 어쨌든 이 물건은 진짜로군.”
“당연하죠.”
더해서 그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오해해서 미안하네. 영웅을 몰라보았군.”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익숙한 기계음이 울려 퍼졌다.
띠링-!
-‘수호의 결계’가 해제됩니다.
-샬론이 당신에 대한 경계를 풀었습니다.
-정령수호자 ‘샬론’과의 친밀도가 10만큼 증가합니다.
이어서 기다렸던 ‘돌풍 속으로’퀘스트에 대한 보상 메시지가 떠올랐다.
-‘돌풍 속으로 (에픽)(히든)’ 퀘스트를 성공적으로 완수하셨습니다!
-초월 경험치를 1,050만큼 획득합니다.
-명성을 20만 만큼 획득합니다.
-특별한 조건을 충족하였습니다.
-클리어 등급의 티어가 한 단계 상승합니다.
-클리어 등급 : SS+
-S이상의 등급으로 클리어하셨습니다.
-정령 마력(초월)을 100만큼 획득합니다.
-소환 마력(초월)을 70만큼 획득합니다.
-‘심연의 파수꾼(전설)’ 칭호를 획득하셨습니다.
줄줄이 떠오르는 보상 메시지에, 이안의 양쪽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말려 올라갔다.
정령 마력과 소환 마력 스텟 보상도 어마어마했고, 특히 초월 경험치를 1천이 넘게 받은 것이 기분 좋았기 때문이었다.
아마 천이 넘는 초월 경험치를 올리려면, 아무리 이안이라 해도 하루 종일 사냥했어야 할 수준이니 말이다.
게다가 보상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고대의 정령소환 마법진’ 아이템을 획득하였습니다.
-‘화염의 상급 원소 결정’ 아이템을 획득하셨습니다.
-‘중급 대자연의 구슬’ 아이템을 획득하셨습니다.
그것들을 확인한 이안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 * *
“체스크, 뮤엘 님은 왜 합류 안 하신 거야?”
“몰라. 그쪽 길드에서 일이 있나 보던데. 다크 어비스 공략하는데 힐러가 부족했나 봐.”
“흠, 뭐 그럴 수도 있지.”
“그나저나 랄프.”
“응?”
“이번엔 확실히 클리어 가능한 거겠지?”
“걱정 마, 체스크. 지난번이랑은 전력 자체가 다르잖아.”
“하긴 그것도 그래.”
바람의 평원 끝자락.
심연의 계곡 진입로에, 일단의 무리들이 줄지어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랄프와 체스크를 선두로 한 미국 서버의 랭커들.
지난 ‘돌풍 속으로’ 퀘스트 트라이에서 랄프를 비롯한 세 사람은 이안 일행과 달리 실패하고 말았다.
계곡을 정화하던 제단이 멈춰 버리자 던전 밖으로 도주해 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이안 일행이 기계파수꾼을 처치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더라면, 그들은 도주하지 않고 버텼을 것이다.
그럼 자연스럽게 퀘스트를 클리어하게 되니 말이다.
하지만 이안 일행의 전력이 자신들보다 한참 아래라고 생각하고 있던 랄프 삼인방이, 그런 가정을 염두해 두었을 리 없었다.
그들은 이안을 비롯한 네 사람이 전부 전멸했을 것이라 생각했고, 때문에 후일을 도모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래서 랄프 일행은 정말 만만의 준비를 해서 계곡으로 돌아왔다.
콘텐츠를 독식하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정예 멤버들로 구성된 열 명이 넘는 풀 파티를 만들어 온 것이다.
하지만 심연의 계곡에 진입하면서 그들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랄프 형, 체스크 형.”
“왜 그래, 이니스코?”
“뭔데?”
“여기 좀 이상하지 않아?”
“뭐가?”
“지난번이랑 너무 다른데? 맵 자체가 뭔가 화사해진 느낌인 데다, 구조도 많이 달라졌어.”
“……!”
“게다가 오염된 정령들이 나타나질 않잖아?”
생각 없이 계곡에 진입하고 있던 랄프와 체스크는 이니스코의 말에 주변을 두리번거려 보았다.
그리고 두 사람의 표정은 점점 굳어 갔다.
“뭐지? 이니스코 말이 맞는데?”
“설……마. 그 사이에 다른 놈들이 퀘스트를 클리어하기라도 한 건가?”
“에이, 설마……!”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랄프 파티는 속도를 높여 더 빠르게 계곡의 내부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돌풍의 협곡에 도착한 순간…….
“하.”
“제기랄.”
“미친……!”
세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허탈함의 탄성이 새어 나왔다.
새카만 결계로 막혀 있어야 할 제단의 뒤쪽에서 환한 빛이 뿜어져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 먼저 퀘스트를 클리어했다는 사실도 충분히 배가 아팠지만, 더 허탈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퀘스트 자체가 사라졌다는 얘기는 ‘돌풍 속으로’ 퀘스트가 1회성 퀘스트였다는 말이었으니까.
쉽게 말해 ‘한정판’ 퀘스트를 놓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대부분, 1회성 퀘스트의 보상이 일반적인 퀘스트보다 더 후한 보상을 주는 경우가 많았다.
퀘스트를 빼앗겼다고 생각한 세 사람은 이를 갈며 하얀 포털을 노려보았다.
“서둘러 들어가자.”
“그래, 어떤 놈들인지는 몰라도 퀘스트 클리어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을 거야.”
안일하게 움직인 탓에 퀘스트를 뺏기긴 했지만, 다른 콘텐츠들만은 선점하리라 생각하는 그들이었다.
* * *
이안이 퀘스트 완료 보상으로 얻은 세 가지 아이템 중, ‘화염의 상급 원소 결정’은 이미 알고 있었던 종류의 아이템이었다.
정령계에 진입하기 전 그리퍼가 건네주었던, ‘태초의 마룡’ 연성 레시피.
그 레시피에 ‘원소 결정’이 재료로 들어가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레시피에 필요한 원소 결정은 ‘최상급’의 등급이었고, 이안이 얻은 원소 결정의 등급은 ‘상급’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리퍼는 이런 말을 했었다.
“원소 결정은 가능하면 많이 구해 오시게. ‘태초의 마룡’을 연성해 내기 위한 레시피에도 필요하지만, 강력한 아티팩트를 만들기 위한 재료로도 많이 쓰이는 물건이니까 말이야.”
때문에 이안은 ‘원소 결정’이라는 아이템의 쓰임새를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고대의 정령소환 마법진’도 마찬가지다.
물론 처음 보는 물건이긴 하였으나, 아이템의 이름만으로도 용도를 유추해 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마지막 하나의 아이템만은 전혀 어떤 물건인지 알 수 없었다.
‘중급 대자연의 구슬이라……. 대체 뭘까?’
때문에 이안은, 이 아이템의 정보 창부터 먼저 확인해 보았다.
-중급 대자연의 구슬
등급 : 유일 (초월)
분류 : 잡화
강력한 대자연의 기운이 응축된, 신비로운 구슬이다.
정령이 이 구슬을 흡수한다면, 순식간에 대량의 정령력을 획득할 수 있다.
*정령에게 사용하는 즉시, 해당 정령의 정령력이 6,000만큼 증가합니다.
“……!”
아이템의 정보 창을 확인한 이안은 순간 두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정령력 6,000이 한 번에 증가한다고?’
아이템 정보 창을 읽는 것만으로도 ‘대자연의 구슬’이라는 아이템의 가치가 확 와 닿았기 때문이었다.
‘가만, 생각해 보자……. 짹이가 진화하는 데 필요한 정령력이 5천이었지?’
현재 중급 정령인 짹이가 상급 정령으로 진화하기 위해선, 총 5천의 정령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하급 정령이었던 짹이를 중급 정령으로 진화시키는 데 필요했던 정령력이 1천.
그 말인 즉, 하급 정령인 짹이에게 이 대자연의 구슬을 먹인다면, 곧바로 상급 정령이 된다는 얘기였다.
정령을 진화시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아는 이안으로서는, 그야말로 대박 아이템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 것이다.
‘대박! 일단 이건 아껴야겠어. 사대 정령을 얻으면 바로 사용해야지.’
입이 귀에 걸린 이안은 서둘러 다음 아이템을 확인해 보았다.
상급 원소 결정이야 따로 확인해 볼 필요가 없었지만, ‘고대의 정령소환 마법진’은 구체적인 정보를 봐야 했기 때문이다.
-고대의 정령소환 마법진
등급 : 전설 (초월)
분류 : 스크롤
‘고대의 정령소환 마법진’이 담겨 있는 마법 스크롤이다.
해당 아이템을 찢으면 허공에 마법진이 생성되며, 랜덤한 속성의 정령을 소환할 수 있다.
*최하급~상급 의 정령이 랜덤으로 소환됩니다.
*사대 정령이 소환될 확률이 30퍼센트만큼 증가합니다.
*사대 정령이 소환될 시, 무조건 최하급 정령이 소환됩니다.
*‘속성의 정수’를 마법진에 집어넣으면, 해당 속성의 정령이 등장할 확률이 증가합니다(정수의 등급에 따라 다른 확률이 적용됩니다).
*한 번 사용하면 사라지는, 1회성 아이템입니다.
황금빛 기운이 일렁이는 신비한 양피지 조각.
아이템 정보를 전부 확인한 이안의 두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예뿍이의 말대로군. 사대정령을 소환의 단서는 샬론에게 있었어.’
어찌 보면 이안에게 가장 필요했던 아이템이 바로 이 ‘고대의 정령 소환 마법진’이었다.
그가 정령계에서 가장 얻고 싶었던 것이 사대 정령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이안이 원하는 속성은 정령왕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바람의 정령이나 불의 정령.
때문에 이 마법진은 이안에게 완벽히 맞춤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정보창의 하단에 쓰여 있는 세부 옵션을 잘 이용한다면, 원하는 속성의 정령을 얻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이안은 세부 옵션을 다시 한 번 곱씹으며 양피지 조각을 꾹 말아 쥐었다.
‘어디 보자……. 불이나 바람의 정령을 얻으려면, 해당 속성의 정수를 집어 넣어야겠네?’
비슷한 느낌이긴 하지만, ‘속성의 정수’와 ‘원소 결정’은 다른 아이템이다.
둘 다 정령계의 정령들을 처치하면 얻을 수 있는 아이템이기는 하지만, ‘정수’가 ‘결정’에 비해 훨씬 흔한 아이템이었으며 용도도 완전히 달랐다.
원래 이 ‘정수’의 용도는, 해당 속성의 정령에게 흡수시켜 정령력을 증가시키는 데 쓰이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나한테는 불의 상급 정수가 있지.’
‘기계파수꾼 처치’ 퀘스트를 클리어하고 얻었던 상급 속성의 정수.
그것의 속성이 바로 ‘화염’이었고, 이안은 더 이상 망설일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상급보다 더 높은 등급의 정수를 언제 얻게 될지도 몰랐으니 말이다.
“샬론.”
“말씀하시게.”
“이 마법진……. 지금 여기서 써 봐도 될까요?”
이안의 물음에 샬론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물론일세. 정령력이 충만한 이 성소 안에서 사용한다면, 분명 훌륭한 정령이 소환될 것일세.”
“그렇군요.”
“그리고 나 또한 궁금하다네. 기계파수꾼을 처치한 영웅의 부름에 어떤 정령이 응답할는지 말이야.”
고개를 끄덕인 이안은 양피지를 움켜쥔 양손에 천천히 힘을 주었다.
그러자 황금빛으로 빛나던 양피지 조각은 세로로 길게 찢어졌고…….
찌이익-!
그와 동시에 새하얀 빛 무리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