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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정령을 얻다 (5)
* * *
족히 수십 미터는 됨직한 키에, 둘레만 오륙 미터 정도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나무들.
푸른 초목이 우거진 숲속에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휘이잉.
그 바람을 타고 작은 정령들이 노닐고 있었다.
-아, 따분해. 오늘은 무슨 재밌는 일 없을까?
-이 좁은 성소 안에 그런 게 있을 리 없잖아.
-맞아. 얼른 바깥으로 나가고 싶어. 바깥에는 재밌는 일이 많을 텐데…….
-그렇기는 하지만, 샬론 님께서 절대 바깥으로 나가지 말라고 하셨어. 성소 바깥은 위험하다고 말이야.
-힝, 조심해서 놀고 오면 괜찮지 않을까?
-안 돼. 샬론 님께서 화나시면 정말 무섭다구!
기계문명에 의해 정복당해 오염되어 버린 정령계.
하지만 그 안에서도 아직 오염되지 않은 구역은 있었다.
정령계의 동서남북에 각각 자리하고 있는 네 곳의 정령의 성소와 정령산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대자연의 성역.
정령계 안에서도 원소의 힘이 가장 강력한 이 다섯 군데만큼은 아직까지 기계문명이 정복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이안이 심연의 계곡을 정화하고 들어온 정령의 성소는 이 중 남쪽에 있는 정령의 성소였다.
위이잉-!
낮은 공명음과 함께, 허공에 푸른빛이 일렁였다.
그리고 잠시 후, 그 자리에 파란 게이트가 생성되었다.
“읏차.”
게이트 안쪽에서 나타난 인물은 까망이의 육성을 맡겨 놓고 돌아온 이안.
이어서 이안의 눈앞에, 새로운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띠링-!
-‘정령의 성소’에 입장하셨습니다!
-전투가 제한되는 구역입니다.
-보유한 정령의 정령력이 조금씩 상승합니다.
메시지를 확인한 이안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예뿍이가 뭐랬더라. 정령수호자 샬론이라는 녀석을 찾아가라고 했던 것 같은데…….”
이안은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방에는 거대한 나무들만이 빼곡하게 솟아 있었고, 인위적인 길 같은 것이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후, 쌍둥이에게 연락해서 좌표라도 찍어 달라고 해야 하나…….”
기계파수꾼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이안과 쌍둥이 자매 그리고 뮤엘은 각자의 볼일을 보기 위해 헤어졌다.
정확히는 이안이 볼일이 있었기 때문에 나머지 세 사람이 먼저 정령의 성소에 들어간 것이다.
이안은 세팅이 끝난 까망이 때문에 인간계에 들러야 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안이 인간계에 다녀온 사이 그들이 먼저 성소에 대한 정보를 조사해 놓기로 했었다.
세 사람과 모두 친구등록을 해 놓은 이안은 곧바로 채팅방을 개설해 보았다.
-이안 : 사라, 바네사. 지금 어디야?
그리고 10초도 채 지나지 않아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대답의 내용은, 이안이 예상했던 것과 조금 달랐지만 말이다.
-사라 : 우리 지금 인간계로 돌아와 있어.
-바네사 : 난 지금 인간계에서 사냥 중!
-뮤엘 : 저는 다크 어비스요. 우리 서버 길드 파티에 돌아와서 명계 공략 중이에요.
“……!”
이안은 살짝 당황했다.
그는 당연히 세 사람이 함께 정령의 성소 안에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다음 퀘스트를 진행하기 위해 성소 안에서 이안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다들 지상계로 내려갔단 말은 더 이상 진행할 퀘스트가 없었다는 얘기일 텐데…….’
하지만 그의 당황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다음 순간 머릿속에 바로 떠오르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역시 생각했던 대로, 정령계도 명계처럼 콘텐츠 제한이 걸려있나 본데? 예상보다 약간 빠른 시점이긴 하지만 말이야.’
이안이 처음으로 진입했던 중간계인 명계.
명계에 있는 대부분의 콘텐츠는 ‘용사의 자격’ 없이 진행할 수 없게 막혀 있었다.
용사의 자격 없이는 카론이 배를 태워 주지 않기 때문이다.
카론의 배에 오르지 못한다면 에레보스에 진입할 방법이 없고, 대부분의 명계 콘텐츠는 에레보스 안에 있으니.
사실상 메인 콘텐츠가 죄다 막혀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명계에서 용사의 자격 없이 입장이 가능한 곳은, 다크 어비스뿐.
그리고 정령계 또한 중간계이기에 어느 정도 예상했던 상황이었다.
‘역시 용사의 자격을 얻기 전엔, 제대로 된 중간계 콘텐츠를 즐길 수가 없는 거였어.’
심연의 계곡이 있었던 ‘바람의 평원’과 서리동굴이 있었던 ‘순록의 숲’ 맵이 명계로 따지면 다크 어비스와 비슷한 느낌이었던 것이다.
순식간에 이러한 내용들을 유추해 낸 이안이 다시 채팅 창에 말을 이었다.
-이안 : 혹시 퀘스트 더 진행하려면 용사의 자격이 필요했던 건가?
그리고 이안의 물음에 쌍둥이 자매와 뮤엘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정령계가 첫 번째 중간계인 그들로서는 그런 유추가 가능하다는 걸 짐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라 : 헐?
-바네사 : 뭐야, 어떻게 알았어?
-뮤엘 : 이안 님, 뭐예요. 무섭잖아요.
그들의 반응을 본 이안은 예상이 맞았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역시…….’
고개를 주억거린 이안은 다시 채팅을 이어 갔다.
메인 콘텐츠 진행이 더 이상 힘들다 하여도 정령수호자 샬론은 만나야 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헤매지 않기 위해서는 그녀들로부터 정보를 얻을 필요가 있었으니까.
-이안 : 그야 다 아는 방법이 있지.
-바네사 : 사기꾼! 솔직히 말해, 너 GM이지?
바네사의 반응에 피식 웃은 이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안 : 바네사,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정령수호자 좌표나 알려 줘.
* * *
정령의 성소 맵은 이안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넓었다.
성소라고 해서 작은 광장 정도의 크기인 맵을 예상했는데, 아예 산봉우리 하나 자체가 전부 ‘정령의 성소’의 범위 안에 있었으니 말이다.
‘바네사에게 좌표를 받길 잘했어.’
이안은 눈앞에 나타난 거대한 고목古木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바네사의 정보에 의하면 이 고목의 꼭대기에 정령수호자 샬론이 살고 있을 터.
좌표를 받았기에 망정이지 만약 위치도 모른 채 찾아 헤맸다면 1시간 넘게 숲속을 돌아다녀야 할 뻔했다.
이 숲속에 있는 수많은 나무들 중 샬론이 살고 있는 이 나무를 찾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니 말이다.
“핀, 저 위로 올라가자.”
꾸르륵- 꾸꾹-!
핀을 소환하여 위에 올라탄 이안은 허공으로 빠르게 솟아올랐다.
그리고 잠시 후, 나무의 꼭대기에 지어져 있는 작은 오두막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읏차.”
가벼운 몸놀림으로 그 앞에 올라선 이안은 조심스레 오두막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그 순간, 닫혀 있던 오두막의 문이 벌컥 하고 열렸다.
“요즘은 새로운 손님들이 많이 오시는군. 심연의 계곡이 정화되어서인가?”
오두막의 문이 열리며 이안의 앞에 나타난 한 노인.
그와 눈이 마주친 이안은, 흥미로운 표정이 되었다.
노인의 외모가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종류의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새하얗고 길게 늘어진 수염에 살짝 굽어 있는 등.
백발의 사이로 튀어나와 있는, 마치 산양山羊의 그것을 연상케 하는 커다란 뿔.
‘진짜 신기하게 생겼네.’
속내를 감춘 이안이, 그를 향해 공손하게 인사를 하였다.
“반갑습니다. 혹시 정령수호자 샬론 님 되시는지요?”
이안의 물음에, 샬론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흠,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네.”
이안은 자연스럽게 그와의 대화를 이어 갔다.
“서리동굴에서 예뿍이라는 녀석을 만났습니다. 그녀에게서 샬론 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지요.”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샬론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오호, 심연의 수호자를 만났다니. 혹시 자네는 판의 관문에 도전하였는가?”
“그렇습니다.”
“모든 관문을 통과했나 보군.”
“어찌 아셨습니까?”
“그야, 관문을 통과한 게 아니라면, 심연의 수호자가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을 리 없으니 말일세. 껄껄.”
샬론의 말을 들은 이안은, 한 가지 재밌는 가정을 세워 볼 수 있었다.
‘샬론은 정령의 수호자고, 예뿍이는 심연의 수호자라……. 정령의 속성들 안에 심연이라는 속성도 존재하니, 어쩌면 정령계에 다른 속성의 수호자들도 존재할지 모르겠군.’
이안이 생각하는 동안, 샬론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관문을 통과했다면 판의 유산을 얻었겠고……. 그가 남긴 정령술을 터득했겠지?”
“맞습니다.”
“좋아. 판이 남긴 유산을 얻었다면, 자네에게 약간의 기대는 해 볼 수도 있겠군.”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한 샬론은 오두막의 안쪽으로 턱짓을 했다.
끼이익-!
이어서 오두막의 낡은 문을 다시 연 샬론이 터벅터벅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오시게.”
* * *
띠링-!
-조건을 충족하셨습니다.
-최초로 ‘샬론의 오두막’에 입장하셨습니다.
‘뭐라고?’
샬론의 오두막에 들어간 순간 떠오른 새로운 메시지가 이안으로선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던 시스템 메시지였으니 말이다.
‘최초라니. 분명 쌍둥이와 뮤엘이 여길 다녀갔을 텐데?’
이안은 알 수 없었지만, 쌍둥이 자매와 뮤엘은 이 오두막에 들어온 적이 없었다.
오두막의 밖에서 샬론을 만난 뒤 ‘돌풍 속으로’ 퀘스트에 대한 보상만을 받고 헤어졌던 것이다.
‘심연의 파수꾼’보상부터 시작해서 제법 후한 보상들이 주어졌기에, 샬론에게 더 이상 미련이 없었던 것.
샬론이 추가로 퀘스트를 준 것도 아니었으니, 그녀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렇다면 샬론은, 왜 이안만을 특별 대우(?) 한 것일까?
이안의 궁금증이 풀리기도 전에 새로운 메시지들이 연달아 떠오른다.
띠링-!
-수호자 ‘샬론’이 당신을 경계합니다.
-‘수호의 결계’가 펼쳐졌습니다.
-‘샬론의 오두막’이 강력한 결계로 봉인되었습니다.
-결계가 해제되기 전까지 ‘샬론의 오두막’을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
이안의 의아함은, 이제 그것을 넘어 당혹스러움으로 바뀌어 버렸다.
정말이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전개이기 때문이었다.
‘아니, 난 잘못한 것도 없는데 대체 왜?’
일단 이안은 침착하기로 했다.
카일란에 이유 없이 전개되는 에피소드는 없었으니 말이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이안이, 샬론을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왜 이러시는 겁니까?”
그러자 샬론이 능청스레 대꾸했다.
“뭐가 말인가?”
“결계로 절 이 안에 가두시지 않았습니까.”
그에 샬론의 두 눈에 이채가 어렸다.
“오호, 대단하군. 결계까지 알아채다니 말이야.”
“……!”
“하지만 걱정할 것 없네.”
이안과 눈이 마주친 샬론은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고 품 속에서 특이한 빛깔을 띤 구슬 하나를 꺼내어 들었다.
“자네에게서 느껴지고 있는 기계문명의 기운에 대한 해답만 얻을 수 있다면, 내가 해를 입힐 일은 없을 테니 말일세.”
“예?”
이안은 기억을 되짚어 보기 시작했다.
‘기계문명의 기운이라고?’
일단 샬론이 화가 난 이유를 방금 대화를 통해 알게 되었다.
그는 성소를 지키는 수호자였고, 수호자의 입장에서 이안에게 기계문명이 느껴졌다면 적대시하는 게 당연했으니 말이다.
그러니 기억을 되짚어, 그 이유를 알아내야만 했다.
‘나한테서 기계문명의 기운이 왜 느껴진다는 걸까?’
그리고 생각에 잠긴 이안을 향해 샬론이 다시 입을 열었다.
“여기 이 구슬에 휘감긴 회백색의 빛깔 보이는가?”
“예, 보이네요.”
“이것이 바로, 자네가 어떤 기계문명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일세. 대자연의 구슬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 말이지.”
샬론의 기세는 더욱 흉흉해졌다.
이안이 곧바로 해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이안은 여유 있는 표정이 되어 있었다.
그와 대화를 하는 사이 생각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샬론과 눈을 마주친 이안은 인벤토리에서 뭔가를 꺼내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조심스럽게 탁자에 올려놓았다.
“제게서 기계문명의 힘이 느껴진다면 아마 이 물건 때문인 것 같군요.”
이안을 보고 있던 샬론의 시선이 자연스레 탁자로 향했다.
이어서 이안이 올려놓은 물건을 확인한 순간, 그의 두 눈이 커다랗게 확대되었다.
“이, 이것은?”
이안은 씨익 웃으며 한마디 덧붙였다.
“한번 확인해 보시죠.”
그리고 잠시 후, 이안의 눈앞에 새로운 시스템 메시지들이 떠올랐다.
띠링-!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숨겨진 퀘스트가 발동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