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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계 입성 (3)
* * *
‘이건 대체…….’
한차례 침을 꿀꺽 삼킨 이안은, 눈앞에 나타난 의문의 생명체를 응시하였다.
이안 일행이 놀란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동굴 안쪽에서 기어나온 생명체의 생김새가 일행의 ‘누군가’와 너무 비슷했던 것이다.
‘뿍뿍이에게 동족(?)이 또 있었다니……!’
자세히 본다면 뿍뿍이와는 약간 생김새가 다른 서리동굴의 거북이.
녀석은 뿍뿍이보다 ‘약간’ 머리가 작았으며, 눈매가 ‘살짝’ 더 둥근 느낌이었다.
하지만 뿍뿍이와 녀석을 구분하는 것은 너무 쉬웠다.
생김새야 거의 비슷했지만, 등껍질의 색상이 완전히 달랐으니 말이다.
녀석의 등껍질은 서리동굴에 쌓여 있는 눈처럼 새하얀 순백의 색이었다.
뽀드득- 뽀드득-.
앙증맞은 발소리와 함께 이안 일행에게 다가온 녀석은, 이안의 발치에 멈춰 섰다.
그리고 앙증맞은 입을 열었다.
“뿍, 너희들은 누구냐뿍?”
그리고 그 순간, 이안은 어이없는 표정이 되어 버렸다.
‘말투까지 뿍뿍이랑 똑같다니…….’
피식 웃은 이안은, 서리동굴의 거북이를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소환술사 이안. 여기는 내 소환수들이고…….”
소환술사라는 이야기에, 거북은 좀 더 흥미로운 표정이 되었다.
“반갑뿍. 나는 서리동굴의 수호자. 판의 친구인 예뿍이다뿍.”
본인을 ‘예뿍이’이라 소개하는 거북이를 보며, 이안은 어이없는 표정이 되었다.
“예뿍이? 그건 누가 지어 준 이름이야?”
“당연히 나의 친구, ‘판’이 지어 준 이름이다뿍.”
“…….”
이안은 예뿍이의 면면을 다시 한번 자세히 살펴보았다.
‘혹시 이 녀석, 암컷인가……?’
하지만 눈을 씻고 살펴보아도, 성별을 알아낼 수 있는 단서는 찾을 수 없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이안은 뿍뿍이와 새로운 친구를 번갈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뿍뿍아, 너 친구 생긴 것 같은데?”
하지만 이안의 말에도 뿍뿍이는 아무런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자리에 굳어 있었다.
“뿍뿍아, 뭐해?”
이안은 뿍뿍이의 눈앞에 손가락을 흔들어 보았지만, 그조차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뿍뿍이의 강렬한 눈빛은, 예뿍이에게 고정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이안은 예뿍이의 성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역시 암컷이었어. 그리고 우리 뿍뿍이는……. 반해 버린 것 같군.’
뿍뿍이의 흔들리는 눈망울.
긴장했는지, 잔뜩 경직되어 있는 등껍질.
잠시 동안 석상처럼 가만히 있던 뿍뿍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예뿍이……. 예뿍.”
그리고 뿍뿍이의 찬사를 들은 예뿍이는 한껏 도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뿌뿍. 뭘 좀 아는 거북이다뿍.”
* * *
서리동굴에서 예뿍이의 역할은, 동굴에 들어선 유저들을 ‘판의 시험관문’까지 안내해 주는 것이었다.
쉽게 말해 그녀(?)는, 이 서리동굴의 가디언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 이안은 첫 번째 관문으로 보이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뿌뿍.
이안의 앞에 멈춰선 예뿍이가, 이안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안, 너는 정령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냐뿍?”
예뿍이의 질문에, 이안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글쎄. 솔직히 아직은 아는 게 별로 없지. 내가 키워 본 정령은, 여기 짹이가 전부니까 말이야.”
이안이 어깨에 앉아있는 짹이를 가리키며 말하자, 예뿍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뿍……. 그렇다면, 역시 첫 번째 관문부터 도전하는 게 맞겠뿍.”
뿍- 뽀드득- 뿍-.
새하얀 눈에 떠올라 있는 보랏빛의 결계.
그리고 그 바로 오른쪽에 솟아 있는 낡은 석상.
그 앞으로 다가간 예뿍이가 석상의 옆면에 발바닥을 대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결계의 한 구석에 게이트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긍- 그그긍-.
이어서 예뿍이의 입이 떨어졌다.
“첫 번째 관문에 들어가기 전, 주의사항을 몇 가지 알려 주겠뿍.”
“음……?”
자연스레 게이트를 향해 이동하던 이안은, 걸음을 멈추고 예뿍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예뿍이가 다시 말을 이어 갔다.
“우선 첫 번째. 이 관문 안에서는 어떤 소환수도 소환할 수 없뿍.”
“정령도?”
“그렇뿍.”
“흐으음…….”
이안의 표정이 살짝 구겨졌다.
어쨌든 소환수를 활용할 수 없다는 것은, 이안에게 있어서 치명적인 페널티이니 말이다.
“그리고 두 번째. 관문에 도전할 수 있는 기회는 단 한 번 뿐이며, 관문의 숫자는 총 세 개다뿍.”
“실패하면 다시는 도전할 수 없는 거야?”
“그렇뿍.”
잠시 뜸을 들인 예뿍이는, 주변을 슬쩍 둘러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이 관문은 최대 다섯 명까지 파티로 도전할 수 있다뿍.”
“흠……?”
“하지만 도전 인원과 관문의 난이도는 무관하다뿍.”
“그러니까, 혼자 도전하면 불리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지?”
“맞다뿍. 똑똑한 인간이다뿍.”
예뿍이의 설명을 들은 이안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으음, 어떡하지……?’
만약 예뿍이의 주의사항 중 두 번째 항목이 없었더라면, 이안은 망설임 없이 혼자 관문에 들어갔을 것이다.
어쨌든 퀘스트 난이도가 C등급에 불과했으니, 혼자서도 충분한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문에 도전할 수 있는 기회가 단 한 번이라는 이야기를 듣자, 아무리 이안이라도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잠깐 차원포탈 열어서 애들 좀 데려와야 하나?’
이안의 머릿속에,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몇몇 인물들이 있었다.
이안이 부르기만 한다면, 당장에라도 달려와 줄 세 명의 추종자(?)들.
훈이와 카노엘, 그리고 유신이라면 아마 이안이 부르는 즉시 하던 일도 멈추고 와 줄 것이었다.
‘쩝……. 그래. 뭐, 솔플이 편하기는 하지만, 굳이 리스크를 안고 갈 필요는 없겠지.’
생각을 정리한 이안은, 차원의 포탈을 열기 위해 인벤토리에서 구슬을 꺼내었다.
하지만 그의 행동은 거기서 더 이어질 수 없었다.
구슬을 꺼내어 손에 쥔 순간, 뒤쪽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자, 잠깐!”
그리고 그 즉시, 예뿍이와 이안의 시선이 소리가 난 방향을 향해 돌아갔다.
더해서 이안은, 언제든 전투할 수 있도록 창대에 손을 가져갔다.
들려온 목소리는 분명 인간의 목소리.
정황상 유저일 확률이 높았고, 그렇다면 타국 서버의 유저일 테니 말이다.
물론 타서버 유저가 딱히 이안을 적대할 이유는 없었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
“헥, 헥.”
“후아, 달려오길 잘했잖아?”
똑 닮은 모습을 한 두 명의 여인이, 이안의 앞에 나타났다.
이안은 여전히 긴장을 풀지 않은 채, 두 여인의 면면을 살펴보았다.
‘쌍둥이……? 혹시 NPC는 아니겠지?’
이안은 두 여인 중, 소환술사인 듯 보이는 여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누구……?”
그런데 여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이안이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었다.
“어라? 날 모르는 사람이 있네? 혹시 유저가 아닌가?”
“……?”
순간 어이없는 표정이 된 이안.
하지만 그런 이안과는 별개로, 두 여자는 재잘거리며 떠들기 시작했다.
“바네사, 너 바보야?”
“내가 또 왜?”
“아니, 지금 저 사람, 퀘스트 하고 있는 거 안 보여? 넌 퀘스트 하는 NPC도 봤어?”
“어……. 생각해 보니 그러네.”
이안은 멍한 표정으로 두 여자의 대화를 지켜봤고, 두 여자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근데 언니, 유저가 어떻게 우릴 모를 수 있지?”
“그러게. 그건 나도 궁금하네.”
대화가 이어질수록 더욱 어이가 없어진 이안은, 결국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저기…….”
“응?”
“모든 유저가 당신들을 알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대체 어디서 나온 자신감이야?”
그리고 이안의 질문이 의외였었는지, 바네사는 순간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 그야…….”
대신 그녀의 옆에 있던 쌍둥이 언니인, 사라가 이안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야, 여기 얘가 랭킹 4위고.”
“……?”
“나는 랭킹 7위니까.”
“음…….”
“적어도 독일에서 랭커 듀오 ‘사라와 바네사’를 모르는 유저는 없을걸?”
그리고 그녀의 마지막 말이 끝난 순간, 그제야 이안은 그들의 자신감이 이해되었다.
‘아……. 이 친구들이 독일 서버의 랭커들이었나 보네. 하긴, 이렇게 눈이 띄는 복장에 쌍둥이 자매가 각각 랭킹 4, 7위면 독일에서는 못 알아보는 사람이 없을 수도 있겠군.’
너무 갑작스러운 등장에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타국 서버의 유저를 만날 수도 있다는 가정.
‘그나저나 쟤들이 독일 사람이라면……. 대체 나랑 말이 어떻게 통하는 거지? 카일란 시스템 자체적으로 동시통역 기능이라도 있는 건가?’
이안은 LB사의 기술력에 다시 한 번 감탄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뿐.
당장에 이 자매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게 더 중요했다.
‘자 일단 PK가부可否 여부부터, 확인해 볼까?’
사라와 바네사가 독일 서버에서는 유명할지 몰라도, 이안에게는 생판 처음 보는 사람들이다.
그녀들의 성향이 어떤지 이안은 전혀 모른다는 이야기다.
때문에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이, PK가 가능한지 불가한지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이안은 가까운 위치에 있는 바네사에게, 가벼운 디버프 스킬을 슬쩍 걸어 보았다.
-소환수 ‘엘카릭스’의 마법, ‘슬로우’를 발동하였습니다.
-‘디버프’를 사용할 수 없는 대상입니다.
‘흠, 일단 유저 간 PK는 안 되는 것 같고…….’
이안의 입꼬리가 슬쩍 말려 올라갔다.
PK가 불가능하다면, 이 쌍둥이 자매의 활용도가 무궁무진해지기 때문이다.
‘좋아. 한동안 얘들이랑 같이 다녀 볼까?’
이안은 기분이 좋아졌다.
이 자매를 잘 구슬리면, 새로운 노동력(?)을 창출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굳이 훈이나 노엘이를 불러올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그리고 생각이 정리되고 나자, 이안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지금 쟤들 대화 내용으로 봐선……. 아마도 중간계의 비밀을 모르고 있는 것 같지?’
사라와 바네사는 이안이 ‘당연히’ 독일 사람일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이 말인 즉, 정령계가 통합 서버를 기반으로 한다는 사실을 아직 모른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이안은, 자신만이 아는 정보를 굳이 저들이 알게 해 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안은 능청을 떨며, 연기를 시작했다.
“아, 그래? 너희들이 랭킹 4위, 7위라고?”
짐짓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이며, 두 여자를 번갈아 보는 이안.
그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바네사가 우쭐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니까? 심지어 나는, 소환술사 랭킹 1위라고!”
“오오!”
정말 놀랐다는 듯 이안은 눈까지 크게 뜨며 바네사의 말에 리액션했다.
사라와 바네사는 신나서 자신들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고, 이안은 그에 열심히 맞장구를 쳐 주었다.
“그런데 우릴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
“그러게, 게다가 정령계에 들어왔을 정도면……. 너도 상당한 랭커일 텐데 말이야.”
“아, 나는 항상 혼자 게임해 왔거든.”
“오, 그래?”
“그리고 다시 생각해 보니까, 너희 이름을 들어 봤던 것도 같아.”
“역시! 그럴 줄 알았어!”
그런데 잠시 후, 멀뚱히 그들을 응시하던 예뿍이가 이안의 다리를 툭툭 건드렸다.
대화를 듣다가 지루해진 모양이었다.
“그래서 이안, 이들이랑 같이 도전할 거냐뿍.”
그런데 예뿍이의 질문에 대답한 것은 이안이 아니었다.
어느새 이안과 친해진(?) 두 자매가 먼저 입을 연 것이다.
“그렇지, 이안? 우리랑 파티 할 거지?”
“언니는 당연한 얘길 하고 있어! 우리가 캐리해 줄 텐데, 이안은 당연히 함께하고 싶을걸?”
그렇게 두 자매는, 이안의 마수에 빠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