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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의 명계 탐방기 (3)
* * *
카론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이안이 숲길에 들어선 지 채 2분도 지나기 전에, 회색빛깔의 토끼 한 마리가 풀숲 사이로 튀어나온 것이다.
푸스슥- 파팟-!
총알처럼 재빠르게 튀어나와, 어디론가 튀어가는 한 마리의 토끼.
그것을 확인한 이안의 얼굴에 흥미가 어렸다.
‘흐흐, 이것도 은근 신선하고 재밌는데?’
패널티로 인해 1레벨이 떨어졌다고는 하지만, 이안의 레벨은 무려 400을 훌쩍 넘은 상태였다.
그런데 이런 시점에 토끼를 사냥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는 것이 무척이나 신선하게 다가온 것이다.
‘어디 보자, 역시 토끼 사냥에는 활이 제 맛인가.’
빠르고 날렵한 토끼를 잡기 위해서는, 당연히 원거리 무기가 훨씬 유리한 것이다.
이안은 자연스럽게 인벤토리를 열어 무기를 바꿔 장착하려 하였다.
하지만 당연히, 인벤토리는 열리지 않았다.
띠링-!
-‘죽은 자’ 상태에서는 인벤토리를 오픈할 수 없습니다.
“후…….”
이안은 또 다시 울고 싶은 표정이 되고야 말았다.
‘창으로 토끼를 잡아야 되다니…….’
토끼는 기본적으로 초식동물이다.
때문에 공격력은 약하기 그지없지만, 이동속도가 무척이나 빠르다.
콜로나르 대륙의 초보자 사냥터에 있는 토끼들만 봐도 그렇다.
초보 유저들 중 근접 무기를 사용하는 유저들은, 토끼는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는 경우가 많았다.
빠른 이동속도로 요리조리 도망 다니는 토끼는, 사냥 효율이 무척이나 안 좋기 때문이다.
‘휴, 그래도 어쩌겠어. 시키니까 해야지 뭐.’
마음을 다잡은 이안은, 검의 손잡이를 다시 고쳐 쥐었다.
이안이 지금 들고 있는 무기는 블러디 리벤지.
명왕 뮤칸과의 싸움 마지막 순간에 손에 쥐고 있던, ‘림롱’으로부터 약탈한 물건이었다.
‘그나마 정령왕의 심판이 아닌 게 다행이지 뭐.’
블러디 리벤지는 단검短劍과 세검細檢의 장점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깃털처럼 가벼운 검이다.
반면에 정령왕의 심판은 묵직하기 그지없는 사모蛇矛 형태의 장창이다.
토끼잡이에 어떠한 무기가 유리할지는 누가 봐도 명확할 수밖에 없다.
‘거기에 블러드 스플릿도 있고 말이지.’
재빠른 토끼를 추격하는 데에 블러드 스플릿과 같은 돌진 공격기술은 훌륭한 도구가 될 것이다.
이안은, 이 스킬이라도 최대한 활용해 보기로 했다.
‘일단 녀석을 찾으러 가 볼까?’
천천히 걸음을 옮겨 풀숲을 향해 다가간 이안은, 조심스레 그 사이를 벌려 공간을 만들어 내었다.
푸스슥.
이안은 최대한 소리를 죽여 풀숲 사이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이안의 인상이 또 한 번 구겨졌다.
‘이게 뭐야? 토끼 주제에…….’
-저승토끼 : Lv 3(초월)
토끼의 레벨이 무려 3이나 되었던 것이다.
‘휴우, 토끼라고 얕보면 안 되겠는걸?’
카일란에서 레벨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현재 이안의 초월 레벨은 2.
어쨌든 토끼의 레벨이 이안보다 높았으니, 조심하는 것이 당연했다.
게다가 레벨이 낮을수록, 1레벨의 차이는 무척이나 크게 체감되니 말이다.
부스럭.
최대한 조심스레 풀숲을 지나선 이안이, 발소리를 죽이며 토끼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블러드 스플릿을 이용해 단번에 다가설 수도 있었지만, 그것은 토끼가 이안의 존재를 눈치챈 후까지 아껴 두는 것이 좋았다.
블러드 스플릿은 논타깃 스킬이고, 거리가 가까울수록 맞추기 쉬운 게 당연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토끼의 바로 1미터 뒤까지 이안이 다가선 그 순간…….
“……!”
토끼의 뒷다리 근육이 움직이려는 것을 포착한 이안은, 순간적으로 블러드 스플릿을 발동시켰다.
파앗-!
-고유 능력, ‘블러드 스플릿Blood Split’을 발동합니다.
이안의 논타깃 스킬 명중률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이다.
논타깃 스킬 맞추는 데는 도가 튼 궁사 랭커들조차도 이안만큼은 입을 모아 인정하니 말이다.
그런 이안이, 1미터 거리에 있는 토끼 정도를 맞추지 못할 리 없었다.
촤아악-!
-‘저승 토끼’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역시나 약점포착까지 발동시켜, 정확하게 치명타까지 터뜨려낸 이안!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저승 토끼’의 생명력이 685만큼 감소합니다.
-‘저승 토끼’와 ‘적대’ 상태가 되었습니다.
‘저승토끼’ 역시 콜로나르 대륙의 일반적인 토끼들처럼, 먼저 공격하지 않으면 적대감을 드러내지 않는 ‘후공 몬스터’였다.
때문에 적대 상태가 되었다는 메시지까지 친절하게 떠오른 것.
하지만 문제는 그 부분이 아니었다.
‘685라고? 지금 딜이 천도 안 박힌 거야?’
분명히 정확하게, 그것도 치명타로 블러드 스플릿이 꽂혔음에도 고작 세 자릿수의 데미지가 박혔다는 부분이었다.
때문에 이안의 시선은 자연히 녀석의 생명력 게이지로 향했고.
“……!”
이어서 더욱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토끼의 생명력 게이지가, 거의 깎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굳이 수치로 따져 보자면, 2~3퍼센트 정도?
블러드 스플릿으로 이 정도의 딜이 박혔다는 것은, 일반 공격으로는 두 자리 수 딜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소리였다.
‘중간계에서 지금 내 공격력이 그래도 1천 정도는 될 텐데…….’
초월 2레벨이 된 이안의 상태창에 표기된 현재 공격력은, 정확히 1,350이었다.
그런데 데미지가 그 절반 정도밖에 박히지 않았다는 것은, 토끼의 방어력이 이안의 공격력보다 높다는 의미였다.
‘토끼 주제에 뭐 이래?’
그리고 당황한 이안이 움찔하던 그때였다.
퍼억-!
순간적으로 튀어오른 토끼가, 이안에게 몸통박치기를 시전했다.
-‘저승토끼’의 공격으로 피해를 입었습니다!
-생명력이 6,798만큼 감소합니다!
“미친……!”
이안은 자신도 모르게 육성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아이템발로 9만 정도의 추가 생명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단 한 번의 공격에 사망할 정도의 막강한 공격력이었기 때문이다.
아이템 보너스를 뺀 이안의 현재 생명력은 5천 수준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어쨌든 한 번씩의 공수 교환에서 오히려 이안보다 우위를 점해 버린 저승토끼였다.
이안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평타로 때리면 거의 천 대는 때려야 잡을 만한 맷집인데 이거.’
아마 이대로 싸우더라도 토끼한테 질리는 없었다.
토끼의 몸통박치기가 제법 빠르긴 하지만, 피해 내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물론 다 맞아주면서 싸운다면, 이안은 이길 수 없다.)
하지만 시간이 문제였다.
이렇게 싸우다가는 한 마리 잡는 데 일이십 분이 걸릴 판이었으니, 3시간 안에 다섯 개의 가죽을 구하는 게 너무도 빠듯해진다.
“후, 토끼 때문에 소환까지 해야 되다니…….”
자조적으로 중얼거린 이안은, 결국 소환수들의 힘을 빌리기로 하였다.
“소환, 카르세우스! 소환, 뿍뿍이!”
그런데 다음 순간, 이안의 눈앞에 이어진 시스템 메시지들은 이안을 더욱 좌절시키고 말았다.
-소환수 ‘카르세우스’를 소환하실 수 없습니다.
-‘죽은 자’ 상태에서는 ‘죽은 자’ 상태의 소환수만을 소환하실 수 있습니다.
-소환수 ‘뿍뿍이’를 소환…….
‘죽은 자’ 상태에서는 똑같이 ‘죽은 자’상태인 소환수만을 소환할 수 있게 설정되어 있었고.
명왕과의 전투에서 사망 판정을 받은 것은 오직 이안뿐이었던 것이다.
“으아아!”
이안의 명계탐방은, 그야말로 첩첩산중이었다.
* * *
-이안의 명계탐방기
그래서 어떻게 했냐고?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저승토끼 자식이랑 아주 혈투를 벌였지.
비웃을지 모르겠지만, 난 지금 아주 진지하다고.
한 놈 잡는 데 걸린 시간이 거의 10분을 넘겼으니까…….
차라리 데스나이트 잡는 게 몇 배는 더 쉽겠다는 생각까지 들더란 말이지.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는 거야.
‘죽은 자’ 상태에서는, 아이템조차 드롭이 되지 않게 설정되어 있었으니까.
세 마리까지 가죽이 드롭되지 않았을 때는, 진짜 하늘이 노래지는 줄 알았다니까?
나는 기획 팀에서 토끼 가죽 드롭률에 장난질이라도 쳐 놓은 줄 알고, 이까지 뿌득뿌득 갈았어.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이거 시스템 메시지로 친절히 알려주기까지 했던 설정이더라고.
완전 멍청이가 따로 없었지.
어쨌든 멍청하게 토끼를 한 세 마리쯤 잡은 뒤에야 그걸 깨달은 나는, 그때부터 사체를 주워다 모르기 시작했어.
그렇게 토끼 다섯 마리 정도 모으는 데 걸렸던 시간이……. 아마 2시간은 훨씬 넘었었던 것 같아.
휴우.
정말 힘들었지…….
이게 난이도 F라고?
난이도 F라는 게 아마, ‘판타스틱’의 약자가 아니었을까?
정말 판타스틱한 난이도의 퀘스트였어. 이건…….
어쨌든 힘들게 토끼 다섯 마리를 전부 잡은 난, 푸줏간에 녀석들을 넘기고 데스 코인 다섯 냥을 얻을 수 있었어.
진짜 이 퀘스트를 제한 시간 5분 남기고 성공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니까?
그래도 이 퀘스트까지 마치고 나니까 드디어 내게 자유시간이 주어졌어.
명계를 돌아다니면서 ‘정보’라는 걸 얻을 시간이 생기게 된 거지.
다시 ‘타나토스 마을’에 도착한 나는, 정말 뻔질나게 명계를 돌아다니기 시작했어.
샤크란 아재와 타이탄 길드가 명계에 입성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대충 십사 일 정도.
나는 그때까지 최대한 많은 정보를 얻어야 했으니까.
물론 아재가 뮤칸 형아를 이기지 못했다면, 명계에 입성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말이야.
그런데 진짜 재밌는 건 뭔 줄 알아?
정작 샤크란 아재가 명계로 가는 문을 연 14일 뒤에, 나는 그들과 함께하지 않았다는 거야.
‘아케론’강을 건널 수 없었던 그들과 달리, 나는 타나토스 마을에 포털을 열 수 있었으니 말이야.
그래도 나를 제외한 다른 로터스 길드원들은 타이탄과 같이 움직이도록 했어.
오히려 아케론 강을 건너기 전의 명계에 초월 레벨을 올릴 만한 사냥터들이 더 많기도 했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분명 샤크란 아재가 날 엄청 의심했을 테니 말이야. (지금도 의심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게다가 ‘산 자’가 아케론의 안쪽. 즉, 에레보스에서 머문다는 것은, 엄청난 리스크를 감수해야 되기도 하고 말이지.
자. 그렇다면!
내가 이렇게 위험과 의심을 무릅쓰고 에레보스에 끝까지 남았던 이유는 뭘까?
원래는 샤크란 아재가 명왕을 이길 때까지 정보를 최대한 얻어놓은 다음에, 아재가 열어 준 문으로 들어가서 신나게 치고 나갈 계획도 세우고 있었는데 말이지.
하핫, 그 이유가 궁금하겠지?
하지만 그건, 조금만 더 생각해 본다면 너희들도 알 수 있을 거야.
혹시, 내가 명계에서 가장 찾고 싶었던 게 뭔지 기억나?
후훗.
바로 그걸 찾아 버렸거든.
생각보다 쉽게.
그리고 빠르게 말이지, 아마 ‘산 자’가 되어 에레보스를 뒤지기 시작한 지, 대충 열흘쯤 되었을 때일 거야.
그러니까 이건, 샤크란 아재가 명왕을 잡기 하루 이틀 정도 전쯤의 이야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