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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계로 향하는 길 (3)
* * *
솔직히 말하자면, 승산은 반반이었다.
‘아니, 사실 이길 수 있는 확률이 훨씬 높았지.’
물론 ‘사령의 포효’가 지속되는 동안 만큼은, 이안이 뮤칸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전무하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공격을 아예 도외시한 채 생존 스킬만으로 버텨 내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령의 포효’ 스킬의 지속 시간 동안만 살아남을 수 있다면, 그 뒤는 충분한 승산이 있었으니 말이다.
‘배리어, 강하. 공간 왜곡……. 생존기야 충분히 많으니까.’
하지만 이안은 그러지 못했다.
아니, 그러지 않았다.
우우웅-!
낮은 공명음과 함께, 어두워졌던 시야가 천천히 밝아졌다.
이어서 이안의 눈앞에 새로운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띠링-!
-명왕 뮤칸의 공격으로 사망하셨습니다.
-‘영혼의 속박’ 효과가 발동합니다.
-데스 패널티(24시간 접속 불가)가 적용되지 않습니다.
-경험치가 감소하였습니다.
-레벨이 1레벨 하락합니다.
-‘죽은 자’ 상태가 되셨습니다.
- *‘죽은 자’ 패널티 : ‘언데드’ 상태가 되어 사흘간 명계에 갇히게 됩니다.(언데드 상태인 동안, 경험치와 아이템을 획득할 수 없습니다.)
-다시 눈을 뜹니다.
시스템 메시지가 떠오르고 2초 정도가 지났을까?
까맣게 변했던 이안의 시야가 다시 조금씩 밝아지기 시작했다.
‘음, 여기는 명계인가?’
하지만 이안의 눈에 들어온 풍경은 너무도 익숙한 곳이었다.
지난 한달간 거의 살다시피 했던 곳.
팔카치오 왕성의 첨탑이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이다.
‘……!’
당황한 이안은 곧바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전투에서 승리한 명왕은 명계로 돌아갔는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자신을 둘러싼 수많은 유저들만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다음 순간, 이안은 자신도 모르게 헛바람을 들이킬 수밖에 없었다.
이안이 서 있는 바로 앞에, 본인의 시체가 누워 있었던 탓이었다.
‘아 씨, 깜짝아.’
유체이탈을 경험한다면 이런 기분일까?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은 이안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런 것까지 이렇게 현실감 넘치게 구현해 놓을 필요는 없잖아.”
괜히 한차례 투덜거린 이안은 바로 근처에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훈이를 향해 슬쩍 다가가 보았다.
소름 돋은 것은 소름 돋은 것이고, 그것과 별개로 호기심과 장난기가 발동했기 때문이었다.
‘훈이 녀석을 한번 놀려 줘 볼까?’
말 그대로 ‘유령’이 된 탓인지 유저들은 이안을 볼 수 없는 듯했다.
훈이의 뒤로 다가간 이안이 그를 향해 손을 훅 하고 뻗었다.
스르륵.
하지만 아쉽게도 이안의 반투명한 손은 훈이를 만질 수 없었다.
-‘죽은 자’ 상태에서는 물리력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쩝…….”
입맛을 다신 이안은, 주변을 다시 둘러보았다.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명계로 가는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안이 고개를 돌리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망자亡者 이안 로터스, 맞나?
이안의 귓전으로, 무미건조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귀를 통해서 들려왔다기보다는, 마치 머릿속 전체에 울려퍼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안은 반사적으로 그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고, 그 곳에는 거대한 검정색 갓을 쓴 의문의 사내가 나타나 있었다.
마치 투명한 계단을 밟고 내려오기라도 하듯 하늘에서 천천히 이안을 향해 내려오는 남자.
그리고 그를 발견한 순간, 이안은 저도 모르게 헛바람을 들이키며 중얼거렸다.
“헉, 저승사자!”
이안이 놀란 이유는 간단했다.
남자의 행색이 무척이나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검정색 갓과 더불어 새카만 도포를 걸친, 동양의 설화 속에 등장할 법한 익숙한 행색을 한 사내.
온몸으로 ‘나 저승사자요’를 외치고 있는 그 남자는, 이안의 반응에 오히려 흠칫 놀라는 표정이 되었다.
-그대는 나를 어찌 알지?
“에……?”
-네놈의 정체가 무엇이냐!
저승사자의 물음에, 이안은 어이없는 표정이 되어 반문했다.
“나 아저씨 처음 보는데요. 나 아저씨 몰라요.”
-방금 ‘저승사자’라고 하지 않았나.
“아, 그……렇죠?”
-내가 저승사자인 것을 어찌 알았느냐 묻는 것이다.
“그야…….”
-……?
“너무 저승사자같이 생겼잖아요.”
-……!
각자 어처구니없는 표정이 된 채로, 아무 말 없이 서로를 응시하는 두 사람. 아니, 귀신이었다.
먼저 다시 입을 연 것은, 저승사자 쪽이었다.
-흐음, 혹시 ‘전생을 기억하는 자’는 아니겠지?
“그게 뭔데요.”
-아, 아니다 인간. 일단 나를 따라오도록.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저승사자가 허공을 향해 한 번 손을 저었다.
그러자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우웅- 우우웅-!
공간이 일그러지며 생겨난 보랏빛의 차원의 포털.
멀뚱한 표정으로 그것을 보고 있는 이안을 향해, 저승사자가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손짓했다.
-여기로 들어가도록.
“저 안에 뭐가 있는데요?”
-죽은 자들의 안식처.
“명계인가요?”
-……!
저승사자의 무미건조했던 표정이 또 한 번 작게 경련했다.
하지만 곧 평정을 찾은 저승사자가, 이안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잔말 말고 일단 들어가도록.
“그, 그러죠 뭐.”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망설임 없이 포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보랏빛의 기운이 새어 나오더니 이안을 그대로 집어삼켰다.
잠시 그 모양을 지켜보던 저승사자는 복잡한 표정으로 천천히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수상한 놈이야.
그리고 저승사자까지 포털 안쪽으로 들어서자, 커다랗게 생성됐던 보랏빛 포털은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다.
* * *
띠링-!
-최초로 ‘명계’에 입장하셨습니다.
-‘죽은 자’ 상태이므로 최초 발견 보상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최초로 ‘명계’를 발견하셨습니다.
-명성을 10만 만큼 획득합니다.
-‘명계’ 에서는 ‘죽은 자’ 상태에서도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차원 타입, ‘중간계’에 입장하셨습니다.
-‘지상계’에서의 모든 능력치가 재구성됩니다.
-‘초월 레벨’이 적용됩니다.
완전히 새로운 차원계, 심지어 그중에서도 ‘중간계’ 타입의 차원에는 처음 입성하는 것이다 보니, 이안의 눈 앞에는 시스템 메시지가 수도 없이 떠올랐다.
‘흐으, 첫 중간계 입성을 이런 식으로 하게 될 줄이야.’
이안이 ‘일부러’ 명왕에게 죽은 데에는, 당연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극히 계산적이고 치밀한 것이었다.
‘타이탄 길드와의 계약을 불이행한 건 아니니까……. 난 잘못한 게 없다고.’
‘죽은 자’ 상태로 명계에 오게 되는 것.
이것은 사실, 제법 리스크가 있는 페널티였다.
24시간동안 로그인할 수 없는 죽은 자 페널티가 적용되지 않는다 뿐이지, 1레벨 다운 페널티는 똑같이 적용되니 말이다.
게다가 경험치나 보상을 얻을 수 없는 채로 명계에 갇혀 있어야 하는 시간이 사흘이나 되다 보니, 사실상 일반적인 데스 패널티보다 더 나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일반적인 경우에 한해’ 그런 것일 뿐.
‘나한텐 차원의 구슬이 있으니까…….’
이안은 한 번 가 본 곳에는 어디든 차원의 문을 열 수 있는 차원의 구슬을 가지고 있다.
맵이 밝혀져 있고 좌표만 있으면 언제든 차원의 문을 열어 이동할 수 있으니, 이안은 3일만 지나면 죽은 자 패널티 없이 이곳에 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명왕의 목걸이 재사용 대기시간은 십오 일. 만약 샤크란 아재가 명왕을 이길 수 있다고 쳐도, 내가 십이 일은 먼저 명계에 들어설 수 있게 된다는 말씀!’
그렇다고 해서 샤크란과의 계약을 어긴 것도 당연히 아니었다.
어쨌든 그에게도 ‘명계에 올 수 있는 기회’는 제공한 것이었으니까.
다만 아주 조금 미안하기는 했기 때문에, 메소드 연기를 펼친 것이었다.
최선을 다했지만 어쩔 수 없이 죽은 것으로 포장해 두어야 샤크란의 빈정이 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명왕이 강력해서 다행이였어. 명왕이 너무 약했더라면 연기도 할 수 없었을 테니 말이야.’
명왕을 떠올리며 한차례 씨익 웃어 보인 이안은 털레털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죽은 자’ 페널티를 받게 되는 사흘이라는 시간도, 허투루 보낼 생각은 전혀 없었으니까.
이안은 사흘 동안 명계를 샅샅이 뒤진 뒤, 최대한 많은 콘텐츠를 파악해 놓을 생각이었다.
‘최고 효율 사냥터, 선점할 수 있는 아이템. 알 수 있는 건 죄다 알아 놔야겠어. 차원의 포털을 열기 가장 좋은 위치도 좌표로 찾아 놔야겠고…….’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계획들을 떠올린 이안은, 히죽히죽 웃으며 전방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의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커다란 강과 작은 나룻배 한 척이었다.
“저걸 타면 되는 건가?”
중얼거리며 나룻배를 향해 조심스레 움직이는 이안.
그런데 잠시 후, 이안의 계획에 커다란 차질(?)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를 방해하는 인물이 나타난 것이다.
-어이, 인간. 어딜 그렇게 마음대로 움직이는 거야?
이안의 시선은 반사적으로 소리가 난 방향을 향해 움직였고, 그곳에는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표정이 된 저승사자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에? 아저씨는 여기 왜 있어요?”
-음?
“여기 저승 아니에요?”
-맞지.
“저승까지 데리고 왔으면, 아저씨 할 일은 끝난 거 아니에요?”
이안의 논리 정연한 의문에, 순간 저승사자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 그런가……?
그리고 그런 그를 향해 이안이 다시 말을 잇기 시작했다.
“아저씨 바쁘죠?”
-나?
“네. 나 말고도 죽은 사람 많을 거 아녜요. 그 사람들 데리러 가야지.”
이안의 말에 품 속에서 뭔가 누런 종이를 꺼내 든 저승사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다. 오늘 할 일이 좀 많긴 하군.
“이제 난 신경 쓰지 마시고, 다음 일 하러 가세요.”
-그, 그럴까?
“네. 난 저 배 타고 알아서 가 볼게요. 알겠죠?”
계획에 차질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저승사자를 설득한 이안은, 휘적휘적 걸음을 옮겨 나룻배에 올라탔다.
이어서 멍한 표정이 되어 있는 저승사자를 향해 손을 휘휘 저으며 크게 소리쳤다.
“수고하세요, 아저씨. 다음에 보면 밥이나 한 끼 해요!”
이안과의 대화로 무척이나 혼란스러워진 저승사자는 멍한 표정으로 그의 뒤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동안 배에 올라탄 이안은 서둘러 노를 저어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뭐, 뭔가 이상한데……?
벙 찐 표정으로 멀어지는 나룻배를 응시하는 저승사자.
그의 낮은 중얼거림만이 명계에 공허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