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왕의 목걸이 (1)
“읏차! 이제 슬슬 TV를 켜 볼까?”
반나절동안 한숨 푹 자고 일어난 나지찬은 개운한 표정으로 거실 쇼파에 걸터앉았다.
“이제쯤 리치 킹과의 전투가 시작됐겠지?”
팔카치오성.
그중에서도 내성의 설계는 나지찬이 속해 있는 기획3 팀에서 진행하였다.
때문에 나지찬은 내성 진입에서부터 리치 킹까지 얼마 정도의 시간이 걸릴지 잘 알고 있었다.
“일반적인 유저 기준으로 트라이하는 데 한 10시간 정도 걸릴 코스니까, 아무리 이안이라 해도 5시간 이상은 걸리겠지.”
이안과 리치 킹의 전투를 볼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 나지찬은 실실 웃으며 TV를 켰다.
결국 리치 킹을 상대하는 것은 루가릭스가 될 것이지만, 리치 킹의 결계가 발동하기 전까지는 이안과 샤크란의 활약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피이잉-!
익숙한 소리와 함께 켜지는 TV.
채널은 항상 YTBC에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따로 돌릴 필요는 없었다.
“너무 일찍 일어난 건 아니겠지?”
뒷머리를 긁적이며 TV에 시선을 고정시킨 나지찬.
하지만 다음 순간, 나지찬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리치 킹 에피소드가 송출되고 있어야 할 YTBC의 화면에, 웬 재미없는 게임 예능이 방송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놀란 나머지 나지찬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채널을 잘못 틀었나 싶어 여기저기 돌려 봤지만, 리치 킹 에피소드 방송이 끝났다는 사실만 확인할 수 있었다.
“뭔데? 설마 공략 실패라도 한 거야?”
당황한 나지찬은 서둘러 스마트폰을 켰다.
인터넷 기사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잠시 후, 인터넷 기사의 제목들을 확인한 그는 허탈한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리치킹 원정대, 단 한 번의 트라이로 에피소드 클리어 성공!
-중간계, 새로운 콘텐츠의 등장?
-어둠의 신룡, 루가릭스의 정체는?
-리치킹 샬리언, 그 또한 이안갓 앞에서는 한낱 잡몹이었을 뿐.
* * *
리치 킹 샬리언이 소멸한 뒤 황폐했던 시카르 사막의 북부지역에도 생명이 싹트기 시작했다.
새하얀 눈과 어둠으로 덮여 있던 설원에, 햇살이 내려앉기 시작한 것이다.
소식을 들은 수많은 유저들이 북부지역으로 입주하기 시작했으며, 그것은 NPC들도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사람이 살아갈 수 없는 환경이었던 어둠의 영토가, 활기를 얻기 시작했다.
“레드 루비 아뮬렛 팝니다! 옵션 최상급인 물건이에요! 시세보다 싸게 드립니다!”
“팔카치오 성 외곽에 멋진 집 지어드립니다! 로튠건설 사무실로 오세요!”
“가고일 사냥 가실 원거리 딜러 두 분 구합니다! 250레벨 이상인 분만 구합니다!”
“팔카치오 왕성 동문 앞에, 대장간 새로 오픈합니다!”
그리고 어둠의 영토 중에서도 리치 킹 샬리언이 기거하던 거대한 성인 ‘팔카치오 성’이 가장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팔카치오 성 안의 인프라가 로터스나 타이탄 왕국과 같은 거대 왕국의 수도 못지않게 잘되어 있었던 탓이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부분은 어둠의 영토였던 모든 영지들이 ‘중립 지역’이 되었다는 점이다.
개발사에서 이 지역을 불가침 지역으로 설정해 버린 것이다.
이 지역에서는 일체 PK가 불가능했으며, 심지어 그것은 타 종족 간에도 적용되었다.
물론 마족이 인간계에 올 일이 아직은 없겠지만, 마족이 온다 하더라도 이 지역에서는 서로 공격할 수 없는 것이다.
팔카치오 내성 안쪽.
왕성의 뒤편에 있는 커다란 공터에, 스무 명이 조금 안 되어 보이는 한 무리의 유저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타이탄 길드의 정예 유저들이었다.
무리의 가장 앞쪽에 서 있던 에밀리가 입맛을 다시며 입을 열었다.
“팔카치오성은 정말 탐나네요. 중립 지역만 아니었어도 꿀꺽 했을 텐데…….”
그 말에, 샤크란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로터스에서 가만히 있지 않았을걸?”
“뭐, 로터스와는 딜을 잘 했으면 됐겠죠.”
“하긴, 그거야 협상하기 나름이니까……. 잘 갈라먹었으면 되긴 했겠군.”
“그렇죠? 시설물 레벨도 참 마음에 들던데.”
“부질없는 얘긴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후후, 알겠어요, 마스터.”
대화를 나누던 샤크란이 피식 웃으며 바위에 걸터앉았다.
그러자 다른 인원들도 자리에 하나둘 주저앉는다.
그들은 이곳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흐음. 그나저나 이제 올 시간이 거의 된 것 같은데…….”
“그러게요. 왜 아직 코빼기도 안 보이는 거…….”
그런데 그때였다.
샤크란과 에밀리가 한마디씩 던지기가 무섭게 공터 한복판에 낮은 공명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우우웅-!
이어서 생겨나는, 낯익은 모양새의 포털.
“꼬마 녀석, 양반은 못 되는군.”
샤크란이 실소를 흘리며 다시 자리에서 일어섰고, 열린 포탈에서는 하나 둘 낯익은 얼굴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이는, 바로 이안이었다.
그는 샤크란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반가움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여, 아재. 푹 쉬고 오셨슴까?”
“짜식이, 거 끝까지 아재라고 그러네.”
“헤헤, 그렇다고 형님이라 하기엔…….”
“형이라니까, 인마.”
리치킹 에피소드를 계기로 제법 친해진 두 사람이 투닥거렸고, 그 사이 공터에는 열댓 명 정도 되는 로터스의 정예랭커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이안과 시선이 마주친 샤크란이 눈을 빛내며,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 꼬마. 약속을 이행할 시간이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씨익 웃었다.
“물론이죠.”
짧게 대답한 이안이, 로터스 길드원들에게 오더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길드원들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여서 둥글게 진영을 갖춰 섰다.
그리고 그것은 타이탄의 길드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로터스의 정예들과 타이탄의 정예들까지.
긴장한 표정이 된 총 서른 정도의 인원이, 이안과 샤크란을 중심으로 쭉 둘러섰다.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중립 지역 안에 들어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이들은 당장이라도 전투를 시작할 수 있게 만만의 준비를 해 놓은 상황이었다.
“자, 그럼 시작합니다!”
인벤토리에서 무언가를 꺼낸 이안이, 그것을 천천히 앞으로 들어올렸다.
보랏빛의 광휘가 찬란하게 뿜어져 나오는 세 조각의 투명하고 아름다운 보석들.
그것들은 점차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더욱 강력한 빛을 뿜어내기 시작하였다.
우웅- 우우웅-!
찬란한 빛과 함께, 세 조각의 파편들이 하나로 합쳐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퍼져 나온 보랏빛의 광휘들이 점차 아래로 빨려 들어가더니 커다란 하나의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
긴장한 표정으로, 정령왕의 심판을 고쳐 잡은 이안.
이어서 이안의 시야에, 새로운 시스템 메시지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띠링-!
-세 조각의 ‘명왕의 목걸이 파편’들을 전부 모으셨습니다.
-강렬한 망자亡者의 힘이 느껴집니다.
-차원의 기운이 역행하기 시작합니다.
-삶生과 죽음死의 경계. 명계의 수문장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꿀꺽.
고요한 가운데, 누군가의 침 삼키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없었으나, 어떤 강력한 기운이 밀려오고 있다는 것만큼은 모두가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10초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까?
고오오오!
작게 울리던 파동음이 점점 더 커지더니, 지진이라도 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공터가 크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을 타고, 시커먼 기운이 솟아올랐다.
스하아아-!
시커먼 운무가 거대한 덩어리를 만들며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 사이로 보랏빛의 기운들이 넘실거렸다.
샬리언이 등장할 때와 비슷한 느낌.
하지만 그 화려함이나 느껴지는 기운만큼은, 그 때와 비교도 할 수 없이 대단했다.
‘명왕이라……. 명계의 왕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으니, 중간계에서도 최상위 보스급 NPC겠지?’
두 눈을 반짝이며 시커먼 운무를 응시하는 이안.
그리고 잠시 후, 장내에 커다란 음성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크핫, 이렇게나 맑은 공기라니. 여기는 혹시 지상계인가?
걸쭉하고 묵직한 한 남자의 목소리.
이어서 그 목소리의 주인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시커먼 운무를 뚫고 나와 모습을 드러내었다.
칠흑같이 새카맣지만, 흑진주를 연상케 할 정도로 화려한 광택이 뿜어져 나오는 묵빛 갑주.
온몸에 흑갑을 두른 남자는, 마치 삼국지에나 등장할 것 같은 동양풍 용장勇壯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굳이 삼국지의 등장인물과 비교하자면, 장비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그와 눈이 마주친 이안이 한 걸음 앞으로 옮겨 그를 향해 다가갔다.
이어서 이안은 흥미진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당신이 명왕입니까?”
그리고 그 목소리를 들은 남자의 시선이 이안을 향해 휙 하고 움직였다.
-오호라, 네놈이로구나.
이어서 생각지도 못했던 대답을 들은 이안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예……?”
-이 나를 이승으로 불러낸 놈 말이다.
“아, 그거라면 제가 맞습니다만…….”
-흐음…….
“그나저나 제 질문에 대답 좀 해 주면 안 됩니까?”
-뭐?
“명왕 맞냐구요.”
-아하, 난 또 뭐라고.
가슴을 쭉 내민 남자가, 흉갑을 텅텅 치며 씨익 웃었다.
-맞다. 내가 바로 명계의 칠대 명왕, 뮤칸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 이안과 대화를 하던 명왕 뮤칸의 몸이 돌연 시커먼 연기에 휩싸였다.
“……!”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안의 바로 앞에도 까만 연기가 피어올랐다.
“조심!”
어떻게 된 일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까만 연기와 함께 뮤칸이 순간 이동한 것이다.
반사적으로 창대를 들어, 방어자세를 취한 이안.
이어서 이안의 바로 앞에 나타난 뮤칸이 왕방울만 한 눈을 부라리며 이안을 여기저기 살폈다.
-흐음, 이상한데…….
“뭐, 뭐가 말입니까?”
-너는 흑마법사가 아니군.
“그렇습니다.”
-하지만 네게서 망자의 냄새는 느껴져.
순간적으로 이해하지 못한 이안이 살짝 갸우뚱했지만, 금방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아, 퓨전 클래스 때문이구나.’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전 어둠의 소환술사니까요.”
-오호……!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는 듯, 뮤칸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 발짝 물러났다.
그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안타깝다는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안타깝게 되었어.
“또 뭐가요.”
-파편을 어떻게 모아서 날 불러낸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난 반쪽짜리 어둠에게 힘을 줄 수 없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데요?”
이안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리고 그 반문에, 뮤칸 또한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나의 힘을 얻고자 날 소환해낸 것이 아니었단 말이냐?
“아닌데요?”
이안의 옆에 있던 훈이가 손을 번쩍 들며 앞으로 튀어 나가려 했으나, 이안에 의해 저지되었다.
“나, 내가 얻을래!”
“시끄러 인마.”
그 모습을 본 뮤칸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네놈들, 뭐 하는 놈들이냐? 그럼 대체 난 왜 부른 거야?
이안은 발버둥치는 훈이를 간단히 제압하여 유신에게 맡겼다.
그리고 뮤칸을 향해 다시 시선을 돌렸다.
“내가 명왕, 당신을 부른 이유는…….”
잠시 뜸을 들인 이안이,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명계로 가는 길을 열기 위해서요.”
이안의 말이 끝난 그 순간.
마치 세상이 정지하기라도 한 듯, 모두의 동작이 일시에 멈췄다.
다만 유일하게 멈추지 않은 것은 명왕 뮤칸이었다.
-크핫, 크하하핫!
뭐가 그리 유쾌한지, 연신 광소를 터뜨리는 뮤칸.
그리고 잠시 후, 완전히 분위기가 달라진 뮤칸이 묵직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저승에 가고 싶은 인간을 만나게 될 줄이야…….
“…….”
-명계에 갈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싶은가?
“그렇습니다.”
이안의 대답을 들은 뮤칸이 씨익 웃으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명계에 갈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지.
“……?”
-첫째, 뒈지면 된다. 내가 이 언월도를 네 심장에 쑤셔 박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명계에 갈 수 있겠지.
뮤칸은 언월도를 위협적으로 휘두르며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이어진 그의 다음 말은, 이안과 일행을 더욱 긴장하게 할 만한 것이었다.
-둘째, 날 이기면 된다. 나와 싸워 이기면, 내가 명계에 직접 데려다 주도록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