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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레벨의 비밀 (2)
* * *
카일란에서는 몬스터의 레벨이 같다고 해서 전투 능력까지 같다고 단정 지을 수 없다.
몬스터마다 제각각 다른 티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 등급부터 시작해서 신화 등급까지.
티어 하나가 올라갈 때마다 전투력이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하기 때문에, 일반 등급과 신화 등급의 경우 그 차이가 거의 두 배에 가까웠다.
때문에 아무리 레벨이 같다고 해도 리치 킹의 하수인들과 리치 킹은 분명히 전투력에서 차이가 날 것이다.
그것을 정확히는 알 수 없겠지만, 이안은 그 차이가 아마 전설 등급과 신화 등급 정도의 차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정도의 차이라면, 리치 킹을 처치하는 것은 너무나도 쉬울 것이었다.
‘이거……. 좋아해야 하는 건가?’
이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리치 킹의 면면을 살펴보았다.
차라리 샬리언의 레벨이 예상했던 대로 550정도였다면 망설임 없이 덤벼 보았을 텐데, 생각지 못했던 상황이 닥치자 오히려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함정’의 냄새가 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움직이지 않는 것은 이안뿐이 아니었다.
원정대 전체가 진영만을 유지한 채 천천히 샬리언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물론 이안과 샤크란의 오더가 떨어지지 않은 탓도 있었지만, 그들 또한 의외의 상황에 당황한 기색이었다.
스하아아아-!
기괴한 소리가 울려 퍼짐과 동시에, 허공에 떠 있던 샬리언의 신형이 사뿐히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그리고 그의 시커먼 두 눈에서 시뻘건 섬광이 뿜어져 나왔다.
“가소로운 인간 놈들, 지상계의 하찮은 힘만 가지고 이 몸에게 도전한 것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고오오오.
이어서 샬리언의 주변으로 강력한 어둠의 기운을 담은 광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세상 모든 것을 파괴해 버리기라도 하겠다는 듯 엄청난 기세로 휘몰아치는 어둠의 소용돌이.
원정대는 그 광풍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빠르게 진영을 뒤로 물러 세웠고, 유저들은 더욱 긴장한 표정이 되었다.
광역 공격에 살짝 스친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피해가 들어오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눈썰미가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 공격의 수준이 하수인들의 그것과 차원이 다르다는 것 정도는 알아챌 수 있었다.
그리고 이안의 표정 또한 지금까지와는 달라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이들과는 달리 긴장이나 놀람의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안은 재미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안은 리치 킹의 대사에서 흥미로운 부분을 발견한 것이다.
‘지상계의 하찮은 힘이라고?’
이안은 차원계에도 등급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안다.
일전에 루가릭스로부터 중간계의 존재를 들으면서, 차원계의 전체적인 시스템이 어떤 식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간계와 마계 등이 속해 있는 지상계.
용천과 명계 등 한 단계 높은 등급의 차원계들이 속해 있는 중간계.
마지막으로 신들의 차원이라는 천상계까지.
이안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저 말은, 본인의 힘이 지상계의 수준을 넘어섰다는 이야기겠고……. 그렇다면 중간계의 힘이라도 얻었다는 건가?’
하지만 의문은 쉽게 가시지를 않았다.
이안의 지식에 의하면, 중간계의 힘은 지상계에서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안은 틈날 때마다 루가릭스에게 중간계에 대해 물어보았었고, 그때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었었다.
이안은 한 달쯤 전, 루가릭스와 했던 대화를 떠올려 보았다.
* * *
“루가릭스, 넌 중간계에서 얼마나 강한 거야?”
“얼마나 강하냐니?”
“그러니까, 중간계 내에서 네 전투력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를 묻는 거야.”
이안의 질문에, 루가릭스는 사뭇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본인도 지금껏 생각해 본 적 없었던 부분이었는지, 그는 제법 오랜 시간 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글쎄…….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아마 평균 정도 수준은 될걸?”
“그래?”
“응. 다른 차원계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용천에서 만큼은 평균 이상이라고 할 수 있지.”
“그……렇군.”
“근데 그건 왜 묻는 건데?”
루가릭스의 반문에, 이안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그리고 그것은 본의 아니게 루가릭스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흠, 생각보다 중간계의 수준이 낮은 것 같아서.”
“뭐, 뭐랏?”
“아니, 그렇잖아. 솔직히 네가 강하기는 해도, 내가 소환수들 다 동원하면 상대 못 할 정도는 아니거든.”
“우씨!”
“그런데 네가 중간계에서도 중간 수준이나 된다면……. 중간계가 내 기대보다 너무 약한걸?”
이안의 일목요연한 근거 제시에 얼굴이 빨개진 루가릭스가 씩씩거렸다.
루가릭스는 뭔가 억울한 부분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야, 이안 이 바보야.”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엘카릭스가 ‘바보’라는 단어에 불쑥 끼어들었다.
“우리 아빠는 천재거든!”
“아우 씨이, 그게 아니라고. 아무튼!”
그리고 루가릭스가 씩씩거리는 것을 지켜보던 이안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루가릭스 저 녀석이 떼쟁이 초딩이기는 해도, 근거 없는 주장을 하는 녀석은 아닌데…….’
흥미가 생긴 이안이, 슬쩍 루가릭스를 떠보기 시작했다.
“그게 아니면 뭔데?”
“으으!”
“내가 모르는 뭔가 있는 거야?”
그리고 루가릭스는 이안이 던진 미끼를 덥썩 물었다.
“당연하지! 내가 중간계의 힘을 사용하면……!”
“오호?”
“모, 몰라! 아무튼 아니야. 나는 이안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하다고!”
이안은 씨익 웃으며, 루가릭스에게 슬쩍 다가갔다.
녀석이 미끼를 물었으니, 이제 슬슬 구슬려 건져 올리기만 하면 될 터였다.
“에헤이, 중간계의 힘이 뭔지도 설명해 줘야지.”
“그, 그건 말할 수 없어……!”
“왜 말할 수 없는데?”
“중간계의 이야기를 지상계의 존재에게 함부로 발설하면 안 된단 말야.”
“그래? 그렇다면 믿어줄 수 없는걸?”
“……!”
“너한테 숨겨진 대단한 힘이 있다는 사실 말이야.”
“그냥 좀 믿어 주면 안 될까?”
“응. 그냥은 안 돼. 네가 그 중간계의 힘에 대해 이야기 해 주기 전까지는, 네 말을 믿을 수 없지.”
“크윽!”
이안이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너 이미 나한테 중간계에 대한 이야기 많이 했잖아.”
“그, 그렇긴 하지.”
“이거 하나 더 해 준다고 해서, 달라질게 뭐 있어?”
“그렇지만……!”
“얼른 얘기해 봐. 그렇지 않으면, 난 네가 중간계의 말단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으니까.”
“말단이라니! 절대로 아니지 그건!”
루가릭스는 여느 때처럼 이안에게 완벽히 넘어왔고, 중간계의 힘이라는 것에 대해 술술 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당장 도움이 되는 내용은 아닐지언정 충분히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상위 차원계에서 얻은 힘은 하위 차원계에서 제대로 사용할 수 없다는 거잖아?’
루가릭스의 설명은 간단했다.
‘자격’이 있는 자가 중간계에 들어서는 순간 ‘중간자’라는 호칭을 얻게 되는데, 그와 동시에 초월적인 힘을 수련할 수 있게 된다고 했다.
그리고 그 힘은 지상계에서 얻을 수 있는 힘보다 훨씬 막강하지만, 하위 차원계에서는 힘의 대부분이 봉인된다는 것이다.
해서 본인이 강력한 초월적인 힘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계에서는 다 사용할 수 없다고 이야기하였다.
‘신들이 인간계에서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보면 되겠군.’
카일란의 시스템 속에 숨겨져 있는 또 하나의 설정을 찾아낸 이안은 무척이나 기분 좋은 표정이 되었다.
‘중간자. 그리고 초월적인 힘이라……. 이거, 중간계에 빨리 넘어가고 싶은데?’
자격이라는 게 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그 또한 중간계에 가 보면 알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리치 킹을 잡고 명계로 넘어가 보면 모든 걸 알 수 있게 되겠지.’
루가릭스에게서 또 한 번 정보를 뜯어낸 이안이, 흡족한 표정으로 씨익 미소 지었다.
* * *
리치 킹 샬리언과 눈이 마주친 이안이 천천히 상념에서 깨어났다.
‘저 녀석, 여기서 중간계의 힘을 사용하려고 하는 건가? 하지만 루가릭스의 말대로라면, 제대로 된 힘을 사용할 수 없을 텐데?’
하지만 다른 가정은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방금 리치 킹이 내뱉은 대사와 500에 불과한 그의 레벨을 생각해 보았을 때 중간계의 힘이 아니라면 저렇게 자신만만한 대사를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중간자로서의 힘을 여기서 쓸 수 있는 방법이라도 아는 건가?’
그런데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안은 순간적으로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지금까지 간과하고 있었던, 하나의 사실을 깨달아 버린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루가릭스도 500레벨이었잖아?”
이안은 자신도 모르게 육성으로 내뱉고 말았다.
옆에 있던 길드원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안은 지금 거기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루가릭스뿐만이 아니야. 전륜성왕도 그렇고, 이리엘도 그렇고……. 마계와의 전쟁에서 성왕이 내려 보냈던 지원군, 천룡수호대장 백휘수의 레벨도 500이었어.’
게다가 곰곰이 떠올려 보니, 마계에서 처음 만났을 때 샬리언의 레벨도 정확히 500이었다.
이쯤 되자 이안의 짐작은 추측이 아니라 거의 확신이 되어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만렙! 500레벨이 만렙이었던 거야! 당연히 그게 성장의 끝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인간계에서 올릴 수 있는 최고의 레벨은 500레벨이 끝이었어!’
머릿속에서 차례차례 퍼즐이 맞춰지면서, 이안은 순간적으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리치 킹의 레벨이 500에 불과한 건 이상한 게 아니라 당연한 거였네. 아무리 놈이 강하더라도 시스템 상에서 정해져 있는 최고 레벨을 벗어날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야.’
척-!
생각이 전부 정리된 이안이 리치 킹을 향해 붉은 검을 겨누었다.
그가 자신만만한 데에는 분명 어떤 근거가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더 이상 망설일 이유는 사라진 것이다.
적어도 가장 의문스러웠던 ‘500레벨의 비밀’은 거의 완벽하게 풀었으니 말이다.
‘중간계의 힘을 어떻게 사용한다는 건지는 몰라도, 일단 부딪쳐 봐야 답이 나오겠지.’
저벅저벅.
진영 안쪽에서 리치 킹과 마주보고 있던 이안이 천천히 걸음을 떼어 샬리언에게로 다가갔다.
그러자 샬리언이 씨익 웃으며, 이안을 향해 입을 열었다.
“가장 먼저 망자가 되어 나의 권속으로 들어오고 싶은 녀석이 이안, 네놈인가.”
샬리언의 말에 피식 웃은 이안이 다시 한 번 검을 겨누며 담담하게 대꾸했다.
“부하들은 죄다 잃어버린 주제에. 입은 그만 털고, 이제 행동으로 보여 주라고.”
여느 때처럼 자존심을 살살 긁는 도발을 시전하는 이안.
그리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샬리언의 기세가 또 다시 일변했다.
“건방진 놈, 그 말, 곧 후회하게 될 것이다!”
말이 끝나자마자 샬리언의 신형이 다시 허공으로 부유했다.
그리고 뼈만 남은 앙상하고 길쭉한 그의 양손에서 보랏빛의 기운이 넘실대기 시작했다.
그것을 확인한 이안이 빠르게 오더를 내렸다.
“어떤 공격 마법을 캐스팅할지 모릅니다! 마법병단, 실드 마법 캐스팅 준비하세요!”
이안의 오더가 끝나기 무섭게 여기저기서 공명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고…….
우웅- 우우웅-!
샬리언의 양손에서 뻗어 나온 어둠의 기운은 점점 더 큰 범위로 퍼져 나갔다.
‘여차하면 닉이라도 동원해서 지워 버려야 할 마법인가?’
날카로운 눈으로 샬리언의 마법을 관찰하는 이안.
그런데 그때, 원정대 유저들의 눈앞에 생각지 못했던 시스템 메시지들이 떠올랐다.
띠링-!
-리치 킹 ‘샬리언’이 금단의 차원 마법을 펼치기 시작합니다.
-‘팔카치오 왕성’ 던전 전역에 ‘어둠의 결계’가 내려앉습니다.]
-‘팔카치오 왕성’ 던전의 차원 타입이 일시적으로 ‘중간계’로 변경됩니다.
그리고 그 메시지의 의미를 이해한 이안의 두 눈이 커다랗게 확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