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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카치오 왕성의 전투 (1)
‘리치 킹’ 에피소드의 전체적인 난이도는 카일란 한국서버 유저들의 평균 수준에 비해 무척이나 높게 설정되어 있었다.
처음 유저들이 에피소드를 접했을 때, 언데드들의 레벨대를 보고 적잖이 당황했을 정도.
하지만 표면적으로 보았을 때 그렇다 뿐이지 실질적인 난이도는 사실 적절하게 책정되었던 것이 맞았다.
에피소드를 구성하는 몬스터들의 레벨이 높기는 하지만 그들이 전부 ‘언데드’라는 종족으로 한정되어 있었으며, 공격타입 또한 ‘어둠’ 속성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자면, 한 가지 타입으로만 적들이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공략이 용이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게다가 ‘언데드’라는 종족은 타 종족에 비해 강점과 약점을 뚜렷하게 가지고 있었고, 때문에 게임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랭커들과 평범한 유저들 사이의 공헌도 격차가 많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여기, 에피소드의 마지막 전장인 팔카치오 내성에서도 랭커들은 놀라운 활약을 보여 주고 있었다.
* * *
-어, 어어! 소울 브레이크! 이안이 위험합니다! 소울 브레이크가 차징되었어요!
-이번에는 아무리 이안이라고 해도 피할 수 없을 것 같은데요?
-돌진기, 순간 이동기. 전부 재사용 대기 시간이 돌아오지 않았을 거예요! 공간왜곡도 방금 전에 사용한 것 같고요. 아, 설마 이안, 게임아웃 당하나요?
-조금만 더 버티면 되는데요!
죽음의 기사단장 샤웰론.
네임드 몬스터인 샤웰론의 거대한 도끼가 지면을 있는 힘껏 찍어 내렸다.
그리고 갈라진 지면으로부터 강렬한 어둠의 기운이 뿜어져 올라왔다.
어둠 속성의 강력한 CC기인 ‘어둠의 속박’에 이어 최강의 단일 공격 기술 중 하나인 ‘소울 브레이크’가 터진 것이다.
그 대상은 바로 원정대 전체의 리더라고 할 수 있는 유저인 이안.
누가 보아도 이안이 게임아웃될 것처럼 보이는 이 상황에 중계진의 입에서 탄식이 새어나왔다.
-아, 이안이 여기서 아웃되면 상황이 급격히 나빠지거든요!
-하인스 님, 이안이 저걸 맞고 살아남을 수는 없겠죠?
-그건…… 없다고 봐야 합니다. 계수가 거의 2천에 가까운 단일 기술인데, 시전하는 기사단장 샤웰론의 레벨이 495거든요. 거기에 어둠의 광폭화까지 걸려 있으니……. 모르긴 몰라도 대미지 천만 정도는 가뿐하게 넘길 것 같습니다.
-아, 그렇군요. 다크문이 떨어지기까지 이제 1분도 채 남지 않았는데, 마지막 순간에 이안이 치명적인 실수를 했어요!
-사실 실수라고 하기도 좀 애매하긴 합니다.
-그것도 그러네요. 방금 상황에서는 어둠의 속박을 피할 방법 자체가 없었으니까요.
소울 브레이크는 단일 공격 기술이지만, 그와 동시에 논타깃 스킬이다.
무기를 있는 힘껏 찍어 내려 바닥에 균열을 만들고, 그 균열 사이로 뿜어져 나온 어둠의 기운이 적을 향해 쏘아지는 방식이었다.
덧붙이자면 투사체의 속도가 무척이나 느려서, 사실상 CC기와 연계하는 것이 아니라면 맞추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단점이 있다.
그런데 이 스킬에는 재밌는 특징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피격당한 대상에 대미지가 적용되는 방식이었다.
소울 브레이크의 최종 피해량이 어둠의 기운에 담겨 있는 마법 공격력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강하게 바닥을 찍어 내렸느냐 따라 결정된다.
즉, ‘마법 피해’를 입히는 것처럼 보이는 스킬인 소울브레이크의 피해량이, 사실은 시전자의 ‘마법 공격력’이 아닌 ‘물리 공격력’에 비례한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안은 소울 브레이크의 매커니즘을 정확하게 꿰고 있었다.
때문에 여유로웠다.
중계진의 말처럼 거의 모든 스킬들이 재사용 대기 시간에 걸려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말이다.
‘나한테 쓸 스킬이 없으면, 도움을 받으면 그만이지.’
어둠의 속박에 발이 묶인 채 이안은 빠르게 오더를 내리기 시작했다.
오더를 구체적으로 내릴 시간도 없었지만, 그럴 필요도 없었다.
오더를 내리는 대상이 바로, 이미 수없이 합을 맞춰 온 이안의 하수인들(?)이었으니 말이다.
“유신!”
“오케이! 전사의 인내!”
이안의 입이 떨어짐과 동시에, 유신의 손에서 기다렸다는 듯 스킬이 발동되었다.
그리고 유신의 손바닥에서 황금빛의 광채가 뿜어져 나와 이안의 신형을 순식간에 휘감았다.
모든 마법 공격의 피해를 50퍼센트만큼 흡수해 버리는, 전사 클래스 최상위의 버프 스킬이 발동된 것이다.
우우웅-!
이안의 주변으로 퍼져나가는, 은은한 황금빛 광채!
그리고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애초에 단순한 버프스킬 하나로 벗어날 수 있는 위기였더라면, 중계진이 호들갑을 떨지도 않았으리라.
“훈!”
이안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 무섭게 샤웰론의 후방에 나타난 훈이가 디버프 마법을 발동시켰다.
“사후경직死後硬直……!”
사후경직은 디버프 스킬인 동시에 버프 스킬이다.
적이건 아군이건 관계없이 ‘언데드’를 대상으로만 발동시킬 수 있는 스킬로, 대상의 이동속도와 물리 공격력을 50퍼센트만큼 하락시키는 대신 방어력을 100퍼센트만큼 증가시키는 스킬이었던 것이다.
시전자의 공격력은 절반으로 떨어뜨려 버린 다음, 피격자는 피해를 흡수하는 스킬을 사용하여 받게 될 피해량을 최소화시키는 전략이었다.
‘소울 브레이크’라는 스킬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멋진 파티플레이라고 할 수 있었다.
본래 소울 브레이크의 피해량이 1천만 가량이었다면, 버프와 디버프의 중첩으로 250만 이하까지 떨어뜨려 버린 것이다.
또다시 중계석에서는 반쯤 쉬어 버린 하인스의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럴 수가! 이건 정말 미친 순발력이에요!
여기에 마지막으로, 이안의 머리 위에 새하얀 빛이 떨어져 내렸다.
심지어 이번에는 이안의 입이 채 떨어지기도 전이었다.
“대신관의 방패!”
허공에서 새하얀 날개를 펄럭이며 이안을 향해 손을 뻗고 있는 아름다운 여인.
그녀는 바로, 아직까지도 사제 랭킹 1위를 지키고 있는 레비아였다.
원정대가 전부 내성 진입에 성공한 이후 레비아와 레미르 또한 선봉에 합류한 것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안의 심장으로 어둠의 기운이 쏟아져 들어왔다.
콰쾅- 쾅-!
하지만 이안의 생명력 게이지는 심하다 싶을 정도로 그대로였다.
-‘전사의 인내’ 스킬을 발동시키셨습니다.
-5초 동안, 모든 ‘마법’속성의 피해가 50퍼센트만큼 감소합니다.
-원정대원 ‘레비아’가 ‘대신관의 방패’ 스킬을 발동시켰습니다.
-7분 30초 동안 ‘대신관의 방패’ 버프가 지속됩니다.
-마법 방어력이 30퍼센트만큼 증가합니다.
-방어 타입이 ‘신성’으로 변환됩니다.
-죽음의 기사단장 ‘샤웰론’으로부터,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습니다!
-생명력이 193,098만큼 감소합니다!
1천만에 육박할 것으로 예상했던 대미지가, 한순간에 50분의 1로 줄어 버리는 기적이 일어났다.
마지막에 덧입혀진 ‘대신관의 방패’ 효과로 인해 피해량이 또 한 번 줄어든 것이다.
마법 방어력 30퍼센트 증가 효과도 무시할 수 없었지만, 방어 속성을 변환시킨 것이 가장 주요한 부분이었다.
어둠 속성의 공격에 가장 적은 피해를 입는 것이, 바로 이 ‘신성’ 타입의 방어 속성이었으니까.
그리고 YTBC의 중계 화면은 이안의 시점에서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시청자들도 떠오른 시스템 메시지를 전부 확인할 수 있었다.
때문에 시청자 게시판에서는 갖가지 반응들이 난무했다.
-ㅋㅋㅋㅋㅋ하인스 이제 해설 접어야 되는 거 아님? 대미지 겨우 20만 들어왔구만, 1천만이라닠ㅋㅋ
-뭐지? 저럴 리가 없는데? 내가 280레벨 전사 클래슨데, 소울 브레이크 저거 내가 써도 100만 가까이 딜 뽑히는 스킬임.
-쯧, 윗분들. 겜알못 티 내지 말고 가만히들 있는 게 좋을 듯.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갈 텐데…….
-그러게요. 저거 사실상 딜이 20만이나 나온 게 기적인 상황이에요. 사후경직으로 절반 까고 전사의 인내로 나머지에서 절반 또 흡수해 버린 상황에서 대신관의 방패까지 발동됐는데……. 아마 님들이 쓴 소울 브레이크였으면, 대미지 5천도 안 들어갔을 듯.
-캬, 그나저나 쟤들은 오늘도 입카일란 현실에서 구현하네. 저게 가능한 플레이였다니……. ㄷㄷ
-그런데 친구들, 이건 이안이 대단한 거냐, 서포팅이 대단한 거냐?
-글쎄. 이번에는 서포팅발 아님? 이안은 그냥 가만히 있었잖아.
-맞아. 이번엔 이안 빠들도 인정해야 한다고.
-가만히 있었다뇨? 우리 이안갓이 오더 내리신 거 못 봤음?
-그냥 이름만 부르던데, 그게 오더였음?
-ㅋㅋ그 정도는 나도 하겠다.
아마 개선되기 전의 카일란 방송이었더라면, 시청자들의 대부분이 어떻게 된 상황인지 이해하지 못하였을 것이었다.
너무 찰나지간에 모든 상황이 지나가버렸으니 말이다.
하지만 유저의 화면이 스크린에 그대로 공유되면서, 카일란 좀 안다 하는 유저들은 금세 어찌 된 상황인지 분석해 내었다.
덕분에 카일란 방송이 더욱 재밌어졌음은 말할 것도 없는 사실이었다.
-말씀드리는 순간, 후방에서 접근한 샤크란이 샤웰론을 향해 달려듭니다!
-세일론, 에밀리, 거기에 레미르까지! 쉴 새 없이 샤웰론을 몰아붙이고 있어요!
-와, 그나저나 네임드 몬스터라 그런지 샤웰론은 정말 스텟 깡패네요. 랭커들이 저렇게 몰아붙이는데도, 생명력이 90퍼센트 밑으로 떨어지질 않네요.
-어차피 원정대의 목적도 시간을 끄는 걸 겁니다. 이제 잠시 후면 ‘검은 달’이 떨어질 테니까요.
-그렇습니다! 앞으로 15초 남았어요! 이제 13초! 12, 11…….
중계진의 카운트다운에 맞춰, 검붉은 하늘에 떠 있던 까만 초승달이 점점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에 따라 시커멓던 하늘이 조금씩 밝아지기 시작했다.
-3……. 2……. 1……!
목청이 터져라 카운트를 외치는 하인스.
그리고 잠시 후, 원정대 모든 유저들의 눈앞에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띠링-!
-‘왕의 권능’이, 힘을 잃었습니다.
-다크 문이 하늘에서 떨어집니다.
-‘어둠의 군단’ 병사들의 ‘어둠의 광폭화’ 상태가 해제 되었습니다.
-‘어둠의 군단’ 병사들이 ‘탈진’ 상태에 빠졌습니다.
-‘어둠의 군단’ 병사들의 전투 능력이 25퍼센트만큼 감소합니다.
이어서 전장 한복판에 이안의 힘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파티 타임Party Time!”
옆에 있던 훈이가 슬쩍 태클을 걸었지만, 기분이 좋았기 때문에 아량을 베풀기로 했다.
“형, 영어도 할 줄 알아?”
“시끄럽고, 언데드나 잡아.”
500레벨에 육박하는 수많은 언데드들을, 모조리 학살할 수 있는 시간.
이안의 양쪽 입꼬리가 귀에 걸렸음은 물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