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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치 킹과의 조우 (5)
* * *
짙은 어둠이 깔려 있는 팔카치오 왕궁.
그 중심부에 있는 웅장한 공간의 한복판에 보랏빛의 기운이 일렁였다.
우우웅-!
그리고 잠시 후, 보랏빛의 광원을 뚫고 시커먼 그림자가 하나 나타났다.
허공에서 떨어져 내린 그림자는 내려앉는 즉시 무릎 꿇고 부복하며 다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왕이시여, 적들이 내성 안쪽으로 진입하고 있나이다. 적들의 기세가 예상보다 강력합니다!”
그러자 그 목소리가 공간 여기저기에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왕성의 내부가 드래곤의 레어를 연상케 할 정도로 거대한 공간이다 보니, 그 울림은 한참이 지난 뒤에야 잦아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듣기 거북한 소리와 함께 거대한 왕좌가 천천히 회전했다.
끼익- 끼기긱-!
이어서 그 왕좌에 앉은 거대한 그림자로부터 칼칼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호들갑 떨지 말라. 내 이미 알고 있으니.”
펄럭-!
새카만 흑빛의 왕좌에서 일어난 샬리언의 신형이 천천히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러자 그의 망토가 바람에 날리며 한차례 크게 펄럭였다.
사실 그의 하수인이 보고하기 전부터 그는 바깥의 상황을 알고 있었다.
외성이 뚫렸을 때는 곧바로 알아채지 못하였지만 내성이 뚫린 순간 적들의 침입을 알아챈 것이다.
내성의 안쪽은 샬리언의 힘이 닿는 완벽한 권역圈域이었으니까.
죽은 자들의 땅을 짓밟는 불쾌한 기운들을 느끼며, 샬리언은 이를 뿌드득 갈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얄쌍하게 생긴 한 마족이 떠올라 있었다.
‘후우, 멍청한 마족 놈을 믿는 게 아니었나.’
마신 데이드몬이 게이트를 통해 보내준 지원군 중 유일하게 살아남아 자신이 내린 임무를 완수했던 마족인 림롱.
분명 그는 샬리언이 보기에도 뛰어나 보이는 인재였고, 그렇기에 스스럼없이 정예부대를 내어 주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놈이 내성 바깥으로 나가고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모든 방어선이 뚫려 버렸다.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놈이 배신하여 성문을 열어 주기라도 한 것이 아니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상관없지. 나의 권능 아래 전부 무릎 꿇리면 그 뿐.’
구구궁-!
망토를 펄럭이며 허공 높이 솟아오른 샬리언이 두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러자 그의 바로 앞에, 세 구의 그림자가 불쑥 솟아올랐다.
“부르셨나이까, 왕이시여.”
“신, 록페르. 왕의 명을 받들겠나이다.”
“죽은 자들의 왕을 뵙나이다.”
동시에 샬리언의 앞에 부복하며 고개를 조아리는 세 명의 그림자들.
그들을 내려다본 샬리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동시에 그의 주변으로 시커먼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왕의 권능으로 명하노니…….”
그의 말이 시작되자 왕성 전체가 가늘게 진동했다.
쿠쿵- 쿠구궁-!
“내 땅 위에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멸하라!”
그리고 잠시 후, 성안에 깔려 있는 어둠을 뚫고 수많은 어둠의 그림자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 * *
팔카치오 성은 콜로나르 대륙의 수많은 요새들 중에서도 손가락에 꼽을 만큼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외성과 내성 사이의 공간마저 전부 방어 시설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으니, 사실 ‘무식한’ 구조라고 이야기하는 게 더 옳은 표현일 수도 있겠다.
평범한 성의 경우, 외성과 내성 사이의 공간 또한 상업지역과 주거지역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팔카치오 내성의 안쪽은 ‘복잡함’과 완벽히 상반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따로 방어 시설이 있기는커녕 어떤 건축물조차 보이지 않는 황량한 평원이었으며, 다만 그 위로 수많은 비석碑石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하늘을 찌를 듯 웅장한 위용을 지닌 왕성이 뾰족하고 높게 솟아 있었다.
그 모습은 무척이나 기이해서 보는 이들로 하여금 소름이 돋게 할 정도였다.
“휘유, 드디어 샬리언과의 재회인가…….”
멀찍이 보이는 샬리언의 왕성을 확인한 이안이, 긴장된 표정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그러자 훈이가 그의 뒤에 바싹 따라붙으며 겁에 질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으, 여기 뭔가 좀 으스스한데?”
“뭐가?”
“이거 공동묘지가 따로 없잖아. 꼭 귀신 나올 것 같은 분위기야.”
그에 이안이 피식 웃으며 핀잔을 주었다.
“너 혹시……. 지금 무서운 거냐?”
“그, 그럴 리가 없잖아!”
“에이, 지금 다리 후들거리는 게 눈에 보이는걸?”
“아냐! 형이 잘못 본…… 거야. 어둠의 군주인 내가 이런 곳을 무서워할 리 없, 없지!”
“말이나 더듬지 말든가.”
“…….”
풀죽은 표정으로 슬쩍 자신의 뒤에 숨는 훈이를 보며 이안은 실소를 머금었다.
훈이의 하는 짓이 제법 귀여웠기 때문이었다.
‘이럴 때 보면 영락없는 초딩인데. 아니, 생각해 보니 언제 봐도 초딩이었던 것 같군.’
사실 훈이의 반응은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 원정대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성인인 이안조차도 소름이 살짝 돋을 정도로 기괴한 모습이었으니 말이다.
온통 시커먼 가운데 지평선 끝에 핏빛 노을이 걸려 있는 하늘, 새하얀 설원 여기저기에 수북하게 쌓여 있는 해골바가지들, 그리고 그 사이로 여기저기 솟아있는 수많은 비석들까지.
당장에 발밑에서 좀비가 튀어나와 달려들어도 이상하지 않은, 그런 비주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옆에 있던 샤크란이 묵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기 보이는 저 왕성 안에 샬리언이 있겠지?”
“아마, 그렇겠죠.”
“어떻게 할 거냐, 꼬마? 여세를 몰아서 단번에 길을 뚫는 게 좋아 보인다만…….”
샤크란은 말을 마치며 허리에 꼽혀 있던 장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그와 미리 맞추기라도 한 듯 이안 또한 검을 뽑아들었다.
스르릉-!
하늘을 향해 영롱한 붉은 빛을 뿜어내는, 아름다운 검신을 가진 한 자루의 검.
림롱으로부터 얻은 전리품인 ‘블러디 리벤지’였다.
샤크란과 눈이 마주친 이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렇게 해야겠죠. 다만…….”
“다만?”
“긴장을 늦춰서는 안 될 겁니다. 보이지 않는 어떤 함정이 또 숨어 있을지 모르니까요.”
“후후, 동감이다.”
대화를 마친 두 리더는 각자 길드의 병력들을 빠르게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마음이 급한 이안조차도 이제는 서둘지 않았다.
지금까지 쉴 새 없이 달려온 덕에 시간적 여유가 제법 생겼으며, 이제는 마지막 단추만 꿰면 되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샬리언을 사냥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 마지막 사냥만 끝내면 에피소드의 끝을 볼 수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해진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정비를 마친 로터스와 타이탄의 병력들이 일제히 왕성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타탓- 타타탓-!
원정대의 유저들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공동묘지를 가로질러 달렸다.
그런데 유저들이 공동묘지의 한복판에 다다랐을 때, 별안간 큰소리가 울려 퍼졌다.
-왕의 권능으로 명하노니…….
쿠쿵- 쿠쿠쿵-!
듣기만 해도 소름이 돋을 정도로, 사이하고 기괴한 목소리.
그와 함께 성 전체가 진동하기 시작하자, 이안은 극도로 긴장하였다.
‘광역 함정이라도 발동시키려는 건가?’
리치 킹 샬리언은 현존하는 최강의 흑마법사라고 할 수 있다.
어둠의 신룡 루가릭스보다도 강력한 흑마법들을 구사할 것이 분명한 것이다.
그리고 흑마법 중에는 강력한 광역 피해를 입힐 수 있는 공격 마법들이 수두룩하다.
하물며 이렇게 광역 마법을 격중시키기 좋은 드넓은 평원임에야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이안이 광역 흑마법을 가장 먼저 떠올린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닉, 준비해!”
끼아아오-!
이안은 광역 마법의 카운터라고 할 수 있는 닉의 고유 능력을 곧바로 대기시켰다.
하지만 다음 순간, 잘못된 판단이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내 땅 위에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멸하라!
키아아악!
캬아아오!
샬리언의 목소리가 연이어 울려 퍼지더니, 바닥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언데드들이 일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언데드들의 정체는, 일반적인 스켈레톤 병사들도 아니었다.
대부분이 워리어나 나이트 이상의 상위 등급을 가진 언데드들.
심지어…….
‘미친, 레벨이 뭐 다 이따위야?’
-죽음의 심판자 : Lv.485
나타난 언데드들의 평균 레벨이 480이 훌쩍 넘는 수준이었다.
이안은 순간적으로, 재빨리 상황을 판단했다.
‘이놈들은 정면으로 싸우라고 만들어 놓은 녀석들이 아니야. 이대로 싸우다간 30분도 못 버티고 전멸할 거야.’
평균 480대의 레벨에, 유일~영웅 등급 정도에 랭크되어 있는 언데드 몬스터들.
물론 이안 본인이나 샤크란이라면 이 정도의 몬스터들은 큰 어려움 없이 상대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원정대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절반 이상의 원정대원들이 480레벨대 죽음의 기사 하나도 감당해 내지 못할 것이었고, 그러다 보면 하나둘 죽어 나갈 것이다.
그리고 다른 유저들의 서포팅 없이는 이안이나 샤크란도 이 녀석들을 상대해 낼 수 없었다.
‘뭘까? LB사에서 이 정도로 난이도를 파괴했을 리는 없어. 분명 뭔가 있을 텐데…….’
이안은 빠르게 병력들을 통솔하여 진형을 응집시켰다.
본래의 진영이 빠르게 길을 뚫기 위한 삼각편대였다면, 변화된 진영은 방어진에 가까운 원 형태의 진영이라 할 수 있었다.
돌파를 강행하지 않고 버티기를 선택한 것이다.
이안이 판단하기에 지금은 병력을 하나라도 더 보존해야 할 타이밍이었다.
‘480레벨대의 언데드 수백을 상대로 강행돌파는 미친 짓이지. 정말 저 미친 병력을 전부 다 사냥해야 하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버티면서 하나씩 차근차근 줄여 나가야 해.’
이안과 샤크란은 진영을 조금씩 움직여서 최대한 고지대에 자리를 잡았다.
기획자의 의도를 파악할 때까지 디펜스 게임을 하듯 병력을 운용할 생각이었다.
“단 한 분도 사망해서는 안 됩니다. 분명 살아남기만 하면 방법이 생길 겁니다!”
이안은 진영 곳곳을 돌아다니며 지속적으로 ‘생존’을 주지시켰다.
이렇게 압도적으로 병력이 열세인 상황에서 진영의 한 곳이라도 망가진다면, 물이 가득 찬 둑이 터지듯 한 번에 전멸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막타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딸피가 보여도 지금은 좀 참아 주세요!”
한 대만 맞으면 사망할 것 같은 생명력 게이지로, 곳곳에서 유저들을 유혹하는 언데드들.
그러나 원정대 유저들은 꿋꿋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방어진을 유지하였고, 시간이 지날수록 진영은 점점 더 견고해졌다.
그리고 그렇게 10여 분 정도가 지났을까?
어디선가 고막이 먹먹해질 정도로 커다란 공명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
이어서 이안의 시선은, 반사적으로 소리가 울려 퍼진 곳을 향해 돌아갔다.
핏빛 노을이 걸려 있던 지평선의 끝자락.
그곳에는 시커먼 초승달이 천천히 떠오르고 있었다.
-‘죽은 자들의 왕’이 강력한 권능을 발현합니다.
-하늘에 다크 문Dark Moon이 떠올랐습니다.
-‘어둠의 군단’ 병사들이 ‘어둠의 광폭화’ 상태가 되었습니다.
-어둠의 달이 하늘에 떠 있는 동안, 어둠의 군단의 전투 능력이 25퍼센트만큼 강력해집니다.
-어둠의 달이 지고 나면 ‘어둠의 광폭화’ 상태가 해제됩니다.
-다크 문 지속 시간 : 00:39:59
주르륵 떠오르는 시스템 메시지를 확인한 이안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리해서 돌파를 강행했으면 진짜 전멸할 뻔했군.’
480레벨대 언데드들의 전투력이 25퍼센트만큼 강력해졌단 말은, 수치상으로 600레벨에 육박하는 수준이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이 상황에서 방어진이 아닌 공격형 진영이었다면, 순식간에 진영이 무너지고 전원 전멸을 면치 못했을 것이었다.
더해서 이제는, 기획자의 의도 또한 확실히 파악할 수 있었다.
‘역시 버티라는 얘기였어. 무슨 짓을 해서든 40분만 버티고 나면, 충분히 해볼 만하겠지.’
이안은 ‘다크 문’이라는 것을 지금 처음 보았지만, ‘어둠의 광폭화’라는 버프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이안뿐 아니라 여기 있는 대부분의 유저들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어둠의 광폭화’는 흑마법사라면 누구나 배울 수 있는 기초적인 버프 스킬이었으니 말이다.
다만 흑마법사들이 배울 수 있는 어둠의 광폭화는 단일 대상 버프였고, 리치 킹의 권능은 수백의 언데드들을 전부 강화한다는 차이점이 있기는 했다.
‘어둠의 광폭화가 끝난 뒤 20분. 그 안에 여길 전부 쓸어버려야 해.’
어둠의 광폭화는 별다른 조건 없이 발동시킬 수 있는 강력한 버프였지만, 부작용이 하나 있었다.
지속 시간이 끝나고 나면, 그 절반만큼의 시간 동안 같은 계수만큼의 디버프가 걸리게 되는 것이다.
40분 동안 지속되는 25퍼센트짜리 어둠의 광폭화였으니, 광폭화가 끝나고 나면 20분 동안 -25퍼센트의 디버프가 걸리게 될 터였다.
480레벨대의 언데드들이 360레벨대 수준으로 약해진 그 순간, 그때가 원정대의 기회라고 할 수 있었다.
‘좋아. 우주 방어는 또 내 전문이니까!’
원진의 정중앙으로 이동한 이안이, 오른손을 번쩍 하고 치켜 올렸다.
그러자 어느새 이안의 어깨에 올라 타 있던 뿍뿍이의 등껍질이 파랗게 빛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