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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치 킹과의 조우 (4)
* * *
‘어라? 이것들 봐라?’
전고 소리가 울려 퍼진다는 것은, 곧 전군이 일제히 움직인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이 퇴각이 되었든 진격이 되었든.
전장의 모든 아군이 한 번에 움직일 때만 울리는 것이 바로 전고戰鼓였다.
처음에 인간계 유저들의 진영에서 전고가 울리는 것을 듣고, 림롱은 당연히 퇴각명령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웬걸.
놈들은 일제히 전방을 향해 돌격하고 있었다.
‘뭐지? 얘들이 단체로 실성한 건가?’
정말 일말의 예상도 할 수 없었던, 당황스럽기 그지없는 전개였다.
림롱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으나, 그와 별개로 눈빛은 더 날카로워졌다.
인간계의 유저들이 제 발로 호구虎口에 머리를 들이밀었으니, 전부 씹어 먹어 주면 그만이었다.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기는 했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었다.
림롱은 언데드 군단을 통솔하기 위해 은신을 다시 풀고 목청 높여 소리쳤다.
“전군, 돌격을 멈추고 뒤로 물러서라! 인간계 놈들이 타워의 사거리 안으로 들어오면, 그때 놈들을 집어삼킨다!”
하나, 둘, 셋.
림롱은 속으로 천천히 숫자를 세었다.
이제 잠시 후면, 이 전장에 아비규환이 펼쳐질 것이었다.
이미 포격 준비를 전부 끝내 놓은 후방의 방어 타워들이, 일제히 공격을 쏟아부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법 포탑들의 강력한 공격으로 완벽히 양념된 인간계 유저들을 깔끔하게 마무리하는 것은 림롱 자신의 몫이 되리라.
척-!
포격 타이밍을 재고 있던 림롱이 오른손을 허공으로 높이 치켜 올렸다.
이것은 바로, 포탄을 장전하라는 의미의 제스처.
이어서 림롱은 후방으로 슬쩍 시선을 돌려 방어 타워들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했다.
포탑들은 림롱의 오더대로 서서히 포문을 열고 있었다.
‘좋아, 조금만 더……!’
림롱의 두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사실 림롱이 팔을 치켜 올린 순간이, 인간계 유저들이 포탑의 최대사거리 안쪽으로 진입하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때문에 지금 당장 포격을 시작하더라도, 인간계의 유저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힐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림롱이 기다리는 이유는 간단했다.
‘단 한 놈도 살려 보낼 수 없지.’
먹잇감이 완전히 입 안으로 들어오기 전까지, 입을 닫기 싫었던 것이다.
슈우웅- 콰콰쾅-!
그리고 잠시 후, 인간계 진영 원거리 딜러들의 공격이 언데드 진영까지 닿을 정도로 진영 사이의 거리가 좁혀졌다.
이제 때가 된 것이다.
조금 더 기다릴 수 있으면 더 좋겠지만, 이 이상 저들에게 거리를 내어 주면 언데드 진영도 적잖이 피해를 입을 것이다.
다시 림롱의 목소리가 전장에 힘껏 울려 퍼졌다.
“지금이다! 포격 개시!”
척-!
림롱은 하늘 높이 들어 올렸던 오른팔을, 아래로 힘껏 내리그었다.
포격을 시작하라는 명령이 담긴 제스쳐였다.
이제 허공은 수많은 마탄魔彈으로 수놓아질 것이고, 인간계 유저들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을 것이다.
림롱은 오더를 내린 즉시, 다시 쉐도우 블링크를 시전했다.
누구보다 빨리 전장으로 뛰어나가서, 빈사 상태가 된 인간계 유저들을 쓸어 담아야 하니 말이다.
타탓- 탓-!
경쾌한 발소리와 함께 림롱의 신형이 전방으로 쏘아졌다.
하지만 잠시 후, 림롱은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퍼펑- 펑- 펑-!
분명 포격이 시작된 것은 맞았으나,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그 규모가 빈약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것은 빈약 수준이 아니었다.
초라하기 그지없는 물리 속성 타워들의 탄환만이 전장에 듬성듬성 떨어지고 있었으니까.
“……!”
심지어 그 포격들조차도 인간계 마법사들이 광역 실드로 완벽히 막아 내고 있었다.
“이거 대체 뭐야? 버그도 아니고!”
당황한 나머지 육성으로 비명을 토해 낸 림롱.
이대로 싸우다가는 10분도 채 버티지 못하고 전사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지금 림롱이 뛰어든 위치는 적진의 한복판과 다름없었고, 아무리 림롱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다굴에는 장사가 없었으니까.
게다가 림롱을 포위한 유저들은 인간계의 최상위 랭커들이었다.
상황이 이쯤 되자, 림롱은 엉뚱한 곳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뭐지? 리치 킹이 배신한 건가? 이건 거의 대놓고 엿을 먹이겠다는 수준인데?’
하지만 그 의심도 오래 가지는 않았다.
리치킹이 배신했다기에는, 어둠군단 진영의 언데드들도 속수무책으로 부서져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림롱은 어찌 된 상황인지 파악할 수 없었지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단 하나뿐이었다.
“퇴각! 모두 퇴각하라! 우선 성안으로 다시 들어간다!”
암살자의 기동력은, 그 어떤 클래스보다도 뛰어나다.
림롱은 그 빠른 기동력을 이용해, 순식간에 언데드 진영으로 되돌아왔다.
인간계 유저들의 공격에 당해 생명력은 넝마가 되어 버렸지만, 그래도 살아서 성안으로 들어갈 수는 있을 것이었다.
일단 성안으로만 들어간다면, 목숨은 부지할 수 있으리라.
우우웅- 촤아악-!
림롱의 붉은 검이 웅장한 울음소리를 토해 내더니, 전방으로 붉은 기운을 쏘아냈다.
이어서 그 새빨간 그림자 속으로 림롱의 신형이 스며들었다.
림롱의 주 무기이자 최강의 무기 중 하나인 블러디 리벤지Bloody Revenge.
그 고유 능력인 블러드 스플릿이 발동된 것이다.
이는 평소에 피를 머금고 있던 단검이 그 기운을 뿜어내며, 전방의 모든 적을 베고 지나가는 강력한 돌진 기술이다.
하지만 림롱의 기분은 무척이나 참담했다.
이 강력한 공격 기술을 도주에 써야 할 상황이 올 줄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으으, 뭐가 어떻게 된 거지? 타워는 대체 왜 작동을 안 하는 거야? 것도 전부 멈춘 것도 아니고 일부만 작동되는 건 또 뭔데?’
지금의 상황에 대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림롱의 머릿속은 점점 백지 상태가 되어 갔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애초에 림롱의 모든 추측에는 이안과 샤크란의 정예 부대가 전멸했다는 가정이 깔려 있었기 때문에, 답이 나올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그긍- 그그그긍-!
하얗게 물들던 림롱의 머릿속이, 아예 사고를 멈춰 버렸다.
살아남기 위해 어떻게든 성문 앞까지 도망쳐 왔건만, 열려있던 성문이 닫히고 있었던 것이다.
성문의 높이는 수십 미터에 달했고, 이미 절반 이상이 끌려 올라가 있었으니, 아무리 림롱이라 하더라도 그 안으로 들어갈 방법은 없었다.
닫히는 성문의 앞에 망연한 표정으로 멈춰 선 림롱이, 커다란 목소리로 절규했다.
“으아아아!”
소리치는 것 말고는 그야말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면초가’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지금의 상황.
이어서 잠시 후.
퍼억-!
림롱의 눈앞에 황금빛의 벼락이 치는가 싶더니, 뭔가 커다란 충격이 전신을 관통했다.
그리고 림롱은 그것으로 게임 아웃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생명력이 30만도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이만한 충격을 받으면 그대로 즉사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림롱은 전신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허탈한 표정으로 두 눈을 감았다.
생명력 게이지가 줄어들고 시야가 어두워지는 그 찰나의 시간 사이에,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오고갔다.
‘젠장, 이안과 샤크란을 잡은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건가.’
하지만 그 생각이 끝나기도 전, 림롱은 두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어두워진 시야의 한편에 믿을 수 없는 메시지가 떠올라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간계 유저 ‘이안’이 ‘심판의 번개’를 발동시켰습니다.
-인간계 유저 ‘이안’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습니다.
-생명력이 1,279,830만큼 감소합니다.
-생명력이 모두 소진되었습니다.
-캐릭터가 사망하였습니다.
‘뭐, 뭐라고?’
림롱은 자신도 모르게 육성으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목소리가 나온 것은 캡슐 안에 누워 있는 현실 속의 그에게서였다.
이미 사망 판정이 떠오른 림롱의 캐릭터가 입을 열 수 있을 리는 없었다.
그리고 흐릿하게 남아 있는 그의 어두운 시야에 익숙한 한 남자의 얼굴이 들어왔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그는 바로 이안이었다.
“무기는 잘 쓸게, 림롱. 나중에 또 보자고.”
어느새 드롭된 자신의 아이템을 챙긴 것인지 ‘블러디 리벤지’를 들어 올린 채 씨익 웃어 보이는 이안.
그 순간 시야가 완벽히 어두워지며 접속이 종료되었지만, 림롱은 캡슐 안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그저 멍한 표정으로 그 안에서 한참을 누워 있어야 했다.
“대체 어떻게…….”
이안은 대체 무너지는 던전 안에서 어떻게 살아남은 것일까?
“하, 하하……! 하하핫!”
허탈한 나머지, 림롱의 입에서는 쉴 새 없이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 * *
-이거 이렇게 되면, 림롱은 이제 갈 곳이 없어요!
-아아, 이안이 나타났습니다! 이안이 들고 있던 황금빛 창을 림롱을 향해 던졌습니다!
-역시 이안! 움직이는 적도 논 타깃 스킬로 죄다 맞춰 내는 이안이, 움직이지 않는 림롱을 맞추지 못할 리가 없죠!
-그렇습니다! 이안이, 이안이, 이걸 또 해내네요!
YTBC의 중계석은,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팔카치오 성에서 벌어지는 이 일련의 상황들이, 너무도 다이내믹했기 때문이었다.
함정에 함정이 이어졌던 비밀통로 던전의 전투에서부터 시작해서, 림롱이 완벽히 외통수에 걸려든 지금의 상황까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각본 없는 드라마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안에 완벽히 몰입한 중계진들은 이제 목청이 쉬어 버릴 지경이었다.
-정말 대박입니다! 이안은 림롱 덕분에 오히려 더 좋은 상황이 되어 버렸어요!
-그렇습니다! 림롱이 리치 킹의 정예군을 일부 빼내 온 덕분에, 내성을 뚫기가 더 쉬워졌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게 이런 식으로 전개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요?
-그나저나 마계 유저들은 너무 안타깝네요. 정말 아무것도 해 보지 못하고 몰살당해 버렸어요.
-그러게 말입니다. 실력 발휘라도 해 보고 아웃당했으면 억울하지라도 않을 텐데 말이죠.
게임 TV의 중계진은 원칙대로라면 중립을 지켜야 한다.
유저 VS NPC의 구도라면 당연히 유저의 입장에서 해설을 하겠지만, 지금과 같은 유저 VS 유저의 상황에서 한쪽의 편을 들어줄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심리라는 게 그렇게 칼 같을 수는 없다 보니, 중계진은 은연중에 인간계 유저들의 입장에서 계속 해설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인간계 랭커들의 팬이어서가 아니었다.
지금껏 계속 인간계가 불리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내심 그들을 응원하게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 불리한 상황을 극복하는 역전 드라마가 펼쳐지다 보니, 더더욱 몰입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지금까지일 뿐이다.
마계의 마지막 남은 랭커였던 림롱마저 너무도 무기력하게 사망하는 모습을 보니, 이제 해설진은 마계 유저들에게 몰입되기 시작했다.
-하인스 님, 저는 이해가 잘 안 돼요. 림롱은 이안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걸까요?
-물론입니다. 림롱은 이안이 그 완벽한 함정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짐작조차 할 수 없었겠죠.
-아니, 그 말이 아니에요. 분명 이 방송을 보고 있는 마계의 유저분들이 계실 거고, 그중에는 림롱 유저의 지인도 있을 것이라는 말이죠.
-아, 물론 그렇겠죠.
-그들이 게임에 접속해서, 림롱에게 알려 주지 않았을까요? 그랬으면 이렇게까지 궁지에 몰리지는 않았을 텐데요.
-하하, 루시아 님, 마계의 유저들은 림롱에게 정보를 줄 방법이 없습니다.
-예? 어째서죠?
-그야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죠.
-아!
-아마 파티 채팅 말고는 차원 너머에서 들을 수 있는 채팅이 없을 겁니다. 그리고 그것도 사실 별로 의미는 없어요.
-림롱에게 남아 있는 파티원이 없었기 때문인가요?
-그것도 그렇지만, 차원이 갈라진 채로 일정 시간이 지나면 파티가 자동으로 해체되어 버리니까요.
-아, 그렇군요. 대단해요! 역시 하인스 님께선 카일란의 세세한 설정까지 전부 다 알고 계시는군요.
-하하, 별말씀을요.
-그나저나 림롱 정말 불쌍하네요. 사망하면서 하필 주력 무기로 사용하던 아이템을 드롭해 버린 것 같은데 말이죠.
-림롱도 림롱이지만, 저는 허무하게 부활 아티팩트 날려 버린 마틴이 조금 더 불쌍한 것 같습니다.
불쌍한 마계 유저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해설진들은 그 이야기를 계속해서 할 수 없었다.
어느새 서문을 뚫고 진격하기 시작한 원정대의 랭커들이, 내성과 가까워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원정대의 병력들은, 마치 성난 파도처럼 내성을 향해 밀려들었다.
그리고 그들이 내성의 서쪽 성벽에 도달한 순간이었다.
쿵- 쿵- 쾅-!
외성에 비해 내구도가 약한 내성의 성벽이 힘없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안이 활약하는 동안 토르와 함께 내성 안쪽으로 잠입한 세리아가, 서쪽 성벽을 무너뜨려 버린 것이었다.
그렇게 에피소드의 마지막 보스, ‘리치 킹 샬리언’을 향한 고속도로가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