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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함정 (1)
팔카치오 성의 입지는 사실상 ‘천혜의 요새’라고 해도 좋을 만큼 완벽한 위치였다.
외부에서 진입하기 가장 좋은 남쪽은 깎아지르듯 한 절벽이었으며, 나머지 세 방향의 진입로 또한 험준한 봉우리를 넘어야 도달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때문에 이안 또한 처음 이 팔카치오 영지의 지형을 확인했을 때 무척이나 난감한 표정이 되었었다.
이 철옹성을 어떻게 뚫어야 할지, 감이 잘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절벽을 타는 건 아예 불가능한 소리고, 그렇다고 한 바퀴 돌아서 다른 루트를 통해 공격하자니 가는 동안 너무 많은 병력이 손실될 것이 뻔히 보인 것이다.
돌아서 올라가는 길목이 전체적으로 적 방어타워의 사정거리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팔카치오 성의 방어 타워는 가장 높은 티어의 고급 타워들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화력 또한 대단할 것이 분명했다.
확실히 에피소드의 최종 보스가 있는 요새답게 하드코어한 공성 난이도를 자랑하는 팔카치오 성.
그런데 고민 중이던 이안과 원정군의 수뇌부에게, 눈이 확 뜨일 정도로 좋은 정보가 입수되었다.
바로 보름 전 쯤, 이 팔카치오 성의 ‘지하뇌옥’ 던전을 공략했던 랭커들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들 중 대부분이 이 원정대에 소속되어 있었고, 덕분에 성 내부로 잠입할 수 있는 생각지도 못했던 루트를 알게 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지하뇌옥을 통해 성의 내부로 잠입할 수 있는 비밀통로.
그 통로를 잘만 이용한다면 내성까지 최소한의 피해로 입성할 수 있을 게 분명했다.
때문에 그 정보가 입수된 순간, 마지막 공성전에 대한 전략수립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이건 진짜 신의 한수네요.”
“그러게요. 마침 지하 던전을 공략하셨던 분들이 원정대에 있었다니……. 정말 다행이에요.”
“이 루트 없었으면 진짜 어쩔 뻔했어요?”
“휴우,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요. 아마 지난번 에피소드 초창기 때처럼, 병력만 계속해서 소모하며 외성에서 비비다가 실패했겠죠.”
“동감입니다. 아마 외성을 어찌어찌 뚫었다고 하더라도, 남은 병력이 없어서 내성은 엄두도 못 냈을 거예요.”
“…….”
지금까지의 공성에서, 거의 절반 이상의 작전이 이안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물론 에밀리와 같은 타 길드의 책사가 더 나은 전략을 낸 경우도 있었지만, 그래도 대부분이 이안의 아이디어에 의견조율을 하면서 완성된 전략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누가 봐도 너무 좋은 전략이 곧바로 수립되어 버렸기 때문에, 수뇌부가 모이자마자 순식간에 공성 루트가 결정된 것이다.
이안이 어떤 반론을 제기할 새도 없이 말이다.
사실 그때로 돌아간들, 반론을 제기할 생각도 없었지만 말이다.
‘깔 곳이 한 군데도 없는, 가장 효율적인 공성 전략이었으니 뭐…….’
하지만 전략회의가 끝나고 난 후, 이안은 지속적으로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어쩌면 ‘감’ 같은 것이었는데, 사실 그렇기 때문에 이안이 그에 대해 다른 수뇌부 유저들에게 말을 꺼내지 않은 것이기도 했다.
확실한 근거가 없는 상태에서 정해진 전략에 태클을 거는 것은, 이안의 성격과 맞지 않았으니 말이다.
‘너무 일이 잘 풀려서 불안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거잖아?’
이안이 불안한 이유는 간단했다.
너무 ‘기다렸다는 듯’ 상황에 딱 맞는 해결책이 나와 버린 것이, 마치 누군가의 의도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더해서 딱 봐도 최고의 난이도로 만들어 놓은 에피소드 최후의 요새를 이렇게 손쉽게 파훼할 수 있도록 기획했을 리 없다는 생각도 그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하지만 정확한 근거 없는 불안감 때문에 최상의 전략을 뒤집는다는 것도 아이러니한 것이었다.
“크흐음…….”
로터스의 정예부대를 통솔하여 지하 뇌옥으로 잠입하던 이안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시커먼 지하뇌옥의 입구가 가까워질수록 머리가 더욱 복잡해진 탓이었다.
이안의 바로 뒤를 따르던 피올란이 의아한 표정으로 이안에게 물었다.
“이안님, 왜 그러세요? 무슨 문제라도…….”
그에 이안은 멋쩍은 표정을 지어보이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 아닙니다. 딱히 문제는 없…….”
그런데 뇌옥의 입구로 진입하려던 그 순간, 이안이 뭔가 떠오른 것인지 우뚝 자리에 멈춰 섰다.
“……?”
그에 이안의 뒤를 따르던 로터스의 병력들 또한 일제히 걸음을 멈추었고, 그런 그들의 곁을 샤크란과 타이탄의 정예부대가 스쳐 지나갔다.
“형, 갑자기 왜 그래……?”
훈이가 두 눈을 꿈뻑이며 이안에게 물었지만, 이안은 그에 대한 대답 대신 시선을 뒤쪽으로 돌렸다.
이어서 부대의 후방에 있던 가신 ‘세리아’를 향해 손짓했다.
“세리아, 잠깐 이쪽으로 와 볼래?”
생각지도 못했던 이안의 부름에 깜짝 놀란 세리아는 후다닥 앞으로 뛰어와 예를 취해 보였다.
“예, 폐하.”
* * *
“후후, 제가 뭐라 했습니까. 일주일이라는 시간, 결코 짧지 않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불긋한 두 개의 유등만이 유일하게 장내를 밝히고 있는, 으스스한 분위기의 방 안.
총 예닐곱 정도 되어 보이는 유저들이 모여앉아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 붉은 망토를 두른 한 사내가 묵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과연 이안인가……. 흐음, 인정할 부분은 인정해야 하겠지.”
이어서 옆에 있던 궁사 유저 하나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받았다.
“놈이 운 하나는 정말 억수로 좋단 말이지. 사실 이렇게 빨리 팔카치오에 도달할 수 있었던 건, 녀석이 운 좋게 얻은 괴상한 공성 소환수 때문이 아닌가?”
바로 옆에 있던 다른 유저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에 동의를 표했다.
“나도 동의하는 바이네. 녀석의 실력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막히게 좋은 ‘운’ 때문에 일부 과장된 부분도 있다고 생각해.”
그러나 처음 입을 열었던 검은 복면의 사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혀를 끌끌 찼다.
“인간계와 단절된 지 제법 시간이 지나기는 했다지만 두 분, 감을 너무 잃으신 것 아닙니까?”
그에 궁사 유저가 발끈하며 대꾸했다.
“뭐라? 감을 잃다니. 내가 감을 잃었다면 우리 호왕 길드를 마계 순위권으로 올려 놓을 수 있었겠나.”
“뭐, 그 부분이야 인정합니다만, 보는 눈 자체는 그것과 별개 아닙니까?”
“크흠…….”
“이안은 분명히 뛰어납니다. 여기 있는 누구와 견주어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말이지요.”
남자의 말이 끝나자, 장내에 있던 인물들의 면면에 불쾌함이 맴돌았다.
하지만 그 말에 대해 반박하는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무튼, 이제 슬슬 때가 오고 있는 것 같군요.”
이번에는 붉은 망토의 사내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이번에야말로, 빚을 갚아 줄 때로군.”
그 말에, 남자는 씨익 웃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이라한’님. 우리들 중에 이안에게 가장 많은 빚을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까?”
으드득-!
붉은 망토의 남자, 이라한의 입에서 뿌드득 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것은 그야말로 그의 ‘한’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소리였다.
“그렇지. 그 ‘빚’이라는 거, 어떻게 갚아 줘야 할지 감이 안 잡힐 정도로 많이 갖고 있지, 내가.”
펄럭-!
이라한이 걸음을 옮기자, 그의 등에 메어 있는 붉은 망토가 크게 펄럭였다.
이어서 장내에 있던 인물들이 차례로 그의 뒤를 따라 일어났다.
그리고 그들은, 어디론가 빠르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아, 역시 이안과 샤크란입니다! 던전 진입한 지 고작 2시간 만에 벌써 절반 이상을 돌파해 버렸어요!
-하인스 님, 방금 원정대가 지난 구간이 던전의 절반 지점이었던 건가요?
-그렇습니다! 방금 이안과 샤크란이 합공으로 처치한 거대한 리치 나이트가 바로, 이 던전의 중간보스였거든요.
-아하, 그렇군요!
-놀라지 마십시오. 지금 이 구간이, 제가 듣기로는 처음 공략을 시도했던 팀이 하루가 꼬박 걸려서야 겨우 도달했던 곳이라고 들었습니다.
-에엑, 그렇게나요?
-하하, 정말 대단하죠? 물론 이 던전을 처음 공략했던 파티는 고작 열다섯 명에 불과했고, 지금 원정대는 유저만 백 명이 넘어가긴 합니다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2시간 만에 중간보스를 뚫을 줄은 상상조차 못 했습니다.
-와아, 과연 인간계 랭킹 1, 2위 길드의 정예다운 위용이군요!
-그렇습니다! 이제 네임드 셋 정도만 더 격파하면, 보스 존으로 가는 길 대신 내성으로 통하는 비밀 통로가 나올 겁니다!
-오오, 그 정보도 원정대로부터 얻으신 정보인 건가요?
-예, 심지어 타이탄 길드의 참모로 잘 알려져 있는 랭커인 에밀리 님과 로터스의 초창기 멤버인 카윈 님으로부터 얻은 정보입니다.
-그렇다면 틀림이 없겠군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많은 정보를 방송에 오픈해 줬다는 건, 클리어에 대한 자신감이 대단하다는 이야기겠죠?
-과연 로터스, 타이탄! 시청하는 입장에서는 그저 감사할 따름이네요.
어두운 거실을 환하게 비추는 커다란 스크린.
TV에서는 쉴 새 없이 두 캐스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고, 그 목소리만이 적막 속에 카랑카랑 울려 퍼졌다.
“후후, 클리어에 대한 자신감이라…….”
소파에 앉은 채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방송을 시청하던 나지찬은 하인스의 해설을 들으며 실소를 흘렸다.
이 모든 콘텐츠의 핵심 기획자인 그가 보기에, 지금 로터스와 타이탄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에밀리와 카윈은 YTBC에서 광고라도 하나 잡아 준 건가? 하인스한테 제법 세부적인 정보까지 많이 넘겼네.”
나지찬은 한쪽 손으로 턱을 괸 채, 소파 깊숙이 몸을 뉘였다.
오랜 야근으로 쌓인 피로 때문에 감기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것이 무척이나 힘들었지만, 이대로 잠들면 너무 억울할 것 같았다.
이제 곧, 무척이나 ‘재밌는’ 장면이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멍청하게 YTBC에 공개적으로 정보를 뿌리다니……. 하긴. 에피소드가 마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니 멍청하다고 할 건 아닌가?’
머릿속으로 이런 저런 상상을 하며 나지찬은 즐겁게 방송을 시청했다.
던전의 구성요소 하나하나가 그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었으니, 랭커들이 던전을 공략하는 장면 하나하나가 그에게는 무척 재밌을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방송을 시청하는 나지찬의 입에서는 연신 탄성이 흘러나왔다.
“캬, 사각지대에서 튀어나온 부비트랩을 어떻게 알고 대처한 거지? 진짜 샤크란……. 반응속도 하나는 진짜 어마어마하단 말이지. 30대 아재 반응속도가 어떻게 저럴 수 있는 거야?”
“크으, 이안 저 놈은 피닉스 얻은 지 얼마나 됐다고 고유능력을 저렇게 응용하는 거지? 게임 이해도 하나는 진짜 어마어마하네.”
이안의 플레이를 보며 입이 근질거리기 시작한 나지찬은, 방 안으로 후다닥 뛰어 들어가 노트북을 거실로 가지고 나왔다.
원래는 피곤해서 컴퓨터를 켤 생각이 없었지만, 하인스의 부족한 해설을 듣고 있자니 너무도 답답했던 것이다.
그것은 무지한 유저들에게 이안갓의 플레이를 해설해 줘야겠다는 ‘사명감’ 같은 것에서 비롯된 답답함이었다.
노트북을 켠 나지찬은 네임드 닉네임인 ‘이안남편’으로 재빨리 로그인하여 온라인 방송에 접속하였다.
‘이안, 이번에도 내 예상을 넘어 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키보드를 두들기는 그의 손이 더욱 바삐 움직였다.
이제 잠시 후면 ‘빅 이벤트’가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