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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죽지세 (2)
* * *
마치 운석이 떨어져 내리기라도 한 듯, 내성 전체가 진동할 정도로 커다랗게 울려 퍼지는 폭발음.
덕분에 장내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소리가 난 곳을 향해 고정되었다.
쩍- 쩌저적-!
이어서 멀쩡하던 내성의 성벽이 갈라지며, 성벽을 이루고 있던 벽돌들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대마법사 시크리드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성벽이 무너지다니……. 설마 내성까지 공성병기라도 들어온 것인가?”
심지어는 어둠법사들을 공격하려던 타이탄 길드의 랭커들조차도, 자리에 멈춰선 채 무너지는 성벽을 응시하고 있었다.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동작이 멈춰 버린 것이다.
“서, 설마……!”
에밀리는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으며, 무너져 내리는 돌더미들을 응시했다.
뿌연 먼지 사이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거대한 그림자.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그것은 ‘토르’의 그림자였다.
그어- 그어어-!
토르가 허공을 향해 포효하며 망치를 크게 한 바퀴 휘돌렸다.
쾅- 콰콰쾅-!
그러자 마치 도미노처럼 커다란 내성의 성벽이 우수수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에밀리는 떨리는 눈으로 토르를 바라보며 머리를 회전시켜 보았다.
‘어째서 로터스가 벌써 도착한 거지?’
그녀는 토르의 공성 파괴력을 결코 과소평가하지 않았다.
분명 저 거대한 망치가 성벽에 입히는 피해를 두 눈으로 확인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에밀리가 예상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안이 ‘공헌도’에 생각보다 큰 비중을 두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만약 이안이 악착같이 공헌도를 모으려고 했더라면, 외성에 있는 타워를 전부 철거하기 전까지는 내성에 들어서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안에게는 공헌도 따위보다 빠른 시간 내에 퀘스트를 클리어하는 것이 훨씬 중요한 과제였고, 때문에 최대한 효율적으로 필요한 타워들만 철거하며 내성까지 이동해 온 것이었다.
그렇다면 로터스가 타이탄과의 공헌도 경쟁을 포기한 것이냐?
그것도 아니었다.
이안의 전략은 로터스의 공헌도를 포기함과 동시에 타이탄의 공헌도 독식을 막는 것이었다.
쉽게 먹을 수 있는 공성 공헌도를 최소한으로만 챙긴 뒤, 샤크란이 네임드 공헌도를 독식할 수 없게 내성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렇게 하면 다른 중소 길드와 일반 유저들에게 많은 부분 공헌도를 넘겨줘야 하겠지만, 그것은 상관없었다.
그래 봐야 중소 길드들은 로터스의 공헌도 수치를 따라올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안은 타이탄과의 공헌도 경쟁도 포기하지 않음과 동시에 퀘스트 클리어 속도도 챙기는 최상의 선택을 한 것이었다.
하지만 에밀리로서는, 그러한 사실을 알 턱이 없었다.
이안의 퀘스트에 시간 제한이 걸려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한 말이다.
에밀리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본인들 공헌도를 포기하고 우리를 방해하겠다는 건가? 이러면 로터스로서도 제법 손해일 텐데…….”
그리고 장내가 잠시 정적에 휩싸인 사이, 토르의 어깨 위에 올라타 있던 이안이 허공으로 높게 도약하며 오더를 쏟아내었다.
“마법병단은 전부 고스트 드래곤을 타깃팅한다! 기병대 2, 3조는 마법병단을 지키고, 나머지는 나를 따르라!”
* * *
이안과 로터스의 정예군과 타이탄의 용기병들이 양쪽에서 덮쳐오자 어둠의 군단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크아악! 샬리언 님께서 네놈들을 용서치 않을 것이다!”
“크으윽, 인간들 따위에게 당하다니…….”
그리고 막상 전투가 시작되자 이안뿐만 아니라 샤크란도 최고의 플레이를 보여 주기 시작했다.
이안으로서는 퀘스트 진행을 조금이라도 빠르게 하기 위해서 열심히 전투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는 상황이었고, 선택지가 없다는 것은 샤크란 또한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었다.
이안이 타이탄의 네임드 몬스터 독식을 막기 위해 나타난 것은 샤크란 또한 눈치챘지만, 그것을 알았다고 해서 다른 뾰족한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타이탄과 샤크란에게 남은 선택지는, 그저 전력을 다해 전투하여 로터스보다 많은 네임드 몬스터를 처치하는 것뿐.
그리고 이 상황이 바로, 이안이 생각하던 최고의 상황이었다.
‘그래, 샤크란! 열심히 일하라고!’
이안은 속으로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소환수들을 컨트롤하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퀘스트가 끝날 때까지, 적당한 템포 조절을 곁들여 샤크란과 타이탄 길드를 조련해 볼 생각이었다.
“카카, 꿈꾸는 몽마!”
“알겠다, 주인!”
쿠오오오-!
언데드들의 천적이라 할 수 있는 카카의 장판 고유 능력이 발동되자, 그렇지 않아도 어두웠던 내성이 더욱 시커먼 어둠 속에 잠겼다.
그러자 카카의 고유 능력을 처음 경험한 유저들이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어, 이게 뭐지?”
“이안 님이 쓴 장판인 것 같은데, 시야가 다 가려지잖아?”
꿈꾸는 몽마 능력이 발동되면 장내에 ‘어둠’이 깔리게 되는데, 이 어둠은 기본적으로 조도를 30퍼센트 정도 떨어뜨린다.
한데 어둠의 성 안쪽은 이미 어두운 상태였고, 여기서 더 어두워지니 깜깜한 밤이나 다를 게 없어진 것이다.
마법사들은 서둘러 라이트 마법을 발동시켰고, 기사들은 흐트러진 진영을 정비하기 위해 후방으로 살짝 몸을 빼 내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어둠 안으로 쏘아져 들어가는 몇몇의 그림자들이 있었다.
타탓- 탓-!
그들은 바로 어둠에 익숙한 몇몇 암살자 랭커들 그리고 이안과 샤크란이었다.
채챙- 챙-!
날아드는 스켈레톤 워리어들의 검날을 빠르게 맞받아치며, 이안의 날카로운 창날이 불을 뿜었다.
‘카카의 장판 위에 있는 언데드들이야말로 최고의 먹잇감이지.’
사실 이안이 아무리 컨트롤에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처음부터 어둠에 익숙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카카의 장판 위에서 싸우는 빈도수가 셀 수 없이 많아지다 보니, 이제 어지간한 어둠 속에서는 적들의 움직임이 훤히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샤크란 또한 어둠에 익숙한 클래스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거침없이 어둠을 향해 파고들고 있었다.
“어디 한번 해보자는 거지?”
이를 갈며 이안을 노려보는 샤크란.
그에 이안이 씨익 웃으며 짧게 대꾸했다.
“아재, 정면 승부 한번 해보자고요.”
이안과 샤크란이 노리는 것은 단 하나. 고스트 드래곤의 위에 타고 있는 네임드 몬스터, 대마법사 시크리드였다.
죽음의 기사단장 ‘록페르’보다도 훨씬 많은 공헌도를 줄 것이 분명한, 어둠의 대마법사 시크리드.
만약 이안이 시크리드를 먼저 처치할 수 있다면, 타이탄의 입장에서는 죽 쒀서 개 주는 꼴이라 할 수 있었다.
어쨌든 많은 네임드 몬스터들을 처치하며 시크리드를 찾아낸 것은, 타이탄의 용기병들과 샤크란이었으니 말이다.
앞을 막는 언데드들을 베어 넘기던 이안의 시선이, 반대편의 샤크란을 향해 살짝 움직였다.
‘오호라, 용기병을 활용하시겠다?’
고스트 드래곤을 타고 하늘높이 떠 있는 시크리드를 사냥하기 위해, 샤크란이 용기병에 올라탄 것을 목격한 것이다.
이 시점에 이안의 뇌리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당연히 핀이었다.
‘나도 핀을 불러야 하나?’
하지만 다음 순간, 이안은 무슨 생각이 떠오른 것인지 라이를 향해 시선을 돌리며 오더를 내렸다.
“라이, 펜리르의 분노! 어둠 잠식!”
“아우우-!”
의도는 알 수 없었지만, 라이가 가진 자가 버프 스킬들을 전부 활성화시킨 것이다.
-소환수 ‘라이’의 고유 능력, ‘펜리르의 분노’가 발동합니다.
-소환수 ‘라이’가 분노 상태가 되었습니다.
-3분 동안 모든 전투 능력치가 50퍼센트만큼 상승하며, 치명타 확률이 20퍼센트만큼 증가합니다.
-소환수 ‘라이’의 고유 능력 ‘어둠 잠식’이 발동합니다.
-소환수 ‘라이’가 ‘어둠 잠식’ 상태가 되었습니다.
-3분간 모든 공격이 치명타로 적중되며, 받는 모든 피해의 70퍼센트만큼을 무효화시킵니다.
-라이의 이동속도가 50퍼센트만큼 빨라집니다.
라이가 가진 최고의 고유 능력인 ‘펜리르의 분노’와 ‘어둠 잠식’은 서로 엄청난 시너지를 내는 자가 버프 스킬들이다.
‘어둠 잠식’에 붙은 100퍼센트 치명타 옵션과 ‘펜리르의 분노’에 붙은 치명타 확률 증가 20퍼센트가 겹치기는 하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무조건 같이 발동시켜야만 하는 스킬이었다.
그 이유는, 메시지에 뜨지 않는 부가 옵션 때문이었다.
-소환수 ‘라이’의 공격이 ‘치명타’로 적중하였습니다.
-‘펜리르의 분노’ 고유 능력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5초 줄어들었습니다.
-‘펜리르의 분노’ 고유 능력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5초 줄어들었습니다.
라이의 공격이 치명타로 적중할 때마다, 계속해서 줄어드는 ‘펜리르의 분노’ 재사용 대기 시간.
‘펜리르의 분노’ 고유 능력의 재사용 대기 시간은 10분 정도였고, 이를 초단위로 환산하면 600초였다.
라이의 공격이 120회만 적중하면, 펜리르의 분노를 또다시 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버프가 극대화된 라이의 공격 속도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했다.
촥- 촤라락-!
고작 2분도 채 지나기 전에 120회의 치명타를 전부 명중시킨 것이다.
매초 1회 이상의 공격을 적에게 명중시켰다고 보면 될 터였다.
이어서 이안이 라이에게 내린 오더는…….
“라이, 다시 펜리르의 분노!”
아우우-!
펜리르의 분노 스킬을 중첩시키는 것이었다.
-3분 동안 모든 전투 능력치가 50퍼센트만큼 상승하며, 치명타 확률이 20퍼센트만큼 증가합니다.
어차피 펜리르의 분노 지속 시간이 3분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중첩이 가능한 시간은 고작 1분 남짓이다.
하지만 모든 스텟 50퍼센트 뻥튀기가 두 번 중첩된 라이는, 그야말로 괴물이었다.
덧 연산이 아니라 곱 연산이기 때문에 기존 스텟의 2.25배에 달하는 괴랄한 전투 능력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쉽게 말해 현재 394레벨인 라이가, 버프가 중첩되는 이 1분 동안 만큼은 880레벨에 육박하는 괴력을 보여줄 수 있다는 말이었다.
물론 단순히 스텟이 높다고 해서 정말 800레벨대의 강력함을 보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 라이의 파괴력은 ‘괴물’이라 부르기에 충분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공중 공격이 가능할 리 없다.
하지만 이안은 이미 머릿속으로 그림을 전부 그려 놓은 상태였다.
“토르, 라이를 던져!”
그륵- 그르륵-!
어느새 토르의 몸을 타고 뛰어올라 허공으로 도약하는 라이의 그림자.
그리고 토르는, 이안의 명령을 기다렸다는 듯 라이를 받친 손을 있는 힘껏 허공으로 던져 올렸다.
그어어어!
이안의 소환수 응용 컨트롤은 그야말로 즉흥적이기 그지없었다.
심지어 이것은 이안조차도 처음 시도해보는 방식의 전술이었다.
하지만 효과는 굉장했다.
어느새 라이의 신형은, 시크리드가 타고 있는 고스트 드래곤의 위쪽까지 솟구쳐 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이것은 NPC인 시크리드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기괴한 플레이였다.
날아오르는 샤크란에게만 신경 쓰던 시크리드는, 제대로 뒤통수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아우우우-!
“이 미친 늑대가?”
시크리드는 고스트 드래곤의 고삐를 당기며 빠르게 라이를 피해 보려 했지만, 그때는 이미 라이의 그림자가 그를 덮치고 있을 때였다.
콰콱- 촤아악-!
그리고 마법병단의 폭격으로 인해 이미 많은 생명력이 빠져 있던 시크리드는, 그대로 다운되고 말았다.
“크아악-!”
-소환수 ‘라이’가 어둠의 대마법사 ‘시크리드’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어둠의 대마법사 ‘시크리드’의 생명력이 8,557,094만큼 감소합니다.
-어둠의 대마법사 ‘시크리드’를 처치하는 데 성공하셨습니다.
-어둠의 군단, 네임드 몬스터를 처치하셨습니다.
-에피소드 공헌도가 695,000만큼 증가합니다.
-경험치를 97,225,100만큼 획득하셨습니다.
-명성을 15만 만큼 획득하셨습니다.
뒤늦게 용기병을 타고 올라온 샤크란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고 말았다.
“……?”
그리고 그런 샤크란을 향해, 이안이 조련을 시작하였다.
“아재, 분발 좀 하셔야겠는데요?”
완벽한 설계를 위한, 이안의 계획된 도발이었다.
그러자 샤크란의 이마에 힘줄이 튀어나왔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