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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맹 결성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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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인간계의 거의 모든 길드들은 ‘동맹’ 혹은 ‘불가침 조약’을 맺은 상태였다.
거기에는 복합적인 여러 가지 이유가 작용하였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이유는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로는 에피소드로 인해 ‘리치킹 샬리언’이라는 강력한 주적이 생겨났다는 점이다.
유저들끼리 전쟁을 벌이는 사이 언데드가 침공해 온다면, 서로 손해만 보게 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게다가 유저끼리 전투하지 않더라도 상대할 언데드들이 지천에 널려 있기 때문에, 굳이 유저끼리의 전쟁을 고집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현재 콜로나르 대륙의 형국과 관련이 있었다.
대륙 각지에 백여 개가 넘는 크고 작은 NPC의 왕국으로 쪼개져 있기 때문에, 영토를 넓히는 과정에서도 딱히 유저들끼리 부딪칠 일이 별로 없었다.
유저들이 세운 왕국은 아직 10개가 채 되지 않는 반면, NPC들이 세운 왕국은 그 열 배가 훨씬 넘는 숫자이기 때문에, 사실 유저가 세운 왕국끼리 국경을 맞대고 있는 경우도 드물었던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이유로, 현재 인간계의 유저들은 잠정적 동맹 관계라 보아도 무방했다.
‘하지만 경쟁 관계인 건 여전하니까.’
이안의 생각에 지금 당장 샬리언을 치기 위해서는 적어도 상위 다섯 개 이상의 길드가 힘을 합쳐야만 한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도 특히 타이탄 길드와의 연합은 필수였다.
하지만 불가침 관계라고 한들 타이탄에서 선뜻 로터스를 도울 리는 없었다.
적대 관계가 아니다 뿐이지 경쟁 상대인 것은 여전했기 때문이었다.
‘충분히 구미가 당길 만한 딜을 하지 않는다면 넘어오지 않을 거야.’
만약 타이탄 길드만 확실히 도와준다면 샬리언과의 전쟁도 충분히 해볼 만한 싸움이었다.
퓰리오스 길드와 같이 이안이 명령 한 번에 곧바로 움직여줄 수 있는 신하 길드도 있었고, 긴밀한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벨리언트 길드도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간계에서 가장 큰 두 개의 길드가 샬리언을 치겠다고 나선다면, 수많은 크고 작은 길드들이 따라붙을 게 분명했다.
로터스와 타이탄이 나선 이상 에피소드가 클리어될 확률이 높다고 생각할 것이었고, 그렇다면 한 숟갈 얹어야만 콩고물이라도 떨어질 것이었으니 말이다.
“바람만 잘 잡으면…… 충분히 해낼 수 있어.”
이안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샤크란을 구워삶을 수만 있다면, 타이탄에서도 구미가 당길 만한 빅딜을 제안할 의향도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손해 볼 생각은 없었지만, 적어도 날로 먹기는 힘들 것이라 생각했다.
샤크란은 그렇게 바보가 아니었고, 그를 보좌하는 뛰어난 책사도 있었으니 말이다.
“흐음……. 이제 슬슬 시간이 된 것 같군.”
이안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론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어떤 경우에서든 협상이란, 자신의 패를 전부 내어 보이면 끌려 다닐 수밖에 없게 된다.
하물며 그 패가 불리한 패인 경우에는 어떻게든 감출 필요가 있었다.
지금 이안이 타이탄 길드에 절대로 내보여서는 안 되는 패는 ‘영웅의 책임’ 퀘스트와 관련된 페널티였다.
현 시점에 이안이 어떻게든 리치킹을 처치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샤크란이 알게 된다면, 이안에게 정말 많은 것을 뜯어내려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샬리언을 처치할 때까지 타이탄 길드의 페이스에 끌려 다녀야 할 게 분명했다.
‘절대로 그럴 수는 없지.’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딜을 해야 동등한 관계, 혹은 조금이라도 더 유리한 위치에서 타이탄과 협상을 할 수 있을까?
이안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급 정보’들을 적절히 이용해 보기로 결정했다.
“흠, 웬일로 나를 보자 했나 했더니……. 확실히 큰 건을 가지고 왔군.”
이안이 꺼내 든 ‘고급 정보’들에 대해 들은 샤크란의 두 눈에 이채가 어렸다.
이안의 고급 정보란 바로 ‘명계’에 대한 것들이었다.
물론 이 귀한 정보를 이안이 온전히 오픈한 것은 아니었다.
살짝 ‘비틀어서’ 샤크란의 흥미를 끌어낸 것이다.
“아저씨도 느끼겠지만, 이 정도면 나도 큰마음 먹고 정보공유한 겁니다.”
‘아저씨’라는 단어가 살짝 신경에 거슬렸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샤크란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후후, 고급 정보라는 건 확실히 인정한다. 꼬맹이 네가 허튼소리 할 녀석은 아니니까…….”
“물론이죠.”
“하지만 내가 액면가 그대로 믿는다고 생각해서는 곤란해. 사실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도 있거든.”
“어떤……?”
“나와 경쟁 관계인 네 녀석이 이런 고급 정보를 선뜻 내어 줬다는 것만으로도, 의심할 여지는 충분히 있다고 생각하는데? 게다가 콘텐츠를 공유하겠다라……. 아주 수상하단 말이지.”
이안이 샤크란에게 넘긴 정보는 아주 간결했다.
‘명계’라는 차원계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함께, 리치 킹 샬리언이 그 열쇠의 한 조각을 쥐고 있는 것 같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더해서 이안 자신에게 명계로 갈 수 있는 열쇠의 나머지 조각들이 있으며, 자신을 도와 샬리언을 처치한다면 명계 입성을 돕겠다고 하였다.
여기까지가 이안이 뿌린 밑밥.
‘거짓을 말하지는 않되, 약점을 숨기기 위한 연막은 확실하게 쳐야지.’
샤크란의 관심 자체를 다른 곳으로 조금씩 끌어오는 과정인 것이다.
명계에 관한 정보가 조금 아깝기는 했지만, 샤크란 또한 머지않아 알게 될 정보들이었다.
이 카일란의 콘텐츠들은, 결국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지니 말이다.
그리고 타이탄 길드를 명계에 데려간다 하더라도 어차피 유리한 것은 로터스였다.
이제야 막연히 명계라는 곳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샤크란와는 달리 이안은 확실한 목적성을 가지고 움직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더해서 타이탄에게 주는 것만큼 추가적인 이득을 확실히 챙기면 될 일이었다.
이안의 말이 이어졌다.
“물론 제가 아무런 대가 없이 아저씨네 길드를 돕는 건 말이 안 되죠.”
이안이 순순히 인정하자, 샤크란은 더욱 흥미로운 표정이 되었다.
“그럼 우리에게 원하는 게 있다?”
“당연합니다.”
“그거 재미있군. 한번 말해 보도록.”
“우선 제가 원하는 첫 번째는, 샬리언이 드롭할 아이템들을 전부 로터스가 가져가는 겁니다.”
“흐음, 첫 번째라……. 그럼 두 번째도 있다는 얘기겠군?”
“그렇습니다.”
“들어 보도록 하지.”
“두 번째는…….”
잠시 뜸을 들인 이안이, 천천히 다시 입을 열었다.
“이 보스 레이드 방송 판권의 5할을 로터스에서 가져가겠다는 겁니다.”
“음?”
“나머지 5할은 타이탄을 비롯해서 참전한 나머지 길드들이 나눠 가져야겠지요.”
“원하는 건 여기까지?”
“그렇습니다.”
샤크란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패였다.
머릿속으로 수지타산을 계산해 보는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샤크란이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며 이안을 응시하였다.
“이건 너무 과한 조건이 아닌가?”
“어째서 그렇죠?”
“에피소드 보스가 드롭할 아이템을 전부 넘겨준다는 조건만 해도, 우리가 충분히 양보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거기에 방송 수익까지 절반을 가져가겠다는 건…….”
이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곧바로 반론을 펼쳤다.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흠?”
“신규 콘텐츠 선점의 가치가 얼마나 큰지, 아저씨가 가장 잘 알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참고 있던 샤크란이 결국 인상을 확 구기며 으르렁거렸다.
“거, 아저씨, 아저씨 하지 마라. 형이라니까, 형.”
“형……이라기엔……. 뭐, 알겠습니다. 형이라고 치죠.”
“…….”
삼촌뻘쯤 되어 보이는 샤크란을 형이라고 부르는 것이 내키지 않기는 했지만, 협상을 위해서 이안은 한 발 양보(?)하기로 했다.
“어쨌든, 저는 신규 콘텐츠를 공유한다는 것이 이 정도의 가치는 있다고 판단합니다.”
“크흠, 생각하기 나름이겠지만 아주 틀린 말은 아니군.”
“어쩌시겠습니까, 형님. 콜 하는 겁니까?”
“하지만 나 혼자 결정할 만한 사안은 아니야. 길드원들의 의견을 좀 들어 보도록 하지.”
샤크란의 대답에 이안은 순간 갈등하기 시작했다.
‘이거 시간 끌면 곤란한데…….’
한 발 물러서 샤크란의 결정을 이끌어 내야 할지, 아니면 조금 더 강경한 태도로 그의 애를 태워야 할지…….
잠시간의 갈등 끝에, 이안은 결국 후자를 택하였다.
“뭐, 그러시죠. 하지만 오래 기다릴 순 없으니, 오늘이 지나기 전엔 답을 주셔야 합니다.”
이안은 쿨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실 이안의 입장에서는, 조금 더 내어 주더라도 타이탄 길드를 확실히 영입하기만 하면 성공이었다.
지금 이안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 내에 리치킹을 처단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끝까지 고자세를 유지한 이유는, 이안이 고자세일수록 샤크란의 의심이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었다.
좋은 조건을 주고 협상을 빨리 마무리하려 한다면, 이안이 급하다는 사실을 샤크란이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이안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샤크란이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서 일어섰다.
그런데 다음 순간, 샤크란의 입에서 생각지 못했던 날카로운 질문이 흘러나왔다.
“그런데 꼬마, 궁금한 게 하나 있다.”
“말씀하시죠.”
“아직 에피소드가 오픈된 지 몇 달 지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빨리 움직이는 이유가 뭐지?”
“……!”
“내가 만약 네 녀석이었더라면, 조금 시간을 두고 힘을 키워서 홀로 콘텐츠를 독식했을 것 같거든. 주력 길드원들 레벨까지 전부 400 이상 찍고 나면 최고 레벨인 네 녀석은 450레벨에 근접할 것이고, 그쯤 되면 500레벨의 에피소드 보스 정도는 단일 길드의 힘으로도 충분히 상대해 볼 만할 테니까 말이야.”
샤크란의 예리한 의문에, 이안은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역시, 이 아재. 보통내기가 아니란 말이지?’
사실 이러한 의문은 냉철하게 생각해 보면 충분히 떠올릴 수 있을 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안이 조금 과하다 싶은 조건들까지 제시하며 샤크란을 애 태운 이유가, 바로 이러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타이탄 길드의 입장에서는 ‘중간계’ 콘텐츠 선점에 어떻게든 한 숟갈 얹고 싶을 것이고, 이안과의 협상에서 조금이라도 많은 것을 얻어 내는 데 정신이 팔릴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샤크란이 핵심을 짚어 낸 것이다.
이안이 벼랑 끝에 몰린 급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아닐 테지만, 여기서 조금만 말실수를 하면 지금까지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 버릴 수도 있었다.
물론 이 상황에 대한 대책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결국 불리한 패를 하나 보여 줘야 하겠군.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잠시 뜸을 들인 이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흠……. 그 부분에 대해서는 솔직하게 말하도록 하죠.”
“……?”
그리고 이어진 이안의 말에, 샤크란은 대번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형님도 아시다시피, 북동부 지역의 지리적 조건이 열악합니다.”
“아…….”
“그 이유가 바로 샬리언 때문이죠.”
샬리언이 처단되고 어둠의 세력이 무너지면, 강력한 북동부 왕국들의 힘이 쇄락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로터스가 빠르게 영토를 넓힐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줄 것이었다.
충분히 납득할 만한 대답을 얻은 샤크란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 거기까지. 그 정도면 충분히 이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