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번째 단서 (3)
* * *
-최초로 400레벨을 달성하셨습니다.
-명성이 70만 만큼 증가합니다.
-‘소환술사의 탑’ 탑주인 ‘바그너’가 당신을 찾습니다.
이안의 시야에 수많은 메시지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역시 ‘최초’라는 두 글자짜리 단어였다.
‘후후, 역시 내가 처음인가?’
카일란에서는 비공개 랭커들의 레벨을 절대로 유출하지 않는다.
이렇게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지 않는 이상 랭킹 리스트만 가지고는 랭킹 1위를 확신할 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이 최초는 여러모로 이안을 기분 좋게 만들어 주었다.
‘크으, 이제 엘리카 왕국은 다 잡은 고기나 다름없겠고……. 샬리언을 치는 것만 남았군.’
이안이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가짜 왕을 베어 버린 레무스가 왕좌로 가 자연스레 앉았다.
지금까지의 다소 지질하던 모습과는 달리 제법 일국의 왕 다운 분위기를 풍기는 레무스였다.
“고맙다, 이안. 이제 내가 약속을 이행할 차례로군.”
그에 이안은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부탁해, 레무스. 난 돌아가는 즉시 군대를 움직일 거야.”
이안은 레무스와 간단하게 계획을 정리한 뒤, 귀환석을 사용하기 위해 인벤토리를 오픈했다.
이제 로터스 왕국으로 돌아가 본격적으로 군대를 일으킬 시간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때, 이안의 눈앞에 몇 줄의 새로운 시스템 메시지가 추가로 떠올랐다.
-400레벨이 되었으므로, 위격을 ‘초월’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을 충족시켰습니다.
-‘용사의 마을’의 촌장 ‘르보로’를 찾아간다면 ‘초월자의 시험’에 대해 알려 줄 것입니다.
“어?”
이안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탄성이 새어나왔다.
‘용사의 마을’이라는 단어가 낯이 익었기 때문이었다.
‘카미레스가 줬던 용기사의 징표! 그 중간계에 있다던 마을이잖아?’
게다가 ‘위격의 초월’이라는 말도 이안에게 반갑기 그지없는 단서였다.
아마 며칠 전이었더라면 이안은 이 말에 대한 의미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 말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중간자!’
이안의 머릿속에, 순간적으로 사흘 전의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 * *
일반적으로 카일란을 플레이하는 유저들의 ‘퀘스트 창’은 한 바닥 정도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경우가 많았다.
레벨이 높은 유저일수록 그런 경향이 더 많았는데, 그 이유는 간단하다.
클리어하기 힘들거나, 혹은 오래 걸리는 퀘스트들이 높은 레벨이 될 수록 많아지기 때문이다.
특히 퀘스트를 귀찮아하는 단순 노가다족속들의 경우, 퀘스트창을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죽어라 사냥만 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퀘스트의 비중이 큰 카일란에서 그런 플레이는 그다지 효율적이지 못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레벨이 최상위급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10줄 이하의 깔끔한 퀘스트 창을 유지하는 유저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 하나가 바로 이안이었다.
이안은, 퀘스트 창에 ‘N’이라는 붉은 글씨가 떠올라 있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변태 중 한 명이었다.
‘저렇게 떠 있으면 하루 종일 거슬린다니까.’
이안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최근 이안에게는 고민이 하나 있었다.
벌써 몇 주일 이상 훌쩍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클리어는커녕 방향성조차 찾지 못하고 있는 퀘스트 하나가 퀘스트 창에 박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것은 이안으로선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퀘스트였다.
그렇다면 시도조차 해 보지 않았느냐?
그건 당연히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클리어할 수 있을까?’
레무스로부터 받은 ‘엘리카 왕국의 꼭두각시’퀘스트를 진행하기 전, 로터스 왕성에서 전투준비를 하던 이안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진행 중인 퀘스트는 무척이나 순조로운 상황이었건만, 미뤄 둔 퀘스트가 계속 눈에 밟혔기 때문이었다.
그 퀘스트는 바로…….
-퀘스트 : 어둠의 신룡, 루가릭스 길들이기
-타입 : 히든 / 돌발
-제한시간 : 없음
-난이도 : SSSSS
-상태 : 진행 중
-보상 : 어둠의 신룡 루가릭스, ‘테이밍 마스터’ 히든 클래스 티어 상승
(자세히 보기)
신화 등급의 소환수이자, 지금껏 이안이 보아 온 어떤 소환수보다도 강력한 최강의 소환수인 루가릭스.
아직 카일란 역사상 단 한 번도 포획된 적 없는 신화 등급의 소환수를 테이밍해야 하는, 펜타S 등급 난이도의 퀘스트가 이안의 퀘스트 창에 알 박기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안으로서는, 시종일관 그곳이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N’이라는 글씨에 고정되어 있던 이안의 시선이, 슬쩍 옆을 향해 움직였다.
그리고 그곳에는, 낯익은 한 쌍의 어린이가 오순도순 놀고 있었다.
둘의 앞에는, 손바닥만 한 크기의 바비인형 같은 것이 놓여 있었다.
“자, 오빠, 빨리이! 아르나샤 성녀님을 제대로 만들어 달라구!”
“자, 봐! 여기 만들었잖아. 봐, 하얀 사제복에 은빛 스태프까지. 완벽히 재현했는걸?”
“아니, 아니야! 아르나샤 성녀님은 이런 생김새가 아니셨을 거야.”
“음?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기억도 없다면서.”
“기억은 없지만, 콜로나르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다구! ‘그야말로 미의 여신이 강림하신 듯한’!”
루가릭스가 점토를 빚어 정성스럽게 만든, 성녀 ‘아르나샤’의 인형.
루가릭스가 무려 마법까지 동원해 가며 만들어 낸 인형은, 엄청난 퀄리티를 자랑하고 있었다.
거의 ‘하이퍼 리얼리즘’이라 하여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사실감.
하지만 엘카릭스는 인형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맞아, 성녀 아르나샤는 무척이나 아름다웠지.”
“그런데 이렇게 만들어 놓으면 어떻게 해?”
“왜? 예쁘게 만들었는데? 뭐가 어때서?”
“아르나샤 성녀님이 이렇게 머리가 크셨을 리 없잖아! 머리 크기 좀 줄여 줘, 오빠.”
엘카릭스는 작품 수정을 요구했지만, 루가릭스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럴 수 없어.”
“어째서?”
“왜냐면…… 이건 아르나샤 성녀의 정체성이거든.”
“……?”
“성녀는 아름다웠지만, 정확히 4등신이었어.”
“에?”
“있는 그대로를 완벽히 표현한 나의 작품을 고칠 수는 없지.”
두 드래곤 어린이의 대화를 들으며, 이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쳇, 저 고집 하고는…….’
처음 ‘루가릭스 길들이기’ 퀘스트를 받았을 때, 이안은 무척이나 막막했었다.
하지만 ‘엘’이라는 든든한 조력자를 얻은 뒤로는 퀘스트가 무척이나 순조롭게 풀려 나가기 시작했다.
소환수를 테이밍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조건인 ‘친밀도’를 엘카릭스 덕에 빠른 속도로 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몇 시간 전.
이안은 루가릭스와의 친밀도가 MAX수치가 되었다는 메시지를 확인했고, 드디어 테이밍을 시도하기에 이르렀다.
테이밍 마스터 클래스의 티어 상승과 신화 등급의 소환수 루가릭스라는 어마어마한 보상에 대한 기대감에 부풀어서 말이다.
“루가릭스.”
“이안, 불렀어?”
“넌 정말 훌륭한 드래곤인 것 같아.”
“물론이지. 난 어둠의 신룡이니까.”
“그렇다면 루가릭스.”
“음?”
“네가 보기에 난 어떤 소환술사인 것 같아?”
‘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대답만 하면 돼.’라는 뒷말을 대놓고 숨기고 있는 이안의 대사였다.
하지만 단순하기 그지없는 드래곤인 루가릭스는 정해진 대답을 충실히 수행해 주었다.
“이안, 너는 엄청 뛰어난 소환술사야.”
“그렇지?”
“적어도 내가 본 인간 소환술사 중에는 가장 뛰어나지.”
“후후, 짜식, 보는 눈이 있구만!”
루가릭스를 영입하기 위한 떡밥을 조금씩 깔기 시작하는 이안.
그리고 완벽한 타이밍이 왔다고 생각되었을 때, 이안은 과감히 행동을 개시했다.
“루가릭스, 그……래서 말인데.”
“왜 그래?”
“포획, 아니, 내 소환수가 되어주지 않을래?”
“음?”
“강력한 네 마법과 함께라면 샬리언도 충분히 물리칠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그 결과는…….
“그, 그럼 내 소환수가 되어 주는 거야?”
“아니, 그럴 수는 없어.”
“왜?”
“나는 ‘인간’의 소환수가 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지.”
“그게 무슨 말이야?”
“나보다 ‘격’이 낮은 존재의 소환수가 될 수 없다는 뜻이야.”
“……?”
루가릭스의 설명은 간단했다.
신룡으로서 차원을 중재하는 자신은 ‘중간자’의 위격을 가지고 있는데 반해, 이안은 평범한 ‘인간’이기 때문에 소환수가 되어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일전에 루가릭스에게 인간계와 중간계 그리고 천상계에 관한 설명을 어느 정도 들었던 이안은, 루가릭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중간자의 위격을 갖지 못해서 내 소환수가 될 수 없다는 뜻이지?”
“맞아.”
“그게 유일한 이유고?”
“응.”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루가릭스. 차원을 중재하는 ‘신룡’들은 전부 중간자의 위격을 갖고 있는 거야?”
“맞아.”
“그렇다면 엘이나 카르세우스, 뿍뿍이도 중간자의 위격을 가지고 있겠네?”
루가릭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영혼의 기억을 잃었기 때문에 온전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위격을 가지고는 있지.”
“그렇다면, 중간자의 위격이 있다고 해서 인간의 소환수가 될 수 없는 건 아니잖아? 얘들은 이미 내 소환수니까 말이야.”
“네 말이 맞아.”
루가릭스의 대답에, 이안은 어이없는 표정이 되었다.
“그럼 왜 안 된다는 거야?”
하지만 루가릭스의 다음 말을 듣는 순간, 이안은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냥. 내 마음이야.”
“……?”
“난 적어도 소환술사 ‘에오스’ 정도의 격은 갖추고 있어야 나를 부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거든.”
‘에오스’는 이안도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이안에게 ‘셀라무스’부족의 퀘스트를 주었던, 고대의 소환술사.
사막부족의 여덟 절대자 중 하나가 바로 에오스였던 것이다
‘에오스? 그가 중간자였나?’
하지만 지금, 사막부족의 절대자가 중간자였다는 사실은 이안에게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루가릭스 길들이기’ 퀘스트를 성공하느냐 마느냐가 가장 큰 문제였으니 말이다.
“그럼……. 내가 중간자의 위격을 얻으면 내 소환수가 되어 줄 거야?”
이안의 물음에, 잠시 고민하던 루가릭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음……. 이안, 너 정도의 소환술사라면 자격이 있지. 좋아, 네가 중간자의 위격을 얻는다면 한번 고려해 보도록 하겠어.”
이안의 루가릭스 길들이기 1차 시도는 여기까지였다.
그 ‘위격’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정해진 룰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루가릭스의 뜻이 완고했기 때문이었다.
밑도 끝도 없이 ‘중간자’가 되어야 한다는 루가릭스의 단순하지만 막막했던 요구.
물론 아직까지도 길을 찾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제는 최소한의 ‘방향성’을 알게 되었다.
이안은 천천히 회상에서 벗어났다.
‘레벨 업이 그 단서를 가져다 줄 줄이야.’
이안의 한쪽 입꼬리가 슬쩍 말려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