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무스의 비밀 통로 (3)
* * *
‘미친, 무슨 이동속도가 이렇게 빨라?’
허공을 시뻘건 불길로 수놓으며 솟아오르는 한 마리의 불새.
피닉스를 보는 이안의 눈동자가 가늘게 흔들렸다.
끼요오오-!
반면에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이안을 내려다보는 피닉스.
어느새 무기를 스왑한 이안이, 활 시위를 당긴 채로 피닉스를 노려보았다.
‘어지간한 속도의 투사체나 마법으로는 맞출 방법이 없고……. 답은 화살뿐인가.’
끼이익-!
활시위를 끝까지 잡아당기자, 휘어진 활대가 비명을 질렀다.
그와 동시에 하늘로 날아오른 핀이 녀석을 향해 맹렬히 돌진하기 시작했다.
끼아아오!
두 마리 신수의 격렬한 공중전.
피닉스가 움직일 수 있는 범위를 제한시키기 위해 핀을 먼저 보내 싸움을 붙인 것이다.
그래야 녀석의 움직임을 예측하기 더 쉬워지니 말이다.
이어서 이안의 손을 떠난 화살들이 연속해서 허공을 가르기 시작했다.
핑- 피핑- 핑!
그리고 이안이 미리 내려두었던 오더대로, 루가릭스의 흑마법이 영창되었다.
“다크니스 블레싱Darkness Blessing!”
우우웅-!
다크니스 블레싱은 모든 흑마법사들이 가지고 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닌 기초 마법이었다.
대상에게 어둠의 축복을 내려 일시적으로 ‘어둠’속성의 공격력을 부여하는 마법.
기초 마법답게 버프 효과는 크지 않았지만, 지금 이안에게 이 마법을 발동시킨 이유는 당연히 따로 있었다.
어둠 속성의 피해를 묻혀, 헬라임이 다크비전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인 것이다.
이것은 어둠속성의 광역마법을 피닉스에게 맞추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에 생각해 낸 방법이었다.
피닉스는 이동속도가 빠른 것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지상으로 내려오는 일이 없다는 점이 더 큰 문제였다.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파이어 레인이나 블리자드 같은 스킬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지금 루가릭스가 가진 어둠 속성 광역 마법 중에는 그런 종류의 스킬이 없었던 것이다.
하여 이안이 차선으로 생각해 낸 것이 바로 본인에게 어둠속성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빠른 속도로 날아다니는 피닉스를 맞추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래도 한두 발 정도는 맞출 수 있는 실력이 이안에게는 있었다.
쐐애액-!
새카만 어둠의 기운을 흘리는 다섯 발의 화살들이, 허공을 가르며 빠르게 피닉스를 향해 쏘아져 갔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이안의 화살들이 제각기 조금씩 다른 방향을 향해 날아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안이 실수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제법 큰 오차를 두고 날아가는 화살들.
하지만 이것은 결코 실수가 아니었다.
단지 한 발이라도 정확히 맞추기 위한 이안의 의도였을 뿐.
끼에에엑-!
날아오는 어둠의 화살을 느낀 피닉스가 허공에서 재빨리 몸을 틀어 움직였다.
하지만 피닉스가 화살을 피한 곳에는, 다른 두발의 화살이 시간 차를 둔 채 날아들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리 몸놀림이 빠른 피닉스라고 하여도, 이미 지척까지 날아든 화살을 피할 방법은 없었다.
파파팍-!
이안의 예측 샷이 제대로 맞아 떨어진 것이다.
-신수 ‘피닉스’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피닉스’의 생명력이 298,072만큼 감소합니다!
-‘다크니스 블레싱’의 효과가 발동하여, 추가로 15퍼센트(44,710)만큼의 어둠 피해를 입혔습니다.
처음부터 피닉스의 이동속도가 너무 빨랐기 때문에 생각해 낸 비책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쏘아 낸 화살들 중 두 발이 피닉스의 몸통을 파고들자, 이안이 재빨리 헬라임을 향해 오더를 내렸다.
“헬라임, 다크 비전!”
“알겠습니다, 주군!”
스하하아-!
새카만 연기가 피어오름과 동시에, 지상에 있던 헬라임의 신형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이어서 헬라임이 나타난 곳은 피닉스의 바로 위, 까마득히 높은 하늘이었다.
“크하아압!”
커다란 기합성과 함께 헬라임의 대검이 피닉스의 몸통 위로 떨어져 내렸다.
콰콰콰쾅-!
그리고 피닉스의 생명력 게이지는, 단숨에 바닥까지 떨어져 내려갔다.
-가신 ‘헬라임’의 고유능력 ‘다크 비전’이 발동하였습니다.
-가신 ‘헬라임’이 ‘피닉스’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피닉스’의 생명력이 291,8092만큼 감소합니다.
90레벨대인 데다 공격형 소환수인 피닉스의 생명력은, 모르긴 몰라도 100만이 채 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때문에 300만에 육박하는 피해를 입었더라면, 한 방에 사망하는 것이 정상적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바닥까지 떨어져 내렸던 피닉스의 생명력이 단숨에 최대치까지 차올랐다.
그리고 그 광경을 본 이안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역시, 저 세계수의 안에 있는 구슬에서 생명력이 대신 빠져나갔군.’
500만이라는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세계수의 붉은 구슬.
피닉스가 입은 300만의 피해는 구슬에서 빠져나온 생명력으로 곧바로 채워져 버렸고, 때문에 피닉스가 다시 쌩쌩해져버린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구슬을 직접 타격할 방법은 없었다.
구슬을 감싸고 있는 세계수가 무한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결국 피닉스에게 극딜을 넣어야 한다는 얘긴데…….’
추측컨대 600만 정도의 피해를 한 번에 몰아넣을 수만 있다면, 피닉스는 사망하여 알로 변할 것이다.
이안은 뿍뿍이와 카르세우스의 브레스부터 시작해서, 모든 공격을 전부 동원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헬라임이 가지고 있는 패시브인 ‘소울 디스트로이어 Soul Destroyer’가 발동하여 ‘회복 불가’ 상태가 되는 것이 베스트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바라기에는 발동 확률이 너무 낮았다.
소울 디스트로이어의 발동 확률은 겨우 15퍼센트.
헬라임이 계속해서 타격할 수 있다면 충분히 기대해 볼 만하겠지만, 빠르게 허공을 날아다니는 피닉스에게 헬라임이 일반 공격을 집어넣을 기회는 다크 비전을 명중시킨 직후 단 1회 정도에 불과했다.
“자, 한 번에 전부 때려 넣는 거다!”
휘이익-!
이안이 휘파람을 불자, 피닉스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던 핀이 지상으로 쏘아져 내려왔다.
그리고 그 위로 올라탄 이안이, 직접 핀을 컨트롤하여 피닉스를 향해 쇄도해 갔다.
‘한번에 600만이라……, 불가능한 수치는 아니야.’
핀을 탄 이안이 날아오르자, 그를 따라 두 마리의 드래곤이 동시에 솟구쳐 올랐다.
루가릭스와 엘카릭스는 마법들로 전투를 보조해 주기 위해, 본체로 현신하지 않은 채 각자 뿍뿍이와 카르세우스의 등에 올라타 있었다.
아쉽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빡빡이와 라이 등의 소환수들은, 일찌감치 소환 해제를 한 상태였다.
가운데에 피닉스를 둔 채, 서서히 거리를 좁혀 가는 이안의 소환수들.
그리고 다음 순간, 이안의 신호에 맞춰 일제히 고유 능력들이 쏟아져 나왔다.
크아아오-!
커다란 포효와 함께 쏟아져 나오는 카르세우스와 뿍뿍이의 강력한 브레스.
그런데 그와 동시에, 피닉스의 몸통이 갑자기 새빨간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끼요오오오!
피닉스의 깃털 하나하나가 빛을 터뜨린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수많은 갈래의 빛줄기가 거미줄처럼 쏟아진다.
그리고 잠시 후, 이안은 두 눈을 의심해야만 했다.
허공을 가득 메우며 피닉스를 집어삼키는 것 같았던 온갖 고유 능력들이, 피닉스가 내뿜은 빛줄기에 흡수되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고작 3초 정도의 짧은 시간에 벌어진 생각지 못 했던 광경에, 이안은 어이없는 표정이 되고 말았다.
‘이게 피닉스의 고유 능력……?’
피닉스의 정보 창을 확인해 봐야 알겠지만, 방금 보여 준 고유 능력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비록 짧은 시간에 불과하기 때문에 발동 타이밍을 잡기 어렵겠지만, 잘만 사용하면 한 순간에 전장의 판도를 뒤집어 놓을 수 있는 능력인 것이다.
순간적으로 전장에 쏟아지는 모든 공격 스킬들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리니, 전략적으로 뛰어난 활용도를 가진 스킬임이 분명했다.
‘갖고 싶다!’
겪으면 겪을수록, 소유욕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소환수인 피닉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피닉스를 ‘알’로 만드는 것은 더욱 어려워져만 가고 있었다.
한 방에 모든 기술을 쏟아부어 회복할 시간을 주지 않으려 하였던 것이 이안의 전략이었는데, 그에 완벽히 카운터격인 고유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 난감해진 것이다.
‘어쩐다……. 이러면 정말 회복 불가를 믿어야 하는 건가?’
첫 번째 전략이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안은 결코 낙심하지 않았다.
운용할 수 있는 고유 능력만 수십 가지가 넘었기 때문에, 찾아보면 분명히 길이 있을 것 같았다.
‘으, 레미르 님 데려왔으면 좀 쉬웠을 텐데…….’
마법사만이 가지고 있는 몇 가지 고유 능력을 떠올린 이안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다못해 기본 마법 중 하나인 타게팅 슬로우만 걸어 줄 수 있어도, 피닉스의 생명력을 깎는 것이 한결 쉬워질 테니 말이다.
밑에서 이안의 전투를 지켜보던 레무스가, 짧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역시 이안이라고 해도 쉽지 않은 일이었군. 세계수의 품에 있는 피닉스는 무적이라더니, 다 이유가 있는 이야기였어.”
레무스는 결코 이안에게 실망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안은, 레무스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뛰어난 능력들을 보여 주고 있었다.
단지 세계수의 보호를 받는 피닉스의 생존력이 예상했던 수준을 훨씬 상회하는 게 문제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레무스의 의도가 어찌 되었든, 그의 중얼거림을 들은 이안은 자존심이 상하고 말았다.
‘내가 포기할 것 같아? 절대 그럴 수 없지.’
이안은 머릿속을 차근차근 정리하며, 지금 피닉스에게 적중시킬 수 있는 단일 공격 스킬들 중 가장 강력한 것들을 떠올려 보았다.
‘떡대라도 데려왔으면 어비스 홀을 활용해 보는 건데……. 아니지, 방금 보여 줬던 피닉스의 고유 능력이 발동하면 어비스 홀도 흡수되어 버리겠어.’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지금 이안이 활용할 수 있는 단일 공격 스킬들 중에는 헬라임의 다크 비전만 한 녀석이 없었다.
스킬들의 계수가 높은 것은 차치하고라도, 헬라임의 레벨이 파티에서 압도적으로 높았기 때문이었다.
‘헬라임이 가진 고유 능력들을 최대한 활용해 봐야겠어.’
이안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어쨌든 결론을 내렸으니, 그 안에서 최대한 가능성 있는 시도를 해 봐야 했다.
‘다크 비전, 어둠의 역습 그리고 체인?’
헬라임의 고유 능력들을 떠올리던 이안의 두 눈이 갑자기 크게 확대되었다.
“그래, 그거야!”
순간적으로 기막힌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이안의 시선이, 뿍뿍이의 위에 올라 타 있는 루가릭스를 향해 휙 움직였다.
“루가릭스, 너 더미Dummy 소환할 수 있지?”
그리고 이안의 물음에, 루가릭스가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더미라면 당연히 소환할 수 있어. 더미조차 소환하지 못하는 흑마법사는 대륙에 존재하지 않겠지. 한데 그건 왜 묻는 거야?”
더미는 마치 ‘허수아비’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것은 흑마법사로 전직하자마자 얻게 되는 가장 기초 소환술로, 스킬을 발동시킨 대상과 비슷한 생김새를 가진 소환물을 바로 옆에 소환해 내는 기술이었다.
하지만 대상과 닮은 모조품을 소환한다고 해서, 능력치까지 복제되는 것은 아니었다.
더미가 복제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대상의 생명력.
때문에 더미는, 언데드를 많이 소환할 수 없는 초보 흑마법사들이 시간을 벌거나 임시 탱커가 필요할 때 쓰는 마법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 더미에는 커다란 약점이 있었다.
더미에게는 적아敵我에 대한 판단 능력이 없기 때문에, 시스템상 ‘중립’의 존재로 인식되는 것이다.
때문에 적에게 딱히 어그로를 끌 수도 없으며, 심지어 아군의 광역 스킬들에 맞아도 피해를 입는 무능력한 존재인 것.
그러나 이안이 떠올린 ‘기막힌 생각’의 포인트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