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무스의 비밀 통로 (1)
‘엘리카 왕국의 꼭두각시’ 퀘스트는 트리플S 등급의 난이도를 가지고 있는 고난이도 히든 퀘스트이다.
하지만 난이도가 높은 이유가 상대해야 하는 몬스터들이 강력해서는 아닌 듯했다.
퀘스트를 부여한 레무스의 말에 의하면, 비밀 통로의 몬스터들은 뇌옥 던전에 등장하는 언데드들에 비해 훨씬 약한 수준이라고 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난이도가 높게 책정된 이유는 다르게 유추해 볼 수 있었다.
‘왕성 안에 있는 다른 NPC들의 눈을 피하는 게 어려운 거겠지. 만약 걸리기라도 하면 살아나가기 힘들 테니까.’
그렇게 판단한 이안은, 파티원은 물론 가신조차도 거의 대동하지 않고 레무스를 따라왔다.
인원이 많을수록 오히려 클리어하기 힘들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유일하게 대동한 파티원과 가신이 각각 하나씩 있었는데, 바로 루가릭스와 헬라임이었다.
“루가릭스, 잘할 수 있지?”
“물론이다, 이안. 이번에야말로 진정한 내 흑마법 실력을 보여 주겠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다짐하는 루가릭스였다.
그리고 이안의 어깨에 올라타 있던 엘카릭스가 베시시 웃으며 추임새를 넣어 주었다.
“오빠, 파이팅!”
“……!”
루가릭스의 양볼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이안이 루가릭스를 대동한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루가릭스가 구사할 수 있는 고위 흑마법 중에 ‘다크 일루젼’이라는 유용한 마법이 있었던 것이다.
일정 시간 동안 범위 내의 파티원들의 모습을 감출 수 있는 이 스킬이, 이번 퀘스트를 진행하는 데 있어서 꼭 필요하다 생각한 것이다.
물론 흑마법사 랭커인 훈이 또한 이 다크 일루젼 스킬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루가릭스를 꼬여서 데려온 이유는 간단했다.
루가릭스의 레벨이 월등히 높으니까.
훈이보다 강력해서가 아니었다.
다크 일루젼 스킬의 치명적인 약점 때문에 시전자의 레벨이 중요한 것이었다.
‘다크 일루젼은 시전자와 레벨이 같거나 더 높은 흑마법사에겐 무용지물이니까.’
만약 훈이가 다크일루젼을 사용한다면, 훈이 이상의 레벨을 가진 흑마법사가 적들 중에 있을 시 곧바로 파훼당하고 만다.
디텍팅 자체가 통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루가릭스의 레벨은 500.
아마 루가릭스의 다크 일루전을 파훼할 수 있는 흑마법사는 리치 킹 샬리언 정도일 것이다.
루가릭스의 다크 일루전과 함께한다면, 잠입 퀘스트의 경우 난이도가 한 단계 낮아지는 정도의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헬라임을 데려온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헬라임과 루가릭스의 시너지가 좋기 때문이었다.
온갖 광역 흑마법을 구사하는 루가릭스가 있다면, 헬라임의 ‘다크 비젼’ 고유 능력이 빛을 발할 테니 말이다.
물론 새로 얻은 가신을 빨리 전투에 활용해 보고 싶은 마음도 큰 비중을 차지하기는 했다.
“루가릭스, 다크 일루전의 범위가 어느 정도나 되지?”
이안의 물음에, 루가릭스가 곧바로 대답하였다.
“음……. 내 주변으로 반경 5미터 정도일 거다.”
“지속 시간은?”
“내가 자리에서 움직이거나, 혹은 마력이 전부 소모되지만 않는다면, 어둠의 환영이 깨질 일은 없지.”
“그렇군.”
다크 일루젼은 채널링 스킬이다.
때문에 스킬이 시전되는 동안 시전자는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다.
이안은 다크 일루젼의 단점들을 면밀히 파악한 후, 통로의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성에 진입한 뒤에는, 라이랑 할리 정도밖에 소환할 수 없겠어. 카르세우스나 엘카릭스 정도는 폴리모프 상태로 쓸 수 있겠고.’
덩치가 큰 소환수들은 다크 일루젼 안에 숨길 수 없기 때문에, 여러 가지 제약이 따라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상관없겠지?”
던전 안쪽으로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하는 몬스터들을 보며, 이안의 입꼬리가 슬쩍 말려 올라갔다.
왕국군에게 들킬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비밀 통로에서는, 마음껏 싸울 수 있으니 하는 말이었다.
옆에 있던 레무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라바 드레이크들이로군. 이거 생각했던 것보다 강력한 녀석들이 많이 생겨났는데?”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이 된 레무스였다.
하지만 이안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은 표정이었다.
눈앞에 나타난 라바 드레이크들의 레벨은, 400이 간신히 넘는 수준이었으니까.
지하 뇌옥을 클리어하면서 이안의 레벨도 399가 되었기에, 이 정도의 몬스터들은 동레벨이나 다를 것 없었다.
“걱정 말라고, 레무스. 금방 쓸어 버릴 테니까.”
자신감 넘치는 이안의 말에, 레무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역시. 이안, 그대만 믿겠네.”
이어서 이안의 눈앞에, 한 줄의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띠링-!
-NPC ‘레무스(Lv. 379)’가 파티에 합류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이안의 사냥이 시작되었다.
* * *
-‘어둠의 협약(에픽)’ 퀘스트를 성공적으로 클리어하셨습니다!
-차원의 문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쿠쿵- 쿠쿠쿵-!
온통 붉은 마기가 넘실거리며 장엄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마신 ‘데이드몬’의 신전.
한 무리의 마계 유저들이 그 중앙에 둘러 서서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중심에는 시커먼 어둠의 기운이 꿈틀대며 퍼져 나가고 있었다.
고오오오-!
널따란 신전의 전체로 울려 퍼지는 요란한 진동음.
그런데 그때, 어둠의 회오리 옆으로 시뻘건 빛의 기둥이 솟아올랐다.
“……!”
어둠의 회오리에 정신이 팔려 있던 마계 유저들은 순간적으로 당황했지만, 잠시 후 붉은 빛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붉은 빛과 함께 나타난 ‘그’가 마계의 유저들이 기다리고 있던 이였던 것이다.
-훌륭하다, 나의 아들들이여.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군.
적안赤眼에, 타오르는 듯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미남자의 등장.
그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유저들의 앞에 등장한 적 없었던 NPC였지만, 유저들은 그의 대사만으로 즉시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지금 그들이 진행 중인 퀘스트를 내려준 남자가 바로 ‘그’였기 때문이었다.
“마신, 데이드몬 님을 뵙습니다.”
“데이드몬 님께 영광을.”
수많은 마계의 유저들이 데이드몬을 향해 일제히 무릎 꿇고 예를 취하였다.
그야말로 장관이라고 할 만한 광경이었다.
심지어 그들 중에는, 이라한이나 마틴. 사무엘 진 등을 포함한 마계의 랭커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무릎 꿇은 그들을 향해, 데이드몬의 말이 이어졌다.
-그대들 덕에 나는 천상계의 이목을 또 한 번 피할 수 있었다. 허나, 이는 분명 차원의 인과율을 어긴 것이다.
데이드몬의 굵직한 목소리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신전의 내부.
데이드몬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만약 그대들이 이번 기회를 살려 내지 못한다면, 또 언제 차원의 문을 열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더 이상 천계에서 묵과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강렬하게 소용돌이치는 거대한 어둠.
그 앞으로 다가간 데이드몬이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뻗어나간 붉은 마기가 어둠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콰쾅- 콰콰쾅-!
고막이 찢어질 듯, 신전의 내부에 무지막지한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이어서 데이드몬이 입을 열었다.
-지금 인간계는 어리석은 리치킹으로 인하여 혼돈에 빠져있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더 없이 완벽한 기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유저들 중 하나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데이드몬의 앞에 다가섰다.
붉은 갑주에 커다란 대검을 등에 메고 있는 남자.
그의 이름은 이라한이었다.
“그렇습니다, 데이드몬이시여. 저희는 결단코 데이드몬 님을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에, 데이드몬이 흡족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좋다, 그대들을 믿는다.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인간계의 침공에 성공하여 마계의 힘을 보여 주도록 하라!
콰콰쾅- 콰쾅-!
또 다시 커다란 폭발음이 신전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어둠의 회오리가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공간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거대한 차원의 문이 생성되었다.
-가라, 나의 아들들이여. 그리고 때를 기다려라! 우매한 어둠의 군단이 인간들과 공멸할 때. 그때가 바로 마계의 하늘을 열 때이니라!
* * *
많은 RPG게임이 그러하듯, 카일란 또한 고레벨이 될수록 레벨 업에 필요한 경험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특별히 필요 경험치량이 크게 증가하는 구간이 존재했는데, 바로 레벨의 백의자리 숫자가 바뀔 때가 그러했다.
예를 들면 199레벨에서 200레벨이 될 때의 경험치가, 198레벨에서 199레벨이 될 때 필요한 경험치의 다섯 배에서 일곱 배에 육박하는 수준인 것이다.
이 구간이 바로, 레벨 업이 가장 고통스러운 구간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399레벨인 지금의 이안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후우, 90퍼센트 대에 진입한 지가 벌써 사흘 짼데 아직도 레벨이 안 오르냐.’
시야 구석에 떠올라 있는 경험치 게이지를 확인한 이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무기를 다잡았다.
96.7퍼센트라는 높은 수치가 떠올라 있는 이안의 경험치 게이지.
숫자만 보아서는 금방이라도 레벨 업 할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남아있는 경험치 량을 본다면 결코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레벨 업에 필요한 시간을 귀신같이 측정하는 이안이, 이번 퀘스트가 끝나기 전에만 레벨이 올라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레무스의 비밀 통로’ 던전이 생각보다 짭짤한 경험치를 쏟아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등장하는 몬스터들의 경험치가 특별하게 많아서 그런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그저 생각했던 것 보다 몬스터들의 물량이 많았고, 기대했던 것보다 헬라임과 루가릭스의 시너지가 좋았던 덕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물과 얼음의 속성을 가지고 있는 뿍뿍이의 브레스도 제법 도움이 되었고 말이다.
“루가릭스, 다크 스웜프Dark Swamp!”
꾸룩- 꾸루룩!
다크 스웜프가 발동되자, 바닥에서부터 끈적끈적한 어두운 기운이 부글거리기 시작했다.
루가릭스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광범위한 어둠 속성의 공격마법.
이안의 오더가 곧바로 이어졌다.
“헬라임, 다크 비전!”
기다렸다는 듯, 헬라임의 다크 비전 고유 능력이 터져 나왔다.
‘어둠’ 속성의 스킬에 피격된 대상의 앞으로 순간 이동하여 강력한 피해를 입히는 헬라임만의 특별한 고유 능력.
어둠의 늪에 오염된 일곱 마리의 드레이크 중 가장 전면에 나와 있던 한 마리의 앞으로 시커먼 기운이 피어올랐다.
스르륵-!
허공에서 솟아오른 어둠의 기운은, 순식간에 헬라임의 형상이 되어 나타났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보랏빛 기운이 번쩍 하며 거대한 대검이 떨어져 내렸다.
콰아앙-!
-가신 ‘헬라임’의 고유능력 ‘다크 비전’이 발동하였습니다.
-가신 ‘헬라임’이 ‘라바 드레이크’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라바 드레이크’의 생명력이 1,998,039만큼 감소합니다.
루가릭스에게는 강력한 광역 공격 마법이 많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티어가 높지 않은 공격 마법인 다크 스웜프를 주문하는 데에는 당연히 이유가 있었다.
첫째로 다크 스웜프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짧기 때문이었으며, 두 번째로 다크 스웜프가 각종 디버프를 선사하기 때문이었다.
다크 스웜프로 입히는 대미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적에게 어둠속성의 공격을 ‘묻히는’게 가장 중요했으니 말이다.
다크비전을 사용한 직후의 헬라임은 뻥튀기된 공격력으로 인해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가지게 되고, 거기에 다크 스웜프의 디버프가 중첩되면 무지막지한 대미지가 들어가게 된다.
400레벨의 영웅 등급 몬스터인 라바드레이크 정도는, 순식간에 썰어 버릴 수 있는 것이다.
쾅- 콰쾅-!
허공에 보랏빛의 광채가 번쩍거리며, 총 일곱 번의 굉음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어둠을 옮겨 다니며 떨어져 내린 헬라임의 대검으로 인해, 일곱 마리 드레이크들이 한 줌 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물론 그 한 방에 드레이크가 사망한 것은 아니었다.
헬라임이 활약할 동안 이안의 다른 소환수들이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200만이나 되는 다크 비전의 대미지가, 거의 대부분의 생명력을 지워 버렸다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마무리 깔끔하고……!”
흥이 나는지 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오는 이안.
별로 도움도 되지 않으면서 경험치를 나눠먹는 ‘레무스’만 제외한다면, 이안의 파티는 완벽하기 그지없었다.
“레무스, 가만히 있지 말고 뛰어다니면서 몬스터라도 좀 몰아 와.”
“그, 그게 좋겠군.”
이안의 한 마디에, 땀을 뻘뻘 흘리며 몬스터들을 모아 오는 전직 국왕 레무스.
그가 이안의 오더를 따르는 것은 이안과의 친밀도의 영향이라기보다 뭐에 홀린 듯한 움직임에 가까웠다.
모두가 완벽히 맞물려 돌아가는 이 파티 안에서 제대로 된 역할을 해내지 못하는 것은, 마치 죄라도 짓는 듯한 느낌이었다.
한차례 몰이사냥이 끝난 뒤, 이안이 레무스에게 물었다.
“레무스, 이제 얼마나 남은 거지?”
“비밀 통로 말인가?”
“그래. 피닉스가 있다는 방까지 가려면 얼마나 더 가야 할까?”
“걱정 마라, 이안. 이제 곧 도착할 때가 되었다. 내 생각보다 두 배는 빨리 통로를 돌파한 것 같군.”
이안의 능력에 놀랐다는 듯, 엄지손가락을 치켜드는 레무스였다.
하지만 칭찬을 받았음에도, 이안은 썩 기분 좋은 표정이 아니었다.
“에, 벌써……?”
던전 최초 발견으로 인한 경험치 버프가 아까웠던 이안은, 내심 비밀 통로가 많이 남아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하지만 이안의 그런 마음을 알 턱이 없는 레무스는 고개를 갸우뚱했고, 그와 별개로 사냥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렇게 30분 정도가 더 지났을까?
철컹- 촤라락-!
통로의 끝에 있던 거대한 철문이 열리며, 던전의 안쪽으로 새하얀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리고 그 빛의 중심에는, 지금껏 본 적 없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거목 한 그루가 우뚝 솟아올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