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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단서 (6)
* * *
“그러니까…… 현재 엘리카 왕국의 국왕 자리에 있는 놈이 샬리언의 하수인이라는 거지?”
“그렇다, 이안. 심지어 그는 ‘인간’이 아니다.”
“인간이 아니라면 뭐지? 언데드나 마족이라도 된다는 건가?”
이안의 물음에, 레무스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다. 녀석은 마족이지. 아니, 정확히는 마수라고 해야겠군.”
“……?”
“나와 완벽히 같은 모습을 한 채 왕좌에 앉아있는 그 녀석의 정체는, 바로 ‘도플갱어’다.”
레무스로부터 새로 받은 퀘스트인 ‘엘리카 왕국의 꼭두각시’ 퀘스트.
이 퀘스트의 내용은 간단했다.
엘리카의 왕성에 숨어들어 가짜국왕을 처치한 후, 그 자리에 다시 ‘진짜 레무스’를 앉히면 되는 것이다.
다만 전제조건이 하나 있었다.
왕성 내에 그 누구도 왕이 바꿔치기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서는 안 된다는 것.
리치 킹에 의해 바꿔치기 된 엘리카 왕국의 왕을, 다시 원래의 왕으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는 것이 퀘스트의 내용인 것이다.
리치킹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말이다.
이안은 황당한 표정이 되어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라타펠 영지에 잠입하는 것도 쉽지 않았는데, 왕성엘 어떻게 몰래 들어가란 말야? 게다가 짐짝도 하나 데려가야 하는데…….’
이안은 세상 편한 표정을 하고 있는 레무스를 한차례 응시하며, 작게 한숨을 내쉬는 이안.
라타펠 영지에 잠입한 방식과 비슷한 방법을 사용한다면, 불가능하다고까지 말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정도의 난이도와 리스크를 감수하느니, 조금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군대를 대동하여 밀어 버리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이안이 레무스에게, 불만을 제기했다.
“이게 비책이야?”
“물론이다.”
“내가 분명 확실히 도움 되는 비책이어야 한다고 했을 텐데?”
하지만 레무스는 여전히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이안의 의문에 대답했다.
“당연히 확실히 도움 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내가 리치킹이 알아채지 못하게 다시 왕좌에 앉게 되면, 로터스 왕국군은 그야말로 무혈입성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니, 그게 아니고……. 몰래 잠입해서 도플갱어인지 뭔지를 죽이고 널 그 자리에 세우는 것 자체가 너무 비현실적인 난이도잖아. 전면전으로 함락시키는 것보다 오히려 더 어려울 것 같으니 하는 말이지.”
그제야 이안의 불만이 이해된 레무스가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 그런 걱정이라면 할 만하군.”
“너무 태평한 거 아냐?”
“나야 태평할 수밖에. 그대의 능력이라면 크게 어렵지 않은 임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
이안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레무스를 응시했다.
잠시 뜸을 들인 레무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왕성의 북서쪽에 비밀 통로가 하나 있다.”
“비밀…… 통로?”
레무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비밀 통로. 내성까지 쭉 이어져 있는, 오직 나만이 알고 있는 통로지.”
“오호?”
이안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확실히 레무스의 말처럼 비밀통로 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생각보다 퀘스트가 쉬울 수도 있다.
‘그래서 난이도가 S밖에 나오지 않은 건가?’
물론 S라는 난이도가 쉬운 난이도는 아니었지만, 최근까지 항상 트리플S등급의 퀘스트만 진행해 오다 보니, 퀘스트 내용에 비해 쉬운 난이도로 보였던 것.
하지만 비밀통로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 보니, 적정 수준의 난이도가 책정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내 능력이라면 어렵지 않을 임무라는 건, 대체 무슨 말이지?’
문득 레무스의 말을 되새기자 떠오른 하나의 의문.
그리고 그 의문은 금방 풀릴 수 있었다.
* * *
쏴아아-!
시원스럽게 쏟아지는 물줄기 소리.
소리에 걸맞은 시원한 수압을 느끼며, 진성은 욕조에 누워 있었다.
“으음, 노곤하네…….”
몇 개월 전 이사 온 새 집은, 여러모로 마음에 드는 곳이었다.
이번에 새로 지어진 신축 아파트였기 때문에 기존에 살던 원룸과는 쾌적함이 비교할 수 없었던 것이다.
특히 진성이 누워있는 이 욕실은 그야말로 비교 불가였다.
답답하게 쫄쫄쫄 흘러나오던 빌라의 샤워기만 쓰던 진성에게 콸콸 쏟아지는 쨍쨍한 물줄기란, 샤워할 때마다 온천에라도 온 듯한 느낌을 받게 해 주는 것이었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가만히 누워 있으면, 그야말로 천국이 따로 없었다.
“흐아암!”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는 진성.
하지만 이 와중에도 진성의 머릿속에는, 온통 카일란에 대한 생각만이 가득했다.
‘접속하면 엘카릭 왕성으로 향해야겠어. 이번에는 딱히 파티를 대동할 필요도 없을 테니 곧바로 움직여야지.’
진성은 눈을 감은 채, 로그아웃하기 전 ‘레무스’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려 보았다.
‘피닉스……라고 그랬었나? 흥미가 동한다는 말이지.’
로터스 왕국을 수호하는 신수는 신룡 ‘카르세우스’와 그리핀 ‘핀’이다.
그리고 이처럼, 다른 왕국들도 제각각 하나 이상의 수호신수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엘카릭 왕국 또한 마찬가지였다.
-우리 엘카릭 왕국의 수호신수는, 전설의 신수인 피닉스다.
엘카릭 왕국을 수호하는 신수는, 이안조차도 아직 본 적이 없는 소환수인 피닉스.
심장에서 타오르는 불꽃이 꺼지지만 않는다면 ‘불사不死’한다는 전설 속의 신수가, 엘카릭 왕국의 수호신수였던 것이다.
그리고 레무스에 의하면, 이 비밀통로를 지키고 있는 녀석이 바로 피닉스라 하였다.
-비밀통로의 끝에는, 한 그루의 거대한 세계수가 솟아 있다. 그리고 그 세계수의 안에, 피닉스의 둥지가 있지.
-흐음. 녀석을 처치해야 그곳을 지날 수 있는 건가?
-그렇지 않다. 피닉스를 처치하는 것이라면, 그대가 아니어도 누구든 할 수 있다. 지금 세계수에 둥지를 틀고 있는 녀석은, 아직 태어난 지 1년도 채 안 된 어린 녀석일 테니 말이야.
-그래?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
-녀석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
-마음……?
이안은 레무스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그 내용들을 머릿속으로 하나하나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세계수의 뒤쪽에는 왕성으로 통하는 문이 있다. 하지만 그곳은 강력한 결계로 막혀 있지. 그리고 그 결계를 열기 위해선 화염주가 필요하다.
-화염주? 그건 또 뭐야?
-피닉스가 일생에 한 번 만들 수 있다는 새빨간 구슬이지.
-음……?
-피닉스는 자신이 인정한 주인에게만, 이 화염주를 선물한다.
-피닉스의 주인은, 엘리카 왕국의 왕이었던 너 아니었어?
-나의 피닉스는 이미 세상에 없다. 샬리언에 저항하다 소멸하였지.
-그……렇군. 그렇다면 비밀통로에 있다는 녀석은……?
-그가 남긴 알에서 나온 피닉스다.
레무스가 키우던 피닉스는 샬리언의 손에 소멸되었다.
하지만 둥지에 남아 있던 그의 알이 레무스가 잡혀 있던 동안 깨어난 것이다.
소환술사가 아닌 이가 피닉스의 주인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알을 깨고 나오는 순간 그와 눈을 마주쳐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 둥지에 있는 녀석은 홀로 깨어났고, 때문에 녀석의 주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녀석을 테이밍할 능력이 있는 소환술사 뿐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소환술사라서 어렵지 않을 것이라 말한 거였군.
-그렇다. 정확히 말하자면, 뛰어난 소환술사이기 때문이지. 신룡조차 테이밍한 소환술사인 그대라면, 분명 피닉스도 길들일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 그렇군…….
엘카릭 왕성의 비밀 통로는, 사실 레무스가 비상시 탈출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때문에 화염주를 가지고 있는 레무스 본인만이 지나다닐 수 있는 결계를 설치해 놓은 것이다.
물론 레무스를 주인으로 여기던 피닉스가 소멸할 때 그 화염주도 같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지금은 본인이 만들어 놓은 결계를 통과할 수 없지만 말이다.
-만약 그대가 피닉스를 처치한다고 해도, 결계를 강제로 열 수는 있다.
-어떻게?
-마음먹고 부순다면 부술 수 있는 결계니까.
-…….
-다만, 그렇게 되면 왕성을 지키는 경비병들이 침입을 알아채게 되겠지.
-무조건 피닉스를 테이밍해야겠네.
촤아아-!
생각을 전부 정리한 진성이, 천천히 욕조에서 일어났다.
‘피닉스’라는 녀석의 등급이 전설일지, 혹은 신화일지조차 아직 모르지만, ‘신수’라는 타이틀을 가진 녀석을 만난다는 것 자체가 소환술사인 그에게는 설렐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물기를 닦고 옷을 입은 진성이 캡슐이 있는 방으로 향하려 할 때, 거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성아, 밥은 먹고 게임하자.”
부모님과 함께 살던 십수 년 동안 최소 몇천 번 정도는 들었을 잔소리.
하지만 지금은 절대로 잔소리로 들리지 않는 목소리였다.
“흐흐, 알겠어, 하린아. 메뉴는 뭐야?”
왜냐하면 하린의 음식은, 게임을 잠깐 미뤄 둬도 될 정도로 맛있었기 때문이다.
* * *
레무스가 만들었다는 비밀 통로의 입구는, 생각보다 진입하기 쉬운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위치 자체는 엘리카 왕국의 내부였지만, 입구와 연결된 포털이 인접한 다른 왕국인 ‘폴루스 왕국’과 이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폴루스 왕국은 로터스와 적대관계가 아니었고, 덕분에 이안은 손쉽게 포털이 있는 위치를 찾아 이동할 수 있었다.
‘물론 리치 킹 에피만 끝나면 다음 차례는 폴루스 왕국이지만 말이야.’
발등에 떨어진 불만 꺼지면 곧바로 폴루스 왕국에 선전포고를 할 생각이었지만, 어쨌든 지금 폴루스 왕국은 로터스와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폴루스 왕국의 외곽에 있는 소규모의 남작령인 케미크 영지.
영지의 구석에 있는 작은 오두막으로 이안을 데려간 레무스가 그에게 당부의 말을 건네었다.
“비밀 통로 안에는, 제법 강력한 몬스터들이 많이 있을 거야.”
그리고 생각지 못했던 레무스의 이야기에, 이안은 조금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에? 대피용으로 만들어 놓은 비밀 통로라며. 그런 곳에 몬스터들은 왜 풀어 놓은 건데?”
레무스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야 ‘화염주’만 가지고 있으면, 통로 안에 있는 어떤 몬스터도 공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음……?”
“통로 안에 있는 몬스터들은 전부 화염 속성의 몬스터들이다. 그리고 화염 속성을 가진 거의 대부분의 몬스터들은, 피닉스를 공격하지 않지.”
흥미로운 표정이 된 이안이 반문했다.
“오호, 그래?”
“정확하지는 않지만, 피닉스보다 상위의 신수가 아닌 이상은 그렇다고 알고 있어.”
“그럼 ‘화염주’라는 물건을 피닉스로 인식한다는 건가?”
“나도 잘은 모르지만, 비슷하지 않을까?”
“그렇군.”
“그런데 화염주가 있다고 해서 아예 공격하지 않는 건 아니야.”
“응? 그건 또 무슨 소리야?”
“화염주가 있다고 해도, 먼저 공격당한다면 적대감을 드러내더라고.”
“아하, 그거야 그렇겠지.”
이안은 지금까지 ‘화염주’라는 물건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었다.
단지 전설의 신수 중 하나인 ‘피닉스’라는 소환수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
한데 레무스의 설명을 듣고 나니, ‘화염주’ 또한 보통 아이템이 아닌 듯했다.
‘이거 화염 속성 던전에 들어갈 때 엄청나게 유용할 수 있는 아이템이겠는데?’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은 고위 던전들 중 분명 화염 속성의 몬스터들로 구성된 400레벨 후반대의 던전들도 즐비할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곳에서 화염주를 가지고 있다면, 던전의 모든 몬스터들이 마치 초보자 사냥터처럼 후공後攻 몬스터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생각보다 던전의 난이도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었다.
‘좋아, 비밀 통로인지 뭔지, 얼른 들어가 볼까?’
오두막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타는 듯이 붉은 빛깔을 가진 작은 포털이 하나 열려 있었다.
고개를 돌린 이안과 레무스의 눈이 한차례 마주쳤고, 레무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저 포털로 들어가면 돼. 먼저 들어가면 따라 들어가도록 하지.”
레무스의 말이 끝나자마자 이안은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고, 포탈을 밟은 이안의 신형이 순식간에 안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어서 일시적으로 새까맣게 변한 이안의 시야에 한 줄의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띠링-!
-‘레무스의 비밀 통로’ 던전에 입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