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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단서 (2)
* * *
폭풍.
그것은 말 그대로,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폭풍’ 그 자체였다.
본체로 현신한 뿍뿍이, 어비스 드래곤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냉기의 브레스를 시작으로, 카르세우스의 난폭한 힘을 담은 파괴적인 브레스.
거기에 온갖 광역 마법들까지 일제히 쏟아져 내리니, 던전에 장관이 펼쳐진 것이다.
물론 언데드들은, 처음 터져 나온 뿍뿍이의 브레스만으로도 모조리 지워져 버렸다.
이미 훈이의 소울 러스트에 지속적인 피해를 입어서, 생명력이 1퍼센트도 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비스 드래곤의 강력한 브레스가 그 정도 생명력도 깎아내지 못할 리 없다.
때문에 광역 마법들의 향연 속에 홀로 서 있는 몬스터는 라카메르 단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라카메르가 회복할 수 있었던 생명력은, 게이지에서 육안으로 확인하기도 힘들 정도로 미미한 수준이었다.
이안의 계산이 정확히 맞아 들어간 것이다.
“됐어!”
결과적으로 라카메르의 생명력은, 순식간에 30퍼센트 정도의 수준까지 떨어져 내렸다.
라카메르가 커다란 목소리로 일갈했다.
“놈들, 잔머리를 굴리는구나!”
라카메르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뛰어난 AI라고 하더라도, 이런 전개까지 예측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한 번에 들어온 엄청난 대미지에 기겁을 한 라카메르가, 허겁지겁 소환 마법을 캐스팅하였다.
새로운 언데드를 소환해서 방패로 삼아야만, 바닥까지 떨어진 생명력을 다시 회복할 수 있으니까.
“나, 라카메르의 이름으로……!”
하지만 그때였다.
피이잉-!
어디선가 날카로운 파공성이 울려 퍼지더니, 라카메르의 오른쪽 어깨에 화살 한발이 틀어박혔다.
퍽-!
화살 자체가 가지고 있는 대미지는 미미했으나, 그것은 다른 의미로 치명적이었다.
-79,480만큼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집중력이 흩어집니다.
-소환 마법의 캐스팅이 취소됩니다.
단 한 발의 화살로 인해, 라카메르의 소환 마법 캐스팅이 끊겨 버린 것이다.
이제 다시 소환 마법을 쓰기 위해서는 1분 정도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지나야 하는 것.
그리고 이것은 이안의 센스 플레이이기도 했지만 라카메르의 실수였다.
그 실수란 바로…….
‘럭키! 패턴 꼬이니까 블랙실드도 안 뜨는구나!’
순간적으로 이뮨Immune 상태로 만들어 주는 흑마법사의 실드 마법인, ‘블랙 실드’를 발동시키지 않은 것이다.
원래 라카메르의 전투 패턴은 블랙 실드를 발동시킨 뒤 소환 마법을 캐스팅하는 것이었다.
이뮨 상태가 되면 모든 상태 이상에 면역이 될 뿐만 아니라, 어떤 공격을 받아도 모션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즉, 라카메르가 블랙실드를 먼저 발동시켰더라면 이안의 화살을 맞아도 소환 마법이 발동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아니, 화살이 아니라 메테오가 떨어졌다고 하더라도 캐스팅이 끊어지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대미지야 전부 들어오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계산되지 않은 상황에 AI가 꼬여 버렸고, 덕분에 라카메르는 블랙실드도 발동시키지 않은 채 소환 마법을 먼저 써 버린 것이다.
어쨌든 그의 실수 덕에 1분이라는 시간을 번 이안 일행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카카, 꿈꾸는 악마!”
이안의 목소리가 던전에 울려 퍼졌고.
“어둠이…… 내린다.”
허공을 부유하고 있던 카카의 두 눈이, 천천히 감기기 시작했다.
* * *
가상현실과의 컴퓨터실은 적막에 휩싸였다.
갑자기 이렇게 조용해진 것은 아니었다.
카일란 한국 서버 최고 랭커들로 구성된 최상위 티어의 파티.
최고 수준의 플레이를 실시간으로 시청하다 보니, 자연스레 말들이 사라진 것이다.
컴퓨터실에 모여든 학생은 어느새 열 명도 넘었지만, 어느 한 명 입을 열지 않았다.
그들은 랭커들의 플레이 하나조차 놓치지 않겠다는 듯, 스크린에 눈을 고정한 채 놀라운 집중력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런데 컴퓨터실에 있던 학생 중 한 명인 형우는, 유일하게 아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형우의 카일란 캐릭터는 ‘기사’ 클래스였는데, 지금 이안의 파티에 기사 클래스의 랭커가 없기 때문이었다.
형우 본인이 기사 클래스인 만큼, 기사 랭커 유저의 활약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유현 선배도 같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유현, 즉 헤르스는 저 파티의 랭커들만큼의 실력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래도 상위 1퍼센트의 최상위권 유저임에는 분명했고, 형우는 기사 클래스가 이 파티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몹시 궁금했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영상의 재미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아쉬운 부분과 영상 자체의 퀄리티는, 별도의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인 클래스의 랭커가 없는 영상이기 때문에, 형우의 시선은 계속 이안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나저나 저 라카메르라는 보스몬스터는 정말 대단하네. 랭커들의 레이드는 난이도가 정말 장난 아니구나.’
이제 갓 50레벨 정도인 형우의 던전 사냥은 단출하기 그지없었다.
방패로 막고 검으로 베고.
방패 막기로 90퍼센트 이상의 피해 흡수율을 띄우면 우쭐할 수 있는, 그런 소소한 사냥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영상 속에 있는 이안은 기사 클래스도 아닌 주제에 90퍼센트 이상의 피해 흡수를 밥 먹듯이 했다.
높은 피해 흡수율이 뜨면 이펙트가 다르기 때문에, 화면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방패를 들었다가 해제했다가 자유자재로 무기를 스왑하며, 신들린 듯한 컨트롤을 보여 주고 있었다.
초보 기사인 형우로서는 엄두도 나지 않는 플레이였다.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
형우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입맛을 다셨다.
랭커들의 플레이 영상을 시청하다 보면, 당장이라도 캡슐로 뛰어가고 싶은 마음이 들기 마련이었다.
그들이 보여 준 멋진 플레이를, 직접 게임 상에서 직접 재현해 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마치 음악 경연 프로를 보다 보면 노래방에 가고 싶어지는 것과 비슷한 이치랄까.
물론 직접 해 보면, 좌절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땀을 뻘뻘 흘리며 수정구를 컨트롤 중인 소진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영상을 시청 중일 터였다.
그런데 그때, 조용하던 장내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허, 허얼!”
“와,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우와……!”
-캬아아오!
-콰쾅- 콰콰쾅-!
스피커를 통해 엄청난 굉음이 울려 퍼지며, 동시다발적으로 수많은 광역 스킬들이 전장을 휩쓸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대규모 전투 영상을 시청하면, 전장에 광역 스킬이 쏟아지는 것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정확히 자로 잰 듯 완벽한 타이밍에 동시에 터지는 광역 마법은, 다들 처음 본 것이다.
“헐, 대박! 어떻게 저렇게 광역 스킬 발동 타이밍을 정확히 다 맞춘 거지?”
“쩐다! 470레벨 보스 생명력이 한 번에 다 깎였어!”
“우오오!”
그런데 이 와중에 재밌는 것은, 그 장면을 본 사람의 이해도에 따라 반응이 제각각 다르다는 것이었다.
카일란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형우의 경우는, 단순히 이펙트와 파괴력에 놀랐으며…….
“와, 광역 스킬 진짜 멋있다! 나도 기사 때려치우고 마법사나 할까?”
이제 200레벨 정도가 된 마법사 클래스인 하영은, 각기 발동 시간이 다른 마법들을 동시에 터뜨린 것에 감탄했다.
“헐, 대박. 저 스킬들 캐스팅 시간 다 다를 텐데, 어떻게 동시에 터지게 한 거지? 우연인 건지, 아니면 오더가 쩌는 건지…….”
하지만 이들 중 가장 이해도가 높은 소진이나 세미의 경우,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입을 쩍 벌린 채 감탄하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던 것이다.
세미는 이 소름 돋는 이안의 설계에 대해 학우들에게 침을 튀겨 가며 설명해 주고 싶었지만, 실행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도저히 영상에서 눈을 뗄 수 없었으니, 설명할 시간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 * *
광역 마법의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뒤, 남아 있는 라카메르의 생명력은 30퍼센트 남짓이었다.
이안의 계산대로라면 이 정도의 생명력은, 파티원들이 공격을 집중할 시 3분 안으로 깎아낼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라카메르의 마지막 저항은 생각보다 격렬했고, 덕분에 애를 좀 먹어야 했다.
거의 실금정도의 생명력을 남긴 라카메르가, 계속 새로운 언데드들을 소환하여 생명력을 회복하며 저항한 것이다.
그렇게 라카메르가 저항한 시간은 추가로 3분 정도.
그러나 결국, 라카메르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이안 파티의 화력도 화력이었지만, 뮤란의 검에 깃든 힘이 무지막지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뮤란의 속성은 ‘어둠’에게 배의 피해를 줄 수 있는 ‘빛’ 속성.
카일란의 스토리상 ‘리치 킹을 봉인한 영웅’이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빛 속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심판의 검……!”
콰르릉-!
뮤란이 양손을 모아 가슴으로 가져가자, 묵직한 진동음과 함께 그의 전신에서 하얗고 찬란한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이어서 공중을 부유하던 그의 세 자루 대검이 하늘로 떠오르더니, 커다란 백색 뇌전과 함께 라카메르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콰쾅- 콰쾅 쾅!
그리고 그것이, 라카메르의 마지막이었다.
“크윽, 하찮은 인간들 따위에게 패배하다니…….”
역시 진부한 대사와 함께 쓰러지는 어둠의 하수인 라카메르.
상황에 몰입한 훈이는, 장단을 맞춰 주었다.
“후후, 그릇된 어둠의 최후다, 샬리언의 하수인이여.”
하지만 옆에 있던 이안이 훈이의 산통을 깨어 버렸다.
“티어만 올려 주면 리치 메이지라도 바로 전직할 녀석이…….”
그에 뜨끔한 훈이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우쒸.”
어쨌든 뮤란의 공격을 마지막으로 라카메르의 생명력은 모두 소진되었다.
스하아아-!
그리고 사이하고 섬뜩한 소리와 함께, 라카메르의 신형이 연기로 변하여 허공으로 흩어졌다.
이어서 이안 일행의 눈앞에, 시스템 메시지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띠링-!
-샬리언의 하수인, 리치 위저드 ‘라카메르’를 성공적으로 처치하셨습니다!
-경험치를 109,789,092만큼 획득합니다.
-명성을 70만 만큼 획득합니다.
-영웅, 뮤란과의 친밀도가 20만큼 증가합니다.
(후략)
던전의 보스 몬스터를 처치하였을 때 통상적으로 나타나는 보상 메시지들을 비롯해서…….
-‘라카메르의 분노’ 퀘스트를 성공적으로 완수하셨습니다.
-남은 제한시간 : 9분 27초
-클리어 등급 : SSS
-‘대마법사의 타락한 해골 목걸이(전설)’ 아이템을 획득하셨습니다.
-‘죽음의 기사 파멸대검(전설)’ 아이템을 획득하셨습니다.
퀘스트 성공을 알리는 메시지들까지.
이안은 뿌듯하고 기쁜 마음이 들었지만, 획득한 아이템들을 확인하고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음, 보상이 좀 짠 것 같은데…….”
무려 전설 등급의 아이템 두 개를 얻었으나, 퀘스트의 난이도에 비해서는 만족스럽지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본인에게 별로 쓸모도 없는 아이템들이었기에 아쉬움은 더했다.
‘대검이야 가신한테 쥐어 줘도 되는데……. 이 목걸이는 그냥 경매장에 팔아야겠어.’
그리고 당연한 얘기겠지만, 아쉬워하는 것은 이안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파티원들도 보상이 짜다는 생각을 하는 중이었던 것이다.
각기 다른 보상을 손에 넣었지만, ‘급’ 자체는 비슷했으니 말이다.
“에이, 신화 등급 하나 정돈 줄 줄 알았는데.”
“맞아. 괴물 같은 놈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LB사가 양심이 없네.”
기대가 컸던 것인지, 아쉬운 마음에 저마다 한 마디씩을 던지는 파티원들이었다..
그런데 그때, 이대로 끝인 줄만 알았던 시스템 메시지들이 추가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띠링-!
-‘라카메르의 분노’ 퀘스트의 히든 클리어 조건을 충족하셨습니다!
-‘라카메르의 분노 Ⅱ (히든)(에픽)’ 퀘스트가 발동합니다.
이어서 축 쳐져 있던 이안 일행의 눈빛이, 다시 반짝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