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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라임과의 재회 (7)
* * *
던전 전체의 벽이 꿈틀대며 굉음이 울려 퍼졌다.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이리저리 움직이며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 내는 지하 뇌옥의 석벽들.
던전의 구조가 바뀌는 동안, 이안은 미니 맵을 오픈하여 바뀔 구조를 미리 파악하였다.
공간이 뒤틀리며 움직이는 중이었지만, 미니맵에는 완성된 구조가 먼저 나타나기 때문이었다.
‘커다란 반구半球 형태의 구조네. 가운데는 뭔가 높다란 구조물이 하나 있고. 복잡하지 않아서 좋군.’
좁고 기다란 복도형의 맵이, 어느새 널찍한 돔처럼 바뀌어 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맵의 정중앙에서 거대한 구조물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쿠쿵- 쿠쿠쿠쿵-!
이안 일행은 그 모습을 넋을 놓고 지켜보았다.
“와, 아무리 게임이라지만 진짜 엄청나네.”
“스케일 죽이는구먼.”
구조물의 생김새는 마치 모래시계와 비슷한 느낌을 하고 있었다.
가운데가 홀쭉하게 들어가 있었으며, 아래위로 불룩하게 튀어나온 형상.
그런데 그때, 이안의 시선이 홀쭉하게 들어간 구조물의 중심을 향해 고정되었다.
새카만 빛이 넘실거리는, 마치 어둠의 핵과 같은 곳.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블랙홀 같은 위치에 어두운 그림자 하나가 두둥실 떠 있었다.
그리고 이안은 그 그림자의 정체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헬라임!’
이안은 혼란에 빠졌다.
분위기를 보아서는, 이미 어둠에 물들어 버린 것도 같은 헬라임의 모습이었다.
만약 헬라임이 데스나이트가 되었다면, 또 하나의 보스가 생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신화 등급임이 분명한 헬라임이 데스나이트가 되어 어둠의 힘까지 얻게 되면, 리치 메이지보다 더 강력할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때, 이안 일행의 눈앞에 생각지 못했던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띠링-!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히든 돌발 퀘스트가 발생합니다.
-‘라카메르의 분노’ 퀘스트가 발동합니다.
“……?”
이어서, 시스템 메시지의 밑으로 커다란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라카메르의 분노 (히든)(돌발)’ -
어둠의 왕국 엘리카.
그리고 라타펠 영지는 이 엘리카 왕국의 중심에 있는 최고의 요새였다.
일만의 병사만 있으면 십만 대군도 막아 낼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라타펠 영지는 견고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영지군의 허가 없이는 들어올 수도 나갈 수도 없는 철통같은 곳.
때문에 엘리카 국왕은 왕국을 건국함과 동시에 이 라타펠 영지에 지하 뇌옥을 짓도록 명령했다.
왕국의 모든 죄수들을 이송하여 가두어 놓을, 결코 탈출할 수 없는 거대한 지하 뇌옥을 말이다.
하지만 엘리카가 리치킹 샬리언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된 뒤, 지하 뇌옥은 완벽히 변질되어 버렸다.
단지 죄수를 수용하는 뇌옥으로서의 역할을 하던 지하 뇌옥이 리치킹의 어둠의 군대를 양성하는 양성소가 되어 버린 것이다.
리치킹의 하수인인 라카메르는 이 뇌옥 안에서 수많은 언데드들을 양성했다.
그리고 그 재료는 당연히 왕국의 죄수들이었다.
수감됨 수천명의 죄수들을, 모조리 언데드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루스펠 제국의 황실기사단이 뇌옥으로 이송되어 왔다.
그리고 그들을 확인한 라카메르는 무척이나 기뻐했다.
루스펠 제국의 황실기사단은 강력한 언데드인 데스나이트를 만들기에 최고의 재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기사단장 ‘헬라임’은 엄청난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라카메르는 헬라임을 쉽게 언데드로 만들어 버리지 못하였다.
그저 그런 데스나이트로 만들어 버리기에는, 헬라임이 가진 잠재력이 아까웠던 것이었다.
물론 데스나이트로 만들더라도 강력한 언데드가 될 것임은 분명했지만, 그에게는 오랜 염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리치 나이트’를 만들어 내는 것.
리치 나이트의 전투력은 리치 메이지를 훨씬 상회한다.
때문에 리치 나이트를 만들어 내어 자신의 권속으로 만든다면, 어둠의 군단 내에서 샬리언 바로 다음의 입지까지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라카메르는 헬라임을 재료로 한다면, 리치 나이트를 완성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하여 라카메르는 오랜 시간 공을 들였다.
그리고 그 결과, 헬라임을 리치 나이트로 만드는 데 거의 성공하였다.
이제 며칠만 지나면, 완벽한 리치나이트가 된 헬라임을 권속으로 부릴 수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실험이 끝나가던 가장 중요한 순간에, 당신의 일행이 실험실에 들이닥쳤다.
하여 라카메르는 분노하였다.
그는 자신의 모든 능력을 동원하여 당신들을 죽이려 할 것이다.
분노한 라카메르를 최대한 빨리 처치하도록 하자.
만약 그를 시간 내에 처치하지 못한다면, 리치 나이트 헬라임이 깨어나 당신들을 공격할 것이다.
퀘스트 난이도 : SSSS
퀘스트 조건 : 라카메르의 실험이 끝나기 전에 실험실을 발견한 유저.
제한 시간 : 35분
*제한 시간이 지나기 전에 잠들어 있는 헬라임을 공격하여 처치한다면, 제한 시간이 사라지게 됩니다.
*제한 시간이 지나 리치 나이트 ‘헬라임’이 깨어나더라도 퀘스트는 실패하지 않습니다.
*제한 시간이 지나 헬라임이 깨어날 시, 헬라임까지 처치해야만 퀘스트가 클리어됩니다.
보상 : 알 수 없음. (퀘스트 진행 방향에 따라 보상이 달라집니다.)
*유저에 따라 보상이 달라집니다.
길쭉하게 늘어뜨려진 퀘스트 내용을 겨우 끝까지 읽은 이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세 번째 몬스터 웨이브가 시작될 때까지 시간을 많이 주는 이유가 있었어.’
두 번째 웨이브가 끝난 지 족히 3분은 지났음에도 아직까지 세 번째 웨이브가 시작되지 않고 있었다.
이 역대급으로 긴 퀘스트 창을 찬찬히 읽으라는, 기획 팀의 배려(?)가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어쨌든 이안은 퀘스트의 핵심을 파악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큰 의미에서의 골자骨子야 어려울 것이 없었지만, 퀘스트의 유형 자체가 지금까지 등장했던 퀘스트들과 살짝 달랐기 때문이었다.
제한 시간이 있음에도 퀘스트의 성패 여부와는 관련이 없으며, 심지어 잠들어 있는 헬라임을 처치할 경우 제한 시간이 없어진다는 특이한 조건.
게다가 퀘스트가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느냐에 따라 보상이 달라진다는 부분은, 이안에게도 무척이나 신선하게 다가왔다.
지금까지 카일란을 플레이하면서 확실히 처음 보는 종류의 퀘스트 구성이었으니 말이다.
‘베스트 공략법은 뭘까? 빠르게 헬라임부터 처리하고 제한 시간을 없앤 뒤, 안정적으로 라카메르를 공략하는 방법? 아니면 헬라임을 죽이지 않고 제한 시간 내에 라카메르를 처치하는 것?’
분명 쉬워 보이는 공략법은 전자였다.
하지만 이안의 촉은 후자를 선택하라 말하고 있었다.
‘헬라임을 살린 채 퀘스트를 완료하면, 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쿼드라S라는 엄청난 난이도를 자랑하는 퀘스트에서 쉬운 길을 두고 어려운 길을 간다는 것은, 어찌 보면 만용이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라카메르를 처치하는 데 실패한다면, 이전에 받은 히든 퀘스트인 ‘엘리카 왕의 눈물’ 퀘스트까지 엮여서 실패하게 된다.
하지만 헬라임이 문제였다.
이안에게 헬라임은, 너무 달콤한 유혹이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지금 이안의 파티에게는 ‘뮤란’이라는 생각지도 못했던 든든한 조력자까지 있다.
그렇다보니 이안의 고민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에이, 인생 뭐 있나.”
파티원들의 생각은 물어보지도 않고, 독단으로 퀘스트의 방향성을 정해 버린 이안이었다.
한편 이안의 중얼거림을 들은 훈이는 흠칫 놀라서 이안을 향해 물었다.
“형, 왜 그래?”
이안은 대답 대신 씨익 웃어 보였고, 훈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잠시 후.
허공에 자욱한 흑무黑霧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감히 나의 실험실에 발을 들이다니! 지옥을 보여 주마!”
리치 킹 샬리언의 하수인.
라카메르의 등장이었다.
* * *
세 번째 몬스터 웨이브는 조금 특별한 방식이었다.
맵에서 생성된 몬스터가 밀려드는 방식이 아닌, 라카메르가 소환하는 언데드를 상대해야 하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얼핏 보면 이 두 가지의 방식은 차이가 없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안을 비롯한 파티원들은, 웨이브가 시작되자마자 그 차이에 대해 정확히 짚어 내었다.
우선 첫 번째는, 몬스터가 생성되는 리스폰 위치가 랜덤이라는 것.
이건 파티원들의 포지션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었다.
만약 전면에서 계속해서 몬스터가 생성된다면 원거리 딜러가 후방에 배치되어야 하겠지만, 언제 어디서 몬스터가 나타날지 모른다면 원거리 딜러의 위치는 센터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더해서 딜러를 지키는 것도 훨씬 까다로워진다.
적의 위치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안 파티의 경우 마법사를 지켜 줄 기사 클래스가 하나도 없고 전사 클래스도 하나뿐이었기 때문에, 이안이 훈이와 레미르를 지키는 포지션이 되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까다로운 부분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몬스터가 리스폰되는 방식이 라카메르가 직접 소환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그의 모션을 커팅할 수만 있다면 몬스터의 리스폰을 막을 수도 있는 것이다.
원진圓陣을 만들어 레미르와 훈이를 보호하며, 이안의 파티는 조금씩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안은 인벤토리에 넣어 두었던 귀룡의 방패를 꺼내어 들었다.
딜러들을 보다 확실히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누나, 극딜 부탁해.”
“정말 헬라임은 공략하지 않을 거야?”
레미르의 반문에 이안이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레미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물었다.
“35분 만에 할 수 있을까?”
“누나만 믿을게.”
“…….”
이안의 표정을 확인한 레미르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차피 파티의 리더인 이안의 오더를 따를 생각이기는 했지만, 무모해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레미르의 동의를 얻은 이안이, 힘차게 오더를 내리기 시작했다.
“드라고닉 베리어 재사용 대기 시간 4분 남았어. 그때까지만 조금 수비적으로 운영하자. 그때까지 보스 공격 패턴만 전부 파악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어.”
그리고 파티원 전원이 일제히 대답했다.
“알겠어.”
“오케이!”
이안의 파티는 멀찍이 나타난 라카메르를 향해, 점점 더 빠르게 전진했다.
반대로 라카메르 또한, 이안의 일행을 향해 마주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허공에 부유한 채 검정색 운무를 뿜어 내며 다가오는 라카메르의 모습은, 무척이나 위압적이었다.
리치메이지와 비슷한 외형을 가지고 있었지만, 일반적인 리치메이지들에 비해 훨씬 더 거대한 몸집을 가진 라카메르.
‘리치 위저드’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는 라카메르가 들고 있던 스컬 완드를 허공으로 번쩍 치켜 올렸다.
“나의 종들이여, 침입자를 처단하라!”
이어서 이안 파티의 주변으로, 수많은 언데드들이 솟아났다.
스하하아-!
온몸에 소름이 돋아날 정도로 스산한 어둠의 소리.
그에 질세라 뮤란의 대검들이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내 오늘, 어둠을 심판하리라!”
하루 종일 쉴 틈 없이 지하 뇌옥을 공략한 끝에, 드디어 뇌옥의 마지막 전투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