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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뇌옥 (1)
보랏빛의 판금갑주를 두른 채, 거대한 대검을 둘러멘 데스나이트가 등장했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이안의 두 눈이 게슴츠레해졌다.
‘누구였지? 분명 아는 얼굴인데.’
기억이 쉽게 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크게 비중 있는 NPC는 아닐 테지만, 적어도 안면이 있는 녀석임은 분명했다.
이안의 눈썰미는 제법 괜찮은 편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잠시 후, 이안은 그의 정체에 대해 깨달을 수 있었다.
“로젠 부단장?”
과거 루스펠 황실기사단의 부단장으로, 항상 헬라임의 곁을 지키던 인물인 로젠.
놀랍게도 루스펠 황실의 충신이었던 로젠이, 죽음의 기사가 되어 지하 뇌옥의 문지기로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이안이 정체를 알아차렸음에도 불구하고, 로젠은 오히려 의아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나의 이름을 알고 있군. 한데 부단장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지? 나는 단지 죽은 자들의 제왕, 샬리언 님의 권속일 뿐이다.”
쿵-!
이어서 대검을 높이 치켜든 로젠은, 그대로 검끝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그것은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돌발 행동이었지만, 이안은 당황하지 않고 반응했다.
“엘, 드라고닉 베리어!”
위이잉-!
도합 2초도 채 걸리지 않은 로젠의 스킬 모션이 발동하기 전에, 드라고닉 베리어를 사용해 파티 전원에게 실드를 생성한 것이다.
그리고 로젠의 광역 공격은, 베리어에 의해 전부 흡수되었다.
콰콰쾅-!
-‘데스 나이트 로젠’의 공격 스킬, ‘다크니스 퀘이크’에 격중당했습니다.
-‘드라고닉 베리어’의 내구도가 57만큼 감소합니다. (내구도 : 2,927/2,984)
-75퍼센트의 확률로 기절 상태 이상이 발동했습니다.
-‘드라고닉 베리어’의 영향으로 저항하였습니다.
네임드급 데스나이트들이 대부분 보유하고 있는 고급 스킬인 ‘다크니스 퀘이크’.
다크니스 퀘이크는 파괴력이 강력한 광역 스킬은 아니었지만, 무척이나 위협적인 스킬이었다.
그 이유는 바로 ‘기절’ 상태 이상 때문.
다크니스 퀘이크에 조금이라도 피해를 입는다면, 높은 확률로 7초 동안이나 기절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7초라는 시간은, 생명력이 약한 딜러 포지션의 클래스들의 경우 사망에 이르고도 남을 만한 시간이었다.
때문에 방금 이안의 재빠른 조치가 아니었다면, 파티가 적지 않은 피해를 입을 뻔한 것이다.
한 발 늦게 면역 스킬을 발동시킨 레비아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제가 좀 반응이 늦었네요.”
“아뇨 뭐, 워낙 급작스러웠으니까요.”
이안은 데스나이트가 된 로젠을 향해 다시 시선을 옮겼다.
‘황실 기사단의 부단장이 여기에 있다는 말은……. 적어도 번지수를 잘못 찾은 건 아니라는 이야기군.’
이안이 홀로 라타펠 영지의 담을 넘은 것은, 차원 포털을 이용한 후방 침투의 목적이 가장 컸다.
그러나 지하 뇌옥에 대한 기대 또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루스펠 제국의 황실 기사단과 같은, 강력한 NPC들을 구해내어 우군으로 만들 수도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에 지금 부단장인 로젠이 이곳에 수문장으로 등장했다는 것은, 일단 긍정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어쨌든 이 뇌옥 안에 다른 황실 기사단 NPC들도 들어와 있을 확률이 높다는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미 모든 기사단이 언데드화해 버렸다면……. 그건 정말 최악의 상황인데.’
로젠 하나 정도야 문제없이 처치할 수 있을 테지만, 만약 헬라임을 비롯한 기사단 전원이 데스나이트가 되었다면.
초호화라 할 수 있는 이안의 파티로도 상대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안은 열심히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된 이상 무조건 뇌옥을 뚫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었다.
판단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커다란 이득을 얻거나 그보다 더 큰 손실을 입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황실 기사단의 숫자는 총 100에서 200정도. 헬라임 포함 절반 정도만 건질 수 있어도 충분히 남는 장사인데…….’
하지만 이안의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질 수 없었다.
선제공격에 실패한 로젠이 지원군을 불러들였기 때문이었다.
“감히 어둠의 성역에 발을 들이려 한 인간들을 살려 보낼 수는 없지.”
고오오-!
로젠의 뒤쪽에서부터 보랏빛의 기류가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뿌옇게 번진 연무가 흩어지더니 그 자리에 열 기나 되는 데스나이트들이 추가로 등장했다.
그 모습을 본 이안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로젠의 레벨이 450. 나머지는 420대라…….’
새로 나타난 기사들 또한, 언데드화한 황실기사단 NPC들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론이 어떻게 나더라도, 지금 이들과의 싸움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이안은 일단 고민을 멈추고 작전을 지시하기 시작했다.
“레미르 누나.”
“응.”
“하나씩 잘라먹는 전략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단일기 위주로 운용하자고.”
“오케이.”
그리고 이안 일행이 전투 태세를 갖추는 사이…….
척- 척- 척-.
데스나이트들 또한 나름의 진형을 갖추며 파티를 압박해 오기 시작했다.
“유신, 네가 잘해야 돼.”
“알겠다, 이안.”
“네가 타깃팅하는 녀석부터 하나씩 잘라 내는 방향으로 가자.”
“오케이!”
프릴라니아 협곡의 퀘스트를 진행할 때를 제외하고는, 최근 있었던 전투 중 가장 고난이도의 전투였다.
이안 일행은 극도로 긴장한 채 각자의 포지션을 잡아 갔고, 곧 전투가 시작되었다.
* * *
드르륵.
또각또각.
미닫이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발소리가 이진욱 교수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바닥을 타고 울려 퍼지는 조심스러운 구둣발 소리.
교수실에 들어온 인물의 정체를 짐작한 이진욱이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안 된다.”
그리고 그 단호한 말에 당황한 발소리의 주인공, 세미는 어정쩡한 표정이 되어 진욱에게 반문했다.
“네? 뭐가 안 되는데요, 교수님?”
끼이익.
뚫어져라 모니터를 응시하던 이진욱이 의자를 뒤로 젖힌 채 옆으로 회전시켰다.
이어서 안경을 살짝 내려쓰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과대, 너 또 휴강하자고 온 것 아냐?”
“……!”
“내가 모를 줄 알아? 이번엔 안 돼! 진도 나가야 할 게 산더민데 휴강은 무슨!”
이진욱 교수의 연속적인 공격에 세미는 살짝 당황한 듯했다.
하지만 그녀는 물러서지 않고 곧바로 반론을 제기했다.
“이번엔 안 된다뇨, 교수님?”
“음?”
“이번 학기 한 번도 휴강한 적이 없는데 ‘이번엔’ 이라고 하시니 제자는 섭섭하옵니다.”
“그, 그랬나? 지난번 휴강은 B반이었나?”
“예. 게다가 내일은 엄연히 국가에서 지정한 대체휴일! 교수님의 열정은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오나……. 휴일까지 수업하시는 건 장기적으로 볼 때 모두에게 손해가 아니겠습니까?”
“그건 어째서 그렇지?”
“첫째로 학생들의 학업 의욕이 떨어지며.”
“그리고?”
“둘째로는 교수님의 체력이 저하되십니다. 무려 주말까지 이어지는 대체휴일에 교수님께서도 푹 쉬셔야 저희에게 더욱 양질의 강의를 해 주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나름 논리 정연한 세미의 주장에 완고했던 표정이 살짝 풀어진 이진욱이 턱을 만지작거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너희들 전체의 의견이 반영된 건 확실하고?”
“물론입니다! 심지어 내일 교수님 수업만 휴강이 되면 모든 시간표가 완벽해집니다!”
“완벽……?”
“완벽하게 깨끗해진다는…….”
“…….”
주름진 눈을 지그시 감은 이진욱은 고민에 빠졌다.
‘사실 기말고사 전까지 여유가 좀 있기는 한데…….’
강의를 쉬게 되면 사실 교수의 입장에서도 편한 것이 당연했다.
2시간 넘게 교단에 서서 떠드는 것이, 제법 에너지를 소진하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거기에 휴강을 할 만한 충분한 근거까지 있었으니 금상첨화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욱을 고민하게 만드는 이유가 하나 있었으니…….
‘문제는 휴강해도 내일 할 게 없다는 말이지.’
오후에 사냥을 나갔다가 사망하여 카일란 계정에 데스 패널티까지 걸려 있었으니, 내일 오후 5시까지는 게임조차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고독한 독신남인 이진욱으로서는 제법 크리티컬한 문제라고 할 수 있었다.
“크흠, 휴강이라…….”
이진욱 교수는 연신 턱을 만지작거리며 고민을 거듭했다.
그런 그에게, 세미가 달콤한 정보를 하나 건네었다.
“교수님, 혹시 그거 아세요?”
“뭐?”
“유현 선배한테 들은 얘긴데요.”
“음……?”
“내일 오전에 선미 교수님 등산가신대요.”
“……!”
“선미 교수님도 혼자 가시면 적적하실 텐데, 한번 연락이라도 해 보시면…….”
그리고 그 이야기를 끝으로, 협상은 마무리될 수 있었다.
돌싱이 된 노총각(?)에게 싱글을 벗어날 수 있는 기회만큼 달콤한 것은 없었으니까.
“그, 그런 고급 정보를……!”
“후후, 제가 능력 있는 과대 아니겠습니까.”
“녀석, 과대로서의 자질이 아주 훌륭하구나.”
“그럼 교수님, 휴강은……?”
“오케이, 콜! 내일은 우리 모두 푹 쉬자꾸나. 다음 주에 보자, 세미야!”
이진욱 교수는 황급히 컴퓨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그를 보며, 세미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좋았어! 그럼 오늘은 마음 놓고 이안느님 영상을 시청해도 되겠군!’
사실 세미는 내일 쉬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다만 마음이 콩밭에 가 있는 관계로 내일까지 해야 할 과제에 도저히 손이 가지 않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학우들의 염원을 모아 휴강을 성사시켰으니, 이제 과제는 주말 이후로 미뤄도 무방하게 된 것이다.
세미는 싱글벙글 웃으며 과실을 향해 뛰어갔다.
얼른 이 기쁜 소식을 알린 뒤, 귀가하여 방송을 시청해야만 했다.
* * *
카일란에는 수많은 종류의 몬스터들이 있다.
스켈레톤, 오크, 고블린, 오우거 등.
이름을 듣기만 해도 그 외형이 상상되는, 여러 분류의 몬스터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같은 몬스터라고 하더라도 완벽히 같은 능력치와 스킬을 가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인간이라고 전부 같은 능력치를 갖지 않는 것처럼, 카일란의 몬스터들 또한 각기 일정 범위 내에서의 차별성을 가지고 있었다.
비교적 힘이 센 오크, 특별히 머리가 좋은 오크 등.
그리고 유닛 하나하나의 차이는, 높은 티어의 몬스터일수록 더 커지게 된다.
기본 몬스터인 고블린의 경우에는 뛰어난 개체와 허약한 개체의 차이가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지만, 데스나이트와 같이 상위티어 몬스터의 경우에는 차이가 체감될 정도로 두드러지는 것이다.
하물며 언데드화하기 전에도 강력한 능력을 자랑하던 NPC들임에야 말할 것도 없었다.
콰쾅-!
유신의 주먹과 로젠의 대검이 부딪치며, 강렬한 폭음이 울려 퍼졌다.
전투가 시작된 지 거의 30분이 지났건만, 이안 일행이 제거하는 데 성공한 데스나이트의 숫자는 고작 세 기뿐.
로젠을 포함해 아직도 여덟 기나 되는 데스나이트들이, 이안 일행을 압박하고 있는 것이다.
‘몬스터들 주제에 AI가 이렇게 뛰어날 줄이야.’
처음 이안 일행의 플랜은 간단했다.
탱킹 능력이 뛰어난 유신과 빡빡이 등이 시선을 끄는 동안, 약해 보이는 개체부터 하나씩 잘라내어 제거해 나가는 전투 방법.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효과가 뛰어난 이 전투 방식이, 로젠의 지휘 하에 무력화되어 버린 것이다.
특정 데스나이트에 공격이 집중되기 시작하면, 슬쩍 전장의 뒤쪽으로 빼내어 다른 개체들이 보호하게 유도했다.
물론 이러한 양상으로 전투가 진행되더라도 결국 이기기는 하겠지만, 어쩌면 거의 3~4시간을 이곳에서 허비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빨리 뚫고 내려가야 하는데……. 방법이 없을까?’
던전의 모든 몬스터들을 처치하면서 내려왔다고는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라타펠 영지군에게 발각될 확률은 높아진다.
적어도 그전에는, 던전을 클리어하고 빠져나가야만 했다.
‘딜러가 한두 명만 더 있었어도…….’
임무를 마치고 용천으로 돌아간 카미레스.
그의 공격력이 문득 떠오른 이안이, 짧게 입맛을 다셨다.
“쩝.”
그 정도 되는 NPC가 한 명만 있었더라도, 10~20분 내에 전투를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카이자르나 폴린이라도 데려올걸…….’
왕국군에 합류하여 열심히 전투를 치르고 있을 가신들까지 떠올려 보았지만, 지금으로서는 묘책이 생각나질 않았다.
제약이 많은 상황이었으니, 짜낼 수 있는 전략에도 한계가 있는 것이다.
이안이 머리를 쥐어짜던 그때였다.
콰아앙-!
전장의 한편에서, 어마어마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그 소리만으로도 전투를 멈추게 할 만큼, 던전 전체가 진동할 정도의 엄청난 폭발음.
이안의 시선은 자연스레 소리가 난 방향을 향했고, 이어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방금까지 거의 풀 HP를 유지하고 있던 데스나이트 하나가, 싸늘한 주검이 되어 널브러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바로 뒤편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남자가 뒷짐을 진 채 이안을 응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