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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카릭스의 활약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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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몬과 루스펠.
양대 거대제국이 멸망한 뒤, 그들이 있던 자리에는 수많은 왕국들이 생겨났다.
동, 서부. 그리고 중부와 북부 대륙까지.
광활한 땅덩이가 수백 개로 쪼개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쪼개진 왕국들의 규모까지 비슷한 것은 아니었다.
거대 왕국의 경우 소형 왕국의 여섯 배는 될 만한 규모를 가진 곳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현재 로터스 왕국의 규모는 어느 정도로 보면 될까?
총 서른다섯 개의 영지로 이루어진 로터스 왕국은, 대략 평균 정도의 규모를 가지고 있다 할 수 있었다.
사실 현존하는 가장 작은 왕국이 열 개의 영지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가장 거대한 왕국이 여든 개가 조금 안 되는 영지를 보유하고 있었기에, 단순히 그에 대한 평균을 내면 45라는 숫자가 나온다.
하지만 소형 왕국의 숫자가 거대 왕국보다 훨씬 많기 때문에, 서른다섯 개의 영지 정도면 평균 이상은 되는 규모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유저가 세운 왕국 중에는 로터스 왕국이 단연 최고의 규모였고 말이다.
그리고 로터스 왕국은 더 원대한 목표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서버 최초 제국 선포.
엘리카 왕국을 흡수하는 것이 바로 그 목표를 향한 시발점이 될 것이었다.
전장의 최전선에 세워진 로터스 왕국군의 막사.
그 안에서 헤르스와 진성이 진지한 표정으로 전략 회의를 하고 있었다.
이제 내일부터 전쟁이 다시 재개되면, 앞으로 보름 동안은 매일같이 전쟁 일정이 잡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보름 동안, 로터스 왕국은 엘리카 왕국을 완벽히 흡수할 생각이었다.
“유현아, 지금 시점에서 엘리카 왕국 영지 현황이 어떻게 되지?”
“으음, 잠시만.”
엘리카 왕국의 지도를 펼쳐 놓고 찬찬히 훑어보던 헤르스가, 잠시 후 살짝 놀란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엘리카 왕국이 은근히 알짜배기네.”
“그래?”
“응, 영지 숫자는 마흔 개 정도인데, 그 중에 케이튼 영지 정도 되는 알짜가 열네 곳이나 돼.”
“오호, 그러니까 백작령 이상이 열네 개라는 말이지?”
“맞아. 백작령이 일곱 곳, 후작령이 네 곳. 심지어 공작령도 세 곳이나 되네.”
“자작령, 남작령은……?”
“자작령 열, 남작령 열넷.”
“열 넷, 스물 넷. 총 서른여덟이군.”
“그렇지. 계산 빠르네.”
“흐음…….”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영지의 규모가 크고 레벨이 높을수록, 공략하기도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방어시설과 영지군의 수준이 훨씬 높기 때문이었다.
또 주변 지형이나 사령관의 능력치 등 전쟁에는 여러 가지 변수가 무척이나 많이 작용한다.
그래서 왕국을 공략할 때는 전략을 잘 짜야만 했다.
실전에서의 지휘능력은 차치하고라도, 병력 투입 계획이나 지형 활용 등 고민해야 할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닌 것이다.
각 영지의 특성에 대해 아는 대로 설명하던 헤르스가, 지도의 한 곳을 짚으며 심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어.”
“응?”
“다른 곳은 다 해볼 만한데, 여기 이곳.”
그에 이안의 시선도, 자연스레 헤르스의 손가락이 짚은 곳을 향해 움직였다.
“라타펠 영지?”
“응, 여기가 정말 까다로운 곳이야. 뚫는 게 가능한지도 사실 판단이 안 서고, 만약 함락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일주일 정도는 여기서 그냥 날려야 할 것 같아.”
“그래? 그 정도야?”
흥미로운 표정이 된 이안이, 지도를 좀 더 상세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헤르스가 이야기해 주기 전에 나름대로 분석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답을 듣기 전에 스스로 고민을 해 보아야, 선입견에 빠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헤르스도 그와 같은 사실을 알기 때문에, 이안이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흐음, 진입로가 한 곳밖에 없어서 공략하기 애매하기는 한데……. 그래도 공작령을 두고 여길 지목한 이유가 뭐지?’
영지는 등급이 올라갈수록, 방어력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때문에 후작령인 라타펠 영지가 다른 공작령들보다도 더 까다롭다면, 어떤 특별한 이유가 분명히 있을 수밖에 없다.
‘뭘까? 그 이유가.’
이안은 라타펠 영지의 지도를 꼼꼼히 훑어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무척이나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헐, 미친! 여기 어둠의 성소……!”
그리고 이안의 탄성을 들은 헤르스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어둠의 성소. 그게 가장 큰 문제야.”
* * *
성소聖所란 무엇일까.
그 이름 그대로 풀이하자면 성스러운聖 곳所일 것이다.
그리고 카일란에서의 성소 또한, 비슷한 맥락에서의 기능을 한다.
신의 강림이나 신관의 중재 없이 신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다.
그저 잠시 들르기만 하면 ‘신의 축복’이라는 최강의 버프를 받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성소’인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단점도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장소의 제약.
성소의 힘이 미치는 곳을 벗어나는 순간, 버프의 효과가 곧바로 풀려 버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인공적으로 성소를 만들어 낼 수도 없었으니, 계륵이라는 말이 딱 어울렸다.
때문에 사실상 성소는 유명무실한 것이었다.
가끔 성소의 범위 내에 던전이 생성된 곳이 있어 엄청난 프리미엄을 누리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이런 위치에 성소가 있다면 얘기가 다르지.’
이안의 눈은 계속해서 지도에 고정되어 있었다.
산세를 따라 둥그렇게 굽어진 라타펠 영지의 성벽.
그리고 그 안쪽에 떡하니 자리하고 있는 어둠의 성소.
그렇지 않아도 산과 강으로 둘러싸여 있어 진입로가 하나밖에 없는, 라타펠 영지에 최고의 버프 시설물인 성소가 절묘하게 박혀 있으니 그야말로 ‘천혜의 요새’가 되어 버린 것이다.
지도가 뚫어져라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는 이안을 보며, 헤르스가 입을 열었다.
“역시 금방 찾아내네.”
“그럼 이걸 못 보겠냐?”
“카인이랑 클로반 형은 지도 한참 들여다봐도 모르던데?”
“카인이는 관찰력 부족일 거고, 클로반 형은 혹시 뇌까지 근육인가?”
“…….”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흐른다.
이안은 생각에 잠긴 듯 보였고, 헤르스는 기다려 주었다.
이안의 머리에서 기발한 방법이라도 나오기를 기대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기대였을 뿐, 잠시 동안 아무 말 없이 지도를 응시하던 이안이 허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거, 지도 잘못된 건 아니지?”
“그럴 리가. 지도는 완전 최신판이라고.”
“…….”
“이건 진짜 생각도 못했네.”
“그러니까 말야.”
“분석 안 하고 무작정 쳐들어갔다간 낭패 봤을 수도 있겠는걸.”
“낭패 정도가 아니라, 병력 다 잃고 회군할 뻔했어.”
“그랬을지도…….”
카일란에 지금까지 알려진 성소는 총 스무 개 정도이다.
그리고 그 성소들은 제각각 버프의 효과가 다르다.
물론 같은 속성의 성소는 같은 버프를 부여하지만, 그 계수에 조금씩 차이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많아 봐야 4~5퍼센트 정도의 차이였으니까.
이안과 헤르스가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이어 갔다.
“어둠의 성소 버프 효과가…… 아마 공격력 증가에 어둠속성 도트 댐이었지?”
“맞아. 공격력 20퍼센트 증가에, 20초간 공격력의 3퍼센트만큼 도트 댐. 그리고 대상이 어둠 속성을 가지고 있으면 버프 효과가 50퍼센트 더 증가해.”
“20퍼센트는 미니멈이니, 최대 25퍼센트까지 나오겠네. 도트뎀 계수야 소수점 차이일 테니 신경 쓸 거 없고.”
“그렇지. 근데 문제는 지금 엘리카 왕국 병력이 전부 언데드로 구성되어 있다는 거야.”
“모든 버프가 한 배 반으로 적용된단 얘기겠네.”
“그렇지.”
“…….”
이 모든 설명을 쉽게 정리하자면, 수성하는 모든 병력의 공격력이 최대 37.5퍼센트까지 뻥튀기될 수 있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누적되는 3퍼센트의 도트 대미지는 덤.
공격력에 한정된 버프이긴 하지만, 이 정도 수치면 병력의 전체적인 레벨대가 10~20퍼센트 정도는 상승한다고 봐도 무방했다.
현재 350정도인 엘리카 왕국군의 평균 레벨이, 385~420레벨 정도로 껑충 뛰는 것이다.
또한 애초에 400레벨이 넘는 데스나이트들의 경우, 거의 500레벨에 육박하는 전투 능력을 갖게 된다.
이건 전술로 어떻게 극복해 볼 만한 수준이 아니라고 할 수 있었다.
“와, 지금까지 영지전 수없이 치렀지만 이런 미친 난이도는 처음인 것 같네.”
이안의 감탄 아닌 감탄에, 헤르스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조했다.
“맞아. 이건 거의 개발사의 농간 수준……. 성소 자체가 대륙에 얼마 없는데, 하필 엘리카 왕국에. 그것도 이 위치에. 게다가 어둠의 성소라니.”
“…….”
두 사람 사이에,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감탄은 할 만큼 했으니, 이제는 정말 뭐라도 방향을 제시해야 할 때였다.
이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긴 답이 없어.”
“그럼? 라타펠은 포기해? 여기 버리면 그 뒤쪽에 있는 열두 개 영지는 버려야 해. 게다가 제일 알짜 영지인 엘리카 왕성도, 라타펠을 넘어야 먹을 수 있고.”
그에 이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그 말이 아니고.”
“음?”
“라타펠 영지를 버린다는 게 아니라, 이 성벽 뚫는 걸 포기한단 말이야.”
“그게 그거 아니야?”
“아니지.”
이안의 손이 지도의 한 곳을 가리켰다.
그러자 헤르스의 시선도 자연스레 그 곳을 향해 움직였다.
이안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여기, 넘어가자.”
“산 넘자고? 그거 생각 안 해 본 건 아닌데…….”
어찌 보면 산을 넘자는 이안의 말은, 가장 단순하고도 쉬운 해결책이었다.
하지만 떠올리기가 쉬울 뿐, 실행하기조차 쉬운 것은 아니었다.
소규모 전투라면 모르되 이런 대병력이 움직여야 하는 전쟁에서는, 수많은 변수와 리스크를 감수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일례로 화공火攻이라도 제대로 당하면, 일반 병사들은 그대로 전멸이라고 볼 수 있었다.
게다가 산으로 간다고 해서 성벽과 방어군이 없는 것도 아니다.
산에는 그 나름대로 방어 시설이 견고히 갖춰져 있을 게 분명했다.
“산이 아무리 험해도 저기 넘는 것보단 쉬울 것 같아.”
“그렇긴 해.”
“정 안되면 고레벨 파티로 별동대라도 구성해서 성소 부수러 가야지.”
“뭐, 확 와 닿지는 않지만 그것도 방법일 수 있지.”
이안이 몇몇 영지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말을 이었다.
“라타펠 영지까지 도달하려면, 못해도 닷새 정도는 걸릴 거야.”
“그렇겠지. 최소 일곱 개 영지는 함락시켜야 하니까.”
“그동안, 내가 산 한번 타고 올게.”
이안의 말에, 헤르스의 두 눈이 크게 확대되었다.
“뭐? 아무리 너라고 해도 그건 너무 위험한 거 아냐?”
그에 이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혼자 들어가서 뭘 어째 보겠다 하는 게 아냐.”
“그럼 뭔데?”
“여기, 정찰 한번 다녀오게.”
“으음……?”
이안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은, 어둠의 성소가 있는 바로 뒤쪽이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작은 글씨로 ‘지하 뇌옥’이라고 쓰여 있었다.
이안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한 헤르스가 의아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지하 뇌옥이라……. 성소도 아니고 뜬금없이 여긴 왜?”
잠시 뜸을 들인 이안이 천천히 대답했다.
“짚이는 게 하나 있어서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