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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카릭스의 활약 (1)
어찌 보면 당연한 얘기겠지만, 카일란의 모든 시설물은 해당 지역의 발전 정도에 따라 그 규모가 성장한다.
그리고 도시의 가장 중요한 시설물 중 하나인 경매장 또한 당연히 그 안에 포함된다.
도시의 레벨이 올라갈수록 경매장 시설물 레벨 상한선도 같이 올라가기 때문이다.
하여 지금까지 카일란에서 가장 큰 규모였던 경매장은, 과거 거대 제국이었던 카이몬과 루스펠 제국의 수도에 있었던 경매장이다.
하지만 이제 제국은 사라졌고, 당연히 해당 경매장 또한 사라졌다.
하여 현존하는 경매장 중 가장 큰 경매장이 로터스 왕성에 있는 경매장이었고, 지금 엘카릭스와 이안은 벌써 30분째 경매장을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아빠, 이거 갖고 싶어요. 이거!”
“그, 그래?”
“네! 너무 예뻐요오!”
매장 구석에 진열되어 있는 털모자를 든 엘카릭스가 아장아장 뛰어왔다.
이어서 이안의 눈에, 자연스럽게 아이템의 판매 정보 창이 떠올랐다.
띠링-
-하얀 드래곤 털모자
가격 : 307,698골드
판매자 : 비공개
판매 종료까지 남은 시간 : 7:14:27
(판매 시간이 종료되면 5퍼센트 낮은 가격으로 갱신됩니다.)
분류 : 코스튬
(코스튬 아이템은, 장비 위에 착용할 수 있습니다.)
옵션 : 한기 저항 +3
매력×1.25
-북부 대륙의 희귀한 동물인 ‘눈꽃사슴’의 가죽으로 만든 털모자입니다.
로터스 왕국 최고의 의류 디자이너인 ‘유피나’가 제작한 리미티드 에디션입니다.
귀여운 아기 드래곤의 얼굴을 콘셉트로 디자인한 털모자입니다.
아이템의 정보 창을 읽어 본 이안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후유, 코스튬 아이템이라니……. 게다가 옵션도 완전 저질이잖아.’
이안은 아이템에 돈을 아끼지 않지만, 철저한 실용주의였다.
때문에 그는 지금까지 코스튬 아이템을 잘 구입하지 않았다.
기본 코스튬 아이템만 대충 사다 장착하여, 코스튬으로 얻을 수 있는 최소한의 옵션만 챙겼던 것이다.
코스튬의 경우 5천 골드짜리든 100만 골드짜리든, 옵션 차이가 거의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코스튬 아이템의 가격 차이는, 거의 ‘디자인’에 좌우되는 것이었다.
“으음, 30만 골드라……. 투쁠 꽃등심으로 하루 세끼를 해결할 수 있는 돈인데…….”
이안의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엘카릭스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그에 이안은 식은땀을 흘리며 엘카릭스에게 물었다.
“엘아, 이 옵션도 제대로 안 붙은 털모자를 ‘30만’ 골드나 들여서 꼭 사야겠니?”
유독 ‘30만’이라는 말을 강조하는 이안이었다.
하지만 엘카릭스는 완고하기 그지없었다.
“어차피 전 드래곤이라 옵션 의미 없잖아욤.”
카일란에서는 NPC도 아이템을 착용할 수 있지만, 인간형이 아닌 NPC는 아무런 옵션도 적용받지 못한다.
드래곤 주제에 카일란의 아이템 옵션이 어떤 식으로 적용되는지까지 빠삭하게 꿰고 있는 엘카릭스였다.
이안의 표정에 다시 당혹감이 어렸다.
“너 별걸 다 안다?”
하지만 엘카릭스는 또다시 애교로 무마할 뿐이었다.
“헤헤, 아빠, 어서요.”
“…….”
그리고 부들부들 떨리는 이안의 손은 어쩔 수 없이 털모자를 향했다.
띠링-!
-‘하얀 드래곤 털모자’아이템을 구입하셨습니다!
-‘307,698골드’를 소모하셨습니다.
빠져나가는 골드를 보며, 이안의 두 눈에 슬픔이 어렸다.
‘크윽, 내가 현실에서 입고 있는 옷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합해도 이거보다 싼데…….’
하지만 이것은 시작일 뿐, 엘카릭스의 쇼핑은 끝날 줄을 몰랐다.
띠링-!
-‘드래곤 발바닥’ 아이템을 구입하셨습니다.
-‘239,820골드’를 소모하셨습니다.
-‘드래곤의 날개 드레스’ 아이템을 구입하셨습니다.
-‘970,981골드’를 소모하셨습니다.
코스튬 아이템에만 무려 200만 골드 가까운 지출을 한 이안의 얼굴에 그늘이 내려앉았다.
“엘아, 그 식탁보같이 생긴 드레스를 꼭 사야겠니?”
“식탁보라뇨!”
“우리 집 식탁보가 꼭 그렇게 생겼던데…….”
“우씨, 아니거든요!”
평소에 코스튬에 아낌없이 돈 쓰는 유저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이안은, 자신이 그 상황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아, 가상현실 게임에서도 아빠 노릇이란 힘든 거구나…….’
이안의 가슴속에, 문득 부모님에 대한 존경심이 무럭무럭 솟아나기 시작했다.
이어서 하린이 보고 싶어졌다.
‘가만, 내가 엘이 아빠니까……. 하린이가 엄마잖아? 양육의 고통을 나 혼자 느낄 필요가 없는 거였어!’
하지만 하린에게 시간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안의 표정이 다시 시무룩해졌다.
최근 외식 사업으로 인해 정신없이 바쁜 하린이었다 .
하린에게 엘이를 맡겨 놓으면, 하루 종일 방치당할 게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귀엽고 사랑스러운 엘이가 삐뚤어질 위험이 있었다.
‘그럴 순 없지!’
뭔가 사명감을 느낀 이안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런데 그때, 구매한 코스튬을 어느새 전부 장착한 엘카릭스가 이안의 앞에 나타났다.
“짠! 아빠, 어때요? 나 예쁘죠?”
전신을 코스튬으로 도배한 엘이 방실방실 웃으며 이안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자, 코스튬에 날린 200만 골드는 이안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귀, 귀여워!”
누가 빛의 드래곤 아니랄까 봐, 온통 하얀 옷들로 도배한 엘카릭스였다.
게다가 머리에 쓰고 있는 드래곤 형상의 털모자는, 엘카릭스의 귀여움을 극대화시켜 주고 있었다.
등 뒤에 날개랍시고 달려있는 작은 털 뭉치는 보너스.
이안의 입에 함지박만 한 아빠 미소가 걸렸다.
“우리 엘이 예뻐졌네!”
그리고 이안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엘카릭스는, 배시시 웃으며 허공을 빙글빙글 날아다녔다.
코스튬 쇼핑을 하기 전에 플라이 마법을 배워 놓아서, 폴리모프 상태에서도 마음대로 날아다닐 수 있는 것이다.
“그쵸? 나 예쁘죠?”
“그럼, 우리 딸이 최고 예쁘지.”
생각지 못한 지출로 인해 생긴 마음의 상처(?)는, 언제 그랬냐는 듯 눈 녹듯 사라져 있었다.
‘그래, 스킬 북까지 전부 합해서 2천만 골드 안쪽으로 해결했으니, 이득이지 뭐.’
원래 생각했던 금액의 거의 두 배를 사용했음에도, 어느새 자기합리화를 시전하고 있는 이안이었다.
해맑은 엘카릭스를 안아 든 이안이, 다시 사냥터를 향해 걸음을 돌렸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사냥을 시작해야 할 타이밍이었다.
‘흐흐, 이제 스킬 사이클을 어떻게 돌려야 할지 연구 좀 해 봐야겠는데?’
엘카릭스의 단독 경험치 버프가 끝이 났으니, 이제는 모든 소환수들을 전부 활용할 타이밍이었다.
기존에 있는 소환수들과 엘카릭스의 마법들을 조합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설레는 이안이었다.
* * *
“후우, 루가릭스, 이 초딩 같은 놈…….”
LB사 기획 팀의 기획 회의실.
열 명이 넘는 인원이 회의실에 모여 진지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입에서는 어쩐 일인지 ‘루가릭스’의 이름이 계속 언급되고 있었다.
“후, 루가릭스 기획한 놈 누구야?”
기획 3팀의 팀장인 김의환.
회의실의 가장 상석에 앉은 그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하자, 그 옆에 앉아 있던 유 대리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저, 저요…….”
“아니, 대체 이놈한테는 정보가 왜 이렇게 많이 들어가 있는 거야?”
“그거야 신룡 자체가 원래 ‘중간자’에 속하잖아요. 중간계에 대한 데이터는 당연히 다 들어가 있을 수밖에요.”
그러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최시영 주임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루가릭스 이전에도 신룡은 많이 등장했잖아요, 대리님. 특히 카르세우스는 아예 이안의 소환수가 되었는데……. 지금까지는 어떻게 정보가 안 풀린 거죠?”
그에 유대리의 입에서 한숨이 푹 새어나왔다.
“그야 카르세우스는 기억이 없었잖아. 완전체가 되어 신룡의 역할에 대해 각성한다고는 해도, 환생의 개념이거든. 빛의 신룡 엘카릭스도 마찬가지고. 걔들한테 중간계에 대한 기억은 없어.”
이번에는 김의환이 다시 물었다.
“그럼 태양의 신룡 라노헬이나 바람의 신룡 노르피스는? 내가 알기로 그 둘의 퀘스트도 이미 진행하고 있는 유저들이 많다고 알고 있는데?”
김의환의 질문에, 유대리가 뒷머리를 긁적인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을 하려는 순간, 옆에 앉아 있던 나지찬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건 친밀도랑 관련이 있습니다, 팀장님.”
“친밀도?”
“네. 아무리 퀘스트를 진행하고 있고, 친분이 생겼다고 하더라도 NPC가 정보를 막 퍼주지는 않거든요.”
“흐음, 그럼 이안은 루가릭스와 친밀도가 높아서 그런 거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용천의 진입에 대한 정보까지 풀어 버릴 줄은……. 정말 생각도 못 했네요. 그건 용신의 ‘언령’에 의해 강력하게 제어되어 있던 정보거든요.”
나지찬의 이야기가 끝나고 나자 회의실에 침묵이 감돌았다.
모두가 저마다의 고민에 빠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지찬 또한 마찬가지였다.
기획 팀의 그 누구보다 이안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나지찬으로서도, 이런 상황이 벌어질 것이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 초딩 같은 드래곤은 왜 그렇게 입이 가벼운 거야?’
사실 루가릭스의 입에서 나온 정보들이 다른 유저에게 들어갔다면 그렇게 크리티컬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랬더라면 기획 팀의 그 누구도 걱정조차 하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문제는 이안이었다.
아마 이안이라면 그 정보만 가지고도 거의 정확한 기획의 골자를 파악해 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짐작이 아니라 거의 확신이었다.
특히 용천으로 들어가는 차원의 문의 경우…….
‘200레벨대일 때도 던전 바닥까지 거의 뚫었던 놈인데……. 거의 400레벨이 된 지금은, 마음만 먹으면 바로 뚫을 수 있겠지.’
이미 용의 제단에 한 번 들어가 본 경험이 있는 이안은, 용천으로 향하는 차원의 문에 대해 정확히 알아내었을 것이 분명했다.
다만 곧바로 용천으로 가지 않는 이유는 현재 진행 중인 국가 전쟁 때문일 것이라 짐작했다.
차원의 문이 있는 용의 제단으로 가기 위해서는, 차원 충전기를 이용해 차원의 문을 열어야만 한다.
한 번 용의 제단으로 이동하면, 최소 일주일간은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제약이 있는 것이다.
때문에 나지찬이 예상하기로는…….
‘전쟁이 끝나고 리치킹까지 잡고 나면, 곧바로 용천에 도전하겠지.’
대륙에서 할 일이 전부 끝나면 곧바로 용천으로 향할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재앙이었다.
대략적인 골자는 잡혀 있으나 완벽히 시스템이 설계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지난번 마계에서 그랬던 것처럼 버그가 생길 확률이 높은 것이다.
나지찬이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팀장 김의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찬이.”
“예, 팀장님.”
“지금 이안 놈 진행 중인 퀘스트 뭐 뭐 있지?”
그에 나지찬이 본능적으로 발끈했다.
“팀장님 이안 놈이라뇨, 이안갓한테.”
“갓은 개뿔, 지금 이 상황에서도 그런 말이 나와?”
“무튼, 이안갓은 갓입니다.”
“됐고, 물어본 거나 대답해 봐.”
나지찬은 잠시 이안이 진행 중인 퀘스트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나지찬의 뇌리를 스친 것이 하나 있었다.
‘맞아, 정령계!’
이안이 묻어 두었던 퀘스트인, 정령계 퀘스트가 기억난 것이었다.
‘추가 보상을 주더라도 정령계 퀘스트 쪽으로 이안을 먼저 유도하면……. 그동안 용천을 완성할 수 있겠어.’
과거 이안이 정령계 퀘스트를 받은 뒤, 기획 팀 전원이 매달린 결과 정령계는 거의 완성 단계에 들어간 상태였다.
때문에 이안이 정령계를 먼저 들어가면, 또 몇 개월 이상의 시간은 벌 수 있을 터였다.
표정이 밝아진 나지찬이 팀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좋은 생각이 났습니다, 여러분.”
그리고 방금 떠올린 계획을 하나 둘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팀원들의 표정이 조금씩 밝아지기 시작했다.
“그거 괜찮네.”
“크, 역시 나 대리님.”
“후우, 그럼 일단 한시름 놓을 수는 있겠군요.”
하지만 정작 나지찬은 설명하면서도 속으로 한숨을 푹푹 쉬고 있었다.
‘후유, 일개 유저 하나 때문에 이렇게까지 머리를 쥐어짜야 한다니…….’
리치 킹 에피소드가 진행되는 동안 단체 워크숍이라도 다녀오려 했던 기획 팀의 계획은, 루가릭스의 가벼운 입 덕분에 완전히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