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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카릭스와 루가릭스 (1)
프릴라니아 협곡 퀘스트부터 시작해서 케이튼 영지 함락까지, 꼬박 하루가 넘게 걸린 강행군을 마친 뒤 이안은 기절하듯 잠에 들었다.
카미레스와 용기사들이 원래의 차원계로 돌아가기까지 최대한 뽕을 뽑아먹었으니, 조금 자야 할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물론 엘카릭스의 경험치 버프는 일주일짜리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주일 동안 한잠도 자지 않고 버틸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7시간 정도 푹 자고 일어난 이안은, 씻을 새도 없이 다시 카일란에 접속했다.
접속하고 있는 이 순간도, 경험치 버프가 아까운 느낌이었다.
-홍채 인식 완료. ‘이안’ 님 카일란의 세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우우웅-!
익숙하기 그지없는 기계음과 함께, 카일란에 접속한 이안은 가장 먼저 인벤토리 창을 열어 보았다.
어제는 전투가 끝나자마자 바로 로그아웃을 했기 때문에 퀘스트 완료 보상을 확인하지 못했던 것이다.
바로 ‘카미레스의 기대에 부응하라’ 퀘스트의 보상이었던 ‘용기사의 징표’ 아이템.
인벤토리의 구석에서 번쩍번쩍 빛나고 있는 ‘용기사의 징표’를 확인한 이안이, 곧바로 정보 창을 오픈해 보았다.
띠링-!
-용기사의 징표
등급 : 신화
분류 : 잡화
용기사단장 ‘카미레스’가 인정한 뛰어난 용사에게만 주어지는 징표이다.
이 징표를 지니고 있으면, 모든 ‘드래곤’ 타입 소환수의 전투 능력을 3퍼센트만큼 증가시켜 준다.
또, 모든 ‘용족’과의 기본 친밀도가 10만큼 상승한다.
*이 징표가 있으면, 중간계에 있는 ‘용사의 마을’에 입장할 수 있습니다.
*유저 ‘이안’ 에게 귀속된 아이템입니다.
다른 유저에게 양도하거나 팔 수 없으며 캐릭터가 죽더라도 드롭되지 않습니다.
‘오호, 용족과의 친밀도야 당장에 쓸모 있는 스텟은 아니지만……. 드래곤 소환수 전투능력 상승은 제법 쏠쏠한데?’
수치 자체는 ‘3퍼센트’로, 낮다고 생각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인벤토리에 지니기만 하면 되는 아이템이라는 점에서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공짜로 버프 옵션 하나가 생겼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잠시 후, 아이템 정보 창을 읽어 내려가던 이안의 두 눈이 살짝 확대되었다.
“어……?”
아이템 정보 창에, 이안으로서도 처음 보는 정보들이 들어있었기 때문이었다.
‘중간계라고? 게다가 용사의 마을? 이건 대체 뭐지?’
400레벨을 찍어야 입성할 수 있는 정령계부터 시작해서, 베히모스의 영혼을 찾으러 가야 하는 명계까지.
아직 가 보지 못한 차원계가 널려 있는데 ‘중간계’라는 새로운 이름이 또 등장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심지어 이 ‘중간계’라는 차원은 명계나 정령계와 달리 어떤 곳일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뭐,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어차피 계정 귀속 아이템이기에 잃어버릴 염려도 없었으니, 계속 들고 있다 보면 언젠가는 그 용도에 대해 알게 되리라.
편하게 생각한 이안이 ‘용기사의 징표’ 아이템 창을 닫아 버렸다.
그리고 아이템 정보 창 대신, 길드 정보 창을 오픈했다.
“어디 보자, 지금이 새벽 6시니까, 아직 접속한 사람은 없겠지?”
접속 상태인 길드원 목록을 한번 확인해 본 이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안과 파티 플레이를 해 줄 만한 길드원이 아무도 접속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바탕 큰 전투를 치른 뒤, 다들 피곤에 지쳐 자는 듯했다.
“어쩔 수 없지. 우리 엘카릭스랑 오붓하게 사냥해야겠어.”
엘카릭스를 떠올린 이안은, 히죽 웃었다.
귀여운 그녀를 떠올리니, 자신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진 것이다.
“엘카릭스, 소환!”
위이잉!
이어서 푸른 빛무리와 함께, 이안의 앞에 엘카릭스가 나타났다.
“헤헤, 아빠, 푹 쉬셨어요?”
소환되자마자 해맑은 표정을 지으며 이안의 팔에 매달리는 엘카릭스.
아직까지 적응이 덜 된 이안은 살짝 움찔하기는 했지만, 그와 동시에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그, 그럼. 아주 푹 쉬고 왔지! 우리 엘카릭스는? 잘 쉬었니?”
“헷, 저도요.”
기분이 좋은지 폴짝폴짝 뛰는 엘카릭스를 보며, 이안은 그녀의 정보 창을 한번 띄워 보았다.
‘음, 170레벨이라……. 어제 정말 많이 올리기는 했네.’
물론 이제부터가 정말 필요 경험치량이 많아지는 구간이었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하루만에 170레벨을 찍은 것은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용기사단장 카미레스와 용기병들이 버스를 태워준 덕에 가능했다고 보는 것이 맞았다.
‘오늘 목표는 240레벨이다……! 원래 목표는 좀 빠듯하게 잡아야 성취감도 있는 법이지.’
이안의 시선이 다시 엘카릭스를 향했다.
고사리같은 작은 손으로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꼭 쥐고 있는 엘카릭스를 보니, 없던 기운도 솟아날 지경이었다.
이안은 이 귀여운 꼬마숙녀에게 애칭을 지어 주기로 했다.
“엘카릭스, 아빠가 이제부터 널 ‘엘’이라고 부르려는데, 어때?”
이안과 엘카릭스의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녀는, 커다란 두 눈을 깜빡이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우왓, 좋아요! 그럼 나 이제부터 엘인 거예요?”
“그래, 엘. 이제부터 엘이라고 부를게.”
“신난다아!”
‘엘’이라는 별명을 얻은 엘카릭스는 정말 신이 나는지 이안의 팔에 대롱대롱 매달려서 환호성을 질렀다.
그런데 그때, 이안의 눈앞에 생각지도 못했던 메시지가 떠올랐다.
띠링-!
-소환수 ‘엘카릭스’에게 새로운 별명을 지어 주었습니다.
-고유한 이름을 가진 소환수에게 ‘별명’을 지어 주는 것을 성공하셨습니다.
-명성이 5천 만큼 상승합니다.
-소환수 ‘엘카릭스’와의 친밀도가 10만큼 증가합니다.
그리고 메시지를 확인한 이안에게 문득 하나의 사실이 떠올랐다.
‘엇, 그러고 보니……. 카르세우스같이 고유한 이름을 가진 소환수는 이름을 지어 줄 수 없다고 했었는데?’
사실 이안은 카르세우스의 이름을 바꿔 보려 시도했던 적이 있었다.
이름이 너무 길어서 부르기 귀찮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카르세우스는 거부했고, 당시에 ‘고유한 이름을 가진 소환수는 이름을 변경할 수 없습니다.’ 라는 메시지가 떴었던 것이다.
‘별명을 지어 주면 되는 거였군!’
게임 플레이에 큰 영향을 미칠 만한 부분은 아니었지만, 재밌는 사실을 발견한 이안은 히죽 웃었다.
카르세우스를 비롯한 다른 소환수들에게도 별명을 지어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왠지 뿍뿍이를 놀려먹을 때 아주 유용할 것 같은 콘텐츠였다.
“자, 그럼 엘, 우리 오늘도 사냥 한번 가 볼까?”
“우왕, 좋아요! 오늘도 어제처럼 까만 친구들 때려잡으러 가는 거예요?”
엘카릭스는 짧은 팔을 휙휙 휘두르며 대답했다.
“그, 그래. 까만 친구들 때려잡으러 가자.”
“헤헷, 조금 무섭지만, 아빠랑 함께니까 재밌을 것 같아요!”
그런 그녀를 보며, 이안은 어쩐지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하나도 안 무서워 보이는데…….’
어쨌든 엘카릭스의 대사는, ‘겁이 많은’이라 쓰여 있는 자신의 성격 정보에 어울리는 것이었다.
“읏차!”
엘카릭스를 번쩍 들어 목마를 태운 이안은,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다.
사냥터로 가기 전, 들러야 할 곳이 한 군데 있었기 때문이었다.
* * *
“흐음, 내가 왜 네 말을 들어야 하지?”
거만한 표정으로 이안을 올려다보며, 퉁명스런 어투로 틱틱거리는 한 초딩. 아니, 소년.
루가릭스의 앞에 쪼그려 앉은 이안이, 그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넌 이 인간계의 조화와 균형을 수호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가지고 있잖아?”
“그, 그렇지.”
“그러려면 어둠의 군대를 몰아내야 하고.”
“맞아.”
“난 지금 어둠의 군대와 싸우러 가는 길이거든. 그러니 너도 따라와야 하지 않겠어?”
케이튼 영지와의 전투를 치렀던 어제.
딱히 이안이 부탁하지 않았음에도 루가릭스는 로터스 왕국을 도왔다.
그가 긴 잠에서 깨어난 이유가 어둠의 군대를 몰아내기 위함이었으니, 어둠의 군단과의 전쟁에 당연히 참전한 것이다.
하여 이안은, 개인적인 사냥에도 루가릭스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생각이었다.
그 어떤 랭커와 비교하더라도 우월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는 데다 경험치까지 가져가지 않는 NPC이니, 파티원으로 이보다 더 완벽한 녀석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겸사겸사, ‘루가릭스 길들이기’ 퀘스트도 시도해 볼 예정이었다.
‘테이밍 마스터 클래스 티어 상승이라……. 아무리 어려워도 무조건 완수해야만 하는 퀘스트야.’
어떻게 테이밍해야 할지 감이 잘 오지는 않았지만, 어떤 시도든 지속적으로 해 봐야만 한다.
만약 루가릭스를 테이밍하지 못한 채 리치 킹 에피소드가 끝이 나면, 퀘스트에 실패하고 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흐음, 정말 어둠의 군대를 상대하러 가는 건가?”
“당연하지. 그게 아니었다면 널 데리러 오지도 않았을 거라고.”
“으으음…….”
하지만 왜인지 루가릭스는 썩 내켜하지 않는 듯했다.
그에 이안은, 조금 더 강수를 둬 보기로 했다.
“루가릭스, 너 엘카릭스 오빠라며?”
“그렇다.”
“엘카릭스도 리치킹의 군대를 물리치기 위해 나와 함께 가는데, 오빠라는 녀석이 성안에서 빈둥댈 셈이야?”
“……!”
생각지 못했던 이안의 공격에 루가릭스는 살짝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이안의 어깨에 올라타 있던 엘카릭스가 한 술 더 떠서 이안을 지원했다.
“아빠, 쟤가 내 오빠라고요?”
“응? 쟤 말로는 그렇다던데?”
“아닌데, 나 저런 오빠 없는데.”
“그, 그래?”
“응! 난 저런 겁쟁이 오빠 없어.”
“……!”
이안이 불을 붙이면서 쌍둥이 남매의 신경전이 시작되었다.
겁쟁이라는 말에 발끈한 루가릭스가, 씩씩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누, 누가 겁쟁이야?”
“누구긴! 네가 겁쟁이지!”
“우씨, 너 오빠한테 겁쟁이라니, 내가 얼마나 용감한데!”
“베에, 우리 아빠가 너보다 훨씬 용감하거든! 그리고 네가 왜 내 오빠야?”
“그, 그야 내가 오빠니까.”
“몰라! 난 인정할 수 없어. 아빠, 쟤 버리고 가요. 나 겁쟁이랑 안 놀 거야.”
영혼석에서 깨어난 엘카릭스는, 과거의 기억이 없는 듯했다.
이안을 아빠로 인식한 것부터 시작해서, 쌍둥이 오빠라는 루가릭스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까지.
엘카릭스의 상태는 카르세우스때와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뭐지? 이거 어떻게 흘러가는 거야?’
원래의 계획과는 조금 틀어졌지만, 어쩐지 더 나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듯했다.
티격태격하는 둘을 구경하던 이안이, 루가릭스를 살살 꼬이기 시작했다.
“야, 루가릭스.”
“으응?”
“너 용맹한 어둠의 신룡이잖아.”
“맞아! 난 용감해!”
“그럼 그걸 보여 주면 되잖아.”
“어떻게?”
“어떻게 하긴! 나랑 같이 어둠의 군대와 싸우면서 보여 주면 되지.”
“……!”
루가릭스는 어린 정신 연령과 함께 강한 자존심을 가지고 있는 어둠의 신룡이었다.
때문에 어둠의 군대를 몰아내야 한다는 사명이 있음에도, 인간에 불과한 이안에게 끌려다니기 싫었던 것이다.
한데 엘카릭스까지 가세해서 자신을 약 올리니, 도무지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조, 좋아! 내가 반드시 이안보다 용맹하다는 걸 보여 주고 말겠어!”
주먹까지 불끈 쥐며 다짐하는 루가릭스였다.
하지만 엘카릭스는 그가 못 미더운지, 혀를 날름 내밀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어디서 쪼꼬만 게 우리 아빠 이름을 마음대로 불러?”
“우씨!”
입이 댓 발 나온 루가릭스가 씩씩거리며 바깥으로 나섰다.
그리고 이어서 이안의 눈앞에 한 줄의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띠링-!
-어둠의 신룡 ‘루가릭스’가 파티에 합류합니다.
이안의 한쪽 입꼬리가 슬쩍 말려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