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마신의 신탁 -1 >
* * *
LB소프트의 기획회의실.
커다란 대 회의실의 전면에는 벽 전체를 꽉 채울 만큼 거대한 스크린이 내려와 있었다.
그리고 그 큰 스크린을 가득 채우고 있는 아름다운 설원.
그 안에는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하는 대규모 전투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마치 유비의 아들을 지키기 위해 백만대군을 돌파했던 조자룡처럼.
새까맣게 많은 언데드 군단을 뚫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한 무리의 파티.
그리고 회의실 안에는, 그 영상을 보고 있는 두 명의 남자가 있었다.
두 사람의 정체는 바로, 김의환 과장과 그의 심복(?) 나지찬 대리였다.
김의환이 나지찬에게 말했다.
“어이, 지찬이.”
“예 과장님.”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뭐가 말입니까?”
“이번 에피는 최소 반년짜리라고 호언장담하지 않았었나? 바로 이 주일 전에, 자. 네. 가. 말이지.”
시선은 계속 스크린을 향한 채, 초조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무는 김의환.
반면에 나지찬은 여유롭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스크린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실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랬었죠. 제가 분명 그렇게 말씀드렸죠.”
나지찬의 대답에, 김의환이 발끈하며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무, 무슨 그런 무책임한 반응이 있어 짜샤! 지금 네 기획만 믿고 다섯 명이나 휴가 승인 내줬는데!”
흥분한 김의환이 핏대를 올렸지만, 나지찬의 표정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왜 그렇게 걱정하고 그러세요? 아직 에피소드 클리어 된 것도 아닌데요.”
김의환이 씩씩거리며 곧바로 대답했다.
“야, 지금 걱정 안하게 생겼냐? 간지훈이인지 뭔지 이상한 초딩 놈이 퀘스트 하라는 대로 안하고 멋대로 한 것 부터가 문제였어. 그 초딩놈 때문에 카데스 카드는 무용지물 되어 버렸고, 심지어 원래 샬리언의 편이었어야 되는 루가릭스까지 인간들 편에 서 버렸잖아.”
마치 랩 배틀이라도 하는지 속사포처럼 나지찬에게 쏘아붙이는 김의환.
나지찬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인정했다.
“확실히 그렇게 되었죠. 훈이가 트릭을 간파해 낼 거라고는 저도 예상치 못했었으니까요.”
그러나 나지찬은 여유를 잃지 않았다.
사실 지금 에피소드의 진행 양상은, 거의 90%이상이 나지찬이 예측했던 대로 진행되어 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지금까지 중 유일하게 나지찬의 예상을 빗나갔던 전개는 단 하나. 바로 훈이였다.
훈이의 게임두뇌가 필요 이상으로(?) 뛰어났던 것이다.
‘뭐 힌트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이안도 아니고 훈이가 그걸 간파해 낼 줄은 몰랐었지.’
덕분에 이안 일행의 퀘스트 속도가 엄청 빨라지기는 했지만, 나지찬은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아직까지 꺼내들지 않은 패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나지찬이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과장님.”
“왜 불러 인마.”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 이 에피소드. 제가 장담했던 것처럼 반년은 울궈먹을 수 있을 테니까요.”
여유를 넘어 자신만만한 나지찬의 표정에, 김의환 팀장의 안색이 살짝 밝아졌다.
그가 아는 나지찬은, 빈말은 하지 않는 성격이었기 때문이었다.
김의환이 은근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호오, 자네가 자신만만해 하는 이유. 그거 나도 좀 알 수 있을까?”
스크린을 향해 있던 나지찬의 시선이 김의환을 향해 돌려졌다.
이어서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잠시 뜸을 들인 나지찬이,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마신 데이드몬. 설마 그를 잊진 않으셨겠죠?”
* * *
“클리크 둥지 풀타임 뛰실 파티원 모집합니다! 180레벨 이상이신 분들만 지원 부탁드려요! 힐러님 레벨제한은 160! 200레벨 이상 알 노가다 하시는 고 레벨 고수님들 환영입니다!”
“자, 자! 항마력 옵션 풀 세팅 된 크루거 풀 세트 판매합니다! 부위당 1350만골드! 도끼는 2700만 골드! 싸게 처분하고 있습니다!”
“님. 혹시 크루거 도끼에 항마력 관통 붙어 있나요?”
“물론입니다. 4.5% 붙어있습니다.”
“에이, 4.5퍼는 좀 애매한데……. 300만 골만 깎아 주시죠.”
“어허, 이 분. 너무 날로 먹으려 하시네. 좋소! 내가 선심 한번 씁니다. 2630만골! 이 이하는 안 돼요!”
인간계가 한참 새로운 에피소드로 인해 시끌벅적할 동안, 마계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인간계에 비해서는 유저 숫자가 적다고는 하더라도, 전체 유저의 30%가 넘는 마계 유저들을 LB사에서 방치할 리 없었던 것이다.
처음 오픈되었던 당시에야 따로 업데이트 할 필요 없이 컨텐츠 자체가 무궁무진했던 마계였지만, 이제는 기존의 컨텐츠가 모두 소모된 지 오래 된 상태.
그 동안 마계에도 제법 많은 컨텐츠들이 업데이트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중 가장 큰 업데이트는 바로, ‘마계 중앙대륙’ 오픈.
넘버링으로 나뉘어져 있던 기존의 마계 이외에, 새로운 대륙이 하나 생겨났다.
‘중앙 대륙 귀환 스크롤’만 지니고 있다면 마계 어디에서든 곧바로 이동할 수 있는 공간인 마계 중앙 대륙.
이곳은 인간계의 대륙과 비슷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곳이었으며, 덕분에 수많은 마계의 길드들이 이곳에 거점을 만들고 성장해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마계 중앙 대륙은, 인간계와 다른 점도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대륙 안에 ‘사냥터’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중앙 대륙은 단지 수 많은 마계의 영지들끼리 치고박고 싸우는 ‘전쟁터’ 같은 곳이었으며, 사냥을 위해서는 기존의 넘버링 지역으로 이동해야 하는 시스템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마계의 중앙대륙은 인간계의 대륙과는 달리, 유저들에 의해 세워진 왕국이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마계 길드랭킹 20위권 안에 드는 최상위의 길드들이, 겨우 영지 2~3개 정도를 보유하고 있는 수준.
마계 중앙대륙에 있는 모든 왕국들은 NPC인 마왕들이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감히 유저들이 비벼볼 만한 수준이 아니었던 것이다.
현재 마계의 공식 랭킹 1위인 이라한조차 마계서열로 따지면 400위 정도 밖에 되지 않았으며, 이것은 자신의 왕국을 갖지 못한 말단 마왕에 비해서도 한참 약한 수준이었다.
그러니 이라한보다 랭킹이 낮은 다른 랭커들의 수준은, 간신히 서열 5~600위 정도에 턱걸이할 뿐이었다.
마계에서 네 번째로 거대한 왕국인, 릴리아나 왕국.
그리고 그 곳의 노블레스인 사무엘진은 오늘도 고통 받고 있었다.
[사무엘진 영주. 분명히 이번 달에는, 릴리아나님께 보낼 마정석을 5%만큼 늘리라고 했던 것 같은데.]
수정구를 통해 흘러나오는 걸걸한 목소리.
수정구의 안에는 우락부락한 마족의 얼굴이 떠올라 있었고, 그는 무척이나 못마땅한 표정으로 사무엘진을 응시하고 있었다.
사무엘진은 식은땀을 흘리며 그에게 대꾸했다.
“그, 그게……. 죄송합니다, 얀쿤님. 생각보다 광산에서 나오는 마정석의 물량이 부족합니다.”
[시끄럽다! 그대의 영지에서 발견된 광산은, 분명 양질의 마정석을 품고 있는 훌륭한 광산이었다. 한데 이 정도의 물량도 맞추지 못한다는 것은 그대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증거!]
사무엘진을 꾸짖는 마족의 정체는 바로, 과거 이안의 가신이었던 얀쿤!
얀쿤은 그동안 릴리아나의 밑에서 성장하여, 마계 서열 200위에 육박하는 엄청난 거물이 되어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처음부터 얀쿤에게 단단히 찍혀 있던 사무엘진은, 주기적으로 그에게 갈굼을 받고 있었다.
‘크윽. 이 근육돼지같은놈은 왜 맨날 날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인 거야? 아니 광산이 좋은 거야 사실이지만 제대로 굴러가질 않고 있는데 마정석 물량을 어떻게 맞추냐고!’
얼마 전 사무엘진의 영지에서는, 제법 커다란 규모의 광산이 발견되었다.
마정석을 비롯해서 마력석, 마수 능력석과 같은 특수한 광물부터 시작해서, 각종 일반 광물들까지 채굴 가능한 광산이 발견된 것.
이 광산의 가치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것이었고, 때문에 사무엘진은 뛸 듯이 기뻤었다.
광산 개발에 착수하기 직전까지는 말이다.
광산 개발이 시작되면서, 사무엘진의 악몽도 같이 시작되었다.
‘광산 레벨 올리는데 돈이 그렇게 많이 들어갈 줄 누가 알았겠어?’
사무엘진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거액이, 광산 개발비용으로 들어가 버렸던 것.
하지만 거기까지는 그러려니 할 수 있었다.
사무엘진은 현실에서도 ‘금수저’에 가까운 인물이었고, 카일란을 플레이하면서 모아놓았던 골드도 제법 많았으니까.
게다가 앞으로의 수익에 대한 투자라고 할 수 있었으니, 낙심할 만한 부분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진짜 악몽은 이제부터였다.
수십억을 들여 광산레벨을 올렸음에도, 광산에서 생산되는 광물들의 수준이 형편 없었던 것이다.
광산의 레벨은 올려놨는데 광물을 캐는 일꾼들의 수준이 낮아, 높은 등급의 광물은 하나도 캐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높은 광산 레벨 때문에 납부해야 하는 세금도 늘어났으니, 사무엘진은 정말 울고 싶을 지경이었다.
한 달 내내 채굴한 광물이 세금을 내고 나면 다 사라져 버리니, 허탈하기 그지 없는 것이다.
“죄송합니다, 얀쿤님. 제가 다음 달 부터는 꼭……!”
[다음 달은 없다, 사무엘진. 릴리아나님께 3일 내로 부족한 마정석을 진상하지 않는다면, 그대에게 엄벌을 내릴 것이다.]
“하, 하지만……!”
[지지직- 지직-]
사무엘진의 간절한 외침에도 불구하고 얀쿤은 냉정하기 그지 없었고, 수정구는 일방적으로 꺼져 버렸다.
쾅-!
“으……! 이 근육돼지같은 노옴!!”
분노한 사무엘진이 주먹을 꽉 쥔 채 부르르 떨었다.
부족한 마정석을 진상하려면, 경매장에서 생돈을 주고 구매해야 하는 것이다.
“하아, 이거 광산 제대로 굴리려면 드워프라도 있어야 되는 거 아냐?”
사무엘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개발비용만 되돌려 받을 수 있다면, 광산을 어디에 팔아넘기고 싶을 지경이었다.
“후우, 광산노예들 숙련도가 높아지면 조금 나아지겠지…….”
하지만 사무엘진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부분이 있었다.
카일란의 광산 시스템은, 광산의 레벨이 높을수록 광물채취의 난이도가 어려워지게 설계되어 있었고, 때문에 처음부터 광산레벨을 높게 올려버리면 광산노예들이 적응을 하지 못한다.
때문에 광산노예들의 채굴 숙련도 오르는 속도가 무척이나 더딘 것이다.
어쨌든 광산으로 인해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은 사무엘 진은, 의자를 뒤로 푹 젖힌 채 눈을 감았다.
이 분노를 삭이려면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았다.
“후우…….”
사무엘진의 입에서 새어 나오는 깊은 한숨.
그런데 그 때, 눈을 감고 있던 그의 귓전으로 경쾌한 기계음이 울려 퍼졌다.
띠링-!
그에 사무엘진의 눈이 반사적으로 뜨여진다.
이어서 그의 눈이 살짝 커졌다.
의외의 인물로부터 메시지가 왔기 때문이었다.
[이라한 : 사무엘, 혹시 지금 레카르도 왕국으로 올 수 있나?]
하지만 내용을 읽자마자 그의 표정은 확 구겨지고 말았다.
“아니 이 자식이, 지금 누구보고 오라 마라야?”
이라한은 사무엘진보다 확실히 강한 랭커이다.
하지만 이라한의 길드인 다크루나 길드는 여전히 호왕길드보다 한 수 아래였다.
때문에 사무엘진은, 이라한의 말투가 몹시 거슬렸다.
[사무엘진 : 내게 볼 일이 있다면, 릴리아나 왕국으로 찾아오는 게 맞는 것 아닌가?]
하지만 이어진 메시지를 본 순간, 사무엘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이라한 : 흐음, 건방진 건 여전하군. 뭐, 오기 싫다면 굳이 오지 않아도 좋아. 다만 ‘마신의 신탁’에 대해서는 호왕길드에 공유할 수 없겠군.]
< (4). 마신의 신탁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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