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 어둠의 군단 -3 >
* * *
- 뭐지? 이안이 갑자기 멈췄어요!
- 어, 그러네? 이건 또 무슨 시츄에이션임? 공격하다말고 갑자기 왜 멈추는 거야?
- 헐 ㅋㅋ 버그라도 걸린 건가? 이안이 카일란 최초로 버그사 하나요?
이례적으로 인간계의 최상위급 랭커들이 전부 모여 진행 중인 ‘사령의 군장’ 보스 레이드.
랭커들은 그 이름값을 증명이라도 하듯 사령의 군장을 몰아붙였고, 덕분에 보스의 생명력은 이제 10%도 채 남지 않은 상황까지 왔다.
그리고 큰 이변이 없다면, 오래 걸려도 3~40분 안으로는 레이드가 마무리될 수 있었던 상황.
그런데 그 때.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상황이 만들어지고 말았다.
레이드에서 가장 큰 존재감을 뿜어내던 이안이, 사령의 군장에게 딜을 넣다 말고 그 자리에 멈춰 서 버린 것이었다.
마치 렉이라도 걸린 듯, 갑자기 자리에 우뚝 서 버린 이안의 신형.
이안 캐릭터 뿐 아니라 이안의 모든 가신들과 소환수들 까지도 동시에 자리에 멈춰 버렸으니, 확실히 평범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리고 멈춰버린 이안의 머리 위로, 사령의 군장이 발동시킨 어둠의 파동이 휩쓸고 지나갔다.
“안 돼……!!”
“쟤 왜 가만히 있는 거야?!”
“갑자기 뭐야?! 버그인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단발마의 비명소리.
이안이 여기서 사망한다면, 남은 레이드에 차질이 생길 수 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안이 없더라도 질 만한 상황은 아니었으나, 훨씬 더 어려운 상황이 될 것만은 분명했으니까.
하지만 유저들의 탄성은 곧 의아함으로 바뀔 수 밖에 없었다.
콰아앙-!
대지를 분쇄시키기라도 할 듯 어마어마한 굉음을 뿜어내며 떨어져 내린 어둠의 기운 사이로, 이안의 신형이 너무도 멀쩡하게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원래라면 그대로 회색 빛으로 변하며 게임아웃 되었어야만 했던 상황이었는데, 게임아웃은 커녕 생명력 게이지가 미동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
당황한 유저들이 동요했다.
“뭐, 뭐야?! 저거 왜 저래?!”
“뭐지? 소환술사한테 무적 스킬도 있었어?”
“무적은 아닌 것 같고, 그냥 버그 걸려서 그런 것 같은데?”
현장에서 전투 중이던 유저들 뿐 아니라, 네티즌들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 님들, 저거 아무래도 버그 맞는 것 같죠?
- 그런 듯 하네요. 무적관련 스킬이라기엔 너무 상황이 이상함.
- 맞아. 카일란이 아무리 버그가 없기로 유명해도, 이제 한번쯤 생길 때 됐음.
그런데 그 때.
누군가 반론을 제기했다.
- 노노 님들 저거 버그 아니래요.
- 엥? 그걸 님이 어떻게 알아요.
- 방금 고객센터에 신고하려고 전화했었음.
- 헐ㅋㅋㅋ 행동력 지리네. 고객센터에선 뭐래요?
- 뭐라긴요, 버그 아니라고 하죠.
- 음;; 뭐지? 진짜 버그 아닌가?
수없이 쏟아지는 가설들과, 이안의 상태에 대한 추측.
무척이나 당황스러운 상황이었으나, 현장에 있던 랭커들은 금방 정신을 차리고는 다시 레이드에 집중했다.
이안에게 신경을 분산시키기에는, 너무도 적이 강력했기 때문이었다.
“모두 집중! 이안 없어도 충분히 잡을 수 있어!”
“오케이! 저놈 생명력 거의 바닥이니까, 살살 요리하면 마무리 할 수 있을 거야!”
침착하게 움직이며 이안의 빈 자리를 메워가는 랭커들.
그렇게 50여분 정도가 지났을까?
[크어어어! 이 내가 고작 인간들 따위에게……!]
커다랗게 포효한 사령의 군장이, 그 자리에서 천천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쿠쿵- 쿵-!
바닥이 울릴 정도로 커다란 소리를 내며 자리에 쓰러지는 레이드 보스.
그리고 이어서, 레이드에 참여한 모든 이들의 시야에 기다렸던 시스템 메시지가 울려 퍼졌다.
띠링-!
[레이드 보스 ‘사령의 군장’을 성공적으로 처치하셨습니다!]
[경험치를 46987030만큼 획득합니다.]
[명성을 1만 만큼 획득합니다.]
[레이드에 기여하셨으므로, 보상을 획득합니다.]
[‘레이드 보물상자’ 아이템을 획득합니다.]
:
:
보스가 쓰러지는 것을 보며, 유저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아, 진짜 힘들었네.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어.”
“크, 샤크란님 수고하셨습니다. 마지막에 극딜 넣어주셔서 피해 없이 마무리 됐네요.”
“별 말씀을.”
“레비아님도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진짜 사제 랭킹 1위 클라스 쩌네요. 회복량 지렸음.”
훈훈한 대화를 나누며 서로의 공을 치하하는 랭커 유저들.
그런데 그 때.
획득한 보상을 확인하던 헤르스가, 이안이 있던 자리로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쟨 언제까지 저렇게 멈춰있……?!”
하지만 헤르스의 중얼거림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전투가 끝날 때 까지, 거의 한 시간에 가까운 시간동안 자리에 멈춰있던 이안과 소환수들의 신형이,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 * *
“마신 데이드몬…!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훈이의 머릿속에 어지러이 뒤섞여 있던 정보의 조각들이, 하나 둘 맞춰지며 커다란 하나의 그림을 만들어 내었다.
그리고 그 만들어진 그림에는 아직 조각 하나가 부족했는데, 그 라스트 피스가 바로 ‘마신 데이드몬과 리치 킹 샬리언의 관계’ 였던 것이다.
‘샬리언이 데이드몬과 무슨 작당을 한 게 분명해. 그로 인해 카데스가 변하게 된 것이고.’
이 마지막 열쇠를 찾는다면, 비로소 그림이 완벽히 완성될 것이다.
현재 인간계에서 진행되고있는 뉴 에피소드.
이 에피소드의 모든 인과관계가 비로소 드러나게 될 테니까.
그리고 그 마지막 퍼즐을 완성하고 나면, 어둠의 신룡 루가릭스를 어떻게 구슬려야 할 지도 알 수 있게 될 것 같았다.
훈이는 서둘러 인벤토리를 뒤졌다.
릴슨에게 보여줘야 할 아이템이 하나 있었다.
“릴슨형. 혹시 마계의 아이템도 감정이 가능해?”
훈이의 물음에, 릴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가능하긴 해. 경우에 따라 특별한 재료가 필요하긴 하지만 말이야.”
훈이는 인벤토리에서 지금까지 고이 모셔 두었던 ‘데이드몬의 서’ 아이템을 꺼내어 릴슨에게 넘겼다.
훈이가 과거에 ‘어둠의 신 카데스의 심부름’ 퀘스트를 완료하고 받았던 아이템.
애초에 카데스의 심부름 자체가 ‘과거에 있었던 데이드몬과의 거래’를 이행하기 위한 것이었으니, 이 ‘데이드몬의 서’ 아이템이 분명 단서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데이드몬의 서’의 아이템 정보가 다음과 같았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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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이드몬의 서 -
등급 : 전설
분류 : 잡화 (유물)
마신 데이드몬과 어둠의 신 카데스의 권능이 담겨있는 고서(古書)이다.
두 신의 맹약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으며, 히든클래스인 ‘파괴의 마법사’ 클래스로 전직하기 위한 단서가 담겨 있다.
* 봉인되어 있는 아이템입니다.
* 마신의 제단에 공양할 시, 높은 등급의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아이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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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슨이 이 ‘데이드몬의 서’에 걸린 봉인을 풀어낼 수 있다면 두 신이 맺은 맹약에 대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훈이에게서 아이템을 받아 든 릴슨이, 혀를 내둘렀다.
“와……. 이렇게 귀한 물건을 대체 어디서 구한 거냐? 심지어 인간계 유저가 마계의 물건을…….”
훈이가 핀잔을 주었다.
“그거 구한다고 정말 뼈 빠지게 고생했었으니까, 쓸 데 없는 소리 말고 빨리 봉인이나 풀어 줘.”
“알겠어, 기다려 봐.”
툴툴거린 릴슨은, 훈이에게서 받은 데이드몬의 서에 감정스킬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릴슨의 입이 다시 열렸다.
“역시, 그냥 풀어버릴 수 있는 봉인은 아니야.”
“그래? 그럼 뭐가 필요한데?”
“아마 넌 잘 모를 텐데, 마령석 이라는 게 필요해. 최소 중급, 상급 마령석이면 더 좋고.”
그 말을 들은 훈이가 고개를 갸우뚱 했다.
“마령석이라고?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그에 릴슨이 두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에? 마령석은 연금술이나 연성술에 쓰이는 재료라서, 생산직업 키우는 유저가 아니라면 보통 모를 텐데?”
“아냐, 분명 들어봤어 형. 그 어감……. 무척이나 낯이 익어.”
마령석과 관련된 기억이 왠지 좋은 기억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훈이는 열심히 머리를 굴려 보았다.
그런데 그 때.
두 사람만 있던 방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훈이는 마령석이 왜 친근(?)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상급 마령석. 내가 제공할게.”
* * *
딱 봐도 광물 이라는 느낌이 드는 ‘마령석’이라는 이름.
그리고 훈이는, 심지어 그 마령석을 열심히 채굴했던 기억이 있었다.
물론 상급 마령석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이안형…? 형이 여기에는 어떻게…?!”
영주성의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다름 아닌 이안이었던 것.
이안이 씨익 웃으며 훈이에게 말했다.
“어떻게는 인마. 형이 너 도와주려고 왔지.”
“……!”
이안의 말에, 훈이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이번 만큼은 혼자서 꿀꺽 해 보려고 했는데…!’
대충 보아도 메인 시나리오의 핵심인 굵직한 히든 퀘스트들.
차원전쟁 때도 그랬듯, 이런 굵직한 핵심 퀘스트를 클리어하다 보면, 결국 큰 시나리오의 주역이 될 수 있다.
당시 이안이 혼자서 인간계 진영을 캐리했던 것 처럼 말이다.
차원전쟁 때 보여줬던 이안의 포스는, 정말 어떤 랭커들과도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압도적인 수준이었다.
그리고 훈이는, 차원전쟁 당시 이안의 포지션을 노리고 있었다.
이번 에피소드의 주역이 되어 인간계의 영웅이 되는.
거창한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눈 앞에 나타나 싱글싱글 웃고 있는 이안을 보니, 이미 그것은 물 건너간 것 같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냐?”
이안의 추궁(?)에, 훈이는 손사래를 치며 대꾸했다.
“아, 아니야 형. 그럼 상급 마령석 좀 부탁해.”
이안은 피식 웃으며 인벤토리에서 마령석을 꺼내어 들었다.
그리고 상황파악이 끝나지 않아 어리둥절한 표정인 릴슨에게, 그것을 건네주었다.
“자, 릴슨형. 여기 마령석.”
“어? 으응.”
릴슨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마령석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훈이에게서 받은 데이드몬의 서 위에 그것을 올려 놓았다.
릴슨의 시선이 다시 이안을 향했다.
“혹시 이안아. 너 마령석 여러 개 있어?”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중급은 엄청 많은데, 상급은 지금 한 세 개 정도밖에 없어. 왜?”
“아, 아니. 이게 한 번에 성공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어서….”
잠시 멈칫 한 이안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거 비싼 거야 형.”
“알아.”
“그러니까 한 번에 성공해. 두 개째 부턴 가격 청구할 거니까.”
“…….”
릴슨은 침을 꿀꺽 삼킨 뒤 마령석 위에 손을 올렸다.
‘후우, 이게 요즘 시세가 얼마였더라? 150만골 정도였나?’
실패하는 순간 노트북 한 개를 날린다고 생각하니,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마정석과 데이드몬의 서에 온 정신을 집중시킨 릴슨.
그는 침을 꿀꺽 삼키며, 침착하게 감정 스킬을 발동시켰다.
< (7). 어둠의 군단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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