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 어둠의 군단 -1 >
너무도 익숙한 분위기.
어둠의 신 카데스의 신전과 꼭 빼어 닮은, 칠흑과도 같은 어둠 속.
그 안에는, 새카만 블랙 드래곤 한 마리와, 음울한 분위기를 풍기는 두 남자가 서 있다.
훈이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두 남자.
임모탈과 카데스가 서로를 마주보며 대화한다.
“임모탈, 그대가 루가릭스를 도울 수 있겠는가.”
백발에 흑의 로브를 두른 남자, 카데스.
그가 입을 열자, 임모탈이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공손히 고개를 숙여 보인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어둠의 신이시여.”
임모탈의 대답에 카데스가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시선을 돌린다.
그리고 그 곳에는 거대한 블랙 드래곤, 루가릭스가 앉아 있었다.
“루가릭스, 너도 잘 할 수 있겠지?”
루가릭스 역시,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물론입니다, 카데스님. 실망시켜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의 기억이 훈이의 머릿속을 빠르게 훑고 지나간다.
차원전쟁 당시 재생되었던 에피소드 영상이, 훈이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당시에는 무척이나 흥미롭게 시청했었지만, 어느새 잊고 있었던 영상.
“맞아, 그랬었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는 훈이를, 릴슨이 멀뚱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뭐해? 책 읽다 말고.”
그에 훈이가 멋쩍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아, 뭐 좀 생각난 게 있어서 형. 형은 정리 다 끝나가는 거야?”
릴슨이 고개를 저었다.
“노노. 아직 멀었어. 좀만 더 읽으면서 기다려.”
“알겠어.”
대답을 마친 훈이가 눈을 감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단서가 하나 더 생긴 것이다.
‘그래, 이로서 이거 하나만큼은 확실해졌어. 최소한 그 세 존재가 원래부터 갈등을 가진 존재는 아니었던 거야.’
훈이가 겪은 차원전쟁은 일 년 정도 전의 일이지만, 영상 속에 등장했던 차원전쟁은 천년도 넘게 지난 과거이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생겨 임모탈과 갈등이 생겼다고 하더라도, 이상할 것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여기까지 생각이 진행되자, 훈이의 머릿속에 있는 또 하나의 퍼즐이 스르륵 맞춰졌다.
‘그러고 보니 이번 차원전쟁에서 임모탈은 나타나지 않았었네. 내가 임모탈의 대리인이기는 했지만, 그가 나타나지 못할 이유도 딱히 없었는데 말이지.’
임모탈은 건재하다.
훈이는 임모탈의 권능을 이어받기 위해 그에게 ‘도전’했던 것 뿐이고, 당시 임모탈은 훈이의 힘을 ‘인정’했을 뿐.
그로 인해 임모탈이 소멸되거나 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당시 임모탈은, 이안에게 새로운 퀘스트를 쥐여 주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임모탈은 혹시 그 탑을 벗어날 수 없는 건가? 모종의 이유 때문에?’
임모탈과 카데스.
그 둘 사이에는, 분명 어떤 사건이 존재했다.
언제일지 알 수 없는 지난 천년 사이에.
훈이는, ‘그 사건’ 안에 핵심적인 열쇠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것은 차기 어둠의 군주로서의 감(?) 이었다.
‘좋아, 그럼 이제 한번 펼쳐볼까…?’
훈이의 두 눈의 초점이, 다시 고서의 위로 옮겨졌다.
그리고 훈이에게 이 모든 기억을 떠오르게 해 준 한 줄의 문구가 금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버림받은 어둠의 군주와 지저(地底)의 제국.]
* * *
흑마법사, 데스 나이트.
그리고 언데드.
어둠 속성을 가진 모든 이들을 상대로, 이안은 막강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다.
이안의 노예인 ‘카카’의 존재 자체가 어둠이며, 또한 어둠의 천적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안의 바로 옆에, 그의 상성이 무색할 정도로 어둠을 학살하는 인물이 하나 있었다.
빛의 성녀 레비아.
그녀의 스킬이 하나 발동될 때 마다, 400레벨에 육박하는 언데드들이 가루가 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빛의 여신, 아르네시스님의 이름으로…!”
하얀 날개를 활짝 펼친 채 허공에 떠있는 레비아.
두 눈을 감고 가만히 손을 모으고 있는 그녀를, 사령의 군장은 어찌하지 못하였다.
그의 어둠마법들이 레비아의 근처에만 가면, 오간 데 없이 소멸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크으윽, 아르네시스의 종이 여기에 어떻게…!]
어둠의 연기 속에서 일어선 언데드들은 휘황찬란하게 내려앉는 빛줄기들을 감당하지 못했고, 레비아의 엄청난 위용 앞에 사령의 군장을 감싸고 있던 수많은 언데드 군단이 바스라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야말로 장관이라 칭하기 아깝지 않은 광경이었다.
“이거… 이러면 생각보다 더 쉬워질 수 있겠는데?”
마치 언데드를 말살하기 위해 태어난 듯, 미친 듯 한 신성력을 뿜어내고 있는 레비아.
그녀의 하얀 날개를 슬쩍 바라본 이안이 입 꼬리를 슬쩍 말아 올렸다.
아무래도 이 사기적인 능력은, 저 날개로부터 나오는 듯 했다.
‘일시적인 퀘스트 템 같은 건가? 하긴. LB사에서 이 정도로 벨런스 붕괴템을 내놓지는 않았을 테니까.’
어쨌든 이안으로서는, 지금의 이 상황을 이용하기만 하면 될 뿐.
아쉽게 레비아의 광역기도 ‘사령의 군장’에게 큰 피해를 주지 못했지만, 길이 뚫렸으니 이제 이안을 비롯한 다른 랭커들의 차례였다.
처척- 척-!
그리고 사전에 맞추기라도 한 듯, 랭커 유저들이 동시에 지면을 박차며 뛰어올랐다.
옆에서 한 발 빠르게 뛰어오른 샤크란을 발견한 이안이, 씨익 웃으며 인사했다.
“아재, 오랜만입니다?”
“시끄럽다 이놈아.”
한껏 인상을 찌푸리며 더욱 빠르게 발을 놀리는 샤크란.
그리고 다음 순간, 샤크란의 신형이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핏빛 그림자가 되어버린 샤크란의 모습.
이어서 그 인영이, 십 수 갈래로 쪼개졌다.
그것을 본 이안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재, 분신 숫자가 더 늘어났군. 어마어마한데…?’
이안은 강해졌고, 계속해서 더 성장하고 있다.
하지만 그동안 다른 랭커들도 놀지 않았다.
아니, 앞서 나가는 이안을 위협하기 충분할 정도로 악착같이 성장하고 있었다.
그에 이안은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샤크란, 레미르. 레비아…. 그리고 유신.’
안면이 있고 친분이 있는 실력자들부터 시작해서, 나열할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인간계의 랭커들.
그 수 십 명의 랭커들이 동시에 공격을 퍼붓는 광경은,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쿠르릉- 쿠쿵- 쿵-!
맵 전체가 진동할 정도로 대지가 요란스레 흔들린다.
하이 티어 스킬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발동되니, 그 여파가 어마어마한 것이다.
줄어들지 않을 것만 같던 레이드보스의 생명력이 깎여나간 게 눈에 보일 정도.
하지만 사령의 군장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쥐새끼같은 놈들…!]
분노한 사령의 군장이 무기를 거칠게 휘둘렀다.
콰쾅- 쾅-!
그러자 몇몇 기사클래스 유저들이 뒤쪽으로 튕겨나갔다.
게다가 그 중 미처 대처하지 못한 두셋 정도는, 그대로 새까만 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일반 공격 단 한방에 사망해 버린 것이다.
누군가의 입에서 탄성인지 투덜거림인지 모를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와 씨, 무슨 일반 공격이 저래?!”
방패 컨트롤을 정상적으로 한 기사 유저들의 생명력까지도 거의 절반이나 깎인 상황.
450레벨 레이드보스의 위용을 제대로 보여주는 공격력이었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도끼창을 휘둘러 기사들을 튕겨낸 사령의 군장이, 그 궤적을 살짝 틀어 올리며 다시 창극을 치켜든 것이다.
그리고 까만 도끼날의 끝에서, 보랏빛의 기운이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범위기다! 피해!!”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유저들.
하지만 그 경고에도 불구하고, 전장에서 이탈하지 않는 유저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중 가장 앞쪽에 있던 헤르스는 아예 방패를 치켜들며 한쪽 다리를 뒤로 내뻗었다.
가장 많은 충격을 흡수해낼 수 있는 방어자세.
이어서 기사클래스 최상위 티어의 방어스킬인 ‘신의 방벽’이 펼쳐졌다.
우우웅-!
신의 방벽은 범위 공격기를 막아내는 데 최적화된 기사클래스의 스킬로, 범위공격기가 발동되는 지점에 정확히 가져다 대면 스플레쉬 데미지를 모조리 흡수해버리는 고급스킬이었다.
다만 신의 방벽을 펼치는 그 자신은 방벽의 피해흡수 효과를 볼 수 없다는 약점이 있는 스킬.
그렇기에 헤르스의 이 판단은, 일견 무모해 보일 수도 있는 것이었다.
- 헐 미쳤어!
- 아무리 기사 랭커라도 저건 맞으면 즉사 각인데?!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사령의 군장의 무기가 헤르스의 방패에 닿기 바로 직전에, 몇 겹의 보호막이 동시다발적으로 헤르스에게 시전 되었다.
그 찰나의 타이밍에, 마법사 랭커들과 사제 클래스 랭커들이 쉴드 마법을 시전 한 것이었다.
콰아앙-!
이어서 헤르스의 방패에서 커다란 충돌음이 퍼져 나갔고, 뒷발을 축으로 버티던 헤르스의 몸이 3M가량 뒤로 밀려나갔다.
하지만 헤르스는 살아남았고, 심지어 생명력도 30%밖에 닳지 않았다.
타이밍 좋게 들어온 쉴드마법들과 헤르스의 방패 컨트롤이 대부분의 피해량을 흡수한 것이다.
게다가 헤르스의 ‘신의 방벽’ 덕에 모든 범위피해는 모조리 증발해 버린 것.
모르는 유저들이 보면 그저 기사 클래스 유저가 보스의 단일기를 막은 것 처럼 보이는 별 것 아닌 장면이었지만, 이해도가 있는 유저들은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찰나지간에 얼마나 많은 계산이 들어가 있는지 보이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채팅창의 스크롤이 미친 듯이 밀려 내려가고 있었다.
- 와, 쟤 헤르스지?
- ㅇㅇ 로터스 길마 헤르스 맞음.
- 크으, 진짜 배짱 지리네. 대체 뭘 믿고 저기서 가드 칠 생각을 한 거지?
- 내 말이 ㅋㅋ 보스 공격동작 시작될 때 까지도 아무 쉴드 안 걸려 있었는데, 진짜 깡 좋네.
- 뭘 믿긴요, 길드원들 믿은 거죠. 저기 뒤로 안 빠지고 남아있는 애들 전부 로터스 애들인 거 안 보임?
- 어? 그러네. 크으…! 로터스 파티플 미쳤네 진짜.
헤르스는 330레벨도 넘는 초 고레벨 기사클래스였지만, 사령의 군장은 450레벨이라는 괴물 같은 레벨의 보스 몬스터였다.
게다가 일반 보스도 아니고 필드에서 튀어나온 레이드 보스 몬스터.
랭커급 기사 클래스가 가드를 친다 하더라도, 450레벨 레이드 보스가 시전 하는 스킬을 맞는다면 그대로 게임아웃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방금의 공격에서 헤르스가 살아남기 위해 필요했던 최소한의 조건은, 거의 최대치까지의 피해흡수율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방패 컨트롤과, 최소 세 개 이상의 쉴드 마법이었다.
자신의 컨트롤과 길드원들의 실력을 믿지 않는다면 절대로 불가능한 한 장면이었던 것이다.
그 순간에 길드원들을 믿고 방패를 꺼내 든 헤르스도, 헤르스를 믿고 뒤로 빠지지 않은 로터스 길드원들도 말이다.
- 역시 랭커들은 다르네. 나 같으면 쫄려서 그냥 피했을 텐데.
- ㅋㅋㅋ동감임. 헤르스 레벨 300도 훌쩍 넘을 텐데, 레이드 보스한테 죽어서 랩따 당하면 그거만큼 억울한 게 어디 있음?
- 헤르스도 헤르스지만, 로터스 랭커들 하나도 빠짐없이 자리 지킨 거 보셈. 방금 헤르스가 못 막았으면 저기 저 인원 죄다 전멸임.
- 크으, 난 방금 헤르스 방패 컨 보고 지렸다. 방금 방패 결 타고 파란색 파동 퍼져나간 거 본 사람 있지?
- ㅇㅇ나도 봤음.
- 잉? 그건 뭐예요? 나 기사 초본데 좀 알려주셈.
- 그 파란색 파동이, 피해흡수율 90%이상 떠야 나타나는 이펙트예요. 아무리 초보라도 기사클래스시면 그 정도는 알아 두시는 게….
- 아하, 그렇구나.
쉴 새 없이 떠들어대는 중계채널의 시청자들.
하지만 놀란 것은 시청자들 뿐이 아니었다.
자리에 있던 랭커들도, 로터스 길드의 팀플레이에 적잖이 놀란 것이다.
“이야, 명불허전 로터스! 배짱도 좋네.”
레미르의 감탄사에, 옆에 있던 이안이 피식 웃었다.
“그러는 누나는? 누나도 헤르스 믿고 안 빠지고 있었던 거 아니야?”
“당연하지. 내가 니들이랑 파티플레이 한두 번 했냐?”
레미르도 헤르스가 막아낼 것을 예측하고, 그 타이밍에 오히려 공격마법을 캐스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안이 소환수들을 컨트롤하며 레미르에게 한 마디 덧붙였다.
“그러니까 이제 우리 길드 좀 들어오라고. 어차피 우리랑 사냥 자주하면서, 왜 안 들어오고 버티는 건데?”
“그, 그건…! 난 그냥 혼자가 좋으니까!”
혹사당하는 훈이와 유신을 보면 무서워서 들어가지 못하겠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하는 레미르.
그리고 두 사람이 투닥 거리는 사이에, 캐스팅이 끝난 레미르의 공격마법이 붉은 빛을 뿜어내었다.
번쩍-!
사령의 군주 아래로 붉은 빛깔의 화려한 마법진이 생성되었다.
그것을 발견한 누군가가, 탄성을 내지른다.
“메테오다!”
이어서 레미르가 전장을 향해 커다랗게 소리쳤다.
“보스 못 움직이게 발 묶어 주세요!”
운석소환 마법진이 생성되면, 정확히 10초 뒤에 그 자리로 거대한 메테오가 떨어져 내린다.
캐스팅 시간도 긴 데다가 발동에 걸리는 시간도 길어서 제대로 쓰기 무척이나 까다로운 스킬인 메테오.
하늘 높이 빛나는 붉은 구체가, 지상을 향해 빠르게 쇄도하기 시작했다.
< (7). 어둠의 군단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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