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 기묘한 퀘스트 -3 >
* * *
국가 단위의 대규모 전쟁이나 영지전같은 특수한 상황을 제외한다면, 카일란의 기본적인 파티 맥시멈은 20인이다.
그리고 그것은 보스 레이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보스 레이드의 ‘보상’면에서만큼은, 파티가 크게 의미 있는 것이 아니었다.
레이드 보스가 주는 경험치가 얼마 되지 않을 뿐더러, 아이템 드랍까지도 참여인원 전부에게 같은 확률로 드랍되기 때문이었다.
물론 같은 파티에 소속되어 있다면 스킬연계나 서포팅을 할 때 더 유기적으로 움직일 수 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모두가 한 팀이나 마찬가지.
그렇기에 레이드 중계방송을 시청중인 유저들은 전율했다.
사실상 지금 이 상황은, 인간계 소속의 거의 모든 랭커들이 하나의 파티가 되어 레이드를 시작하는 형국이었기 때문이었다.
- 와 미쳤다. 이거 차원전쟁 이후로 처음 있는 일 아니냐?
- 그런듯. 그냥 450레벨짜리 보스몹 레이드 중계한대서 방송 틀었는데, 이거 뜻밖에 횡재네.
- 키야, 샤크란 이안 듀오를 다시 보는 날이 오게 되다니…! 리얼 행복하다.
- 나도 ㅋㅋ 샤크란이랑 이안은 다시 만나면 적으로 만날 줄 알았는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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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을 시청중인 네티즌들은 물론, 현장에 있는 유저들도 어리둥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말도 안 되게 강력한 보스가 등장했다고는 하나, 수많은 랭커들이 이렇게 약속이라도 한 듯 나타난 것 자체가 신기했기 때문이었다.
“샤크란님! 레이드 끝나면 싸인 좀 해주세요!”
“이안님! 저도 파티 끼워주시면 안될까요?! 같이 파티해보는 게 소원입니다!”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진 레이드 현장.
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사령의 군장이 포효하자 전장에는 다시 긴장이 감돌기 시작했다.
[모조리! 죽여주마!]
대지가 울릴 정도로 강력하고 위협적인 포효.
수많은 언데드 군단의 보호를 받고 있는 사령의 군장을 보며, 이안이 속으로 입맛을 다셨다.
‘쩝, 이럴 때 마신의 분노만 쓸 수 있었어도…!’
이안은 오랜 시간동안 인벤토리 안에 잠들어 있는 신화등급의 대궁인 ‘마신의 분노’를 생각하며 입맛을 다셨다.
‘노블레스’라는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해 아직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이안의 두 번째 신화등급 무기.
사실 이안은, 노블레스가 되기 위한 조건 자체는 갖추어 놓은 지 오래였다.
하지만 노블레스 작위를 사사받기 위해서는 마왕을 만나야 했는데, 아직까지 만날 수 없었던 것이다.
일전에는 마왕 릴리아나를 만나기 위해 얀쿤을 찾아갔던 적도 있었는데, 릴리아나는 커녕 얀쿤조차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던 적도 있었다.
‘뭐, 아쉬워해 봐야 소용없는 거니까.’
이안은 여느때 처럼 할리의 등 위에 올랐다.
그리고 뿍뿍이와 카르세우스에게 오더를 내렸다.
“브레스는 좀 아끼고 있어봐. 우선 탐색전이야.”
“알겠뿍!”
“알겠다, 주인.”
일단 저 무지막지한 레이드 보스가 보유한 스킬들과 공격패턴을 전부 알아낼 때 까지, 재사용 대기 시간이 긴 스킬들은 사용을 보류하는 게 좋았다.
“레비아님, 일단 좀 수비적으로 진행해 보죠?”
“그래요, 이안님.”
그리고 레비아의 뒤쪽에 있던 기사 클래스의 유저, 로무르가 이안에게 물었다.
“일단 돌파는 보류하는 겁니까?”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로무르님. 우선 간 좀 보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얼추 각자의 역할이 정해지자, 레비아가 허공에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전장에 빛의 가호가 내리기를…!”
슈우우웅-!
그러자 하늘에 잔뜩 껴 있던 어두운 구름들 사이로, 수많은 빛줄기들이 내려와 전장에 있던 유저들에게로 스며들었다.
[15분 간 빛의 가호를 받습니다.]
[생명력의 최대치가 10%만큼 증가합니다.]
[방어력이 5%만큼 증가합니다.]
[빛의 가호가 지속되는 동안, 모든 피해의 3%만큼을 흡수합니다.]
그리고 버프를 받은 유저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지? 이 사기적인 버프는?”
“사제 스킬에 이런 게 있었어?”
“와…. 역시 랭킹 1위는 괜히 랭킹 1위가 아닌 건가.”
놀라운 버프효과에 감탄하는 유저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버프를 발동시킨 레비아가, 돌연 허공으로 날아오른 것이다.
펄럭-!
그녀의 등 뒤에 달려있던 새하얀 날개가 밝게 빛나더니, 순식간에 허공으로 솟구쳐 오른 것.
그것을 본 이안이 혀를 내둘렀다.
‘와 저건 대체 무슨 아이템이지? 망토류 아이템인가?’
허공을 자유자제로 비행할 수 있다면, 전투에 훨씬 더 많은 변수를 만들어낼 수 있다.
물론 이안도 핀이나 카르세우스 등, 허공 비행이 가능한 소환수를 탑승할 수 있지만, 본인이 직접 비행할 수 있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정령왕의 심판을 고쳐 쥔 이안이, 언데드 군단을 향해 달려들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에이, 훈이 이 녀석은 대체 어디 간 거야? 하르가수스라도 소환할 수 있었으면 좀 더 편했을 텐데.’
계약자인 훈이와 함께할 때만 발동시킬 수 있는 어둠의 소환술사 퓨전스킬들.
그 중에서도 하르가수스의 비행 능력과 강하 고유능력이 잠시 아쉬웠던 이안은, 살짝 입맛을 다셨다.
* * *
“오호, 그러니까 어둠의 신룡인 루가릭스에 대한 고문서를 찾고 싶은 거야?”
“응. 루가릭스 뿐만 아니라 카데스나 임모탈에 관한 문서도 있으면 다 확인해 보고 싶어. 어떻게든 어둠의 신룡을 내 편으로 만들어야만 하거든.”
훈이는 그간 있었던 퀘스트의 진행상황, 그리고 카데스의 음모에 관한 이야기를 릴슨에게 전부 다 해주었다.
같은 로터스 길드원인 릴슨에게라면 정보를 공유하는 것이 크게 아깝지 않았고, 더해서 자신도 얻어야 할 정보들이 많았으니 말이다.
그리고 설명을 전부 듣고 난 릴슨은, 눈을 크게 뜨며 감탄했다.
“와…. 이제 NPC들이 유저한테 훼이크를 쓰기도 하네?”
“내 말이. 진짜 알아차리고는 식겁했다니까? 아무 생각없이 게임했다간 통수 맞을 뻔 했어. 형도 앞으로 조심하라고.”
훈이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린 릴슨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게. 조심해야겠다. 아직까지 그런 훼이크 퀘스트를 받아본 적은 없지만….”
이어서 릴슨은 인벤토리를 뒤지기 시작했다.
“잠시만 기다려봐. 인벤토리를 한번 뒤져 볼게. 분명 그에 관련된 고서나 유물을 가지고 있는 게 있을 거야.”
“오케이, 부탁해 형.”
그리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릴슨의 인벤토리에서 아이템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툭- 투툭- 툭-
[고대 거신족과 마족들의 전쟁기록서.]
[홀드림과 성배의 비밀.]
[고대 아르노빌 제국의 멸망과 카이몬 제국의 탄생비화.]
(중략)
[카일란 신좌의 17신과 13마신들.]
훈이는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는 고대 서적들의 정보를 확인했고, 그러던 와중에 한 가지의 제목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카일란 신좌의 17신과 13마신들… 이라고?’
훈이는 게임을 무척이나 진지하게 플레이하는 유저이다.
여기서 ‘진지’란, 일반적인 유저들과는 조금 다른 의미에서의 진지함이었다.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그 세계관과 상황에 완벽히 동화되도록 노력한다는 것.
예를 들자면, 마치 진짜로 흑마법사가 된 듯 행동하고 말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때문에 중2병이라고 오해(?)를 받곤 했으니까.
어쨌든 그렇기에, 훈이는 카일란의 세계관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일반 유저들은 잘 챙겨보지 않는 카일란 공식 홈페이지의 시네마틱 영상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챙겨봤을 정도니까.
그런데 그런 훈이조차도, ‘13마신’ 이라는 단어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이거 흥미로운데?’
인벤토리를 열심히 뒤지고 있는 릴슨을 향해, 훈이가 입을 열었다.
“릴슨형, 나 저 책 좀 읽어봐도 돼?”
그리고 릴슨은, 훈이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라. 난 그동안 도움 될 만한 고서들 정리해 놓고 있을게.”
릴슨의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훈이는 책을 집어 들었다.
13마신에 대한 호기심도 호기심이지만, 왠지 이 책에서 단서를 찾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훈이는 설레는 마음으로, 고서의 낡고 두꺼운 하드 커버를 천천히 넘겼다.
그리고 그 첫 장에는, 누렇게 뜬 종이와는 어울리지 않는 금빛으로 쓰여 진 한 줄의 글귀가 쓰여 있었다.
그것은 카일란에 처음 캐릭터를 생성했을 때 상영되는 시네마틱 영상에도 등장하는 문구였다.
[태초의 카일란에는, 총 열 일곱 명의 각기 다른 권능을 가진 신들이 존재했다.]
* * *
신들의 권능은 신자(信者)에게서 나온다.
쉽게 말하면, 해당 신을 믿는 신자가 많아질수록 그 권능이 강력해 진다는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신자가 없는 신은, 아무런 힘도 없는 것일까?
그건 아니었다.
신자가 존재하건 하지 않건, 태초부터 존재한 신들이 가진 고유한 힘은 막강한 것이었으니까.
다만 가진 권능의 힘에 따라 신들의 서열이 정해지게 되며, 일정 수준 이상의 권능을 가져야만 차원계에 현신할 자격이 생기기에, 신들은 항상 경쟁했다.
그리고 차원계에 현신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권능을 가진 신들은, 그에 걸맞는 책임을 부여받는다.
차원계의 조화와 균형의 수호.
만약 욕심에 눈이 멀어 이 책임을 등한시한다면, 인간들은 그를 믿지 않을 것이며 권능은 약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열심히 독서(?)를 하던 훈이가 중얼거렸다.
“그래서 차원전쟁 때 다섯 신밖에 나타나지 않은 거였네.”
훈이가 항상 궁금했던 부분.
분명 처음 게임을 접할 때는 인간계를 수호하는 열일곱의 신이 존재한다고 설명되는데, 인간계의 대부분의 NPC들은 다섯 신의 존재밖에는 알지 못한다.
또 실제로 인간계에 한 번씩 나타나는 신들은, 항상 다섯의 신이 고정적이었다.
그것이 항상 이상했는데,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이다.
더해서 카데스의 행보도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카데스가 리치 킹을 돕는 것은, 자신의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서 이겠고.’
리치킹이 거대한 어둠의 제국을 세우게 되면, 카데스의 권능은 더욱 강해질 게 분명했다.
망자들이 추종하는 신이 바로, 어둠의 신인 카데스였으니까.
이로서 훈이의 첫 번째 의문이 풀렸다.
하지만 훈이는 책을 덮지 않았다.
아직 많은 내용이 남았고, 이 뒤쪽에는 또 다른 열쇄가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신룡과 신의 관계. 그에 대해 알아내야 해.’
평소에 책이라면 진절머리를 치던 훈이의 열정적인 독서.
그리고 잠시 후, 훈이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원하던 챕터를 발견한 것이다.
[신의 사자(使者), 그들의 활약.]
훈이는 빼곡히 쓰여 있는 문구를 빠르게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가독성도 엉망일 정도로 촘촘하게 쓰여 진데다, 군데군데 뜯겨 있어 유실된 내용도 많은 글이었으나, 훈이의 집중력은 그 어느 때 보다 높은 상태였다.
그리고 읽어 내려가던 중, 훈이는 반가운(?) 이름들을 발견했다.
[콜로나르력, 3950년.]
[마계의 무시무시한 군대가 차원을 넘어 대륙에 침략하였다.]
[그들은 무척이나 잔혹했으며, 강력했다.]
[인간들의 군대는 악귀들을 막을 힘이 부족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손에 죽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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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불패의 검사 카이자르가 나타났다.]
[그는 용맹하고 강력했고, 그의 대검에 수많은 마수들과 마족들이 소멸했다.]
[그는, 전쟁의 신 마레스님의 사자(使者)였다.]
훈이는 피식 웃었다.
이에 대해서는, 지난 차원전쟁을 치르면서 알게 되었던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기분이 확 상했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카이자르와의 앙금(?)은 많이 사라진 상태였지만, 굴욕적인 주종관계는 아직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쳇.”
작게 투덜거린 훈이는 다시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잠시 후, 훈이의 두 눈이 살짝 커졌다.
흥미로운 기록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콜로나르력, 2547년.]
[제국 전역에 무시무시한 전염병이 돌았다.]
[수많은 백성들이 고통에 울부짖었고, 면역력이 약한 어린 아이들은 속수무책으로 죽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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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성녀 아르나샤께서 나타나셨다.]
[성녀께선, 빛의 가호를 내려 백성들의 전염병을 치료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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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빛의 신, 아르네시스님의 사자(使者)셨다.]
“빛의 신 아르네시스라고…?”
완벽히 처음 들어보는 이름.
그리고 곧 혼란이 찾아왔다.
‘현신할 정도의 권능을 쌓았던 신이, 다섯 신 말고 더 있었어? 그렇다면 지금은 왜 보이지 않는 거지? 쌓았던 권능을 다시 잃을 수도 있는 건가?’
훈이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계속해서 책장을 넘겼다.
그리고 곧, 원하던 내용을 찾아낼 수 있었다.
더해서 그 내용 덕에, 잊고 있던 영상도 하나 떠올릴 수 있었다.
< (6). 기묘한 퀘스트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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