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 뉴 에피소드 -1 >
카일란 기획팀의 작은 세미나실.
기획3팀의 대리인 나지찬은, 서류를 한 가득 책상위에 쌓아둔 채 의자를 축 젖히고 앉아 스크린을 응시하고 있었다.
스크린에는 지금, 한국 전역에 방송되고 있는 뉴 에피소드 영상이 크게 띄워져 있었다.
“잠깐 쉬면서 감상이나 해 볼까?”
루스펠 제국 황성을 시작으로 시작되는 장장 6시간 50분에 걸친 에피소드 영상.
이 영상 제작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나지찬은, 그 스케일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 어떤 블록버스터 급 영화보다도 화려하고 재밌을 거라고 확신해.’
부스럭-
세미나실 구석의 서랍을 열어 숨겨 뒀던 감자칩을 꺼낸 나지찬은, 스크린에 두 눈을 다시 고정시켰다.
이미 아는 내용이기는 했으나, 영상으로 보는 것은 또 다른 재미를 주는 것이었으니까.
영상이 진행되면 될수록, 나지찬은 개발팀의 기술력에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햐…. 인공지능만 가지고 어떻게 저런 자연스러운 영상을 뽑아내는 거지?’
지금 카일란에서 선보이는 영상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기술의 집약체였다.
이제까지 있어왔던 모든 영상제작기법과는, 완전히 그 궤를 달리하는 것이었으니까.
지금 전국의 게임채널들을 통해 송출되고 있는 이 영상은, 카일란 내의 모든 오브젝트들이 자체적인 AI로 움직여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카일란의 개발팀에서는 ‘신탁’이라는 매개체와 약간의 간섭만을 통해 두 제국을 움직였고, 그로 인해 이러한 대규모 전쟁이 벌어지게 된 것이었다.
물론 유저들이 게임 중인 실제 서버에서 진행한 것은 아니었다.
가상 서버에서 카일란 한국 서버의 똑같은 환경을 복제해 시뮬레이션을 돌렸을 뿐이다.
그리고 열두시간이라는 대규모 업데이트 시간 동안에는, 시뮬레이션으로 인한 결과를 실제 서버에 도입하는 작업을 진행하는 중이었다.
쉽게 말해 이 영상을 제작하기 위해 LB사에서 한 일이라고는, 알아서 움직여주는 배우들을 영상에 담아 편집한 것 밖에 없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인력과 시간이 소모되었지만 말이다.
‘지금쯤 개발팀은 진짜 뭐 빠지게 고생 중이겠군.’
나지찬의 고개가 슬쩍 옆으로 돌아갔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익숙한 건물.
빌딩 전체가 하얗게 불이 켜져 있는 개발팀의 건물을 보며, 나지찬은 피식 웃었다.
아마도 내일 해가 뜰 때 까지, 개발팀은 단 한 사람도 퇴근하지 못할 듯 싶었다.
아그작-!
감자칩을 연신 입에 집어넣으며, 흡족한 얼굴로 영상을 보던 나지찬.
그런데 그 때.
나지찬의 입에서 알 수 없는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그나저나 이안느님께서 출현하시려면 아직 좀 걸리겠군.”
이안이 듣기라도 했더라면 두 눈 가득 물음표를 띄웠을 만한 발언!
하지만 나지찬은 태연한 표정으로 탁자 위에 있던 서류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안느님 나올 때 까지 아침에 올려야 할 업데이트 내용이나 한번 점검해 볼까…?”
나지찬은 흥얼거리며 서류를 한장 한장 넘기기 시작했고, 그와 별개로 스크린 속에는 계속해서 에피소드가 진행되고 있었다.
* * *
“와, 씨! 미쳤다!”
“그러게? 이런 건 상상도 못했는데?”
“야, 진성아. 이러면 이제 우리 길드는 어떻게 되는 거냐? 전쟁 바로 시작인데?”
에피소드 영상이 시작된 지 삼십여 분 정도가 지났을까?
진성의 집 거실은 흥분의 도가니가 되어 있었다.
영상 속 스토리의 스케일이 점점 커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들이 이렇게 흥분한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바로 지금. 영상 속에 있는 루스펠 제국의 황제 셀리어스가, 루스펠 소속의 모든 영주들에게 참전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루스펠 제국에서 가장 큰 길드인 로터스의 영지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유저들이야 지금 전부 이 영상 시청중일 테니, NPC들로만 전장에 투입되지 않을까?”
하린의 의견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으음… 그렇게 된다면, 이거 에피소드 진행 때문에 손해 보는 길드들 생기는 거 아니야?”
세원의 말에 유현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씨익 웃었다.
“글쎄요. LB사가 생각이 있으면 그렇게 하진 않겠죠.”
“하긴, 그것도 그러네.”
그런데 그 때, 지금껏 잠자코 영상만을 감상하고 있던 진성이 문득 입을 열었다.
“음…. 근데 다들 이상한 거 못 느껴?”
유현이 가장 먼저 반응했다.
“이상한 거라니? 뭐가?”
“이 영상 말이야. 시간이 엄청 빠르게 지나가고 있잖아. 지금 이십분 정도밖에 안 지났는데, 저 안에선 벌써 한 달 가까이 지났다고.”
“그거야 연출을 위해서 당연한 거 아냐?”
진성이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다시 입을 연다.
“아니, 생각해봐. 지금 닫혀있는 서버 안에서 이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거라면, 현실 시간과 똑같이 시간이 흘러가야 하는 거잖아.”
“어? 그러고 보니…?”
“물론 LB사의 기술력이라면 뭔가 방법이 있을 수도 있긴 하겠지. 서버의 시간을 빨리 지나가게 한다거나….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게 실시간 영상이라면, 이렇게 깔끔하게 영상편집이 되서 바로바로 송출될 수는 없지 않았을까…?”
“그러게. 진성이 말이 맞네.”
생각지 못했던 진성의 지적에 유현의 눈이 살짝 커졌고, 그것은 다른 이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의 지적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영상 속에서는 더 충격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어? 잠깐! 저기 저 얼굴…! 피올란님 아니야?”
“에에? 정말! 그러네?”
“헐, 피올란 언니가 왜 저기에 나오는 거지?”
일동은 멍한 표정으로 영상을 계속해서 지켜보고 있었다.
피올란은 파이로 영지의 영주이자 루스펠 제국의 ‘공작’ 신분으로 셀리어스 황제의 명을 받들고 있었다.
아마 중부대륙의 귀족들을 대표해서 명을 받는 듯 했다.
파이로 영지가 루스펠 제국 소속 영지들 중 가장 크고 강대한 세력을 가지고 있으니, 그녀가 대표자가 된 것이리라.
그리고 곧, 모든 명령을 하달한 셀리어스 황제가 검을 치켜들어 개전(開戰)을 선포했고, 또다시 화면이 바뀌었다.
이번에는 새하얀 설원이 가득 펼쳐진, 북쪽의 전장이었다.
하지만 놀라운 일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TV에 송출된 화면에서, 누구보다도 익숙한 얼굴이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 * *
샛노란 전류가 흐르는 황금빛의 장창.
그에 어울리는 금빛 투구와 최고급 경량 갑주를 몸에 두른 남자.
커다란 블랙 드래곤의 등 위에 올라있던 그가 금빛 창을 휘두르며 허공에서 뛰어내렸다.
타탓-!
그리고 그와 동시에, 드래곤의 입에서 보랏빛의 입김이 뿜어져 나온다.
크아아오-!
전장에 쏟아지는 어마어마한 위력의 드래곤 브레스!
이어서 그 위로, 금빛 창을 휘두르는 남자가 떨어져 내렸다.
콰지직-!
남자의 금빛 창이, 말을 타고 있던 붉은 갑주의 기사를 꿰뚫고 지나간다.
그리고 그 위로, 누런 빛이 번쩍 하더니 번개가 떨어져 내린다.
콰르릉- 콰쾅-!
순식간에 기사를 처치한 그는, 쓰러진 백마를 향해 손을 뻗으며 허공으로 끌어올렸다.
그러자 그 손짓에 맞춰, 죽은 것만 같았던 백마의 몸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와 함께, 백마의 가죽이 스멀스멀 까맣게 변하기 시작한다.
어느새 뼈 날개가 돋아난 새카만 흑마의 위에, 남자가 올라탔다.
“적장을 처치했다! 전원 돌격하라!!”
널따란 전장에 우렁차게 울려 퍼지는 그의 목소리!
루스펠 제국의 병사들이 열광하기 시작했다.
“와아아!! 지원군이다!!”
“이안 대공께서 직접 오셨다!”
“적들을 섬멸하라! 대공께서 오신 이상, 우리에게 패배는 없다!!”
로터스의 깃발이 펄럭이며 밀려드는 수백의 기마병들.
그리고 허공을 날아다니며 적들을 짓밟는, 두 마리의 드래곤과 수십의 와이번 나이트들.
마지막으로 하르가수스에 올라탄 금빛 갑주의 남자가, 북부의 전장을 쑥대밭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멀찍이서 전장 전체를 보여주던 화면이, 점점 클로즈업 되더니 금빛 갑주의 남자를 향해 다가간다.
그리고 마침내, 장창을 휘두르며 전장을 누비는 남자의 뒷모습이 화면 가득히 담겼다.
절대자의 위용이 뿜어져 나오는 그의 뒷모습.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순간 카메라의 앵글이 급격하게 회전되더니, 남자의 얼굴을 전면에서 확대하기 시작했다.
금빛 투구 안쪽에서 빛나는, 남자의 깊고 새카만 두 눈동자.
대부분이 가려져 있어 생김새는 자세히 보이지 않았으나, 이 외관 자체로 무척이나 유명한 한 남자.
이안.
그의 얼굴이 화면 가득히 들어찼다.
* * *
- 그분! 그분이 오셨습니다, 여러분!
- 크으으! 주모! 여기 치킨 한 마리 추가요!
- ㅋㅋㅋ위에 미친놈은 주모한테 치킨을 왜 찾는 거야 ㅋㅋ
- 와 지린다. 저거 이안 AI겠지?
- ㅇㅇ 아마도. 지금 유저들도 전부 다 AI 발동 되서 알아서 움직이는 중 인듯.
- 캬아, 이안은 AI도 겁나 잘 싸우네.
- 그러게 말이야. 이거 AI도 원래 주인 컨트롤 능력이랑 관계가 있는 건가?
- 글쎄ㅋㅋㅋ 그건 모르겠는데, 저건 컨트롤이라기보다 그냥 이안 캐릭터 자체가 너무 쎄서 그런 것 같….
- 하아, 카이몬 제국 소속 유접니다. 제 캐릭터 방금 이안한테 한 방 맞고 골로 갔어요. 님들 위로 좀.
- ㅋㅋㅋㅋㅋ 아놬ㅋㅋㅋ 님 북부 영지 소속 이셨나봐요?
- 네…. 쪼랩이라…ㅜㅜ
- 이안느님의 창에 전사하시다니…! 부럽습니다…!
- 아니, ㅋㅋㅋ 이놈은 또 뭐야 ㅋㅋ 죽었는데 뭐가 부러워 ㅋㅋㅋ
- 미친!ㅋㅋㅋ 그나저나 윗님처럼 캐릭터 AI가 싸우다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거임? 설마 템 떨구고 데스 패널티 적용되고 그러진 않겠지?
- 에이, 설마 ㅋㅋ
TV를 통해 에피소드를 시청하는 유저들도 많았지만, 그만큼이나 많은 유저들이 인터넷 방송을 통해 영상을 시청하고 있었다.
온라인 상의 수많은 네티즌들과 실시간으로 대화를 나누며 영상을 시청한다면, 그 재미가 몇 배는 상승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이안이 등장하자마자 채팅창은 폭주하고 있었다.
- 와 이거 팝콘각이다 진짜 ㅋㅋ 서버점검 시간동안 영상 틀어준다기에 뭘까 기대했는데ㅋㅋ 기대 이상이네 정말.
- 근데 님들, 혹시 LB사 기획팀에도 이안 빠돌이 있는 거 아님? 아니 무슨 이안 매드무비 영상도 아니고 전쟁 시작하자마자 이안부터 겁나 간지 나게 등장하냐고 ㅋㅋㅋ
- 그냥 어쩌다 그런 거겠죠ㅋㅋ 그리고 제일 처음 등장한 건 사실 샤크란이었음ㅋㅋ 카이몬 제국 2황자였나? 걔랑 대화하는 거 아까 잠깐 나왔잖아요.
- 그, 그랬었나?
- 응ㅋㅋ 겁나 쪼그만 뒷모습으로 한 5초정도 나온 듯…?
- 우리 피올란 누님도 나오셨슴다 무시 ㄴㄴ
이안의 북부대륙 전투영상이 3분 정도 비춰진 뒤, 화면은 계속해서 바뀌고 있었다.
대륙 곳곳의 전장들을 비춰주는 영상의 화면들.
그리고 간간히 등장하는 랭커들의 활약.
그 영상을 지켜보는 것은 신선한 재미가 있었다.
레벨이 제법 되는 유저들은 단 1초라도 자신의 캐릭터가 등장하지 않을까 눈에 불을 켜고 화면에 집중했으며, 또 어떤 유저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랭커가 등장하면 환호성을 질렀다.
여기저기 깨알 같은 볼거리들이 넘쳐나는 뉴 에피소드 영상.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흥미진진한 것은 메인 스토리였다.
각 제국의 수많은 용장들이 등장하여 전략을 세우며 공성전을 벌이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갈등들이 생겨난다.
그리고 그 스토리들 안에는, 새로이 업데이트 될 세계관에 대한 정보들이 여기저기 숨어있다.
퀘스트에 대한 정보도 있으며, 아티펙트에 대한 정보도 있고, 숨겨진 던전이나 네임드 몬스터에 대한 정보들도 있다.
장장 여섯 시간이 넘는 어마어마한 러닝타임을 가진 뉴 에피소드 오픈 영상.
하지만 카일란을 사랑하는 수 많은 유저들은, 단 한순간도 화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 (7). 뉴 에피소드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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