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 도약을 위한 준비 -1 >
“설마… 진성선배 오늘 안 오시는 건가?”
“에이, 아닐 거야. 기다려 보자. 오늘은 꼭 자료 넘긴다고 지난번에 자신 있게 말 하셨잖아.”
한국대학교 가상현실과의 한 강의실.
빈 강의실에 세 사람이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가상현실과 1학년 학생들인, 세미와 영훈. 그리고 민수.
오늘 팀플을 진행하기로 했기 때문에 이렇게 모여 있는 것이었다.
세미가 미간을 좁히며 작게 중얼거렸다.
“진성선배가 더도 말고 딱 두 케이스 정도만 조사해 오시면 되는데….”
영훈이 노트북을 두들기며 덧붙였다.
“그러게. 세미가 가져온 자료가 워낙 많아서, 그 정도면 발표자료 작성하는 데는 충분할 것 같아.”
그런데 그 때.
강의실의 뒷 문에서 드르륵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오늘 이 강의실에 잡혀 있는 모든 수업은 오전에 끝이 났고, 지금 이 시간에 강의실 문을 열 사람이라면 분명히 팀플이 잡혀있는 진성밖에 없을 터.
세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소리 난 방향을 향해 돌아갔다.
“진성 선…!”
하지만 진성을 부르던 영훈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나머지 두 사람도, 당황한 채 굳어 버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이가 진성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누, 누구…?”
많이 당황한 표정으로 입을 연 세미.
사실 진성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세 사람이 이렇게 까지 당황할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 들어온 사람은 진성이 아닐 뿐더러, 여자. 그것도 무척이나 아름다운 여학생이었던 것이다.
제법 미녀가 많다는 한국대학교에서도, 지금껏 본 적이 없을 만큼 예쁘장한 여학생!
민수가 영훈에게 속삭였다.
“야, 우리 과에 저렇게 예쁜 사람이 있었냐? 동기는 당연히 아닐 거고… 선배 중에?”
영훈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대답했다.
“아, 아니. 난 처음 보는데….”
그리고 잠시 후.
또각 또각 소리를 내며 다가온 여학생이, 환하게 웃으며 영훈에게 물었다.
“아, 혹시…. 여기가 가상현실과 B-15 강의실 맞나요?”
영훈이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마,맞아요.”
“아, 잘 찾아왔네요. 그럼 세 분이, 진성이랑 같이 팀플 하신다는 후배님들…?”
영훈과 민수는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 고개를 끄덕였고, 먼저 정신을 차린(?) 세미가 그녀에게 물었다.
“맞아요. 그런데 그 쪽은… 누구시죠?”
그리고 이어진 여학생의 말을 듣는 순간, 영훈과 민수는 그녀를 처음 봤을 때와도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충격을 받고 말았다.
“아아. 전, 한국대학교 호텔조리과 3학년에 재학 중인 하린이라고해요.”
“그런데 여긴 어떻게…?”
“진성이 심부름 왔어요. 이걸 전해드리라고 하더라구요.”
영훈과 민수가 서로를 마주보며 두 눈을 부릅떴다.
‘시, 심부름…?! 저렇게 예쁜 여학생이?!’
‘그것도 진성선배의…!!’
두 사람이 경악하는 것과는 별개로, 하린은 책상 위에 두터운 서류봉투를 내려놓았다.
그것은, 족히 전공서적의 절반 정도는 될 법한 두터운 서류뭉치를 담고 있었다.
턱-!
세미가 하린에게 다시 물었다.
“이게 뭐죠…?”
하린은 빙긋 웃으며 곧바로 대답했다.
“저도 뭐가 들었는지는 잘 몰라요. 과제라고 했던가 레포트라고 했던가…? 무튼 팀플에 관련된 거라고, 전해주기만 하면 된다고 했어요.”
그에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진 세미가, 벙찐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진성에게 원했던 것 자체가 남아서 함께 팀플을 하는 것이 아닌, 약간의(?) 자료제공 정도였으니까.
또각- 또각-
과제셔틀 임무를 잘 수행한 하린은, 걸음을 돌려 강의실을 빠져나갔고, 당황한 세 사람은 잠시 아무 말 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가장 처음 입을 연 것은, 민수였다.
“뭐, 뭐지…?”
영훈이 말했다.
“혹시… 진성선배 여동생, 아니 3학년이랬으니 누나…?”
세미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야. 말이 된다고 생각해? 아무리 유전자 몰빵이라고 해도 그렇지, 진성선배랑 방금 그 여자분이랑 남매라니….”
“그럼, 대체 방금 그 분이 진성선배 과제셔틀을 왜 해주는 건데?”
“글세…? 혹시 여자친구…?”
민수가 발끈했다.
“그럴 리가 없어! 말도 안 돼!”
영훈이 한 마디 거든다.
“그, 그래. 여자친구는 아닐 거야. 어떻게 진성선배가 저런 여신님을…! 그냥 친구 정도로 생각하자.”
“….”
한 바탕 소란이 지나간 뒤.
흥분을 가라앉힌 세 사람은 하린에게서 건네받은 서류뭉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나저나 우리,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그래, 세미 말이 맞아. 당장 내일이 발표 날인데… 시간이 없다고.”
“그러네. 그나저나 다행이다. 어쨌든 진성선배가 약속은 지키셨잖아?”
“그거야, 보기 전엔 모를 일이지.”
세미가 서류봉투를 집어 들어 서류를 꺼내며 한 마디 덧붙였다.
“그나저나 케이스 두 개 자료를 뭐 이렇게 쓸 데 없이 두껍게 만들었담.”
왼쪽 모서리에 커다란 집게로 집혀 있는 두터운 A4용지들.
그 첫 페이지를 본 순간.
세 사람은 또다시 경악하고 말았다.
“자, 잠깐!”
“뭐 이렇게 빼곡한 거야…?!”
그리고 영훈은, 잽싸게 A4뭉치를 집어 들어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난 수록 급격하게 표정이 어두워지는 영훈.
케이스 조사에서 빠진 대신, 발표자료 정리와 PPT를 맡은 사람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옆에서 자료를 같이 들여다보던 세미가, 눈을 반짝이며 영훈에게 말했다.
“영훈아. 레포트에 단 한 줄도 빠뜨리지 말고 전부 정리해서 넣어야 돼, 알았지?”
영훈은 우울한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 았어.”
* * *
“오늘은 어쩐 일로 카일란 데이트야?”
파이로 영지의 영주집무실.
하린과 만난 이안이 헤실헤실 웃으며 물었다.
원래대로라면 월요일인 오늘은, 하린과 함께 험난하기 그지없는 바깥세상(?)에서 만났어야만 하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1~2주일에 한번은 간단하게라도 게임 외 데이트를 하기로 하린과 약속했었고, 그 날이 바로 월요일이었기 때문.
하지만 어쩐 일인지 오늘 하린은 약속장소를 파이로 영주성으로 잡았고, 덕분에 이안은 ‘뭐 하고 놀지?’ 라는 비생산적인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게다가 오늘. 팀플 자료까지 하린이 등교하는 김에 전달해 주었기 때문에, 그녀가 몇 배는 더 예뻐 보였다.
‘흐흐 역시 게임 데이트가 최고지. 영화 같은 걸 봐서 뭐해. 마수 사냥만 해도 어지간한 액션 영화보다 훨씬 재밌는데.’
그리고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이안을 향해, 하린이 비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진성아, 나 진지하게 생각해 봤는데….”
“…!”
전에 없던 하린의 진지한 목소리에, 이안은 문득 불안감이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뭐, 뭐지?!’
그동안 너무 게임에 집중하느라 하린에게 소홀했던 것이 드디어 터진 것일지도 모른다는 불안함!
‘아냐,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 씩은 꼬박꼬박 데이트했는데…! 게임에서야 레벨차이가 너무 많이 나니 같이 하기 힘들었던 거고.’
오만가지 불안한 생각이 찰나 간에 스쳐지나갔지만, 다행히 하린이 꺼낸 말은 이안의 상상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러나 이안이 상상했던 것 만큼이나 놀라운 이야기이기도 했다.
“사업 한 번 해보려고 해.”
이안이 벙찐 표정으로 되물었다.
“사, 사업…?”
하린이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응! 사업.”
“무슨 사업인데?”
“음… 프랜차이즈 사업이랄까…?”
그 말을 들은 이안의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생각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뭐지? 프랜차이즈? 하린이가 학교 후문에 음식점이라도 차리려는 걸까? 음…. 하린이의 요리실력이라면 확실히 괜찮을지도…? 그런데 그럴 생각이면, 프랜차이즈를 하는 것 보다는 차라리 하린이만의 브랜드를 만드는 게 더 좋을 것도 같은데….’
이안이 머릿속으로 오만가지 생각을 하던 그 때.
하린이 갑자기 가방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음? 뭐 찾아?”
“잠깐, 있어봐. 사업계획서 보여줄게.”
“사, 사업계획서까지…?”
“응! 평소에 진성이 네가 카일란 분석하는 거 보면서 감탄했거든. 그래서 나도 사업계획서 한번 써봤어.”
이안은 조금 의아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일단 지켜보았다.
‘뭐지? 작은 가게 하나 차리는데 왜 사업계획서가 필요한 거야…? 구멍가게 차리는데 필요한 돈 정도는… 모자라면 빌려줄 수 있는데.’
그리고 잠시 후.
하린의 사업계획서를 받아 든 이안은, 열심히 그것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런 것 없이도 몇 천 만원 정도는 그냥 빌려 줄 용의가 있었지만, 기왕 준비해 온 것이니 꼼꼼히 살펴볼 생각이었다.
비록 게임이 아니었지만, 이렇게 뭔가에 대해 면밀히 조사 분석한 자료를 읽는 것은, 진성이 좋아하는 것이었으니까.
“상호명이 L&H…?”
하린이 신이 나서 한 마디 거들었다.
“응. 이안의 L이랑 하린의 H를 따서 만든 상호명이야.”
그리고 잠시 동안.
영주집무실에는 조용한 적막만이 감돌았다.
하린의 사업계획서가 한 페이지씩 넘겨지는 소리만 들릴 뿐.
이안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으며, 두 눈은 몬스터에 대한 데이터를 분석할 때 만큼이나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하린은, 기대감 어린 표정으로 이안의 면면을 살피고 있었다.
‘헷…. 진성이가 좋아했으면 좋겠는데…!’
진성은 잘 몰랐지만, 사실 하린은 그간 제법 많은 돈을 모아놓았다.
길드파티에 합류해 사냥을 나가는 시간을 제외한다면, 거의 모든 시간을 요리를 만들어 파는데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하린이 지금까지 카일란을 플레이하며 모은 돈은 무려 1억 3천만 골드.
그리고 이런 어마어마한 액수를 모을 수 있었던 이유는, 파이로 영지에 오픈한 음식점 덕분이었다.
‘하린의 아름다운 음식점’이라는 이름의 음식점은 파이로 영지의 명물이었고, 간간히 커뮤니티에도 언급될 정도로 유명했으니까.
물론 사냥과 퀘스트로 바쁜 이안은, 대략적으로밖에 알지 못하는 사실이었지만 말이었다.
그리고 하린이 지금 추진하려는 사업은, 카일란 내의 음식점 프랜차이즈 사업이었다.
프랜차이즈 브랜드를 받아서 가게를 오픈하는 것이 아닌, 하린 스스로가 프랜차이즈를 오픈하려는 원대한 계획!
이안에게 지원받으려는 부분도 사실 돈이 아니었다.
이안의 이름값과 로터스 길드의 명성.
그것을 빌려 쓰려는 것이 그녀의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안의 의견도 한번 들어보고 싶었다.
그가 사업적인 감각이 있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게임에 대한 식견만큼은 누구보다도 탁월했으니까.
한편, 감탄사를 연발하며 하린의 사업계획서를 전부 검토한 이안이, 두 눈을 반짝이며 하린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하린아, 이거 엄청난데?!”
“저, 정말? 가능성 있을 것 같아?”
이안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이거 정말 괜찮은 발상이야. 카일란 내에서 프랜차이즈 레스토랑을 오픈할 생각을 하다니…!”
요리는 카일란 내의 수많은 생산직업 중에서, 비인기 클래스 중 하나였다.
가장 인기 있는 생산직업인 대장장이의 경우 벌써 마스터 단계에 오른 유저가 열 명도 넘는데 반해, 요리 클래스는 아직까지도 마스터 단계에 오른 유저가 없다는 사실만 보아도 그 인지도 차이를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요리 클래스의 버프효과 자체는 무척이나 훌륭하지만, 숙련도를 올리기가 어려운 편이었기 때문.
게다가 다른 버프스킬과 중첩되지 않는 효과도 많았으니, 점점 다른 생산클래스에 비해 밀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가장 큰 이유는 사실, 대장장이나 제봉술과 같은 아이템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생산기술의 숙련도를 올리는 게 훨씬 더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카일란을 플레이 하는 유저들이 가장 중요시 여기는 것은, 전투에 필요한 장비들이었으니까.
하지만 하린이 좋아하는 것은 오직 요리!
그래서 하린은, ‘요리’의 본질로 다시 눈길을 돌렸다.
‘맛’의 가치를 더욱 부각시켜서, ‘맛있는 요리’ 자체로 승부를 볼 생각인 것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가능성은, 이미 파이로 영지에 음식점을 운영하면서 증명되었다.
이안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이 사업, 길드 차원에서 한번 진행해 보자.”
하린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길드… 차원에서?”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그래서 잘 되면, 네 요리 뿐 아니라 여러 가지 방향으로 한번 확장시켜 보게.”
한 술 더 떠서, 카일란 내에 대기업(?)을 창업하려는 이안의 원대한 포부!
두 사람은 마주앉아 하린의 사업을 열심히 구체화 시키기 시작했고, 이안은 그것을 앞으로의 길드확장 계획과 연결 시켜 생각하고 있었다.
‘하린이의 음식점 프랜차이즈를 길드 차원에서 성공시키면, 제법 돈을 벌 수 있을 거야. 내 마력광산에서도 이제 곧 돈이 들어오기 시작할 거고….’
‘대영지’의 단계에서 확장할 수 있는 최대치까지 영지를 전부 확장한 로터스 길드는, 이제 다시 내실을 다지고 있는 단계였다.
그간 소모한 병력들을 복구하고, 복속시킨 영지들을 발전시키기 시작한 것.
그리고 최대한 힘을 끌어 모은 뒤, 한 번에 공국을 넘어 ‘왕국’까지 선포할 생각이었다.
‘그때가 되면 제국이랑도 한 비벼 볼 만 하겠지. 아직은 시기상조지만 말이야.’
하나 둘, 천천히 완성되어 가기 시작하는 이안의 큰 그림.
처음 중부대륙이 열렸을 때부터 시작되었던 이 커다란 그림의 윤곽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3개월이라는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 (6). 도약을 위한 준비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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