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정령왕의 심판 -3 >
* * *
하르가수스는 날개가 있지만 날 수 없다.
그렇다면 날개는 그저 장식에 불과할까?
그것은 아니었다.
하르가수스가 가진 세 가지 고유능력 중, 첫 번째 고유능력이 바로 날개와 연관되어 있었으니까.
하르가수스의 첫 번째 고유능력은 바로 강하(降下).
높은 곳에서 뛰어내렸을 때 날개를 펼쳐 천천히 하강하는 능력이 바로 이 강하인데, 여기에는 특수한 부가효과가 있다.
강하를 발동시키기 위해 날개를 펼치는 순간, 하르가수스와 탑승자가 0.5초 동안 ‘무적’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컨트롤이 좋은 흑마법사 유저들은, 직접 하르가수스를 탑승하여 이 ‘강하’ 능력을 활용하기도 한다.
강력한 공격에 노출되었을 때, 0.5초라는 단발성 무적을 활용하여 피해를 무효화 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강하를 발동시키기 위해서는 하르가수스의 네 다리가 전부 허공에 떠올라있어야만 한다는 조건이 필요했으니, 활용하기 무척 까다로웠다.
그렇기에 상위 길드에서는, 흑마법사를 뽑을 때 이 강하컨트롤을 얼마나 잘 하는가를 심사하는 경우도 더러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안은, 지금 이 ‘강하’ 고유능력을 200%활용하여 전장을 누비는 중이었다.
“이안이다!”
“근접하지 말고 원거리 공격으로 조져! 근접했다가 쳐 맞으면 바로 게임아웃이다!”
수백이 훌쩍 넘는 병사들이 바글거리는 퓰리오스 진영의 한복판.
하르가수스를 탑승한 이안은, 그 안을 제 집 드나들 듯 누비며 적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이안이 창을 한번 휘두를 때 마다 그 주변에 황금빛 전류가 뿜어져 나왔으며, 퓰리오스의 병력은 볏짚 쓰러지듯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촤아악-!
[퓰리오스 길드의 ‘은기사’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은기사’의 생명력이 1029895만큼 감소합니다.]
[‘정령왕의 심판’의 고유능력, ‘심판의 번개’가 발동합니다.]
콰아앙-!
[퓰리오스 길드의 ‘은기사’에게 1533221만큼의 전격 피해를 입혔습니다.]
[퓰리오스 길드의 ‘고급창병’에게 870980만큼의 전격 피해를 입혔습니다.]
[퓰리오스 길드의 ‘고급창병’에게 728452만큼의 전격 피해를 입혔습니다.]
[퓰리오스 길드의 길드원 ‘푸른깃털’유저에게 598090만큼의 전격 피해를 입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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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왕의 심판의 고유능력인 ‘심판의 번개’의 진정한 무서움은, 여럿을 상대로 한 전투에서 발휘된다.
일대 일의 전투에서는 10%밖에 되지 않는 발동확률 때문에 발동시키기가 쉽지 않은데, 여럿을 상대로 전투할 때에는 다르기 때문이다.
‘심판의 번개’의 발동조건은, ‘공격에 성공했을 시 10%확률로 발동’인데, 일단 번개가 한번 떨어지면 반경 5미터 이내의 적들에게 광역 피해를 입히게 된다.
즉, 5미터 이내에 여럿의 적이 들어와 있었다면, 광역 피해를 입히는 순간 각각 10%의 확률이 개별적으로 발동하게 되는 것.
적이 많이 밀집해 있을수록 심판의 번개의 추가 발동확률이 높아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래서 수백의 병사들에게 둘러싸인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열댓 번이 넘게 미친 듯이 번개가 떨어져 내리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한다.
바로 이렇게.
쾅- 콰쾅- 콰콰쾅-!
“으아악!”
“마법사들 뭐해! 안티 라이트닝 필드 걸어!”
콰콰쾅-! 쾅 쾅-!
“크으윽…!”
이안의 주변으로 마치 비가 내리듯 번개가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이안을 둘러싸고 있던 퓰리오스의 병력들은, 단 한명도 남지 않고 모조리 재가 되어 쓰러져 버렸다.
200레벨이 채 되지 않는 일반 병사들은 물론이고, 생명력이 150~200만에 육박하는 기사들까지 싸그리 전멸한 것이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퓰리오스의 간부들은 어이없는 표정이 되어 입을 뻐끔거렸다.
“무, 무슨 마법사도 아니고….”
마법사의 상위 광역마법들 중에는, 방금 이안이 보여줬던 수준의 위용을 뿜어낼 수 있는 마법들이 제법 있었다.
그리고 랭킹 10위권의 마법사라면, 이안이 보여준 만큼의 파괴력도 충분히 뽑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안은 마법사가 아니다.
게다가 어떤 스킬을 사용한 것도 아닌, 그저 무기에 붙은 패시브 능력 하나만으로 이런 광경을 연출해 내었다.
그야말로 절대자의 위용이었다.
전장을 지휘하던 퓰리오스 길드의 간부가 정신을 차리고 다시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근접하지 말라니까! 멀리서 원거리 공격으로 조져!”
그 명령에, 성벽 위에 배치되어있던 수많은 궁사들과 마법사들이 이안을 향해 투사체를 날리기 시작했다.
핑- 피이잉-!
화르륵-!
하지만 이안은 가만히 앉아 그 공격들을 맞아줄 생각이 없었다.
“이랴!”
이안이 복부를 가볍게 발로 차자, 하르가수스가 엄청난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타타탓-!
한 번의 도약으로 거의 2~3미터를 뛰어오르는 하르가수스는, 순식간에 계단을 타고 성벽 위로 뛰어올랐다.
이안은 하르가수스를 컨트롤해 거의 모든 투사체를 가볍게 피해내었으며, 피하기 힘든 광역스킬이 날아들 때는 ‘강하’능력을 활용하여 데미지를 씹어버렸다.
가히 신들린 컨트롤이라 할 만 했다.
- 나 아까부터 이안 생명력 게이지만 보고 있음.
- 나도.
- 엥, 그러고 보니… 쟤 왜 생명력이 안 닳아?
- 왜 안 달긴요. 뭐라도 맞아야 생명력이 닳지. 다 피하는데 생명력이 떨어질 이유가 있음?
- 아니 제가 허접이라 잘 몰라서 그러는데요, 방금 광역기도 여러 번 맞은 것 같은데 아닌가요?
- 아, 그건 저 하르가수스 고유능력인 ‘강하’ 발동시켜서 다 씹은 거임. 강하 쓰면 0.5초 동안 무적상태 되거든요.
- 오… 그럼 강하스킬이 사기인 건가?
- ㄴㄴ 강하 저렇게 쓰는 사람 나 오늘 처음 봄.
- 미투. 어떤 미친 흑마법사가 말 타고 전장 한복판에 들어가 ㅋㅋㅋ
- 크으, 내가 얼마 전에 하르가수스 소환스킬 배운 230레벨 흑마법산데, 강하 컨 진짜 겁나 어려움. 이게 허공에 완전히 떴을 때만 발동되는데, 스킬 날아오는 거 보자마자 점프하면서 발동시켜야 딜 씹을 수 있음.
- 제가 흑마법사가 아니라서 잘 모르는데요, 님들 말대로라면 허공에 떠있기만 하면 강하 껐다 켰다 계속 해서 무한무적 할 수 있는 거 아님?
- ㄴㄴ 도약 한 번에 강하 한 번씩 밖에 발동 못시켜요. 그러니까 어려운거지.
- 님들, 저 강하 연습하러 갑니다. ㅂㅂ
- ㅋㅋㅋ연습한다고 되는 건 아닐 것 같은데…. 근데 님들, 이안은 어떻게 하르가수스 컨트롤 하는 건가요? 하르가수스는 소환자의 명령만 듣는다고 알고 있었거든요. 이안은 흑마법사도 아닌데 어떻게 하르가수스를 타고 다니는 거지?
- 얼마 전에 월드메시지로 뜬 퓨전클래스? 그거 때문인듯요.
- ㅇㅇ 다들 그렇게 추측하는 중.
시끌벅적한 채팅창의 이야기처럼, 이안의 생명력은 시종일관 100%였다.
하지만 네티즌들이 조금 잘못 이해한 부분도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안이 모든 공격을 다 피하고 막아낸 것은 아니라는 점.
수없이 날아드는 투사체 중에 어쩔 수 없이 허용해야 했던 공격도 있었지만, 회피로 인해 발동된 ‘정령왕의 심판 초월옵션’이 다시 생명력을 회복시켜준 것이다.
하지만 영상으로 그렇게 세세한 부분까지 확인하기는 힘들었고, 네티즌들은 이안의 신들린 컨트롤에 더욱 열광할 수 밖에 없었다.
비 오듯 쏟아지는 원거리 공격들을 모조리 피해내며 전장을 누비는 이안의 모습은, 누구라도 넋을 놓고 볼 수 밖에 없는 것이었으니까.
어쨌든 이안이 이렇게 날뛰기 시작하자, 퓰리오스 길드는 급격하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모든 화력이 이안에게 집중되어있는 동안 로터스의 다른 병력들이 성곽을 모조리 점령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쯤 되니, 팽팽했던 서북쪽 전선도 균형을 잃어버렸다.
동쪽이 완전히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자, 자연스레 병력이 분산되었기 때문이었다.
“와아아…!! 서쪽 성문도 뚫었다!”
“이제 내성만 점령하면 끝이다! 다 쓸어버리자!”
로터스 길드의 충차는 서쪽 문도 거침없이 파괴해 버렸고, 이제 성 안은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다.
퓰리오스 길드는 ‘수성진영’으로서의 이점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그 와중에 이안은 카카로부터 얻은 정보들을 바탕으로, 퓰리오스 길드의 주력 랭커들을 하나씩 제거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파죽지세.
퓰리오스 길드 최고의 고수인 유신이 사망한 마당에, 하르가수스를 타고 전장을 누비는 이안을 막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기울어가는 전황을 한 눈에 보여주는 영지전의 현황판이, 관람중인 유저들의 눈 앞에 떠올랐다.
이것은 직관하는 유저들 뿐 아니라 중계를 통해 시청중인 유저들도 확인할 수 있도록, 수정구에도 공유되는 시스템 창이었다.
[영지전이 시작된 지 1시간이 지났습니다.]
[영지전 현황정보를 공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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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지전 현황 (로터스 vs 퓰리오스) -
영지 명(名) : 세르가스
영지 분류 : 대영지
공격 길드 : 로터스
수성 길드 : 퓰리오스
외성 점령율 : 97.55%
내성 점령율 : 66.25%
* 길드 전력 정보 (생존 / 참여)
- 로터스 길드
유저 : 159 / 205
NPC : 275 / 423
현재 전력 지수 - 1548620
- 퓰리오스 길드
유저 : 72 / 257
NPC : 105 / 395
현재 전력 지수 - 654852
:
:
* 현재 예상 승률
로터스 : 퓰리오스
95.75% : 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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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메시지 창을 확인한 관중들은, 더욱 열광하기 시작했다.
특히 로터스 진영에서 직관하던 관중들은, 거의 인사불성의 상태로 목이 쉬어라 외치고 있었다.
“와아아…! 로터스!! 미쳤다!”
“이안갓! 사랑해요!”
“크아아아! 로터스! 8연승! 이대로 12연승 달리자!”
“진짜 오늘 전공수업 째고 왔는데…! 보람이 있다 보람이!”
“전 오늘 경기를 직관했으니, 이제 학고를 받아도 여한이 없습니다, 이안형님!”
고작 한 시간 만에 완전히 승기가 기울어져버린 로터스 길드와 퓰리오스 길드의 영지전.
게다가 영지전 현황이 떠오른 지 10분도 채 지나기 전에, 세르가스 영지의 내성에 꼽혀 있던 퓰리오스 길드의 깃발이 부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핀의 늠름한 모습이 수놓아져 있는 로터스 길드의 깃발이 휘날리기 시작했다.
[세르가스 영지의 내성 점령률이 100% 달성되었습니다.]
[퓰리오스 길드의 병력이 전부 전멸하였습니다.]
[영지전이 종료됩니다. (01:09:47)]
[로터스 길드가 승리하였습니다.]
[이제부터 세르가스 영지는 로터스 길드가 다스리게 됩니다.]
[앞으로 일주일 간, 세르가스 영지는 불가침 상태에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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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영지전의 러닝 타임을 평균 4시간 정도로 잡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야말로 압도적인 결과.
로터스 길드의 8번째 영지전은, 이렇게 깔끔한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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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역시나.”
TV로 카일란의 중계영상을 열심히 시청하던 최유신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TV를 꺼 버렸다.
그의 카일란 아이디는 바로 ‘유신’.
이안에 의해 게임아웃된 뒤, 캡슐에서 나와 곧바로 영지전 영상을 시청한 것이었다.
그리고 방금 전. 로터스 길드의 압도적인 승리로 영지전이 끝났으니, 더 이상 TV를 시청할 이유가 없어졌다.
“정말인지 저 황금빛 창은… 엄청난 무기로군.”
한 방에 70%이상 남았던 생명력이 전부 사라지던 순간을 떠올리자,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무도가라는 직업을 얻은 뒤 일대 일의 상황에서 져 본 적이 없는 유신으로서는, 정말 충격적인 사건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안의 템빨을 폄하할 생각은 없었다.
이안에게 템빨이 있었다면, 자신은 근접전에서 훨씬 유리한 스킬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 ‘무도가’ 클래스였으니까.
지금 유신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생각은 오직….
“한 번, 다시 겨뤄보고 싶다…!”
호승심.
이안과 제대로 다시 맞붙어보고 싶다는 생각 뿐 이었다.
다시 붙는다면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강자와의 전투에 대한 열망일 뿐.
이안을 상대하다보면 어느 순간부터 정체되었던 자신의 실력도 더 성장시킬 수 있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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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정령왕의 심판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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