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정령왕의 심판 -2 >
* * *
- 뭐지? 이안 무기가 갑자기 바뀌었는데?
- 그러게? 저 창 뭐임. 나 이안 영상 안본 거 없다고 자부하는데, 나도 저 창은 처음 보는데?
- 와씨 ㄷㄷ 간지 터진다. 저거로 한 대 맞으면 그대로 뒤지겠는데?
채팅창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안의 손에 쥐여진 창의 위용이 정말 대단했기 때문이었다.
신화등급에, 4차초월까지 강화된 우주파괴 무기의 위용.
그것은 외형만으로도 충분한 위압감을 안겨 줄 만한 비주얼을 가지고 있었다.
잠시 움찔 했던 유신이 씨익 웃어 보이며 물었다.
“뭐지? 이제 와서 템빨이라도 세우겠다는 건가?”
유신의 도발.
하지만 이안은 발끈하기는커녕 오히려 비웃었다.
“템빨이라니. 소환수도 없는 소환술사한테 얻어맞은 주제에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
이안의 비아냥을 들은 유신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하지만 필요 이상으로 흥분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안의 말에 틀린 점은 없었으니까.
유신은 소인배가 아니었다.
“후후, 그 말이 틀리지 않아. 무려 전사클래스 랭커라는 내가 소환수도 없는 소환술사에게 고전할 줄은 상상도 못 했지.”
저벅- 저벅-
주먹을 단단히 말아 쥔 유신이, 이안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하지만 결코 내가 부족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군. 그대가 상식 밖으로 강할 뿐.”
이안과 유신의 두 눈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그렇기에 여기서 죽어줘야겠어. 이 기회가 아니면 그대를 죽일 방법이 없을 것 같거든.”
말이 끝남과 동시에, 유신이 지면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그리고 이안의 몸이 반응했다.
쾅- 콰쾅-!
유신의 주먹에 어린 푸른 빛의 기운과, 이안의 창에서 뿜어져 나온 황금빛의 기운이 허공에서 충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겉으로 보기에는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두 사람의 격돌은 치열했다.
하지만 그것은, ‘겉으로 보기에’ 그럴 뿐인 것이었다.
쾅-!
굉음이 일며, 반발력으로 인해 격돌하던 두 사람의 신형이 뒤쪽으로 밀려 나갔다.
그리고 유신의 표정에는 당황스러움이 어려 있었다.
‘뭐, 뭐지? 어떻게 빗겨낸 공격에 이런 말도 안 되는 데미지가 들어오는 거야?’
분명 유신은 제대로 된 공격을 허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십만에 가까운 생명력이 깎여나간 것이었다.
이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저 이상한 창의 공격력이 대체 몇이기에…?’
당황을 넘어 경악에 가까운 유신의 표정.
반면 이안의 표정에는 여유가 넘쳤다.
정령왕의 심판의 성능이, 생각했던 것 보다 더욱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두 명의 기사들을 상대로 힘겹게 버티는 중인 훈이를 슬쩍 응시한 이안이 창을 고쳐 쥐며 유신을 향해 다시 달려들었다.
“시간이 없으니 빨리 끝내도록 하지.”
“오만하구나!”
두 사람은 다시 격돌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안은 집중력을 최대한으로 끌어 올렸다.
‘정령왕의 심판’ 이라는 괴물 같은 녀석의 모든 능력치를 전부 뽑아내기 위함이었다.
까강- 촤아악-!
쇄도하는 유신의 주먹을 창대로 쳐 올린 뒤.
그대로 떨어져 내린 창날이 유신의 허벅지를 쓸고 지나갔다.
[퓰리오스 길드의 마스터 ‘유신’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유신’의 생명력이 474579만큼 감소합니다.]
단 한 번의 공격에 20%에 가까운 생명력이 뭉텅이로 떨어져 나가는 유신!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는 데 성공했습니다!]
[‘정령왕의 심판’의 고유능력, ‘감응’이 발동합니다.]
[소환수 ‘할리’와 감응하였습니다.]
[‘할리’의 고유능력인 ‘바람의 수호자’가 발동합니다.]
[앞으로 2분 동안, 민첩성이 나머지 전투능력치를 합한 수치만큼 추가로 증가합니다.]
정령왕의 심판의 고유능력인 ‘감응’으로 인해, 할리의 상징과도 같은 스킬이자, 최강의 버프스킬인 ‘바람의 수호자’가 발동해 버린 것.
물론 민첩성 능력치의 증가폭은, 할리가 발동시켰을 때 보다는 훨씬 적은 수준이었다.
‘바람의 수호자’ 고유능력이 계산하는 ‘전투능력치의 합’에는, 장비로 인한 스텟보너스가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안이 할리보다 레벨은 높았지만, 장비 스텟 보너스를 제외하면 본신의 전투능력 자체는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수천이 넘는 민첩성이 일시에 증가하자, 이안의 움직임이 거의 2배 가까이 빨라졌다.
그리고 갑자기 빨라진 이안의 움직임에, 유신이 적응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어어…!”
온 몸에 새하얀 바람결이 감긴 이안이, 순식간에 유신의 뒤를 점하고 들어갔다.
유신의 주먹이 허공을 가른 것은, 당연지사.
[공격을 회피하는 데 성공하여, ‘정령왕의 심판’의 초월옵션이 발동합니다.]
지지직-!
이안의 창에서 뿜어져 나온 강력한 전류가 유신의 온 몸을 휘감았고.
[퓰리오스 길드의 마스터 ‘유신’에게 197980만큼의 전격 피해를 입혔습니다.]
이안의 생명력은 전부 회복되고 말았다.
[생명력이 179809만큼 회복됩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콰아앙-!
정령왕의 심판을 역수로 거머쥔 이안이, 유신의 뒤통수를 향해 번개같이 창을 내려 그었기 때문이었다.
[퓰리오스 길드의 마스터 ‘유신’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습니다.]
[‘유신’의 생명력이 619895만큼 감소합니다.]
[‘정령왕의 심판’의 고유능력, ‘심판의 번개’가 발동합니다.]
[퓰리오스 길드의 마스터 ‘유신’에게 921511만큼의 전격 피해를 입혔습니다.]
이안의 공격에 채 반응하기도 전에 허공에서 떨어져 내린 심판의 번개.
그리고 그 무지막지한 연속데미지에, 유신의 몸은 새카맣게 타 버리고 말았다.
[퓰리오스 길드의 마스터 ‘유신’을 성공적으로 처치하셨습니다.]
[명성이 5만 만큼 증가합니다.]
이안의 눈 앞에 주르륵 떠오르는 시스템 메시지.
그리고 이어서, 전장에 있는 모든 이들의 시야에 시스템 메시지가 추가로 떠올랐다.
[퓰리오스 길드의 ‘길드 마스터’가 사망했습니다.]
[‘퓰리오스’길드의 사기가 20만큼 감소합니다.]
[‘로터스’길드 공격군의 사기가 20만큼 증가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대 학살극의 시작이었다.
* * *
뚫어져라 이안의 전투영상을 지켜보고 있던 나지찬은, 그 자리에서 굳은 채 멍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었다.
손에는 방금 집어먹으려던 감자칩이 그대로 들려있었지만, 순간적으로 모든 것을 잊어버린 듯 한 표정이었다.
“바, 방금… 어떻게 된 거지?”
나지찬은 직책은 그리 높지 않지만, 기획팀에서도 핵심 인물이었다.
그 말인 즉, 카일란의 전투시스템에 대해 누구보다도 빠삭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소리.
게다가 이안의 광팬인만큼, 이안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모든 능력을 줄줄이 꿰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의 눈에도 순간적으로 버그처럼 보일 만큼, 방금의 상황은 어처구니가 없는 수준이었다.
“뭐가 어떻게 됐기에 290레벨짜리 무도가가 원콤이 나는 거지?”
그리고 나지찬이 이런 반응일진대, 채팅창의 상황은 불 보듯 뻔했다.
- 뭐야! 러블리안 회원님들 계시면 저 상황 좀 설명해줘 봐요. 방금 번개 떨어지더니 유신 캐릭터 그냥 삭제됐는데?
- ㅇㅇ그냥 푹찍 이었음. 대체 뭐임. 아무리 이안이라도 저건 좀 심하잖아. 갑자기 공격 다 피하더니 유신 뒤통수 후려갈긴 거 까진 이해한다 이거야. 근데 왜 한 방에 뒤지냐고.
- 이안교 입문한지 5개월쯤 된 신자입니다. 저거 아직 밝혀진 바 없는 스킬이긴 한데, 저희 러블리안에서는 확률발동 패시브 같은 걸로 추측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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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끝도 없이 밀려 내려가는 채팅창의 스크롤.
나지찬은 방금 이안의 전투장면만 서너번 쯤 돌려본 후, 펜을 들고 허겁지겁 뭔가를 메모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영지전이 끝나고 나면, 다시 회사에 나가서 방금의 전투와 관련된 데이터를 뽑아 분석해 봐야 할 것 같았다.
“그나저나… 극딜이야 그렇다 치고. 감응스킬로 뭐가 발동될 지 미리 알기라도 한 거야? 어떻게 바로 반응해서 물 흐르듯 공격을 연계하는 건데?”
나지찬이 가장 놀란 부분은, ‘감응’ 고유능력으로 인해 발동된 ‘바람의 수호자’ 버프에 이안이 곧바로 반응했다는 점이었다.
일반적인 유저였다면, 랜덤으로 걸린 버프스킬에 조금이라도 당황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특히 ‘바람의 수호자’와 같은 민첩성 증가 버프의 경우에는, 갑자기 캐릭터의 움직임이 빨라지기 때문에 공격의 밸런스가 깨져서 휘청거려야 정상인 것이다.
한데 이안은, 당황은 커녕 그 속도에 곧바로 적응해서 순간적으로 유신의 뒤를 잡고 들어갔다.
이정도면 ‘반응속도가 좋다’라는 정도의 수식 따위로는, 설명할 수 없는 수준의 동물적 감각이었다.
나지찬은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10%확률로 발동하는 심판의 번개가 떨어진 거야 운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게 아니었어도 어차피 유신은 죽었을 거야.”
심판의 번개의 무지막지한 추가피해 덕에 원콤이 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게 아니었더라도 이안의 후속타가 두세번은 들어갈 여지가 있었다.
유신이 완벽히 뒤를 내줬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세 번의 창질이면, 어차피 유신은 죽어야 했을 운명이기는 했다.
초점 없는 눈으로 같은 장면만을 10회 이상 돌려보던 나지찬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마우스를 옮겼다.
“아, 이럴 때가 아니지. 생방송 보던 중에 내가 뭐 하고 있었던 거야.”
유신을 처치한 이안은, 곧바로 훈이를 지원했을 게 분명했다.
훈이가 상대하고 있던 두 명의 기사클래스 또한 제법 높은 랭킹을 가진 랭커들.
그들과의 전투 또한 놓칠 수 없었는데, 이안의 어처구니없는 퍼포먼스 덕에 1분 이상의 생방을 놓쳐버린 것이다.
허겁지겁 마우스를 돌려 실시간 영상을 다시 재생한 나지찬.
하지만 화면에 보이는 것은, 이미 까맣게 변해버린 세 사람의 시체 뿐이었다.
* * *
한편.
세 사람의 랭커들을 순식간에 처치한 이안과 훈이는 빠르게 계단실에서 뛰어 나왔다.
그리고 두 사람의 앞에는, 로터스와 퓰리오스 길드의 병력이 부서진 성문을 사이에 두고 치열하게 공방을 벌이고 있었다.
“훈아, 하르가수스 소환좀!”
“오케이!”
이안의 주문에 훈이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뻗었고, 그의 손에서 까만 기운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새까만 기류는 전장에 쓰러져 있던 말 한마리를 향해 빠르게 스며들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쓰러져 있던 말이 벌떡 일어나더니 허공을 향해 포효했다.
히히잉-!
그 뿐만이 아니었다.
가죽으로 덮혀 있던 말이 어느새 뼈만 남은 기괴한 모습으로 변하였고, 등허리에는 기이한 모양의 날개가 돋아났다.
명계(冥界)의 명마(名馬)라 불리는 하르가수스가 소환된 것이었다.
“하르가수스다!”
“고레벨 흑마법사가 침투했다!”
“찾아! 어디야!”
본래 하르가수스는, 딱히 전투력을 갖지 않은 언데드였다.
전투능력치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혼자서는 아무런 전투도 할 수 없었기 때문.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르가수스가 위협적인 이유는, 데스나이트와 한 쌍을 이루는 소환수이기 때문이었다.
탑승자의 전투능력을 자신이 가진 전투능력의 50%만큼 증폭시켜주는 소환수인 하르가수스는, 흑마법사의 최상위 소환수인 데스나이트와 함께 소환되었을 때 어마어마한 시너지를 만들어주는 녀석인 것이다.
퓰리오스의 유저들은 곧 데스나이트도 함께 소환될 것이라 생각했고, 그들의 예측은 틀리지 않았다.
훈이가 곧바로 전설등급의 데스나이트인 발람을 소환한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큰 재앙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둠소환술!”
어디선가 울려 퍼진 스킬의 시동어와 함께, 추가로 소환된 한 마리의 하르가수스.
그리고 그 위에는 어느새, 황금빛 장창을 거머쥔 ‘소환술사’가 한 명 올라 타 있었다.
< (3). 정령왕의 심판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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