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정복전쟁의 서막 -3 >
* * *
쾅-!
굉음이 울려 퍼지며, 마계15구역의 시작지점에 커다란 게이트가 오픈되었다.
가로3미터 세로5미터 정도는 되어 보이는 붉은빛의 커다란 게이트의 중심에서, 커다랑 공명음이 울려퍼지더니 붉은 회오리가 몰아쳤다.
그리고 잠시 후.
붉은 회오리로 가득했던 게이트가 열리며, 그안에서 일단의 무리들이 튀어나왔다.
퉁- 퉁-
게이트에서 나타난 이들의 몰골은, 엉망 그 자체였다.
기사들의 판금갑주는 여기저기가 검게 그을러 져 있는 것은 기본, 군데군데 찌그러져 있기까지 했고, 마법사나 사제들의 로브는, 거의 누더기에 가까울 정도로 엉망이었다.
가장 먼저 게이트에서 나타난, 회갈 빛 갑주를 두른 전사클래스의 유저.
마틴이 갑주에 묻은 먼지들을 털어내며 중얼거렸다.
“후우 겨우 잡았네. 그동안 한 번도 관문지기가 등장 안 하길래, 30구역 이하 최상위구역 관문에는 원래 관문지기가 없는 건 줄 알았는데 말이야.” 일반적으로 마계 관문의 관문지기는, 누군가 한 번 클리어하고 나면 짧게는 1~2주. 길게는 한 달 동안 리젠이 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관문지기가 없더라도 누군가 이미 잡아서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30구역 이하의 지역을 누군가 클리어했다고 생각하긴 힘들었던 것.
심지어 최초발견 보상까지 꾸준히 나타났으니, 의심할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이안 일행이 이미 17구역까지 뚫었는데 어떻게 최초발견 보상이 나타났느냐?
그 이유는 간단했다.
이안과 마틴일행의 종족은 달랐고, 최초발견 보상과 같은 컨텐츠 선점 보상들은, 종족별로 따로 적용되도록 설계된 것이었다.
이것 또한 마족이라는 새 종족을 만들면서, 유저들의 종족이전을 유도하기 위한 개발사의 의도된 기획이었다.
어쨌든 마틴을 시작으로 다른 유저들도 차례대로 게이트에서 나오기 시작했고, 뒤늦게 빠져나온 체이스가 마틴의 말에 맞장구치며 대답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마스터. 관문지기가 뜬금없이 연달아 나타난 건 그렇다 치더라도… 400레벨이나 되는 노블레스가 나타날 줄은 몰랐습니다. 게다가 하나도 아니고 둘이라니.”
그에 이라한이 빈정대듯 말했다.
“내가 아니었으면 아예 통과조차 못 했을 놈들이 말만 많군.”
마틴이 발끈했다.
“그건 그쪽도 마찬가지일 텐데…?”
하지만 이라한은 콧방귀만 뀔 뿐이었다.
“무슨 소리. 우리 다크루나 길드만으로도 이 정도 관문지기는 충분히 클리어 했을 거다. 착각하지 말았으면 좋겠군.”
별로 동의하고 싶지는 않은 마틴이었지만, 쓸 데 없는 것으로 심력소모를 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입을 다물었다.
관문지기와의 오랜 전투 때문인지, 피로도가 극에 달했고, 이라한과 말싸움을 하는 데 필요한 칼로리조차 아까운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마틴은 이라한을 무시한 채, 관문에서 빠져나온 인원들을 체크하기 시작했다.
“흐음… 생각보다 피해가 크군.”
사실 마계 17구역까지 도달하는 동안은, 큰 어려움이 없었다.
호왕길드와 다크루나길드 모두, 전력손실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들이 현재 마족 유저들 중 최고의 정예들로 구성되어있는 데다가, 매 관문을 넘을 때 마다 존재해야 하는 관문지기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마계30구역의 혼돈의 도시에서 17구역까지는 일주일도 채 걸리지 않아서 도착할 수 있었던 것
하지만 16구역으로 들어서는 관문부터, 갑자기 관문지기가 등장했다.
그나마 16구역을 지키는 관문지기는 350레벨정도 되는 노블레스 세 명 정도였기에 이었기에 싸워볼 만했었는데, 15구역의 관문지기는 정말 지옥같은 난이도였다.
무려415레벨의 노블레스 마법사 하나와 390레벨의 노블레스 전사 하나가 지키고 있었던 것.
덕분에 지금까지 한 번도 잃은 적 없던 파티원을 거의 절반 가깝게 잃고 말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주력이 되는 랭커들을 전부 살려서 왔다는 정도.
[마계 15구역에 최초로 입장하셨습니다.]
[명성을 10만 만큼 획득합니다.]
[앞으로 일주일 간, 마계 15구역에서 획득하는 모든 마계 관련 스텟들이 1.5배만큼 증가합니다.]
[앞으로 일주일 간, 경험치 획득량이 2배로 증가하며, 아이템 드랍율도 2배로 상향조정됩니다.]
떠오르는 메시지를 본 이라한은 속으로 침음성을 흘렸다.
‘흐음… 17구역까지는 대체 왜 관문지기들이 등장하지 않았던 걸까? 누군가 클리어 한 것이 아니라면 말이 안 되는데….’
이라한은 종족이 다를 경우 최초발견 보상이 따로 적용된다는 사실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인간 유저가 먼저 17구역까지 발견한 것일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말이 되지를 않았다.
인간계와 마계를 연결하는 모든 차원문이 닫힌 지금, 인간 유저가 마계에 남아있다는 것은 말이 되지를 않았으니까.
만약 인간 유저가 17구역을 뚫었으려면, 차원전쟁이 발발하기 전이어야만 하는데, 그것은 더욱 말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 당시 랭커들의 평균레벨은 지금보다 30 이상 낮았을 테니까.
이라한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다크루나 길드의 수뇌이자 이라한의 심복과도 같은 인물인 ‘솔린’이 그를 향해 다가왔다.
“이라한님, 인원파악 마쳤습니다. 레온을 비롯해서 총 다섯 정도가 사망했고, 나머지 일곱 명은 무사합니다.”
이라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다 솔린. 이제 정비하도록 해.”
“예, 마스터.”
한 편, 마찬가지로 인원파악을 끝낸 마틴이 이라한을 향해 다가왔다.
“이제 어떻게 할 건가, 이라한. 지금 곧바로 던전을 찾으러 움직였다간… 전멸을 면치 못할 것 같은데 말이야.”
마틴의 말에, 이라한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오랜만에 맞는 말을 하는군. 이렇게 집중력이 저하된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
이라한이 시선을 슥 돌려 파티원들을 한 차례 훑어보더니 말을 이었다.
“하루 정도는 쉬었다가 ‘잊혀진 영혼의 무덤’을 찾아 나서는 게 좋겠어. 잠도 푹 자고, 개인 정비도 전부 한 다음에… 정확히 내일 이 시간에 이 곳에 모이는 게 어떤가?”
이라한의 말에, 마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렇게 하도록 하지.”
* * *
“어…? 설마 이안형이 아직 안 온 건가?”
마계 17구역.
사령의 탑 뒤편에 있는 작은 공터.
공터 입구에 들어선 훈이가 두리번거리며 이안과 카노엘을 찾았다.
“어후, 졸려 죽겠는데 한 30분 정도 더 자고 올 걸 그랬나? 하지만 이안형이 약속을 어기는 걸 본 적이 없는데….”
그리고 훈이의 중얼거림이 끝나기가 무섭게, 공터 구석에 있는 바위에 걸터앉아있던 이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난 이미 와 있지. 노엘이는 연락해 봤어?”
“…역시 안 와 있을 리가 없지. 노엘이 형 지금 접속중일 거야. 아까 밥 먹고 접속한다고 나한테 메시지 왔었어.”
사령의 탑에서 발동했던 생각지도 못 한 돌발임무.
이안 일행은 거의 한계까지 다다른 정신력으로 임무를 무사히 클리어 해 내었다.
세 사람의 소환수와 언데드들이 제법 희생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사망해서 24시간을 날리는 참사는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정확히 여덟시간이 지난 지금.
이안과 훈이가 약속장소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노엘이 도착하면 바로 출발하자고. 1분 1초가 아까우니까 말야.”
이안이 의욕적으로 정령왕의 심판을 붕붕 위둘렀고, 훈이는 바닥에 털썩 누워버렸다.
“나 노엘이 형 올 때까지 10분만 졸고 있을 테니까, 형 오면 좀 깨워….”
하지만 훈이가 눕기를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멀리서 카노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헉, 헉, 나 늦은 거 아니지?”
그리고 훈이는 울상이 되어버렸다.
“조금 늦지 그랬어 형….”
* * *
“17구역 관문지기 스팩이 어느정도였지?”
이안의 물음에, 훈이가 짧게 대답했다.
“340레벨 노블레스 둘. 320레벨 최상급 마수 셋.”
이안이 씨익 웃으며 훈이의 머리를 어루만져(?) 주었다.
“역시 우리 훈이가 기억력 하나는 쓸만하단 말이야.”
“아니, 형이 나보다 더 기억력 좋잖아. 이런 건 좀 직접 기억하라고.”
훈이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훈이와 카노엘이 느끼기에, 이안의 기억력은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파티원의 모든 액티브 스킬의 쿨타임을 기억하며 하나하나 오더를 내리는 모습은, 봐도 봐도 적응이 되지 않을 정도로 기가 막힌 것이었다.
사실 이안과 훈이, 그리고 카노엘이 전사나 기사 같은 클래스였다면 그렇게까지 놀라운 모습은 아니었다.
최상위 랭커들 중에서는 세 명 정도의 소규모 파티를 일일이 제어할 수 있는 능력 정도를 가진 이는 제법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 세 사람은, 무려 소환술사 둘에 흑마법사였다.
이안이 일일이 오더를 내리는 대상에는, 파티원들이 소환해 낸 소환수들의 고유능력까지 전부 포함되는 것이다.
어지간한 소환술사 유저들이 자신이 운용하는 소환수 두셋의 고유능력도 제대로 활용해 내지 못하는 것을 감안하면, 이건 거의 사기에 가까운 수준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때문에 훈이가 툴툴거린 것이었고, 이안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시끄러 인마. 형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좀 할 것이지….”
“킁.”
어쨌든 훈이의 말을 들은, 이안은 16구역의 관문지기가 어느정도 스펙을 가지고 있을지 대충 머릿속으로 계산을 해 보았다.
‘구역을 내려갈수록 관문지기의 레벨이 급격히 오르는 것 같으니… 어쩌면 400레벨 가까운 노블레스가 등장할 지도 모르겠어.’
그리고 그에 맞게 철저히 대비를 한 이안 파티는, 긴장한 채 16구역으로 향하는 관문을 향해 발을 딛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세 사람은 동시에 의아한 표정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떠오른 시스템 메시지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기 때문이었다.
[마계 16구역으로 향하는 관문에 도착하셨습니다.]
[잠시 후, 마계 16구역으로 이동합니다.]
“으응…? 어째서?”
훈이와 카노엘은 좋은 게 좋은 거라며 히히덕거렸지만, 이안은 고민에 빠졌다.
‘뭐지? 마족 중에 누군가 먼저 16구역을 밟은 건가?’
이안 일행은 빠르게 16구역을 지났고, 곧 15구역으로 향하는 관문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런데 또다시 관문지기는 존재하지 않았고, 이안 일행은 15구역으로 향하는 관문을 프리패스로 통과할 수 있었다.
처음 사령의 탑 앞에서 모일 때만 해도 울상이었던 훈이가, 히히덕거리며 떠들었다.
“크으, 이 훈이님께서 15구역에 오신다는 소릴 듣고, 관문지기들이 무서워서 다 도망가 버렸구나! 으하핫!”
이안이 한숨을 쉬며 훈이에게 핀잔을 주었다.
“시끄러 이 멍청아. 관문지기들이 도망가기는 어딜 도망가. 누군가 여길 먼저 통과했다는 소리지.”
그런데 그 때, 카노엘이 뭔가를 발견한 듯 이안과 훈이를 불렀다.
“잠깐, 이쪽에 뭔가 있는데?”
“응…?”
이안과 훈이는 카노엘을 따라 움직였고, 관문의 바로 앞쪽에 떨어져 있는 잡템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뭐야 이거? 그냥 유리병이잖아?”
“여기에는 내구도가 다 떨어져서 파괴된 판금갑옷도 있어.”
이안의 눈매가 살짝 가늘어졌다.
‘역시, 내 짐작대로 누군가 먼저 여기에 도착한 거야. 아마 마족 유저들이겠지.’
이안은 허리를 굽혀 다 마시고 버린 빈 포션병을 집어들었다.
병의 입구에는 아직도 촉촉한 수분이 남아 있었고, 그렇다는 얘기는 유저들이 여길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이안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어떤 놈들인지는 알 수 없지만, 15구역 관문지기 뚫고 나서 방금 전에 로그아웃한 게 분명해.’
물론 15구역 안쪽을 향해 움직였을 확률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희박한 확률이라고 생각했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덕분에 시간을 많이 아꼈는데?”
이안의 입 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아무리 이안 일행이라 하더라도, 15구역과 16구역의 관문지기를 처치하려면 제법 시간이 필요했을 터.
퀘스트 완료까지 이제 2일 하고 12시간 정도밖에 남지 않은 이 상황에서, 관문지기를 상대할 시간을 아꼈다는 것은 그야말로 호재(好材)라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추가로, 사악한(?) 생각까지 하나 떠올랐다.
< (4). 정복전쟁의 서막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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