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정복전쟁의 서막 -2 >
* * *
이안은 과거 그리퍼에게 넘겨줬던 알 수 없는 마수의 알이 베히모스의 알이라고, 지금까지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베히모스의 알을 얻고 나자, 또 한번 혼란에 빠졌다.
‘분명 그리퍼에게 넘겼던 알은 붉은 빛의 알이었는데…?’
‘알 수 없는 마수의 알’이 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는 건, 100%확실한 사실이었다.
한데 지금 이안의 손에 들려있는 이 베히모스의 알에서는, 푸른 빛이 은은히 새어나오고 있었다.
적어도 두 알이 같은 물건은 아니라는 이야기.
“대체 뭘까…?”
이안의 중얼거림에, 옆에 있던 카노엘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요, 형? 무슨 문제 있어요?”
이안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 아니야. 혼자 생각할 게 좀 있어서.”
이로써 베히모스의 알인 줄 알았던 ‘알 수 없는 마수의 알’의 정체는 다시 묘연해졌다.
그리고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건, 인간의 본능적인 심리.
어쩐지 그리퍼가 가져간 알은 베히모스보다 더 대단한 마수의 알일 것만 같다는 생각이 스멀 스멀 피어올랐다.
‘으으… 그 알 어떻게 다시 회수할 방법 없을까?’
이안은 그 알이 대체 어떤 마수의 알일지 무척이나 궁금했지만, 일단은 고민을 접기로 했다.
우선은 지금 퀘스트를 마무리하는 게 가장 시급했으니까.
‘퀘스트 다 끝나면 오랜만에 차원의 마탑에 한번 들려 봐야지. 그리퍼를 잘 구슬리면 알을 다시 받아낼 수 있을지도…!’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친 이안이, 주먹을 불끈 쥐고는 훈이와 카노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 훈이, 노엘이. 정비 다 했지? 움직여 볼까?”
“난 아까부터 다 끝나 있었다고. 형만 기다리고 있었어.”
“오케이, 가자 그럼.”
베히모스가 알을 품고 있던 그 뒤편에는, 어느새 푸른 빛깔의 이동게이트가 열려 있었다.
저 안으로 들어가면, 분명 어둠의 보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안은 마지막으로 소환수들의 상태를 한 번씩 점검했다. 새로운 적이 나타나지는 않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만일을 대비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철퍽- 철퍽-
던전 바닥의 질퍽한 질감에, 잠시 눈을 찌푸렸던 이안은, 망설임 없이 게이트의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게이트는 세 사람을 전부 삼킨 뒤, 스르륵 소리를 내며 자취를 감추었다.
* * *
띠링-
[‘어둠의 보주’를 획득하셨습니다.]
[수천 년 동안 탑에 잠들어 있던 사령의 군주가 깨어납니다.]
[‘사령의 권능’이 발동됩니다.]
우우웅-!
이안 일행이 게이트를 통해 들어선 곳은, 탑의 꼭대기인 듯 보이는 신비한 공간이었다.
끝없는 높이로 우뚝 솟아 있는 해골 모양의 제단과, 그 앞에 두둥실 떠 있는 묵빛의 보주.
세 사람이 모두 그 앞에 다가가 서자, 보랏빛의 기운이 제단을 타고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기운의 일부를 빨아들인 보주가 천천히 이안 일행을 향해 다가오더니, 파티장인 훈이에게로 빨려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시스템 메시지가 또다시 떠올랐다.
띠링-
[어둠의 보주에 깃든 사령의 권능은, 3일 동안 지속됩니다. 그 안에 모든 재료를 모아 데이드몬의 신단에 가져가만 합니다.]
[ 남은 시간 - 71 : 59 : 58 ]
메시지를 확인한 이안은 벙찐 표정이 되었다.
이 메시지 하나로 인해 이안이 세워놨던 계획이 전부 틀어졌기 때문이었다.
“아오, 뭐 이렇게 치사한 퀘스트가 다 있어!”
3일이라는 시간제한은 정말 생각지도 못 했던 부분.
만약 이러한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더라면, 사령의 탑에는 가장 마지막에 왔을 것이었다.
‘최소한 발록의 심장은 얻은 뒤에 왔었겠지.’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훈이도 툴툴거리며 입을 열었다.
“3일이라… 좀 많이 빠듯하긴 하네. 어떡할 거야 형. 그래도 우리 열 시간 정도는 자고 다시 접속해야 하지 않겠어?”
퀘스트에 생각지 못했던 시간제한이 생기기는 했지만, 베히모스 사냥으로 온 몸에 힘이 하나도 남지 않은 상태였다.
아무리 급하다고 하더라도 지금 퀘스트를 진행하는 것은 사실상 무리.
비상식의 아이콘인 이안조차도, 지금은 좀 쉬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렇다고 상식적인 계획을 세운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어쩔 수 없지. 딱 8시간만 자고 오자. 그리고 남은 63시간 스트레이트로 달리면 되지.”
“….”
훈이가 한숨을 푹 쉬었고, 카노엘은 이제 완전히 체념한 듯한 표정이었다.
잠수라도 타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이안으로부터 500통 정도 전화가 올 지도 몰랐다.
“그럼 일단 로그아웃?”
훈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려던 이안은, 뭔가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야 근데 아까 떴던 메시지 중에, 사령의 군주 어쩌고 하는 것도 있지 않았나?”
“아, 내가 알 게 뭐야. 지금 졸려 죽겠다고. 일 분이라도 더 자고 싶어.”
훈이는 귀찮다는 듯 곧바로 로그아웃을 시도했다.
하지만 그 순간, 훈이의 눈 앞에 생각지도 못 했던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로그아웃이 불가능한 이벤트가 진행 중입니다.]
“음? 뭐라고?”
그리고 훈이의 반문을 듣기라도 했다는 듯, 시스템 메시지가 이어서 한번 더 떠올랐다.
[봉인에서 풀려난 ‘사령의 군주’가 깨어납니다.]
스아아아아-!
온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의 스산한 소리가 던전 안에 울려 퍼졌다.
몰려오던 잠이 확 달아날 만큼, 기괴하기 그지없는 파동음,
그리고 세 사람의 눈 앞에, 전혀 생각지도 못 헀던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띠링-
[돌발 퀘스트가 생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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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령의 탑 탈출(히든, 돌발 퀘스트)(타임어택)-
당신은 마신 데이드몬의 신탁을 받아, 베히모스를 물리치고 어둠의 보주를 얻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 어둠의 보주는 본래 ‘사령의 군주’ 샬리언을 봉인하던 물건이었고, 그 때문에 리치 킹 샬리언의 봉인이 해제되어버렸다.
샬리언의 영혼에 걸려 있던 봉인이 전부 다 풀리는 순간, 그는 미쳐 날뛰며 모든 것을 파괴할 것이다.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 무사히 사령의 탑을 탈출하자.
퀘스트 난이도 : SSS
퀘스트 조건 : 어둠의 보주 획득
제한 시간 : 15분
보상 - 마기 능력치 1000, 마기 발동률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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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스트 내용을 빠르게 읽은 세 사람은, 모두 어처구니 없는 표정이 되었다.
“뭐 이딴 퀘스트가 다 있어!”
“트리플S등급 퀘스트 보상이 뭐 이따위야!”
하지만 그들의 불만과는 별개로, 퀘스트는 그들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사령의 군주가 폭주하기 시작합니다.]
쿠쿠쿵-
던전이 무너질 듯, 어마어마한 굉음이 사방에서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안은 고개를 돌려 진동의 근원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곳에는, 시커먼 연기로 둘러싸여 있는 기괴한 그림자가 있었다.
[사령의 군주 샬리언 - Lv 500]
이 괴물의 레벨은 무려, 차원의 전쟁에서 소환되었던 천신의 군단장과 동급인 500레벨.
이 정도 레벨의 보스몬스터라면, 공격스킬에 스치기만 해도 아마 가루가 되어 버릴 게 분명했다.
“제기라알…!!”
이안은 다급히 들어왔던 게이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세 사람을 이 곳으로 데려다 주었던 게이트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뭐, 뭐야? 어쩌라는 거지?’
그런데 그 때, 카노엘이 이안을 불렀다.
“형 저기!”
카노엘이 가리킨 곳에는 새로운 게이트가 열려 있었고, 이안 일행은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퀘스트의 성패는 둘째 치고, 여기서 사망한다면 3일이라는 제한시간 중 24시간을 통째로 날려버리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필사적으로 달리고 또 달렸다.
* * *
차원전쟁 이후, 이안의 이름값은 모든 유저들 중에서도 최고를 다툴 정도가 되었다.
카일란 한국서버의 최강자로 알려져 있던 이라한이 이안에게 공식적으로 패배했으며, 양 진영 통틀어서 최고의 전공포인트를 모은 이 또한 이안이었으니,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얘기일지도 몰랐다.
물론 이라한이 그 뒤에도 이안에게 영혼까지 털렸다는 사실은 이안 외에는 아는 이가 없었지만, 그러한 사실들이 알려져 있지 않더라도 이안이 현 카일란의 최강자에 가깝다는 건 누구나 인정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안이 길드원으로 속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로터스 길드는 충분히 유명한 길드였다.
하지만 요 며칠 동안, 그 로터스길드의 이름값은 기존의 배 이상 단숨에 치솟았다.
중부대륙에 있는 총 12개의 영지에 영지전을 걸었으며, 그 영지들이 루스펠 제국 소속 길드 기준으로 최고랭킹에 랭크되어있는 길드들의 영지였으니까.
그리고 이미 로터스 길드는, 파죽지세로 연승행진을 이어가고 있었다.
지금까지 오 일 연속, 총 다섯 번의 영지전을 벌여 모두 승리한 것.
사실상 거의 모든 유저들의 이목이 지금 로터스 길드의 행보를 향해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사령의 탑에서 퀭한 눈으로 퀘스트를 진행 중인 이안 일행은 제외해야겠지만 말이었다.
중부대륙 서부지역에서 가장 거대한 영지인 폴핀영지.
타이탄 길드의 깃발이 크게 휘날리는 이 영지의 영주성에서는, 두 남녀가 심각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정체는, 샤크란을 제외한 타이탄 길드 최고의 권력자.
‘광휘의 기사’로 유명한, 부 길드마스터 ‘세일론’과, 대외적으로는 전혀 정체가 알려지지 않은 타이탄 길드의 책사인 ‘에밀리’였다.
에밀리는 원래 세일론의 측근 중 한명일 뿐이었지만, 그 능력을 샤크란에게 인정받아, 이제는 타이탄 길드의 비공식 책사로 활약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작은 원탁을 앞에 두고, 마주본 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원탁의 위에는, 영지전의 영상이 흘러나오고 있는 수정구가 올려져 있었다.
세일론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에밀리. 여기까지도 예상했던 범주가 맞아?”
세일론의 물음에, 에밀 리가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조금 애매해.”
“뭐가?”
“파이로 영지의 규모를 봤을 때, 와이번 나이트 정도는 충분히 생산을 시작했을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어.”
“그런데?”
“그런데 문제는, 지금 전쟁에 투입된 와이번 드래곤들의 물량만 놓고 봐도, 우리가 보유중인 병력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말이야. 벌써 이 정도까지 생산했다고는 나도 생각하지 못했거든.”
말을 마친 에밀리의 입에서 얕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거 우리도 얼른 움직여야 할 것 같은데…?”
“움직이다니?”
“지금 로터스의 목표가 뭐겠어?”
잠시 생각하던 세일론이 곧 대답했다.
“그야 당연히… 루스펠 소속의 상위권 길드들을 전부 흡수해서 덩치를 뿔리는 거겠지?”
에밀리가 고개를 저으며 다시 말했다.
“아니, 그 다음.”
“그 다음이라면… 설마 서부를 공격하려는 걸까?”
같은 중부대륙이라도, 서부에 있는 영지들에 영지전을 건다는 것은, 의미 자체가 달랐다.
서부대륙은, 루스펠 제국 소속의 길드들이 아닌, 카이몬 제국 소속의 길드 영지들이 위치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에밀리가 또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아닐거야. 물론 언젠가는 그럴 계획도 가지고 있겠지만, 내가 로터스 길드 같으면 그 전에 하나를 더 하겠어.”
“하나를 더 한다고?”
“응.”
잠시 뜸을 들인 에밀리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아마 왕국을 선포하겠지. 로터스 길드의 규모를 봐선, 아마 오래 전에 왕국 조건 같은 건 다 충족시켜 놨을 테니 말이야.”
“…!”
여기까지 듣고 나자, 세일론 또한 로터스가 그리는 큰 그림이 뭔지, 머릿속에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 다음은 루스펠 제국을 집어삼키고… 아예 제국을 선포해 버리겠군.”
에밀리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럴 것 같아. 그리고 그 다음은… 아마 카이몬을 상대로 한 제국전쟁이겠지?”
이미 로터스가 그 만큼 성장하고 나면, 일개 길드인 타이탄으로서는 견제할 방법 자체가 사라질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로터스 길드를 미리 공격하거나 할 방법도 없었다.
지금은 공식적으로, 카이몬과 루스펠 제국 간에 평화협정이 맺어져 있는 상태였으니까.
휴전 상태인 지금 타이탄 길드가 로터스 길드를 공격할 방법은 없는 것이다.
세일론이 굳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하… 이런 때에 마스터께선 어디에 계신 거야?”
“그러게. 이제 돌아오실 때도 되었는데….”
그런데 그 때.
그들의 뒤편에 있던 회의실의 문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아무래도 내가, 시간을 잘 맞춰서 돌아온 것 같군.”
< (4). 정복전쟁의 서막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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