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혼돈의 도시 -2 >
* * *
노블레스 마족 키르얀은, 마왕 릴리아나의 가신들 중에는 가장 서열이 낮은 노블레스였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마계 전체 서열 450위 전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마계의 진성귀족.
그는 이제 갓 승급전을 시작하는 상급마족 나부랭이가, 자신에게 도전했다는 것이 심히 불쾌했다.
‘건방진 놈…. 격이 다르다는 것이 어떤 건지 확실히 보여주도록 하지.’
키르얀은 성큼 성큼 걸음을 옮기며, 자신의 애병(愛兵)을 쓰다듬었다.
그의 무기는 추가 세 개 달린 거대한 철퇴였다.
무시무시한 외형을 가진 흉악스러운 병기.
하지만 얀쿤의 무기도 만만치 않았다.
얀쿤의 손에 들려있는 것은 거대한 대검이었는데, 검날의 크기가 거의 집 채 만한 수준이었다.
이안이 씨익 웃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걸 처음 획득했을 땐, 정말 얀쿤을 위한 무기라고 생각했지.’
원래 얀쿤은 두 가지의 무기를 사용할 줄 알았다.
그 중 하나는 대검(大劍)이었고, 다른 하나는 대부(大斧).
그런데 지금 얀쿤의 무기는, 표면적으로는 대검이었으나 도끼처럼 사용해도 무방할 만큼 검날의 상부가 거대하고 묵직했다.
얼핏 봐서는 도끼인지 대검인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얀쿤의 무기는 우악스러운 모습을 자랑했다.
그야말로 힘과 힘의 대결!
키르얀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얀쿤에게 접근해 왔다.
“굳어있는 꼴을 보니, 노블레스 승급전이 처음인 애송이로군.”
얀쿤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그렇다. 하지만 그대에게 질 것 같지는 않군.”
부웅-
얀쿤이 거대한 쇳덩이를 한 차례 휘두르며 씨익 웃었다.
명백한 도발.
키르얀의 안색이 붉어졌다.
“놈…. 절망을 보여주도록 하지.”
으드득-!
본래는 선공을 양보하려 헀던 키르얀이었지만, 얀쿤의 도발에 그런 생각은 싸그리 사라지고 말았다.
키르얀은 눈 앞의 애송이를 당장 밟아 쓰러뜨려야 기분이 풀릴 것 같았다.
키르얀은 얀쿤을 향해 달려들었고, 얀쿤 또한 가만히 있지 않았다.
두 마족은 서로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고, 묵직한 뜀박질 소리가 승급전장 위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쿵- 쿵- 쿵-!
두 마족의 거대한 무기가 부딪치며, 장내에 커다란 굉음이 울려 퍼졌다.
콰앙-!
그것은 대 격전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한 차례 격렬히 공방을 주고받은 둘은, 살짝 거리를 벌리며 물러섰다.
이안은 그 과정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흐으음….”
이안이 낮게 침음성을 흘리자, 옆에 있던 카카가 물었다.
“왜 그러냐 주인아.”
이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노블레스 마족. 예상보다 더 강해.”
“내가 말했잖아. 서열 6위의 마왕을 모시는 직계가신이다. 강할 수 밖에 없다.”
이안의 시선은 키르얀의 생명력 게이지에 고정되어 있었다.
‘방금 제대로 된 공격이 들어간 건 아니었지만… 최대 생명력의 5%도 깎지 못했어.’
한편 반대편에 앉아있던 릴리아나는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키르얀과 달리 얀쿤은, 거의 10%도 넘는 생명력이 깎여나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당사자인 키르얀은, 더욱 의기양양한 표정이 되었다.
‘멧집이나 공격력이 상급마족 치고는 괜찮은 수준이기는 하다만… 역시 내 상대는 아니야.’
키르얀은 철퇴를 만지작거리며 얀쿤을 향해 성큼 성큼 다가갔다.
하지만 얀쿤은, 의외로 차분하고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제법….”
입을 꾹 다문 키르얀이 다시 철퇴를 치켜 들었다.
‘아직까진 여유가 있다 이건가?’
후웅-
키르얀은 마치 무력시위라도 하듯, 바닥을 향해 철퇴를 휘둘렀다.
그러자 묵직한 소리를 내며, 돌바닥이 움푹 패여 나갔다.
콰앙-!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파괴력!
하지만 얀쿤을 겁을 먹지 않았다.
얀쿤은 씨익 웃으며 다시 키르얀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그리고 두 마족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서로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한편 이안은, 얀쿤의 표정을 확인하고는 조금 아리송한 기분이 되었다.
‘뭐지? 얀쿤은 저렇게 포커페이스를 유지할 만큼 속이 깊은 녀석이 아닌데…?’
이안은 누구보다 얀쿤의 성향을 잘 알았다.
키르얀처럼 다혈질이라고 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무척이나 단순한 성향인 얀쿤.
만약 정말로 손해를 봤다면, 순간적으로 표정에 전부 다 드러났을 것이었다.
이안은 턱을 괸 채 고민에 빠졌다.
‘대체 뭘까?’
그리고 다음 순간, 이안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것이 있었다.
‘혹시 방금… 단순히 물리적인 공방만 오고갔던 건가?’
마기는, 마기를 사용하는 고유능력을 발동시키지 않는 한, 확률에 의해서만 발동하게 되는 고정데미지였다.
유저가 발동시키고 싶다고 발동시키고, 발동시키고 싶지 않다고 억제시킬 수 있는 그런 종류의 능력이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방금의 격돌로 두 마족은 최소한 서너 번의 공방은 주고받았을 것이고, 그렇기에 당연히 마기가 한 번은 발동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그러나 이안의 추측대로라면, 방금의 공방에서는 얀쿤과 키르얀 모두 마기가 발동하지 않은 듯 보였다.
이안은 다시 두 마족이 마주 서있는 승급전장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랬던 거였어. 마기 없이 오로지 물리적인 데미지만 주고받았으니, 항마력이라는 믿는 구석이 아직 남아있었던 거야.’
그렇다면 방금의 격돌로 얀쿤은 얻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키르얀의 ‘방심’.
그리고 이것은 기회였다.
‘지금 얀쿤이 쓸 수 있는 고유능력이 뭐가 있지?’
이안은 전투에 집중하며 얀쿤이 가진 고유능력들에 대해 생각했다.
‘마기집중이야 패시브능력이니 의미 없고… 마기분출은 지금 사용해서는 안 되는 고유능력….’
마기집중은 얀쿤의 기본적인 전투능력을 올려주는 패시브 능력이었고, 마기분출은 강력한 광역공격기술이었다.
게다가 마기분출은 채널링 스킬이었기 때문에, 일대 일 싸움에서 더더욱 불필요한 기술이었다.
마기분출을 발동시킨다면, 스킬의 지속시간이 끝날 때 까지 얀쿤이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지금 얀쿤이 쓸 만한 능력은 광란의 전투 뿐인데….’
광란의 전투는 짧은 시간동안 얀쿤의 전투능력을 폭발적으로 상승시켜주는 자체 버프 능력.
이안은 얀쿤을 슬쩍 쳐다봤다.
‘이 기회를 제대로 살리려면, 곧바로 몰아쳐야 한다. 상대가 판단할 수 있는 기회를 줘선 안 돼.’
마기가 발동한 것은 아니었지만, 방금의 공방으로 인해 키르얀과 얀쿤 사이의 격차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쉽게 말해 한 대씩 주고받았는데 입은 피해는 두 배도 넘는 수준.
그 단편적인 사실 하나만 놓고 추측해 보더라도, 키르얀의 전체적인 전투능력이 얀쿤보다 몇 수는 위일 것이라는 사실을 도출해낼 수 있었다.
그렇다면 항마력을 믿고 장기전으로 갔다가는, 점점 더 전투가 어려워질 것이었다.
얀쿤이 항마력이 높다는 사실을 상대가 알게 되면, 훨씬 더 조심스럽게 전투에 임하게 될 것이었고, 전체적인 스펙이 떨어지는 얀쿤은 결국 패배하게 될 것이다.
‘얀쿤이 잘 해 줘야 할 텐데….’
얀쿤은 똑똑한 편이 아니었지만, 전투감각만은 뛰어난 편이었다.
이안은 그것을 믿어보기로 했다.
그런데 이안의 생각이 전부 정리된 그 순간.
“크아아아!”
넓은 승급전장의 한복판에서, 얀쿤이 커다랗게 포효했다.
그리고 이안의 입 꼬리가 슬쩍 말려 올라갔다.
‘광란의 전투’ 고유능력이 발동되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래, 바로 그거야 얀쿤. 지금 바로 끝내버리라고.’
* * *
마우리아 제국에서 가장 웅장하고 화려한.
그리고 남섬부주 전체를 굽어볼 수 있는, 가장 높은 장소.
마우리아 제국의 ‘황성’에, 두 번째로 들어선 남자가 있었다.
“오호, 그대는 진정 환영문의 후예…!”
“그렇습니다, 성왕이시여. 제 사조(師祖)의 유지를 이어받아, 이렇게 폐하를 찾아왔습니다.”
짙은 눈매, 그리고 강인한 턱선을 가진 남자.
핏빛 장검을 등에 멘 그의 정체는, 바로 샤크란이었다.
다크루나 길드가 마계로 넘어가며 그 세가 약해진 뒤, 압도적인 랭킹 1위의 길드가 된 타이탄 길드의 길드마스터.
그가 이안 이후 아무도 밟지 못했던 마우리아 제국의 땅을 밟은 것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서, 샤크란은 그가 가지고 있던 히든클래스의 숨겨진 관련 퀘스트를 마우리아 황성에서 찾아내었다.
‘후후, 이런 어마어마한 신규 필드가 존재했을 줄이야.’
샤크란은 자신이 마우리아 제국을 처음 찾아낸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착각은, 금방 깨어졌다.
“그러고 보니, 그대에게선 얼마 전에 보았던 젊은 소영웅과 비슷한 기운이 느껴지는군.”
샤크란이 움찔 하며 대꾸했다.
“그는 누구입니까?”
성왕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의 이름은 이안. 정말 용맹스러운 청년이었지. 바로 한 달 전 쯤, 내 보물을 빌리러 이 황성에 찾아왔었다네.”
그 말에 샤크란은 허탈함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뭐야, 그럼 이안 그 꼬맹이는 벌써 한 달 전에 여기 제국의 관문을 전부 통과하고 황제를 만났었다는 얘기야?’
샤크란은 속으로 툴툴거리며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가만, 한 달 전이라면… 차원전쟁이 한창이었던 시점인데….’
샤크란은 곧, 이안이 차원전쟁 기간에 이 모든 퀘스트를 거치고도 공적치 1위를 차지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후우, 진짜 미친놈이로군.’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의욕이 없어진다거나 넘을 수 없는 벽 같은 것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샤크란은, 더욱 호승심을 불태울 수 있었다.
‘이번에는 변명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패배지만… 곧 다시 따라잡아주지. 후후.’
그리고 그런 그의 자신감은, 충분한 근거가 있는 자신감이었다.
그 증거가 바로, 눈 앞의 단상에 놓여있는 황금빛의 책자였다.
샤크란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이안은 저도 익히 알고 있는 인물입니다.”
황제가 반색하며 물었다.
“오호, 그런가? 자네의 세계에서 그는 어떤 인물이지?”
황제는 이안을 무척이나 높이 평가하고 있는 듯 보였고, 그럴수록 샤크란의 승부욕은 더욱 불타올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확실히 대단한 인물입니다. 그가 있었기에 우리는 마계의 침공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황제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과연 그렇군.”
그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리고 환영문의 진전을 이은 자네 또한, 분명히 대단한 인물이겠지.”
샤크란은 살짝 고개를 숙여보이며 대답했다.
“실망시켜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샤크란은 겸손한 편이 아니었다.
자신감 넘치고 직설적인 것이 바로 그의 성향.
일반적인 유저였다면 황제의 기세에 눌려 겸양을 보였을 방금의 상황에서도, 샤크란은 굳이 자신을 낮추지 않았다.
하지만 샤크란이 거만하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샤크란은 선을 넘지 않는 ‘당당함’을 가지고 있었다.
황제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좋아, 기대해 보도록 하지.”
말을 마친 황제는, 단상 위에 놓여있던 황금빛 책자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샤크란에게 넘겨주었다.
“받게, 이것이 바로 환영문의 비전이 담긴 ‘환영비서’일세.”
“감사합니다.”
샤크란은 망설이지 않고 책자를 받아들었고, 그와 동시에 그의 시야에 수많은 시스템 메시지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띠링-
[‘환영문의 비밀 Ⅰ’ 퀘스트를 완료하셨습니다.]
[‘환영비서(幻影秘書)’ 아이템을 획득하셨습니다.]
[명성치를 20만 만큼 획득하셨습니다.]
[경험치를 95700000만큼 획득하셨습니다.]
:
:
그리고 시스템 메시지의 최 하단에 떠오른 한 줄의 메시지.
그것을 확인한 샤크란의 입 꼬리가 슬쩍 말려 올라갔다.
[히든 클래스 ‘환영검객(幻影劍客)’의 티어가 한 단계 상승합니다.]
< (4). 혼돈의 도시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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