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혼돈의 도시 -1 >
이안의 타이트한 사냥일정(?)을 가까스로 소화해 낸 얀쿤은, 결국 390레벨을 달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얀쿤이 390레벨이 되자마자, 이안 일행은 곧바로 30구역과 31구역 사이에 있는 관문을 뚫고, 30구역 안쪽으로 진입했다.
이안은 게이트를 통과해 30구역 안에 들어오자마자, 입이 쩍 하고 벌어졌다.
“와, 이게 뭐야. 무슨 만리장성도 아니고….”
이안의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정말 만리장성을 연상케 할 만한 것이었다.
이안의 옆에서 날던 카카가 물었다.
“주인아, 만리장성이 뭐냐.”
이안이 대답했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나라가 있는데, 그 곳을 통치했던 황제가 세운, 어마어마하게 규모가 큰 성벽이야.”
이 정도가 이안의 짧은 지식으로 대답할 수 있는 한계.
하지만 카카의 눈은 초롱초롱해졌다.
“중국? 만리장성?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주인아.”
이안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거야 당연하지. 중국은 이 세계에 있는 나라가 아니니까.”
“오호, 주인이 평소에 넘나드는 이면세계 안에 존재하는 제국인가보군.”
이안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다고 보면 돼.”
대충 카카를 납득시킨 이안의 시선이, 다시 눈 앞에 있는 웅장한 성벽을 향했다.
성벽은 지평선을 따라 끝없이 늘어서 있었고, 그 위로 물들어있는 붉은 마계의 하늘은,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았다.
‘저기를 넘어야 한다는 거지.’
이안의 시선이 얀쿤을 향했다.
“얀쿤.”
“불렀는가, 주인.”
“할 수 있겠지?”
얀쿤이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주인.”
그에 이안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어째 어제보다 자신감이 2배 정도 상승한 것 같다?”
얀쿤이 멋쩍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주인이 빌려준 장비들이라면, 상위 노블레스라 해도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것 같다.”
이안은 30구역에 넘어오자마자, 얀쿤에게 자신의 장비들을 전부 빌려줬다.
얀쿤이 창을 다룰 줄 모르기에 정령왕의 심판은 빌려주지 못했지만, 항마력 세팅이 되어있는 나머지 장비들을 모두 빌려준 것이었다.
그리하여 세팅된 얀쿤의 항마력은, 이안보다는 못했지만 거의 60%에 육박하는 수준.
게다가 이안이 착용하던 아이템이니, 다른 옵션들도 출중한 것은 당연했다.
이 정도의 템빨이라면, 얀쿤이 상위 노블레스를 상대로 이기는 것도 가능할 것이었다.
“하지만 방심하면 안 돼, 얀쿤.”
“알겠다, 주인. 꼭 이길 거다.”
이안이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템까지 다 빌려줬는데, 지면… 알지?”
“….”
얀쿤은 온 몸에 오한이 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 * *
이안 일행은, 어렵지 않게 혼돈의 장벽을 넘을 수 있었다.
얀쿤이 문지기에게 무언가를 보여주니, 그가 말없이 이안 일행을 통과시켜줬던 것이었다.
심지어 경비병 중 하나가, 이안 일행을 친절히 안내하기 시작했다.
그를 따라 이동하며, 이안은 얀쿤에게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얀쿤, 그게 뭐야?”
“상급 마족의 인장이다.”
“음…? 상급 마족의 인장이라면….”
상급 마족의 인장은, 이안도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반마이기는 하지만 이안 역시 상급마족이었고, 처음 상급 마족이 될 때 자연스레 인벤토리에 생성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안이 의아해 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내가 가진 인장이랑 좀 많이 다르게 생겼는데?”
이안은 고개를 갸웃 했다.
모양이 조금 다른 것은 둘째치고, 자신이 이안의 인장은 그저 검붉은 동패처럼 생긴 것이었는데, 얀쿤이 가진 인장에는, 강렬한 붉은 빛이 일렁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얀쿤이 대답했다.
“기본적으로 반마와 진마는 인장의 생김새가 다르다. 하지만 인장에 마기가 맺히는 것은, 그것과는 또 다른 문제다. 다음 등급으로 승급할 자격요건이 모두 갖춰졌을 때, 인장에 마기가 일렁이게 된다.”
“그래? 흐음… 근데 얀쿤.”
“말하라, 주인.”
“나 마기 5만은 예전에 채웠는데? 네 말대로라면, 나는 다른 자격요건이 추가로 필요하다는 건가?”
얀쿤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마의 노블레스 승급요건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른다. 하지만 인장에 마기가 맺히지 않았다면, 아직 자격미달인 것은 확실하다.”
“흐음….”
지금이야 얀쿤이 노블레스로 승급에 성공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지만, 이안도 빠른 시일 내에 노블레스가 되고 싶었다.
‘자격요건을 알아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사실 이안은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노블레스에 큰 관심이 없었다.
진마의 경우 마족 등급이 상승할 때 마다 전투능력치도 함께 상승하지만, 반마의 경우는 마계와 관련된 능력치 말고는 상승하는 게 없기 때문이었다.
마기 발동률과 항마력, 그리고 기본 마기량 등.
그것만으로도 승급할 가치는 충분히 있었지만, 해야 할 일이 많기에 일단 미뤄뒀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차원전쟁이 끝난 이후, 우선순위가 조금 바뀔 수 밖에 없었다.
칼리파가 드랍한 신화등급의 활.
‘마신의 분노’ 아이템의 착용제한이 노블레스 등급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찌되었든 자격요건이 충족된 상급 마족의 인장을 보여주고 마왕의 가신에게 도전의사를 밝히자, 일행은 곧바로 혼돈의 마왕성까지 안내받을 수 있었다.
* * *
“귀한 손님이 오셨군요.”
긴장된 표정으로 마왕을 대면한 이안은, 첫 마디에 조금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무슨 의미지?’
차원전쟁 승리의 주역인 이안.
그 말인 즉, 마계의 입장에서는 차원전쟁에서 패배한 주 원인이 바로 이안이라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이안은 마왕을 대면함에 있어 긴장하고 있었는데, 마왕 릴리아나의 반응이 무척이나 부드러웠던 것.
이안은 그녀와 시선을 마주쳤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조심해야지. 어쨌든 여긴 적진 한복판이니.’
이안이 조심스레 입을 떼었다.
“저를 아시는군요.”
릴리아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나 릴리아나가 어찌 그대를 모를 수가 있을까요. 아마 마계의 모든 통치자들이 이안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을 겁니다.”
“그렇… 군요.”
뭐라 대답해야할지 몰라 말꼬리를 흐리는 이안을 보며, 릴리아나가 피식 웃었다.
“그나저나 엄청난 배짱이예요. 차원전쟁이 끝난지 얼마나 지났다고, 이렇게 버젓이 마계를 활보하시다니.”
그에 뻔뻔하게 나가기로 결심한 이안이 입을 열었다.
“전쟁은 전쟁일 뿐. 마왕께서 이미 끝난 전쟁을 마음에 담아두고, 일개 개인에게 무력을 행사하실 리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인간계의 입장에서는, 정당방위 아닙니까.”
이안의 말을 듣고 잠시 말이 없던 릴리아나는, 곧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 정말 특이한 인간이군요, 당신은.”
잠시간 이안의 면면을 관찰하던 릴리아나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사실 그대의 말은 크게 틀리지 않아요. 우리 마족은 힘이 부족해 패배한 전쟁에, 은원을 담아두지 않죠.”
그 말을 들은 이안은 살짝 안도했다.
‘휴, 십 년 감수했네.’
하지만 릴리아나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마계를 통치하는 한 명의 군주. 나의 입장은 일반적인 마족들과 조금 다르죠. 그대는 분명 적진의 뛰어난 전력이었고, 나는 마계의 군주. 내가 마계의 수장으로서 당신을 방치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은 해 보지 않았나요?”
“…!”
당황하는 이안을 보며, 릴리아나는 재밌다는 듯 웃었다.
릴리아나가 하얗고 길쭉한 다리를 꼬아 앉으며, 이안을 응시했다.
이안은 긴장한 채 그녀와 시선을 마주쳤고, 릴리아나의 붉은 입술이 천천히 떨어졌다.
“그런데 그대는 참 운이 좋아요.”
“그건 무슨 말입니까?”
“다행히도 나는, 파괴마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요. 만약 내가 온건파가 아닌 강경파였다면, 그대는 날 대면하기도 전에 죽은 목숨이었겠죠. 또는 뇌옥에 갇혔던가.”
이안은 그제야 지금의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파괴마라… 그랬던 거였군. 그렇다면 릴리아나 라는 저 마왕은 온건파…?’
이안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반마인 내게 호의적이었던, 마왕 레카르도도 온건파일 확률이 높겠고….’
릴리아나와의 대화, 그리고 지금까지의 정황을 통해, 이안은 마계의 정세를 대략적으로나마 깨달았다.
릴리아나의 말이 이어졌다.
“그렇다고 내가 당신과 한편이라는 말은 아니에요.”
“그 정도야 알고 있습니다.”
릴리아나가 입술을 핥짝였다.
“좋아요. 어쨌든 그대가 여기 혼돈의 마왕성을 찾은 이유. 그것부터 이행하도록 하죠.”
이안은 침을 꿀꺽 삼키며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릴리아나는 다시 입을 여는 대신, 가볍게 손뼉을 쳤다.
짝-
그러자 릴리아나의 옆에 늘어서 있던 마족들 중 하나가 천천히 앞으로 나왔다.
“부르셨습니까, 가주.”
릴리아나가 가볍게 고개를 까딱이며 명령했다.
“키르얀, 그대가 저 상급마족의 상대가 되어주도록 하라.”
릴리아나의 앞에 나온 우락부락한 덩치의 마족이 부복해 보이며 걸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명을 받듭니다!”
* * *
마계의 노블레스 계급은, 말 그대로 ‘귀족’을 의미한다.
노블레스가 되면 마계의 귀족이 되어, 진정한 마계의 기득권층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힘이 곧 법인 마계에서는, 당연히 그 계급이 힘에 의해 정해진다.
노블레스들은 마계의 기득권을 누릴 자격이 있는 강자들이라는 이야기였다.
이안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키르얀이라고 했나? 저 마족은 서열이 어느 정도 일까?”
마계에서 노블레스의 기준은, 조금 복잡했다.
표면적으로는 정확히 마계 서열 1천위 까지가 노블레스의 자격을 인정받는데, 재미있는 것은 서열이 1천위 밖으로 밀려난다고 해서 계급이 강등당하거나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최초에 노블레스가 되기 위해서는 서열 1천위 안쪽의 노블레스를 상대로 승리해야만 하지만, 한번 노블레스가 된 이후에는 다시 상급마족으로 떨어지는 경우가 없다는 이야기였다.
대신에 1천등 밖으로 밀려난 노블레스 마족은, ‘서열외’ 처리를 받게 되며, 마계의 실세에서 밀려나게 된다.
이안의 옆에 둥둥 떠 있던 카카가 이안의 혼잣말에 대꾸했다.
“혼돈의 도시는 서열 6위인 릴리아나가 주인으로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겠지만… 마계의 여러 도시들 중에도 상위 클래스의 도시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겠지.”
카카의 말이 이어졌다.
“릴리아나의 가신인 저 노블레스 마족 또한 분명 한 자리 꿰차고 있을 거고, 이정도면 마계에서는 엄청난 권력자라고 할 수 있을텐데….”
잠시 고민하던 카카가 키르얀을 응시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못해도 마계 서열 500위 정도는 된다고 생각해야 할 것 같다, 주인아.”
카카의 말에 이안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음? 이런 거대한 도시의 관료로 있는 노블레스가, 고작 500위 밖에 안 된다고?”
카카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대답했다.
“고작 500위가 아니다, 주인아. 일단 서열 1위부터 100위까지는 마왕들이고, 200위부터 400위 사이에 있는 노블레스들은, 대부분 마계의 중심인 신마전(神魔殿)의 관료로 들어가 있을 것이다. 마계 서열 500위는 절대로 무시할 수 있는 서열이 아니지.”
“신마전…? 그건 또 뭐야.”
처음 듣는 단어에 이안의 호기심이 발동했지만, 카카는 곧바로 그에 대한 답을 주지 않았다.
“그건 다음에 얘기해주도록 하겠다, 주인아. 아직은 주인과 관련 없는 곳이고, 나도 정보를 좀 더 모아야 한다.”
“정보를 모은다고? 어디서?”
카카가 인상을 쓰며 대답했다.
“그만 물어봐라, 주인아. 이제 얀쿤의 승급전이 시작된다.”
그 말에 이안은 일단 호기심을 접고, 얀쿤과 키르얀이 대치하고 있는 제단 위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마왕 릴리아나는, 이안의 반대편에 앉아 그 모습을 흥미롭게 응시하고 있었다.
< (4). 혼돈의 도시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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