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각성 -1 (14권 시작) >
마왕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곧장 뿍뿍이를 향해 달려들었다.
대장군 ‘백휘수’를 상대할 때에도 여유롭기 그지없었던 마왕들의 표정은, 거대한 한 마리의 드래곤 앞에 한껏 굳어 버리고 말았다.
[소멸하라…!!]
하르세인이 노호성을 터뜨리며 엄청난 양의 마기를 쏘아내었고, 다른 마왕들도 각기 가진 바 절기(絶技)를 펼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안은 아직까지도 이 상황에 아무런 관여를 할 수 없었다.
ai로 인한 제약이 풀리지 않은 것이다.
‘이것 또한 퀘스트 진행의 일부라는 건가?’
어마어마하게 강력한 힘을 가진 여섯 마왕의 합공.
이안은 뿍뿍이에게 뭔가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었기에 조금 답답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편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ai가 모든 것을 조종하게 되면, 부담감이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그래, 뭐 어떻게 진행되는지나 보자.’
이안은 관전자의 마음으로 전투에 다시 집중하기 시작했고, 어비스 드래곤이 된 뿍뿍이는 마왕들과 혈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 * *
“심연의 힘이… 깨어난 것인가…?”
흑발을 허리까지 늘어뜨린 한 사내.
그는 한 자루도 제대로 가누기 힘들 법 한 거대한 대검을, 두 자루나 등에 교차시켜 메고 있었고, 금테로 마무리된 무광의 묵빛 갑주를 온 몸에 두르고 있었다.
남자의 왼쪽 눈 밑의 광대에 있는 기다란 흉터가 있었는데, 그는 그것만 아니라면 절세의 미남자라 해도 좋을 만큼 완벽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후후….”
남자는 실소를 흘리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양 손을 들어 등에 교차되어 메어져 있던 두 자루의 대검을 뽑아들었다.
스르릉-!
날카로운 쇳소리가 적막 속에 울려 퍼진다.
남자는 양 손에 든 대검을 바닥에 닿기 직전까지 늘어뜨린 채,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저벅- 저벅-
그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랜만에 나의 아이들을 만날 수 있겠군.”
남자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그리고 잠시 후.
스르륵-
얇은 천이 흘러내리는 듯 한 가벼운 소리와 함께, 그의 신형이 오간 데 없이 허공에서 사라져 버렸다.
남자의 이름은, ‘마레스’였다.
* * *
레미르는 편한 마음으로 심연의 드래곤과 마왕들의 전투를 관전하고 있었다.
어차피 ai가 온 몸을 지배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스토리 진행으로 인한 컨트롤 불능 상태에 빠진 것은, 이안 뿐만이 아니었던 것이었다.
지금 전장에 있는 모든 유저는, 단 한명도 예외 없이 ai의 컨트롤에 지배받는 상황이었다.
‘전쟁을 종결시킬 수 있는 퀘스트를 하는 중이라더니… 역시 허언이 아니었어.’
레미르는, 인간계 진영의 가장 선두에 서 있는 이안을 응시했다.
‘그러고 보면, 정말 이번 차원전쟁만큼은 이안님이 혼자 다 캐리한 거네.’
이런 대규모의 컨텐츠를, 정말 혼자 주물럭거리다시피 한 이안.
레미르 또한 이 대형 스토리의 핵심 퀘스트에 어느정도 발을 걸치고 있었기 때문에, 누구보다 이안의 대단함을 잘 알고 있었다.
‘태양신의 퀘스트를 내가 먼저 완성했다면… 오늘의 주인공은 내가 될 수 있었을까?’
이런저런 망상을 해 보는 레미르.
그런데 그 때, 레미르의 눈 앞에 돌연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띠링-!
[특정 이벤트 발동으로 인해, 태양신의 권능(Ⅱ) 퀘스트가 소멸됩니다.]
[태양신의 권능(Ⅱ) 퀘스트에 실패하셨습니다.]
[명성이 10만 만큼 감소합니다.]
[신룡 ‘라노헬’과의 친밀도가 1포인트만큼 하락합니다.]
그것을 본 레미르가 피식 웃었다.
‘쳇, 역시 스토리 상, 더 이상 진행될 수는 없는 퀘스트였어. 이렇게 되면 배가 좀 아프긴 하지만….’
이안의 뒷모습을 보며, 레미르의 입 꼬리가 슬쩍 말려 올라갔다.
‘그래도 전쟁에서 승리하기만 한다면 이 정도 손해쯤은 아무것도 아니지.’
그런데 다음 순간, 레미르의 눈 앞에 또다시 시스템 메시지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띠링-!
[조건을 충족하여, 새로운 퀘스트가 발동됩니다.]
[‘태양신의 현신’ 퀘스트가 발동됩니다.]
[거부할 수 없는 퀘스트입니다.]
‘어, 어어…?’
레미르는 당황했다.
하지만 그녀가 당황한 것과는 별개로, 그녀의 눈 앞에 새로운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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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신의 현신 Ⅰ(히든)(연계)-
태양의 신 헬레나.
그녀의 권능이 인세에 현신하기 위해서는, 태양의 보석을 비롯해 몇 가지 신물이 필요하다.
하지만 단 하나의 조건이 충족된다면, 그 모든 절차를 전부 생략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차원의 중재자인 어비스 드래곤의 각성.
그리고 바로 지금, 어비스 드래곤이 깨어나며 그 조건이 충족되었다.
태양의 신 헬레나는, 당신의 앞에 현신하여 마병들을 몰아내고자 한다.
그녀를 도와 마계의 군대를 몰살시키도록 하자.
퀘스트 난이도 : 없음
퀘스트 조건 : ‘어비스 드래곤’의 각성. ‘태양의 신 헬레나’와 관련된 퀘스트 달성률이 가장 높은 유저.
제한 시간 : 알 수 없음
보상 - 랜덤한 ‘전설 등급’의 스킬 북 x2
태양신의 비약
* 거절할 수 없는 퀘스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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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대체 뭐야…? 게다가 난이도 없음은 뭐지?’
레미르는 당황했다.
이것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전개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그녀의 귓가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녀를 제외한 다른 누구도 들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나의 사자(使者)여. 나를 도와 저 흉물스런 마계의 침략자들을 내 땅에서 몰아내도록 하라…!]
순간 레미르의 머리 위에서 붉은 화염의 소용돌이가 몰아치기 시작하더니, 그것은 곧 그녀를 집어삼켰다.
화르륵-!
그리고 그 순간, AI의 통제가 풀리며 그녀의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우우웅-!
어비스 드래곤과 마왕들의 혈투.
그 앞에 커다란 공명음이 울리며 다섯 개의 그림자가 하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웅- 우우웅- 우우웅-!
각기 다른 빛깔을 지닌 마나의 소용돌이와 함께, 전장에 모습을 드러낸 오대 신.
그들은 각각 어마어마한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는데, 조금 특이한 점이라면 신형이 반투명한 상태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등장하는 순간, 격렬했던 전투가 거짓말처럼 멈춰졌다.
[결국… 이렇게 되어 버리고 말았군.]
마왕 하르세인이 자조섞인 목소리로 음울하게 웃었다.
그러자 그들 중 가운데에 서 있던 흑발의 사내, 전쟁의 신 마레스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차원의 중재자가 등장한 그 순간, 너희들은 뒤도 돌아보지 말고 마계로 돌아갔어야 했다.]
그의 말에 하르세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확실히 차원의 중재자가 등장한 순간, 결과는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지.]
마레스가 그를 비웃었다.
[예나 지금이나, 마족 나부랭이들은 멍청하기 그지없군.]
[어쩔 수 없다. 소멸하더라도 마지막까지 전장을 지키는 것이, 우리에겐 최고의 영예(榮譽)니까.]
[그 정신 하나는 높이 사도록 하지.]
마레스의 말이 끝나자, 다른 신들도 저마다 한 마디씩 입을 열었다.
그리고 간단한 대화가 끝나자, 바람의 신 ‘미로’가 손에 들고 있던 뿔피리를 입에 가져다 대었다.
뿌우우-!
협곡 전체에 울려 퍼지는 묘한 음색의 뿔피리 소리.
그와 함께, 협곡의 하늘에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펄럭- 펄럭-
지상에서 들릴 정도로 거대한 날갯짓 소리와 함께, 뿍뿍이에 비견될 정도로 위압적인 크기를 가진 네 마리의 신룡이 협곡을 향해 날아왔다.
쿵-! 쿠쿵-!
네 마리의 신룡은 심연의 드래곤을 중심으로 사방에 내려앉았고, 그것은 그야말로 그림같이 멋진 광경이었다.
이안은 그것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다섯 신과 네 마리의 신룡… 그렇다면 나머지 한 마리는…?’
그리고 그 순간, 인간의 모습으로 폴리모프 한 채 이안의 뒤에 서 있던 카르세우스의 신형이, 새하얀 빛으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이제는 ai의 통제를 벗어난 이안이, 고개를 돌려 카르세우스를 응시했다.
‘그래, 카르세우스가 전쟁의 신룡이었지…!’
쿵-!
묵직한 소리와 함께, 본체로 현신한 카르세우스가 비어있던 한 자리로 날아가 내려앉았다.
그것을 본 전쟁의 신 마레스가, 카르세우스를 향해 말했다.
[카르세우스, 너는 아직 기억을 전부 되찾지 못했구나.]
카르세우스가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나의 신이시여.]
마레스가 씨익 웃으며, 다시 말했다.
[하여, 아직도 모르겠느냐?]
[아닙니다, 마레스님.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넓게 날개를 펼치거라, 카르세우스. 너는 나의 분신이 아니더냐.]
쿠르릉-!
마치 번개가 치기라도 한 듯, 커다란 천둥소리를 연상케 하는 진동음이 협곡을 타고 울려 퍼졌다.
그리고 카르세우스의 커다란 몸이, 다시 새하얀 빛에 휘감기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그의 체구가,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
다른 신룡들에 비해 비교적 왜소하던 카르세우스의 몸체가, 그들과 비슷할 정도로 커진 것이었다.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던 이안의 눈 앞에, 새로운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띠링-
[소환수 ‘카르세우스’의 진화조건이 모두 충족되었습니다.]
‘…!!’
이안은 경악했고, 그와 별개로 카르세우스의 몸은 계속해서 변하고 있었다.
우득- 우드득-!
등에 돋아있던 회백색의 돌기들은 더욱 길고 날카롭게 솟아 올랐으며, 머리의 뒤쪽으로 자라 있던 묵빛의 뿔은 더욱 거대하고 화려하게 자라났다.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는, 온 몸에 묵빛의 은은한 기운이 휘감겨 있다는 점이었다.
[소환수 ‘카르세우스’가 ‘신화등급’으로 진화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안은 기쁨을 넘어 경악했고,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이게 뭐지? 지금까지 한 개고생에 대한 보답인가? 그렇다고 하더라도… 카르세우스까지 신화 등급으로 진화하다니…!’
이안은 몰랐지만, 카르세우스는 그냥 진화한 것이 아니었다.
이안이 용신의 인정을 받으면서 먼저 조건이 하나 해제되었고, 그에 이어 전쟁의 신 마레스가 등장하면서 마지막 조건까지 전부 충족된 것이었다.
이안은 감격으로 인해 눈이 촉촉해질 지경이었다.
‘크으, 이제 이대로 마왕놈들을 처치하고 전쟁을 끝내면 되는 건가…! 이젠 더 놀랄 것도 없겠어.’
하지만 이것은 끝이 아니었다.
저벅- 저벅-!
묵직한 발소리가 들리며, 이안의 뒤쪽에 서 있던 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리고 더 이상 놀랄 것이 없으리라 생각했던 이안의 두 눈은, 휘둥그래질 수 밖에 없었다.
< (1). 각성 -1 (14권 시작)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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