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 마지막 혈투 -2 >
* * *
‘과연… 발록…!’
이안에게 처절히 당하느라 며칠간 접속조차 할 수 없었던 이라한.
하지만 아무리 이안의 압박이 있더라도, 차원전쟁 마지막 날에는 접속을 해야 했기에, 이라한은 전장에 나와 있었다.
그리고 마침 발동한 ‘마왕의 군대’ 퀘스트.
이라한은 이 퀘스트 덕에, 이안으로부터의 위협을 피해 무사히 전장에 합류할 수 있었다.
마왕의 군대 퀘스트가 발동하며, 이라한에게도 퀘스트가 발동했기 때문이었다.
이라한에게 주어진 퀘스트는 발록을 비롯한 마병들을 인솔하여 전장에 합류하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지금의 이라한에게 딱 필요한 퀘스트.
이 퀘스트가 이라한에게 발동한 이유는, 최상위 랭커 중에 이라한만이 마계에 남아있는 유저였기 때문이었다.
7레벨이나 떨어졌음에도, 아직 이라한은 마족 유저 중 20위권 안에 드는 고레벨이었다.
“마하뮤님의 권능으로 명한다! 모든 마병들은 전방에 보이는 적들을 섬멸하라!”
이라한의 외침이 울려 퍼지고, 일곱의 발록을 선두로 한 수많은 마수들과 마족들이 전장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엄청난 재앙의 시작이었다.
크오오오-!
발록들은 전장에 들어선 순간,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쿵- 쿵-!
발록의 거대한 발이 대지를 짚을 때 마다 굉음이 울려 퍼졌으며, 일정 범위 내의 인간계 유저들은 마기 데미지를 입음과 동시에 확률적으로 ‘공포’ 상태에 빠졌다.
[마수, 발록의 고유능력인 ‘진동파’ 스킬이 발동합니다.]
[생명력이 79809만큼 감소합니다.]
[‘공포’ 상태에 빠졌습니다.]
[3초 동안 공격력과 방어력이 30%만큼 감소하며, 이동속도가 50%만큼 감소합니다.]
[‘공포’ 상태에서는 마수 ‘발록’을 공격할 수 없습니다.]
상태이상 ‘공포’는, 거의 모든 상태이상 중에 최상급의 디버프라 할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지속시간이 매우 짧은 편이라는 정도.
하지만 그 정도의 시간은, 발록의 공격에 박살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하등한 인간들이여…! 지옥의 겁화 속으로 사라져 버릴 지어다!]
화르륵-!
발록은 몸을 거칠게 회전시키며 양 손을 휘둘렀고, 그와 동시에 그 주변으로 불길이 뿜어져 나갔다.
쾅- 콰콰쾅-!
“피해…!!”
“으아악! 미친 데미지야!”
“젠장, 스친 것 같은데 생명력 절반이 날아갔어!”
유저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치기 시작했고, 공포 상태에 빠져있던 유저들은 단 한명도 살아남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증발해 버렸다.
정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으어어…! 저 괴물좀 누가 어떻게 해 봐!”
“이제 끝이야! 끝이라고! 이런 미친 괴물을 무슨 수로 잡아!”
충만해 있던 인간계 유저들의 사기는, 한 순간에 폭삭 주저앉아버렸고, 마족 진영은 단숨에 다시 승기를 잡았다.
그리고 인간계 진영의 유저들이 우왕좌왕하던 그 때. 전장의 하늘에 붉은 점이 생기더니, 공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우우웅-!
그것을 발견한 원거리 딜러 유저들은, 잔뜩 긴장하며 그 곳을 향해 공격스킬을 조준했다.
“저기서 뭔가 나타난다!”
일그러진 공간 사이로는, 칠흑같이 어두운 망토를 길게 늘어뜨린 한 남자가 나타났고, 그 순간 인간계 유저들의 원거리공격이 일제히 남자를 향해 쇄도했다.
슝- 슈슈슝-!
쐐애애액-!
원거리 마법부터 시작해서 혼신의 힘을 다한 궁수들의 저격까지.
수많은 투사체들이 남자를 향해 쏟아졌고, 그것을 확인한 ‘그’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하찮은 놈들….]
휘익-!
남자는 허공에 대고 한 차례 팔을 휘저었고, 그러자 그의 주변에 마기로 생성된 불길이 치솟으며 모든 투사체 공격을 흡수해 버렸다.
그리고 그것을 본 유저들은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제기랄 저건 또 뭐야?”
“저 놈은 투사체 공격이 안 통한다! 타겟 변경해!”
순식간에 아비규환으로 변한 전장터를 스윽 둘러본 남자는, 무척이나 흡족한 표정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 하르세인이 이곳에 당도했노라. 마병(魔兵)들은 나를 믿고 적들을 섬멸하라!]
자신을 하르세인이라 소개한 남자는, 눈을 감고 양 손을 가슴 앞으로 천천히 뻗었다.
그러자 그의 앞에 붉은 기운이 휘몰아치기 시작했고, 그것은 점점 커다란 구체를 형성해 가기 시작했다.
고오오오-!
전장에 휘몰아치는 마기의 폭풍.
인간계 진영의 유저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기 시작했다.
“저건 또 뭐야! 어떻게 대처해야 돼?”
“광역 마법공격인 것 같다! 마법사들 광역 쉴드 좀 캐스팅 해!”
그런데 그 때.
인간계 진영의 중심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목소리는 단순히 커다란 목소리가 아닌, 아티펙트를 통해 유저 하나하나에게 또렷이 전달되는 목소리였다.
[모두 뒤쪽으로 후퇴하십시오! 알미르 평원은 일단 내어줍시다! 세라인 협곡으로 후퇴합니다!]
그리고 그 목소리를 듣자 마자, 단 한 명의 유저도 빠짐없이 일제히 몸을 돌렸다.
인간계 유저들의 귓전에 울려 퍼진 그 목소리는, 모두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인물의 목소리였기 때문이었다.
“이안님이다!”
“이안님께서 무슨 방법이 있으신가봐!”
“일단 알미르 평원은 버린다! 모두 후퇴!”
그리고 인간계 유저들이 썰물처럼 전장을 빠져나가던 그 때.
‘하르세인’의 앞에 생성된 거대한 마기의 구체가 터져 나가며 인간계 유저들의 뒤를 덮치기 시작했다.
콰아아아-!
그것은 한눈에 보아도 어마어마한 위력일 것임을 짐작할 수 있는, 거대한 마기의 폭풍이었다.
“피해!!”
그런데 모두가 수 십 이상의 유저들이 전멸할 것임을 예견한 바로 그 때, 유저들의 뒤쪽으로 새하얀 기의 파동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위이잉-!
“천신의 가호!”
“레비아 님이다!”
“살았어!”
‘천신의 가호’는, 사제 클래스의 광역 보호마법 능력 중 최상위의 마법이라고 알려져 있는 스킬이었다.
그리고 아직까지 이 스킬을 구사할 수 있는 유저는 사제 랭킹 1위인 ‘레비아’ 뿐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콰아앙-!
붉은 마기의 폭풍과 새하얀 성령의 장막이 맞부딪혔다.
천신의 가호는 무려 100만이 넘는 어마어마한 내구도를 가진 신성력 보호막.
하지만 계속해서 밀려드는 마기의 폭풍 앞에, 새하얀 장막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쩡- 쩌저정-!
많은 양의 마기를 흡수하기는 했지만, 천신의 가호는 광역 스펠을 온전히 막아내지는 못했다
그러나 천신의 가호로 인해 벌 수 있었던 5초 정도의 시간동안, 다른 유저들도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위잉- 위이잉-!
여기저기서 사제들과 마법사들이 발동시킨 보호 장막이 생성되기 시작했고, 그것들은 결국 마기의 폭풍을 전부 막아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잔존하여 보호막 사이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마기로 인한 피해는, 사제들의 빠른 대처로 금방 회복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휘유.”
“진짜 큰일 날 뻔 했네.”
한편 레비아가 마기의 폭풍을 막아내는 동안, 이안은 레미르와 피올란을 비롯한 몇몇 랭커 마법사들과 함께 광역 공격기를 발동시키고 있었다.
카르세우스의 브레스와 핀의 분쇄.
그리고 레미르의 잉걸불과 피올란의 얼음지옥 등.
수많은 광역기가 동시다발적으로 터지면서, 유저들의 뒤를 쫓던 마병들의 움직임을 일시적으로 저지시킬 수 있었다.
그렇게 마족 진영과 인간계 진영에는 제법 넓은 간격이 생겼고, 그 순간, 인간계 진영 곳곳에서 보랏빛 섬광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위잉- 위이잉-!
여기저기서 광역 순간이동 마법 스크롤이 발동된 것이었다.
그 광경은 엄청난 장관을 연출해 내었고, 허공으로 솟아오른 섬광이 사라짐과 동시에, 수많은 인간계 유저들은 단 한명도 빠짐없이 알미르 평원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만약 10초 정도만 늦었더라도, 순간이동 스크롤이 발동하기 전에 발록의 광역 공격에 당해 모조리 캔슬당했으리라.
그야말로 간담이 서늘하다는 표현이 정확히 들어맞는 상황.
허공에서 조금 전의 공방을 지켜보던 ‘하르세인’의 입 꼬리가 슬쩍 말려 올라갔다.
[이거 제법이군. 생각보다 더 재밌는 전투가 되겠어.]
하르세인은 멀어져 가는 인간계 유저들을 응시하며 나직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마병들은 모두 나를 따르라…!]
* * *
“하르세인은 아마 서열 90위권 정도에 랭크되어있는 마왕일 거다.”
얀쿤의 말에, 이안의 표정이 살짝 구겨졌다.
‘마왕… 역시 그랬어. 마왕 정도 되니 이런 어마어마한 위용을 보일 수 있었던 거겠지.’
인간계 진영은, 이안의 일사분란한 지휘와 랭커들의 고군분투로 인해 한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맵 하나를 통째로 내어 주기는 했지만, 재정비할 수 있는 어느 정도의 시간을 번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리 많은 시간을 벌은 것도 아니었다.
‘아무리 늦어도 15분. 그 안에는 다시 마수들이 들이닥치겠지.’
이안은 세라인 협곡의 지형을 꼼꼼히 둘러보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세라인 협곡이 좁고 길다란 맵이라는 점이었다.
어떤 방향에서 밀고 들어오든, 방어하기는 수월한 진영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마족들보다 상대적으로 광역 스펠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인간계 유저들에게 조금은 유리한 지형이기도 했다.
세라인 협곡에는, 광역기를 피할 만한 공간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안님, 어떡하죠? 일단 상황이 조금 나아지기는 했는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건 전력 차이가 너무 극심하네요.”
피올란의 말에, 이안이 고개를 천천히 주억거렸다.
발록들은 둘째 치고, 마왕이라는 존재가 너무 사기적인 전력이기 때문이었다.
비록 서열이 100위에 가까운 하위권의 마왕이라고 할지라도, 노블레스와는 또 다른 차원의 강함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마왕이었다.
‘세라인 협곡에서도 막아낼 수 없다면… 어디서도 막아낼 수 없다.’
이안이 피올란을 비롯한 랭커들에게, 간결하게 작전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평원 같은 맵에서라면, 승산이 아예 없습니다. 하지만 보시다시피, 여기는 좁은 협곡이죠.”
이안은 마른침을 삼키며 다시 말을 이었다.
“광역 스펠을 최대한 활용해야 합니다. 유저별로 재사용 대기 시간을 정확히 계산해서, 쉴드 사이클만 끊어지지 않아도 버텨볼 만 해요. 버티면서 지속적으로 광역 공격기를 뿌린다면, 괴물 같은 발록과 마왕이라고 하더라도 쉽게 방어선을 뚫을 수는 없을 겁니다.”
이안이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
“남은 시간은 이제 네 시간 반 정도…. 우리는 싸워서 이기려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때까지 버티기만 하면 저들은 돌아가야 해요. 그게 곧 승리죠.”
레미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건 그렇죠.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전략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반적인 광역 쉴드 스킬은, 짧게는 10분에서 길게는 30분 정도의 재사용 대기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 이안이 하는 말은, 모든 유저들의 재사용 대기 시간을 완벽히 한 사이클로 만들어서 돌리면, 방어 쉴드가 끊어지지 않게 만들 수 있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그야말로 이론상으로나 가능한 전략.
우선 오더를 내릴 사람이 모든 마법사들과 사제들의 쉴드 스킬 재사용 대기 시간을 파악해야 가능한 전략이었는데, 그것부터가 말도 안 되는 난이도라고 할 수 있었다.
이안이 좌중을 한번 둘러본 뒤 대답했다.
“어차피 이 방법이 아니면, 무슨 짓을 해도 지금의 전력으로는 저들을 버텨낼 수 없습니다.”
이안의 시선이 레미르를 향했다.
“레미르님이 공격 오더 좀 맡아서 내려 주세요. 제가 한번 쉴드 사이클을 돌려 보겠습니다.”
레미르가 걱정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가능하시겠어요? 아무리 이안님이라고 해도….”
이안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해 봐야죠. 아니 가능하게 만들어야죠.”
이안은 우선 레미르에게 물어, 모든 마법사 클래스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광역 보호막 스킬들의 재사용 대기시간은 숙지했다.
그리고 사제 클래스인 레비아에게도 마찬가지로 물었다.
‘후우, 머리가 좀 아프긴 하지만, 그래도 대부분이 원래 알고 있던 스킬들이었으니까.’
이안은 긴장한 표정이었다.
아무리 평소에 기계처럼 스킬 재사용 대기시간들을 외우고, 칼같이 사이클을 돌리는 게 몸에 베어 있는 이안이라고 하더라도, 수십이 넘는 인원의 스킬들을 컨트롤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난이도였다.
게다가 조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안이 협곡에서 대기 중인 유저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모든 유저들은 각각 주력스킬 두 개씩 아이콘을 공유해 주세요.”
스킬의 아이콘을 공유한다는 말은, 파티원에게 그 스킬의 재사용 대기 시간 및 공격계수, 소모값 등의 정보를 공유한다는 이야기였다.
“다른 스킬들은 각자의 판단에 따라 사용하면 되지만, 광역 보호나 회복류 스킬은 제 오더에 따라 발동시켜 주셔야 합니다. 제가 실시간으로 남은 재사용 대기시간을 확인해야 하니, 협조 부탁드리겠습니다.”
사실 이것은 자신이 가진 스킬의 정보를 너무 적나라하게 노출시키는 방식이었기에, 일반적인 파티사냥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는 기능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급박한 상황이었고, 누구 하나 반박하지 않고 각자의 스킬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유저들의 진형이 거의 다 갖춰져 갈 때 쯤.
협곡 반대쪽 입구로부터, 뿌연 먼지가 피어오르는 것이 이안의 시야에 들어왔다.
< (6). 마지막 혈투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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