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뒤집힌 판세 -2 >
* * *
분명 이안은, 카일란 내에서 손 꼽힐 정도로 인지도 있는 유저였다.
한두 달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음에도, 최소 다섯 손가락에 드는 인지도를 가진 유저.
그런 이안과, 현재 최고의 이슈거리이자 최고의 랭커인 이라한과의 격돌.
이 최고 수준의 대결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했다.
“날 도발한 걸 후회하게 해 주마, 멍청한 놈.”
이라한이 으르렁거렸지만, 이안은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그런 말은 원래 다 이겨놓고 하는 거야, 등신아.”
까가강-!
이라한의 공격을 손 쉽게 쳐 낸 이안이 살짝 뒤로 물러섰다.
사실 이안은 이라한을 적수로 조차 느끼고 있지 않았다.
이안에게는, 오히려 마족인 이라한보다는, 인간계의 랭커인 샤크란이나 레미르가 훨씬 더 까다로운 상대였다.
항마력이라는 확실한 방패가 있는 이상, 이라한의 강력한 마기도 무용지물일 뿐이었다.
“장난은 여기까지다.”
이라한의 말에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 또한 지금까지는, 단지 이라한의 전투능력을 가늠해 보기 위한 탐색전을 벌였을 뿐이었다.
‘그래, 장난은 여기까지지.’
이라한과의 짧은 공방을 나눠본 결과, 이안은 대략적인 그의 능력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
‘나랑 비슷한 레벨, 거기에 마족 종족의 스텟보정을 받아서인지 전투능력 하나는 어마어마하군.’
이라한의 공격은 무척이나 파괴적이었다.
그리고 엄청나게 빨랐다.
단순한 능력치 상으로 놓고 봤을 때, 이안은 이라한의 움직임을 완벽히 따라갈 수 없었다.
순발력 스텟에서 메우기 힘든 차이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정도는 예상했던 수준이었다.
자신만만한 이라한의 표정을 보며, 이안의 입 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5분 뒤에도 그런 표정을 짓고 있을 수 있을까?’
이안은 소환수도 불러오지 않았다.
지금 이안은, 단지 캐릭터의 능력만으로 이라한을 밟아줄 생각이었다.
컨텐츠 선점으로 인해 얻은 잠시간의 강력함.
그 정도 가지고 이런 오만함을 보인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게다가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이안의 기준에서 이라한이 진짜배기 실력자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이안이 창을 고쳐 쥐고는 이라한을 향해 치켜세웠다.
이라한을 향해 시선을 고정시킨 이안은, 언젠가 무협지에서 본 적이 있는 대사를 써먹었다.
“와라, 허접. 선공은 양보한다.”
그리고 그 대사는, 이라한에게 무척이나 큰 효과가 있었다.
“너 이 새끼. 방금 그 말 후회하게 만들어주지.”
이라한이 이를 악물고 이안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안은 피식 웃으며 방어 자세를 취했다.
‘할리를 타지 않고는 놈의 움직임을 쫓을 방법이 없어. 소환수 없이 이기기 위해선, 카운터를 먹여야 돼.’
만약 이안이 먼저 달려들어 공격을 성공시킨다면, 이라한은 지금처럼 공격적인 스탠스를 취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이안의 창에 한 방만 찔려 봐도, 그 공격력의 괴랄함을 느낄 수 있을 테니까.
지금 이라한이 이렇게 공격적일 수 있는 이유는, 이안에게 입어 본 데미지가 화살 공격 뿐이기 때문이었다.
당연하겠지만 이안의 활은 정령왕의 심판에 비해 격이 몇 단계는 떨어지는 무기였다.
정보 창에 뜨는 무기 데미지 자체도, 정령왕의 심판의 30%정도 밖에 안 되는 수준.
이라한은 이안의 공격력이 그 정도라고 오해하고 있었고, 그랬기에 정면으로 이안을 향해 달려들 수 있었다.
‘기회를 보다가, 단숨에 대가리를 쪼개버려야지.’
이안은 짓쳐들어오는 이라한의 쌍검을 침착하게 막아갔다.
깡- 깡- 까강-!
쌍검은 애초에 공격력이 강력하기보단, 공격속도가 엄청나게 빠른 병종(兵種)이었다.
거기에 이라한의 무지막지한 순발력 능력치가 가미되니, 정말 눈으로 따라가기 힘들 정도의 스피드가 뿜어져 나왔다.
이안은 창날과 창대를 이용해,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그것을 막아 나갔다.
‘스킬을 쓰는 순간을 노려야 겠어.’
아무리 이안이라고 해도, 모든 공격을 계속 막아내기는 힘들었다.
오히려 항마력 스텟을 믿고, 좀 맞아주면서 싸우는 게 더 수월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안이 악착같이 전부 방어하는 이유는, 이라한의 방심을 이끌어내기 위해서였다.
이안이 모든 공격을 필사적으로 방어한다면, 이라한은 또 다른 오해를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마 내가 자신의 마기 공격력을 무서워한다고 생각하겠지.’
그리고 그런 이안의 의도는 정확히 들어맞았다.
이안을 향해 미친 듯이 공격을 퍼붓는 이라한은, 약이 오를 대로 오르기 시작했다.
‘제기랄, 한 대만 제대로 박히면 되는데…!’
한끝 차이로 검 날이 이안의 몸에 닿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되자, 이라한은 이를 바득 바득 갈았다.
겉으로 보기에 이안은 계속해서 수세에 몰리고 있었고, 그저 자신의 공격을 막기에 급급한 하수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쥐새끼 같은 놈…!”
이라한은 공격을 멈추고 한발짝 물러섰다.
그리고 그 순간, 이라한의 한쪽 검이 시뻘건 빛을 머금기 시작했다.
‘저건… 폭마섬…!’
이안은 이라한이 쓰려는 기술의 명칭을 알고 있었다.
미리 커뮤니티를 통해 조사해 보았기 때문이었다.
폭마섬은 마족의 전사 클래스인 ‘전투마’ 클래스의 상급 단일 공격스킬이었고, 이라한이 즐겨 사용하는 필살기였다.
최근 1~2개월간 별다른 활동이 없었던 이안과 달리, 이라한은 근래 들어 엄청난 활약을 보이고 있었다.
그에 대한 정보가 커뮤니티에 널려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발동까지 2초 정도 걸린다고 했나?’
폭마섬은 어마어마한 공격력을 가진 스킬이라고 했다.
게다가 스킬이 캐스팅되는 2초 동안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게 되는데, 그동안은 방어력이 급격히 증가하여 거의 딜이 들어가지 않는다고도 했다.
그래서 폭마섬이 발동하는 기미가 보이면 재빨리 몸을 빼는 것이 유일한 대처법이라는 것을, 이안은 커뮤니티에서 본 기억이 있었다.
‘폭마섬의 단일 계수는 300%정도. 이라한의 숙련도가 다른 마족 유저들보단 월등할 테니… 한 400%까지는 생각할 수 있겠지.’
이라한의 붉게 빛나는 검신을 보며, 이안의 두뇌가 빠르게 회전했다.
‘400% 계수의 단일기술이면, 내 방어력과 저놈의 공격력을 고려했을 때 60~70만정도 딜이 들어오겠지.’
60~70만이면, 한 방에 빈사상태가 될 수 있는 어마어마한 딜이었다.
치명타라도 터지면 생명력이 최대치인 상태로 맞더라도 한 방에 골로 갈 수 있는 위력.
하지만 이안에게는 70%에 육박하는 어마어마한 항마력이 있었다.
‘70만이라고 가정해도 거의 50만이 깎여서 들어올 테니… 맞아줘도 죽을 일은 없겠어.’
이안의 계산이 끝나는 순간, 이라한의 검이 뻗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라한의 얼굴에는, 득의양양한 표정이 어려 있었다.
그는 이안이 ‘폭마섬’ 스킬에 대해 알지 못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기에 지금 이 공격으로 승패가 갈릴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안은, 아예 이라한의 칼날에 몸을 들이밀고 있었다.
이안의 시선은 정확히 이라한의 왼쪽 가슴을 향해 있었다.
이라한의 가슴에는, 이안이 가진 패시브 능력인 ‘약점포착’ 으로 인한 붉은 점이 반짝이고 있었다.
이안은 창을 아래쪽으로 슬쩍 빼서 이라한의 검을 아예 피해 버렸다.
그리고 디딤발을 뒤로 빼어 몸을 고정시킨 뒤, 아래부터 위쪽으로 모든 힘을 다해 창을 치켜 올렸다.
“뒈져라!”
이라한의 입에서 기합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이안의 창극이 그의 심장에 박히는 것이 먼저였다.
콰드득-!
이라한이 상의에 걸친 묵빛의 갑주가 기괴한 소리를 내며 우그러졌다.
그와 동시에 이안의 창극은, 이라한의 갑주를 뚫고 정확히 붉은 점에 틀어박혔다.
콰악-!
그리고 거의 1/100초 정도의 시간차로, 이라한의 공격이 이안의 복부에 틀어박혔다.
콰앙-!
폭마섬의 이펙트와 함께 강렬하게 터져 나오는 거대한 폭발음!
두 사람의 전투를 지켜보던 모든 유저들은, 숨 죽인 채 격돌의 결과를 지켜보았다.
전장에 있는 유저들의 30%이상은 폭마섬이라는 기술을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당연히도 이안의 패배를 예감했다.
양 측이 동시에 공격을 성공시키기는 했지만, 이라한은 엄청난 공격계수를 가진 단일 스킬을 명중시킨 것이었고, 이안은 그저 단순한 찌르기를 성공시킨 것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잠시 후, 믿을 수 없는 결과가 모두의 눈 앞에 펼쳐졌다.
“커허억-!”
헛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뱉은 이라한의 몸이,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었다.
털썩-!
그리고 바닥에 쓰러진 이라한의 신형은, 시커멓게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
사망했다는 뜻이었다.
“…!”
반면에 이안은 멀쩡히 두 발 딛고 서 있었다.
단지 반발력에 의해 뒤쪽으로 1m 가량 튕겨나갔을 뿐, 흉갑과 복대가 조금 우그러진 것을 제외하고는 너무도 멀쩡한 모습이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모든 유저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고, 단지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이안 한 사람 뿐이었다.
‘에이 뭐야? 생각보다 데미지가 더 조금 들어왔잖아?’
이안은 남아있는 생명력을 확인하고는 속으로 툴툴거렸다.
20만가량 들어올 줄 알았던 데미지가, 고작 13만 정도밖에는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이안이 이라한의 능력을 최대한 높게 잡고 피해량을 계산한 탓이었다.
저벅- 저벅-
쓰러진 이라한의 시체를 향해 다가간 이안은, 씨익 웃으며 손을 뻗었다.
그러자 시커멓게 변한 그의 시체가 사라지며, 이안의 눈 앞에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띠링-
[마족 ‘이라한’ 유저로부터 전리품을 획득합니다.]
[‘전설’등급의 아이템, ‘환마(幻魔)의 망토’를 획득하셨습니다.]
[‘영웅’등급의 아이템, ‘칼림푸스의 대검’을 획득하셨습니다.]
:
:
무려 십여 개도 넘게 쏟아지는 이라한의 아이템들.
심지어 그 중에는 전설등급의 아이템이 두 개나 포함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전설등급 아이템이 계정귀속 옵션을 갖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엄청난 성과였다.
‘뭐야, 이놈. 어떻게 전설템이 두 개나 떨어지지?’
하지만 이안이 생각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이라한은 지금까지 수 많은 유저들을 사살했고, 그 과정에서 얻은 전리품들을 인벤토리에 그대로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드랍하는 아이템의 질과 양이 좋은 것이었다.
‘짭짤한데…?’
씨익 웃은 이안은, 오른 손에 들고 있던 정령왕의 심판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척-!
그리고 커다란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겼다…!”
잠시간의 정적.
하지만 곧 이어 인간계의 진영에서는,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함성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와아아아…!!!”
“이겼어! 이겼다고!!”
“이안님이 이라한을 잡았어!”
“미쳤다 진짜! 대체 폭마섬을 어떻게 버틴거지?!”
“피했나? 피하면서 그 사이에 무슨 스킬을 박아 넣은 건가?”
“와, 미친!! 대박! 나 이거 있다가 저녁에 재방송으로 다시 한번 봐야겠어!”
그야말로 기적 같은 이안의 승리.
싸움을 지켜보던 이들의 90% 이상은 이라한의 승리를 점치고 있었고, 그렇기에 이안의 승리는 더욱 엄청난 반전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전쟁의 판도를 바꿔놓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이제 이라한이 없다고! 좀 더 과감하게 싸워도 되겠어!”
“그래, 다 죽여 버리자! 우리에겐 이안님이 있어!”
“이대로 밀고 나가는 거야!”
전쟁은 다시 시작되었고, 인간계 진영의 유저들은 사기가 머리 끝까지 올라 있었다.
괴물같은 이라한을 제외하면 다른 마족 유저들은 상대할 만한 수준이었고, 거기에 이라한도 이긴 이안이 합류한다고 생각하니 사기가 오를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안은,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이길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최소 두 개 필드 정도는 밀고 올라갑시다!”
이안은 유저들을 독려하며 전장을 지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번 기세를 탄 인간계 진영의 유저들은, 마족 진영을 폭풍같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이안은 자신에게 당한 이라한을 떠올리며, 실실 웃기 시작했다.
‘뭐에 죽은 지도 모르고 죽었겠지? 멍청한 놈.’
아마 사망 패널티가 끝나면, 이라한은 다시 도전해 올 게 분명했다.
아마도 이라한은, 자신의 패배를 용납할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그저 운이 좋아서 내가 이긴 것이라 생각하겠지. 어쩌면 무승부라 생각할 수도 있고.’
미세한 차이이긴 하지만, 이라한의 폭마섬보다 이안의 창이 조금 더 빨랐다.
그 말인 즉, 이라한은 자신의 공격이 이안에게 얼마나 피해를 입혔는지 보지 못한 채 죽었다는 말이었다.
카일란에서는 사망 판정이 뜨는 순간, 모든 시스템 창이 사라지고 시야가 까맣게 물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시스템 창이 사라진 상태에서는 어떠한 시스템 메시지도 확인할 수 없었다.
아마 시스템 메시지를 확인하지 못한 이라한은, 이안도 사망했다고 생각할 것이었다.
최상위 랭커급의 탱커들도, 폭마섬을 직격으로 맞는다면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는다.
그런데 고작 ‘소환술사’인 이안이 그걸 맞고 살아남았을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내 항마력이 얼만지도 보지 못했겠군.’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이안은, 계속해서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겨우겨우 억누르고 전투에 집중했다.
앞으로 아주 재밌는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4). 뒤집힌 판세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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