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 두 가지 보물 -3 >
* * *
“도전자라, 정말 오랜만의 도전자로군.”
시험의 비동 심처에 있는 커다란 공터.
이안은 자신 앞에 서 있는 10척 장신의 거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거인족’ 이라기에는 빈약한 덩치였지만, 인간이라기에는 터무니없이 거대한 남자.
그는 허리춤까지 내려오는 기다란 흰 수염에, 황금빛의 갑주. 거기에 자신의 키보다도 더 커다란 언월도를 든 노장(老將)이었다.
이안은 그를 향해 다가가 입을 열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뭐지? 여기서도 자동 퀘스트 진행이 발동되는 건가?’
이안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퀘스트가 진행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안은 편안한 마음으로 관조하기 시작했고, 퀘스트가 진행되었다.
“이안이라고 합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안의 말에, 노장이 흡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우리 마우리아 제국에 오랜만에 걸출한 인물이 등장했군. 성왕께서 축복을 내리심이 분명하구나.”
여기까지 들은 이안은 의아해졌다.
‘뭐지? 갑자기 어딜 봐서 걸출한 인물이라는 거지?’
이안은 정확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노인의 ‘걸출한 인물’ 이라는 평은, 이안의 명성과 관계가 있었다.
그동안 단 한 번도 명성을 소모하지 않은 이안의 명성은, 현재 2천만을 넘어 3천만에 육박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양이 쌓여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우리아 제국의 관문은, 유저의 명성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곳이었다.
“과찬이십니다. 그저 도의를 알고, 정의를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을 해 왔을 뿐입니다.”
이안은 자신의 분신(?)의 대사에 손발이 사라질 뻔 했다.
‘뭐야, 으… 소름이 다 돋네.’
하지만 오그라드는 이안과는 별개로, 이안의 앞에 있는 노장은 무척이나 흡족한 표정이었다.
“정법의 이치에 맞게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진정 존경받을만한 일이지.”
이안을 잠시 응시한 노장이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쨌든 만나게 되어 반갑네, 이안. 나는 7대 성왕이시자 철륜왕이신… 헤이슈카님의 신하 쇼우타라고 한다네.”
자신을 쇼우타 라고 소개한 그는, 이안과 한 차례 악수를 한 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따라오시게. 자네 정도의 공덕을 쌓은 인물이라면 굳이 이러한 시험을 거치지 않아도 되겠군. 어떤가. 내가 지금이라도 성왕을 알현케 해드릴 수 있는데… 그렇게 하겠는가?”
쇼우타의 말을 들은 이안은 눈이 번쩍 뜨여지는 것을 느꼈다.
‘뭐지? 이 이 꿀같은 프리패스는 대체 뭐지?’
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엄청난 호의(?)를 베푸는 쇼우타.
하지만 다음 순간, 이안의 행복했던 기분은 산산히 조각나고 말았다.
“아닙니다. 제가 뭐라고 그러한 특혜를 바라겠습니까. 저는 성왕을 알현키 위해 제 능력이 충분함을 증명해 보이고 싶습니다.”
이안은 어이가 없어서 벙 쪘다.
‘뭐, 뭐야 이게…! 이건 내가 아니라고! 이건 무효야!’
하지만 AI의 통제를 받기 시작한 이안의 몸이 움직일 리는 만무했고, 이안은 눈을 뜬 채 코를 베이는 기분이었다.
그런 이안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쇼우타가 호탕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허헛, 정말 마음에 드는 친구로군. 좋아. 자네라면 내 시험 정도는 분명히 통과할 수 있겠지.”
이안(?)이 고개를 숙여 보이며 대답했다.
“제 능력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쇼우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네. 그렇다면 지금 바로 시험을 시작하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이안은 조금 우울해졌지만,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 뭐, 퀘스트가 꽁으로 풀릴 리가 없지. 시험인지 나발인지 통과하면 그만이지 뭐.’
뭔가 카일란의 AI에게 농락당한 기분이 든 이안은, 이를 갈았다.
그리고 잠시 후, 이안이 통제하던 AI로부터 해방되었고, 쇼우타는 허공에서 조금씩 희미해졌다.
“무운을 비네, 이안.”
이안은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쇼우타는 사라졌고, 대신에 이안의 눈 앞에는 다섯 줄기의 빛이 내려 앉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빛줄기들은 각기 다른 모습을 가진 괴수들로 형상이 갖춰지기 시작했다.
이안은 소환수들을 얼른 소환하고, 긴장한 표정으로 그들의 면면을 하나씩 살피기 시작했다.
‘325, 339, 340… 전체적으로 300~350레벨 사이의 네임드 몬스터 다섯이라….’
이안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전체적인 레벨은 남섬부주 외곽의 던전에 있던 몬스터들보다 오히려 낮은 수준이었지만, 이들은 전부 네임드 몬스터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안에게는 지금 가신도 없었다.
얀쿤과 카이자르의 도움이 없는 지금, 이 정도의 상대는 결코 쉽지 않았다.
‘카카의 새로 얻은 능력을 요긴하게 한번 써봐야 겠군.’
적중에 암살자가 있다거나 어둠속성 공격을 사용하는 몬스터가 있다고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그것을 배제하더라도 카카의 광역 범위기는 무척이나 매력적이었다.
전체 공격력을 5% 올려주는 데다, 라이에게 독무대를 만들어주는 느낌이었기 때문이었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 어디선가 쇼우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들은 ‘동승신주(東勝身洲)’의 지저에 서식하는 악마들의 환영이다. 이들은 본신의 능력의 6~7할 정도밖에는 반영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결코 쉬운 상대는 아닐 터. 어디 자네의 능력을 마음껏 증명해 보시게나.]
이안은 쇼우타의 이 말이, 자신을 놀리는 것으로 들렸다.
“으… 으으… 그냥 좀 꽁으로 넘어가 주면 얼마나 좋아.”
이안은 창대를 고쳐 잡으며 투덜거렸다.
이안이 전투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무임승차가 가능할 때는 그 편이 좀 더 좋은 게 당연했다.
“그래, 이 정도도 못 잡을 거였으면 여기 오지도 않았지.”
이안은 중얼거리며 몬스터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제는 정말 퀘스트의 막바지라는 생각을 하자, 조금 더 힘이 나는 듯 했다.
* * *
“좋아, 훌륭해.”
온통 붉은 불길이 치솟으며, 여기저기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의 향연.
마계의 심처임이 분명한 이곳에서, 한 남자가 마왕을 향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지금까지 제법 많은 인간이 나를 거쳐갔지만, 자네만큼 완벽하게 내 임무를 수행한 인간은 처음이군. 아, 한명 정도는 더 있었나?”
마왕의 칭찬에도, 남자는 큰 표정의 변화 없이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감사합니다.”
마왕은 손뼉을 치며, 몸을 돌려 뒤편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허공에 떠있던 붉은 수정 중 하나가, 마왕의 손을 향해 빨려 들어왔다.
그 수정은 무척이나 크기가 컸으며, 피와 비슷한 짙은 붉은 색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훌륭한 성과를 보여준 만큼, 그에 맞는 보상을 줘야겠지.”
마왕은 손을 슬쩍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의 손 위에 떠 있던 붉은 수정도, 그의 동작에 맞춰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이 정도면 충분한 보상이 될 것이다.”
마왕은 남자를 향해 손을 뻗었고, 그러자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수정이 남자의 심장을 향해 빨려 들어갔다.
우웅- 우우웅-!
그러자 남자의 눈 앞에 한 줄의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띠링-
[‘마족의 진혈’을 흡수합니다.]
살짝 표정이 일그러진 채 아무런 말 없이 이를 악물고 있는 남자를 보며, 마왕이 한 마디 덧붙였다.
“이미 반마로도 제법 쓸만한 성취를 이뤘었군, 자네는.”
남자는 이를 악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마왕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아마 가지고 있던 마기가 제법 되니, 어쩌면 노블레스에 가까운 진마가 탄생할 수 있을지도….”
마왕은 말을 마친 뒤 걸음을 돌렸다.
이제 그의 역할은 끝난 탓이었다.
그는 어둠 속으로 사라지며 마지막 한 마디를 더 남겼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다음 해야할 일은 알고 있을 것이다. 일이 다 끝나면 다시 찾아오도록.”
남자는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열어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피식 웃은 마왕은 이내 완전히 자리에서 사라졌고, 마족의 진혈을 전부 흡수한 남자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그의 표정이 바뀌었다.
AI에 지배되어 있던 캐릭터의 통제권이 유저에게로 넘어온 탓이었다.
“좋아, 쉽지는 않았지만, 결과가 좋군.”
남자는 입 꼬리를 씨익 말아 올렸고, 그런 그의 눈 앞에 시스템 메시지가 주르륵 떠오르기 시작했다.
[마왕의 시험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셨습니다.]
[최종 등급 : SS]
[유저 ‘림롱’님의 마계등급이 ‘상급마족’으로 책정되셨습니다.]
[마계의 전투 능력치인 ‘마기’를 70000만큼 추가로 부여받았습니다.]
[마계의 새로운 능력치인 ‘마기 발동률’을 4%만큼 추가로 부여받았습니다.]
[‘진마(眞魔)가 되는 데 성공하셨습니다.’]
[종족이 ‘마족(魔族)’으로 변경됩니다.]
[명성을 20만 만큼 획득합니다.]
[마기발동률이 영구적으로 3%만큼 증가합니다.]
[항마력이 영구적으로 5%만큼 증가합니다.]
:
:
남자, 림롱은 더욱 기분좋은 표정이 되었다.
‘확실히 반마였던 베이스가 있어서 그런가? 다른 유저들보다 보상이 월등히 좋네.’
림롱의 추측은 매우 정확했다.
림롱은 진마가 되기 전에도, 반마로서 마기를 제법 많이 쌓아 놨었다.
그는 반마가 될 때 이미 악마의 시험을 통과하여 ‘평마족’의 등급으로 시작했었고, 마계에서 열심히 사냥한 끝에 상급마족까지 등급을 올려놨었던 것.
기본 베이스가 상급마족이었던 림롱은, 마족이 되는 퀘스트인 ‘마왕의 시험’을 높은 클리어등급으로 통과하면서 당연히 상급마족으로 진마 등급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고, 부가적으로 7만이라는 어마어마한 마기까지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현재 림롱의 마기는 15만에 육박했다.
‘노블레스가 되기 위해 필요했던 마기가 20만이었던가…?’
5만이라는 마기를 모으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을 것이었지만, 진마가 된 이상 반마일 때 보다는 수월할 것이었다.
‘스킬 숙련도가 바닥으로 떨어진 게 아깝기는 하지만….’
림롱은 캐릭터의 정보창을 열어 달라진 자신의 능력치들을 한번씩 쭉 점검했다.
그리고 흡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좋아, 생각보다 더 괜찮은걸.”
림롱은, 처음 종족전환 퀘스트가 오픈되었을 때 곧바로 뛰어든 케이스는 아니었다.
그는 마족으로 전향하는 데에 있어서 무척이나 많은 고민을 하다가 퀘스트를 받은 케이스였다.
이미 쇄락의 길을 걷고 있는데다, 길드 마스터인 사무엘진까지 마족으로 전향한 오클란길드에는 하나도 미련이 없었다.
그가 망설인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첫째로는 누구나 그렇듯, 지금까지 공들여 쌓아 온 스킬 숙련치에 대한 미련이었다.
그리고 가장 큰 이유는, ‘항마력’이라는 스텟이었다.
물론 아직까지는 10%의 항마력을 넘긴 유저도 거의 없을 게 분명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항마력 세팅이 올라가면 마족이 불리해질 게 뻔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랬던 그가, 마족을 선택하게 된 데에는 확실한 계기가 있었다.
‘항마력 관통 옵션을 경매장에서 발견할 줄은 몰랐지.’
림롱은 우연치 않게 경매장을 검색하던 도중, ‘항마력 관통’ 이라는 옵션을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
그 수치 자체는 2.5%정도로 그리 높은 수준이 아니었지만, 아이템의 모든 부위에 항마력 관통을 맞춘다면, 충분히 항마력에 대한 대처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일단 10%정도만 어떻게 맞춰도, 웬만한 유저들 항마력은 다 뚫을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림롱이 경매장을 뒤져 확보한 항마력 관통 아이템은 총 두 부위.
항마력 관통 옵션이 붙어있는 아이템 자체는, 수십 개도 넘게 찾을 수 있었지만, 그 중에 다른 옵션까지 쓸 만한 장비는 단 두 개 밖에 찾지 못한 것이었다.
그 두 부위의 장비도, 원래의 림롱이 착용하던 장비보다는 많이 부족한 것이었지만, 아쉬운 대로 쓸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두 개 다 전설등급의 장비였기 때문에, 합하면 7% 정도의 항마력 관통 옵션을 얻을 수 있었다.
림롱은 그 정도면, 모든 유저에게 거의 트루 데미지로 마기를 꽂아 넣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한 생각이었다.
어지간히 노가다를 한 자신도 이제 겨우 9%정도의 항마력을 확보했을 뿐이었으니까.
림롱의 항마력은 캐릭터 자체 항마력 7%에 아이템으로 확보한 2.5%를 합한 9.5%였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캐릭터 자체 항마력만 30%에 가깝게 모아 놓은 이안 같은 괴물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후후… 빨리 노블레스 조건을 충족시키고 나서, 나도 차원전쟁에 합류해야겠어. 이라한 혼자서 독식하는 꼴을 볼 수는 없지.’
림롱은 이라한이 최초의 진마라는 정보도 알고 있었다.
진마가 된 뒤 상태를 꼼꼼히 점검하고 난 림롱이 서둘러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지금도 이라한이 꿀을 빨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 * *
< (7). 두 가지 보물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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