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 얀쿤과의 조우 -1 >
‘노예계약서’ 라는 이름의 아이템을 발견한 이안은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뭐지? 노예계약서?’
이안은 다시 한 번 주변을 둘러보았다.
‘노예시장에, 내 눈앞에 있는 탑은 아무래도 감옥 같은 느낌이고…. 설마 이대로 얀쿤을 노예로 계약해서 부려먹을 수 있게 되는 건가?’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그것은 아닐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얀쿤의 계급이 노예가 되었다면, 평마족이었던 헤이스카가 존대를 했을 리가 없지.’
이안은 일단 노예계약서 아이템을 열어 정보를 확인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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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예 계약서 -
분류 - 잡화
등급 - 희귀
내구도 - 50/50
분노의 도시 중앙광장에는 마계에서 가장 큰 노예시장이 있다.
마계의 노예시장에서 노예를 계약하기 위해서는 최소 상급마족 이상의 마계 계급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 노예계약서가 있다면 1회에 한해 유저의 마계 계급에 관계없이 노예를 계약할 수 있는 권한이 생기게 된다.
* 만약 사용자의 마계 계급이 상급마족 이상이라면, 1회에 한해 노예계약에 필요한 비용이 절반으로 할인된다.
* 유저 ‘이안’ 에게 귀속된 아이템이다.
다른 유저에게 양도하거나 팔 수 없으며 캐릭터가 죽더라도 드랍 되지 않는다.
(최초 1회에 한해 양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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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흠… 노예가 어떤 컨텐츠인지도 정확히 모르는 지금으로서는 일단 킵 해둬야할 아이템이겠군.’
조건부 계정귀속아이템.
즉, 1회에 한해 양도가 가능한 귀속아이템이었지만, 이안의 성격상 최초로 얻은 아이템을 누군가에게 팔거나 양도할 리가 없었다.
‘일단 얀쿤을 찾는 게 우선이야.’
징벌의 탑은 이안이 예상했던 대로 ‘감옥’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곳이었고, 탑 내부에는 수많은 마계의 수감자들이 철창 안에 빼곡하게 들어 차 있었다.
이안은 징벌의 탑 내부를 두리번거리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얀쿤의 외모는 워낙 특이했기 때문에, 가시권에 들어오기만 한다면 눈에 확 띌 게 분명했다.
하지만 30분 후, 이안은 그 판단이 무척이나 잘못된 것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으… 무슨 죄수들이 이렇게 많아!’
이안은 결국 직접 찾는 것을 포기하고, 구석에서 졸고 있던 간수에게 다가가 상급 마족의 인장을 내밀며 말을 걸었다.
“저… ‘얀쿤’을 찾고 있는데, 혹시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계십니까?”
이안의 말에 화들짝 놀란 간수는 입가에 흐르는 침을 닦아내며 허둥지둥 대답했다.
“얀쿤님 이라면 10층 중앙뇌옥에 계실 겁니다.”
간수의 대답에 이안은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뭐지? 간수가 죄수에게 존칭을 쓰는 건 대체 무슨 상황이야?’
하지만 상황이 어쨌든 얀쿤을 만나면 모든 궁금증을 풀어낼 수 있을 것이 분명했기에, 이안은 고개를 끄덕인 뒤 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감사합니다. 그럼 전 이만.”
30분동안 탑을 뒤지면서 이미 6층까지 올라와있었기 때문에, 10층까지는 4개 층만 올라가면 되었다.
계단을 오르는 이안의 발걸음이 점점 더 빨라졌다.
* * *
“크아아앗, 인간들…! 인간 치고는 제법 강력 하구나…!!”
양쪽 어깻죽지에 무소의 뿔처럼 튀어나와 양 방향으로 길게 굽어져 있는 거대한 날개 뼈.
온통 검붉은 피부에 군데군데 화염이 일렁이는 거대한 체격을 가진 마족.
‘셀라쿠마’가 자신의 눈 앞에 있는 다섯 명의 유저들을 향해 인상을 찌푸렸다.
“후욱… 후욱…. 이쯤 됐으면, 슬슬 포기할 때도 되지 않았나. 넌 우리의 상대가 되지 못해.”
가장 앞에서 셀라쿠마를 향해 기다란 창을 겨누고 있는 것은, ‘광휘의 기사’라는 히든 클래스로 유명한 세일론이었다.
또한 그 뒤쪽으로 늘어서 있는 유저들 또한 다들 이름이 쟁쟁한 카일란 한국서버의 최상급 랭커였다.
특히 세일론의 바로 뒤쪽에 있는 샤크란과 레미르는, 전투력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고 알려져 있는 초 고 레벨 유저.
그리고 이런 초 호화 전력이 힘을 합해 상대하고 있던 셀라쿠마는, 바로 110구역을 지키고 있는 마계 수문장이었다.
[마계 수문장(십이지장十二指將) 셀라쿠마 / 레벨 : 360]
셀라쿠마의 레벨은 얀쿤보다 10레벨이 높은 360이었고, 180~190레벨 사이인 랭커 다섯 명이 전력을 다해야 할 만큼 강력한 상대였다.
하지만 세 시간도 넘게 이어진 치열한 전투 끝에, 결국 셀라쿠마의 생명력은 모두 소진되고 말았다.
셀라쿠마는 일행을 잠시동안 지긋이 노려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아, 인정한다. 너희들은 이 안쪽으로 들어갈 자격이 있어.”
조금은 분한 표정의 셀라쿠마.
그런데 지금껏 조용히 있던 레미르가 셀라쿠마를 향해 물었다.
“우리에게 110구역 안쪽으로 진입할 ‘자격’ 이 생겼다라….”
불길이 화르륵 하고 피어오르는 레미르의 손끝을 본 세일론이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레미르님, 왜 그러세요?”
레미르는 냉랭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잠시만 있어 봐요.”
그리고 그녀는 한 걸음 한 걸음 성큼성큼 셀라쿠마를 향해 다가섰다.
“지금 내가 여기서 네놈을 죽여 버리면 어떻게 되는 거지? 어차피 네놈을 죽이면 우린 여기를 지나갈 수 있게 될 거고, 막대한 명성도 얻을 수 있을 텐데….”
레미르의 말을 들은 샤크란이 한쪽 입 꼬리를 슬쩍 말려 올렸다.
‘거기까지는 생각 못했는데…. 역시 레미르, 보통내기가 아니야.’
일행은 레미르와 셀라쿠마의 대화를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응시했고, 셀라쿠마의 대답이 이어졌다.
“뭐, 그렇다면 나와 끝까지 싸워도 상관은 없겠지.”
레미르의 협박(?)에도 셀라쿠마의 어투는 의외로 담담한 어조였다.
“네 말대로 이대로라면 분명 패하는 것은 너희가 아니라 내가 될 테고, 나를 죽이는 데 성공한 그대들은 막대한 명성과 보상을 얻을 수 있겠지.”
레미르의 말을 순순히 인정하는 셀라쿠마.
하지만 그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다만, 어느 쪽이 이득인지는 잘 생각해 봐야 할 거야. 나를 죽인다면 이 포탈을 지키기 위해 다른 수문장이 새로 임명될 거고, 그는 늦어도 일주일 내로는 다시 이곳을 지키기 시작할 거다. 그러면 너희는 여길 지나기 위해서 또 다시 그와 전투를 해야만 하지.”
“…!”
생각지 못했던 셀라쿠마의 말에, 레미르의 커다란 눈이 동그랗게 뜨여졌다.
“자, 어떻게 할 텐가. 당돌한 아가씨. 나와 끝까지 전투를 한번 벌여볼 텐가? 그렇다면 나도 최선을 다해 상대해 주도록 하지.”
대답과 함께 셀라쿠마의 주변으로 강렬하게 피어오르기 시작하는 마기.
뒤쪽에 있던 세일론이 재빨리 레미르를 불렀다.
“레미르님. 아무래도 그와 끝까지 싸우는 것은 손해가 많습니다.”
레미르가 눈을 게슴츠레 뜨며 물었다.
“어째서죠? 물론 다음에 다른 수문장을 상대해야 한다는 부분이 조금 귀찮기는 하지만, 마계 수문장씩이나 되는 놈이 어떤 보상을 줄지도 모르는 거잖아요? 번거롭더라도 놈을 죽이고 다음에 새로운 파티를 짜서 한번 더 사냥을 하는게….”
잠자코 그들을 지켜보고만 있던 샤크란이 불쑥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레미르님. 세일론의 말처럼, 이번에는 여기서 마무리짓고 지나가는 게 여러모로 우리에게 이득일 것 같습니다.”
레미르가 샤크란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왜 그런지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샤크란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지금 당장의 이득을 생각한다면 레미르님의 말처럼 놈을 잡고 보상을 얻는 게 좋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린 상대적 이득도 고려해야만 합니다.”
“상대적 이득이요?”
샤크란의 말이 이어졌다.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가 놈을 그대로 여기에 두고 떠난다면, 110구역은 한동안 우리를 제외하고는 어떤 유저들도 통과할 수 없는 곳이 되어버리겠죠. 지금 여기 있는 랭커들을 제외한 채 다른 유저들끼리 파티를 꾸린다면, 셀라쿠마를 상대할 전력은 쉽게 나오지 않을 겁니다.”
샤크란의 설명에, 레미르가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으음… 제 생각이 짧았군요. 상대적 이득이라… 확실히 중요한 부분이죠.”
특히나 110구역 통과여부는 120구역보다도 더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마계에서 접할 수 있는 최초의 도시인 ‘분노의 도시’가 100구역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었다.
분노의 도시가 100구역에 있다는 정보는, 이미 LB사에서 공식적으로 패치 노트에 언급한 부분이었으므로, 일행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일행의 의견을 모은 레미르가 셀라쿠마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좋아, 그대의 말대로 전투는 여기서 멈추도록 하지.”
셀라쿠마가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잘 생각했다. 그게 서로에게 유리한 훌륭한 결정이다.”
레미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우리 서로 윈 윈 했다고 생각하자고.”
그와 동시에 일행의 눈 앞에 기다렸던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최초로 110구역을 지키는 수문장을 상대로 승리하셨습니다.]
[명성을 40만 만큼 획득합니다.]
[이제부터 마계 수문장 ‘셀라쿠마’가 관문을 지키고 있는 동안은, 110구역의 포탈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습니다.]
레미르의 입 꼬리가 씨익 말려 올라갔다.
‘좋았어.’
그렇게 셀라쿠마와 성공적인 거래(?)를 마친 다섯 명의 유저는 109구역을 향해 열려있는 포탈로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레미르는, 누군가에게 조용히 속삭이듯 입을 열어 혼잣말을 했다.
“카산드라, 이번에는 어때? 이번에는 확실히 내가 ‘그’보다 먼저 이 곳을 지났겠지?”
레미르의 중얼거림과 동시에, 그녀의 손바닥에서, 새하얀 불길이 타오르더니 동그란 구체가 하나 떠올랐다.
그리고 그 안에서 얼굴을 내비친 카산드라가 싱글 싱글 웃으며 대답했다.
[글세…?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
이번에는 당연히 최초라고 생각했던 레미르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뭐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거야? 이번에는 ‘최초’로 110구역의 수문장을 상대로 승리했다는 메시지도 확인했는 걸?”
카산드라가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대답했다.
[물론 셀라쿠마를 상대로 승리한 건, 네 파티가 최초야. 하지만 그가 ‘상급 마족의 인장’을 가지고 있다면 얘기는 달라지지.]
레미르가 109구역으로 향하는 포탈 문을 밟으며 말을 이었다.
“‘상급 마족의 인장’…? 그게 뭔데?”
[쉽게 설명하면, 마족들로부터 상급 마족의 대우를 받을 수 있게 해주는 아이템이지. 그게 있으면 상급 마족 이하의 계급을 가진 수문장이 지키는 구간은 프리패스로 지날 수 있거든.]
“…?!”
[만약 ‘그’가 얀쿤으로부터 상급 마족의 인장을 얻었다면 110구역은 그냥 지날 수 있었을 거야.]
우우웅-
포탈을 통과해 109구역에 진입하자, 일행은 왁자지껄 떠들며 서로의 노고를 칭찬하고, 최초로(?) 109구역을 밟은 것에 대해 자축하기 바빴다.
하지만 레미르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그걸 왜 이제 말해 주는 거야? 그럼 우리도 만약 셀라쿠마를 죽였다면 상급 마족의 인장 이라는 것을 얻을 수도 있었던 것 아니야?”
카산드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그랬다면 내가 미리 너에게 귀띔을 해 줬겠지. 상급마족은 그렇게 쉽게 얻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야. 셀라쿠마에게서 인장을 얻어내고 싶었다면, 그에게 완벽한 인정을 받아야 해.]
“…?”
카산드라가 씨익 웃으며 한마디 덧붙였다.
[최소한 1:1의 싸움으로 완벽한 승리를 거둬야 그에게서 인정을 받을 수 있었을 거야.]
* * *
< (8). 얀쿤과의 조우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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