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신룡 카르세우스 -3 >
* * *
태초의 카일란에는, 총 열 일곱 명의 각기 다른 권능을 가진 신들이 존재했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천년 전.
마계의 침공을 막기 위해 열 일곱의 신들 중 다섯 명의 신이 인간계에 내려왔다.
하지만 신들은 직접적으로 인간계에 관여할 수 없었다.
하여, 다섯 신은 각기 자신의 권능을 이용해 마족의 침략을 받은 인간들을 도왔고, 마룡 ‘칼리파’를 막기 위해 각자 자신의 권능을 일부 부여한 드래곤들을 인세에 내려 보냈다.
그 중 전쟁의 신인 ‘카이레스’가 자신의 권능으로 탄생시킨 드래곤이 바로 전쟁의 신룡 ‘카르세우스’였고, 힘을 나누어준 인간 영웅이 바로 불패의 검사 ‘카이자르’ 였다.
둘은 활동 시기는 같았지만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카르세우스는 북부대륙의 프릴라니아 계곡을 지키며 마룡들과 맞서싸웠고, 카이자르는 중부대륙의 마족들을 상대로 활약했기 때문이었다.
마족들과의 전쟁이 끝날 때 쯤, 카르세우스는 마룡 칼리파에 의해 큰 위기를 맞게 되어 영혼의 상태로 봉인되었고, 카이자르는 전쟁의 신으로부터 기억을 봉인당해 인세를 떠돌기 시작했다.
전쟁의 신 ‘카이레스’라는 같은 줄기를 가진 카이자르와 카르세우스.
어찌 보면 형제나 다름없지만, 지금껏 서로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둘이, 이안에 의해 천년 만에 만나게 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둘은, 서로에 대한 짙은 동질감을 느낄 뿐 서로에 대해 알지는 못하는 상태였다.
중부대륙 외곽의 한 던전.
홀로 열심히 사냥 중이던 이안이 카르세우스를 향해 투덜거렸다.
“야, 모질이. 그때처럼 가신님이랑 합체할 수는 없는 거야?”
며칠 동안 열심히 레벨을 올린 덕에 어느덧 100레벨이 가깝게 성장한 카르세우스.
하지만 아직까지 150~180레벨대의 몬스터들이 즐비한 중부대륙의 던전에서는 제대로 된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에, 이안은 한숨을 푹푹 쉬고 있었다.
[그의 힘을 빌리는 건, 특수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지금은 불가능하다.]
카르세우스의 말에 이안은 입맛을 다셨다.
“쩝… 이래서 언제 내 레벨 언저리까지 따라오게 만드냐.”
카르세우스가 카이자르와 일체화 되어 전투했을 때는, 128레벨이기는 했지만 능력치는 그보다 훨씬 강력한 수준이었다.
물론 90레벨대인 지금의 카르세우스도 레벨에 비하면 말도 안 되는 수준으로 강력하기는 했지만, 이안은 답답했다.
“가신님, 여기 빨리 쓸어버리고 다음 던전으로 넘어가자.”
이안의 말에 카이자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자. 저 모질이 때문에 사냥 속도가 무척이나 느리군.”
카이자르의 말에 카르세우스가 고개를 휙 돌리며 정색했다.
[지금은 내가 인간의 몸이라서 그런 것 뿐이다. 본체로 돌아가면 이런 몬스터들 따위…!]
하지만 카르세우스의 변명을, 이안은 한 문장으로 일축시켰다.
“본체가 도움이 됐으면 본체로 뒀겠지.”
[그… 그렇지 않다…! 나는…!]
부들거리는 카르세우스를 향해 이안이 한 마디 더 했다.
“어차피 도움 안 되는 건 매한가지니까 움직이기 편한 인간의 몸으로 있으라고 한 거라고. 암튼, 잔 말 말고 따라오기나 해. 나랑 카이자르가 버스 태워 줄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라 주인…. 내가 저 무식한 인간놈보다는 금방 더 강력해 질 거다.]
카이자르를 보며 경쟁심을 불태우는 카르세우스.
둘을 한 번씩 번갈아 본 이안은 피식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네.”
“동감이다. 모질이 드래곤놈아.”
[….]
겉으로 티격태격하기는 했지만, 카이자르와 카르세우스는 합이 잘 맞는 편이었다.
레벨이 낮아서 능력치 자체가 아직 부족하기는 했지만, 전쟁의 용 이라는 수식어 답게 카르세우스의 전투 ai는 무척이나 뛰어났다.
그리고 가장 고무적인 부분은, 카르세우스가 깨어난 뒤로 카이자르의 충성도가 무려 20이나 올랐다는 것이었다.
‘카이자르의 충성도가 27이나 되다니… 이제 팀킬 당할 걱정은 안 해도 되겠어.’
무려 기분 좋을 땐 이안의 오더를 듣기도 하는 카이자르!
그야말로 장족의 발전이 아닐 수 없었다.
쾅- 콰쾅-!
카이자르와 카르세우스가 열심히 던전을 휘젓고 다니는 것을 보며, 이안도 창대를 고쳐 쥐고 전장에 뛰어들었다.
셀라무스 전사의 의지 스킬을 사용한 이안은, 카이자르만큼은 아니더라도 지금의 카르세우스보다는 강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카이몬 놈들은 슬슬 입질이 올 때가 됐는데… 왜 이렇게 잠잠한 거지?’
이안은 잠시 자신이 벌려놓은 일을 생각했지만, 곧 사냥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당장에 급한 일은 아니었고,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얼른 카르세우스의 레벨을 궤도에 올려놓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 통솔력도 어떻게든 올릴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카르세우스가 100레벨이 넘으면, 그동안 묵혀뒀던 소환술사 직업 퀘스트를 할 계획이었다.
직업 퀘스트는 일반적으로 직업 관련 스텟을 보상으로 주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 * *
카일란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여자친구와 데이트도 하며 오랜만에 느긋한 주말을 보내던 유현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컴퓨터를 켜고 쇼파에 몸을 뉘였다.
“흐으음… 오늘 하루 동안 카일란에는 별 일 없었으려나…?”
하지만 집에 돌아오니 곧바로 카일란 생각부터 하는 자신을 발견한 유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후우, 뭐 나도 어쩔 수 없는 게임 덕후인가….’
곧 공식 커뮤니티에 접속한 유현은 게시판을 여기저기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두 눈이 살짝 커졌다.
“으음… 뭐지? 무슨 일 있나? 여기 게시물 숫자가 갑자기 왜 이렇게 많아졌어?”
평소에는 많아봐야 한 시간당 50여개 정도의 새 글이 올라오던 ‘오늘의 이슈’ 게시판에, 무려 다섯 배가 넘는 양의 게시물들이 올라와 있었던 것.
별로 자주 들어가던 게시판은 아니었지만, 유현은 호기심에 클릭했다.
딸깍-
그리고 그 내용들을 본 후 더욱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뭐야…? 이거 우리 길드 얘기잖아?!”
저도 모르게 소리내어 중얼거린 유현은, 게시물들을 하나씩 찬찬히 읽어보기 시작했다.
- 와, 진짜 루스펠 최상위권 길드들 제대로 썩었네요. 진짜 그때 파이로 영지 문 열린 게 걔들 뒤통수였을 줄은 꿈에도 몰랐네.
- 그러니까요. 진짜 미쳤음. 근데 전 아직도 걔들이 왜 그런 짓을 한지 모르겠는데, 누구 좀 이해가게 설명해주실 분 안 계신가요?
- 뭐 저도 정확한 정황은 모르지만… 지금까지 알려진 내용, 보고 들은 내용들 한번 정리해 봅니다.
1. 후방 안전지대에서 손가락만 빨고 있던 루스펠 기득권층 길드들은 파이로 영지에서의 공성전이 생각보다 길어지니 전선이 후방까지 내려오지 않을까봐 불안해졌을 수 있습니다. 전쟁이 곧 돈이자 훌륭한 자원인 중부대륙의 특성 때문이죠.
2. 설령 며칠 뒤에 파이로 영지가 함락될 예정이었다고 하더라도, 그 기간 동안 로터스 길드가 얻어낼 이득이 배가 아팠을 겁니다. 실제로 로터스 길드는 이번 공성전을 전후로 길드 순위가 거의 70~80계단 정도 껑충 뛰어올랐으니까요. 제가 알기로 로터스 길드는 이제 길드순위 20위권 안쪽으로 진입했을 겁니다.
3. 마지막으로, 공성전이 길어질수록 도덕적 측면에서 대중으로부터 받게 될 지탄이 두려웠을 겁니다. 로터스 길드가 파이로 영지에서 오래 버틸수록, 그들을 돕지 않고 후방에 숨어 버린 자신들의 인지도가 떨어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죠. 로터스가 오래 버텼다는 얘기는, 최상위권 길드들이 로터스를 지원했다면 충분히 막아낼 수도 있었다는 말과 일맥상통하니까요. 물론 그들의 도움 없이도 로터스는 연합군을 막아냈지만 말입니다.
- 캬, 윗분 통찰력 진짜 장난아니네. 진짜 듣고보니 그럴싸 하네요. 스플렌더, 오클란… 진짜 나쁜놈들…. 전에 북부지역 던전들 독점할 때부터 알아봤어.
- 윗분 쓰신 내용에 다 동의하기는 하는데… 하나만 짚고 넘어가죠. 저희 벨리언트 길드는 전력으로 로터스를 도왔습니다. 후후…. 물론 로터스 길드와 이안님이 대단한 활약을 하기는 했지만, 저희 도움도 큰 몫 했다는 점은 다들 아셨으면 좋겠네요.
- 크, 윗님 벨리언트 길드 소속이신가보네. 뿌듯하시겠어요. 이번 공성전으로 벨리언트 인지도도 엄청나게 올라갔던데. 랭킹도 치고 올라가서 굳건히 3위 지키고 있더라고요. 부럽네요, 벨리언트라니… 흑….
- 후훗, 막간을 빌려 홍보한번 하자면, 저희 벨리언트 길드의 문은 항상 열려 있습니다. 언제든 가입하러 오세요! 물론 레벨제한은 130으로 올랐지만 말입니다….
게시판 수십 페이지가 스플렌더 길드를 비롯한 기득권층의 길드들을 향한 비난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고, 찬찬히 읽어 내려가던 헤르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지. 진성이 녀석 던전에 쳐박혀서 사냥만 하고 있을 텐데… 빨리 가서 알려줘야겠어.”
진성은 서둘러 컴퓨터를 끄고 캡슐 안으로 들어갔다.
시간이 조금 늦기는 했지만, 아직 진성이 접속 종료했을 시간은 아니었기에 스마트폰 메시지를 보내는 것 보다는 게임에 접속하는 편이 빠를 것이었다.
* * *
헤르스의 호출을 받은 진성은, 곧바로 파이로 영지의 영주성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급한 대로 접속해있던 피올란까지 셋이서 회의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배후가 스플렌더 길드라는 얘기가 여기저기 퍼져 있다는 거지?”
이안의 물음에 헤르스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그런 건 아니야. 내가 전부 다 읽어본 건 아니라서 정확히 어떻다고 얘기할 순 없지만, 두루뭉술하게 ‘최상위권 길드들이 배후다’ 정도만 이야기되고 있는 것 같아.”
헤르스의 말에 피올란이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루머일 가능성은요?”
“글쎄요. 루머일 수도 있긴 하겠지만… 이게 파급력이 너무 커요. 저도 지금 좀 혼란스럽네요. 차라리 이 내용이 전부 루머였고, 루스펠제국 길드들의 내분을 유도하기 위한 카이몬 수뇌부의 계략이었으면 좋겠는데….”
이안이 짧게 한숨을 내 쉬며 말했다.
“후, 안타깝게도 둘 다 맞을 거야.”
밑도 끝도 없는 이안의 말에, 헤르스가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뭐가?”
“그들이 우리 뒤통수를 친 배후인 것도 맞을 거고, 루스펠의 내분을 유도하기 위한 카이몬의 계략인 것도 맞을 거라고.”
“…?!”
잠시 이안이 한 말을 찬찬히 되새겨 본 두 사람은, 곧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카이몬 연합군 측에서 의도적으로 사실을 흘린 것이라는 얘기죠?”
피올란의 물음에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맞아요. 그렇지 않아도 헤르스가 준 정보들을 토대로, 암살자의 신원은 거의 확보한 상태라 저도 90% 이상 짐작은 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이번 사태도, 사실 제가 흘린 떡밥을 카이몬 쪽에서 물은 것 뿐이고요.”
“네에?”
“좀 생각지 못한 전개이긴 하지만….”
이안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이렇게까지 일이 커질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세작을 심은 일이 알려지면, 카이몬 놈들의 이미지에도 타격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대놓고 이럴 줄은 몰랐는데….’
하지만 이렇게 되면 비난의 화살이 전부 루스펠 제국의 랭킹권 길드들에게로 쏠리게 되니, 자연스럽게 카이몬 연합군은 비난의 화살을 피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이안이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이었다.
‘잘못하면 루스펠 제국 전체가 흔들릴 수도 있겠어.’
이렇게 이슈화 되어 버리면, 이안과 로터스 길드가 직접적으로 루스펠 제국의 기득권층 길드들과 대립각을 세우지 않더라도 민심이 돌아서 버린다.
그리고 중상위권 유저들에게 지원을 받지 못한다면, 그들은 카이몬의 연합군에 속절없이 무너져 버릴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지 않아도 전력 면에서 카이몬 쪽이 상당히 우세했으니까.
이안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게… 새로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기회일지도….’
< (5). 신룡 카르세우스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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