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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밍 마스터-182화 (209/1,027)

< (4). 사면초가 (下) -2 >

*          *          *

“그러니까… 우릴 도와주겠다는 겁니까?”

어둠이 짙게 깔린 달밤.

그리고 카이몬 제국 연합군 진영의 외곽에 있는 한 조용한 막사.

그 안에는, 몇몇의 인물이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특이점이라면, 나머지 인물들은 카이몬 제국의 문양이 수놓아져 있는 망토를 메고 있는 반면에 한 남자는 아무런 치장도 없는 새카만 흑의를 입고 있다는 점이었다.

흑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정확히 말한다면 돕는 건 아니죠.”

“흠…?”

“‘거래’ 라고 해야 더 맞는 표현이겠죠.”

“거래라….”

흑의 사내와 맞은편에 앉아있던 남자가 관자놀이를 살살 문지르며 입을 열었다.

“거래라면 그쪽도 우리한테 원하는 게 있을 텐데… 그건 뭡니까?”

그의 물음에, 흑의사내가 천천히 대답했다.

“우리가 원하는 건… 우리에게 일주일 정도 전쟁의 탑을 열어주는 겁니다.”

“…!”

그의 말에 막사 안에 있던 남자들의 표정이 누구 하나 예외 없이 굳어 버렸다.

“그건… 크흠….”

그들이 망설이는 빛이 보이자, 흑의 사내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쪽 입장에서는 크게 손해 보는 제안은 아닐 텐데요? 우리는 그동안 모아뒀던 전공 포인트나 좀 쓰겠다는 거고. 대신에 그대들은 2차 방어선을 쉽게 뚫을 수 있을 테고….”

하지만 아무도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고, 남자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최근 전황을 보면, 내 도움 없이 연합군이 2차 방어벽을 뚫는 건… 쉽지 않아 보이는데. 기약 없이 병력, 자원만 소비하면서 계속 이렇게 무식하게 대치할 생각입니까?”

그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닫았으며, 제법 긴 시간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렇게 이어지던 정적은, 한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섬과 동시에 깨어졌다.

“그 제안, 받아들이도록 하지.”

*          *          *

중부대륙에서도 두 제국세력이 맞물려있는 중심지역의 거점지들은, 길드의 깃발이 꽂혀 있더라도 제대로 발전된 곳이 거의 없었다.

언제 공성전이 발발할지 모르고, 또 언제 거점지의 소유자가 바뀔지 모르기 때문.

그렇기에 중심지역 근방에서 사냥중인 카이몬 제국 소속의 유저들은 쉴 곳이 없었다.

“하, 진짜 중부대륙은 경험치도 쩔고 아이템도 잘 드랍되고 다 좋은데, 사냥하고 정비할 만한 영지나 마을이 없어.”

“그러니까 말이야. 잡템들 팔 때도 너무 손해보고 파는 거 같아서 짜증나네.”

하지만 루스펠 제국의 유저들은 달랐다.

지역 안에서 유일하게 대영지의 단계까지 거점레벨이 올라가 있는 거대 영지인 파이로 영지가 중심지역 한복판을 굳건히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루스펠 제국 소속 유저들과 npc들은 파이로 영지를 이용할 수 밖에 없었고, 그것은 파이로 영지가 성장하는데 엄청난 원동력이 되었다.

“햐, 파이로영지는 대체 이 전장 한복판에서 어떻게 이렇게 발전이 빠른거야?”

“그러니까 말이야. 이제 곧 있으면 어지간한 북부대륙의 영지들보다 훨씬 좋아지겠어.”

심지어 며칠 째 공성전이 진행되고 있는 이 시점에도, 파이로 영지 안은 않은 유저들로 붐볐다.

사실 영지가 함락될 것 같으면 로그아웃을 하거나 귀환석을 이용해 다른 곳으로 대피하면 되기 때문에 큰 리스크가 없기도 했다.

귀환석은 전투중이 아닐 시에는 언제든지 사용이 가능했다.

위이이잉-

[곧 공성전이 시작되오니, 영지 외곽 쪽에 계신 유저분들께서는 속히 몸을 피해주시기 바랍니다.]

해가 중천에 걸리자 여지없이 공성전이 다시 시작되었고, 영지 외곽 쪽에 있던 유저들은 영지 중심부로 자리를 이동했다.

“오늘도 시작이구만.”

“그러게 말이야. 오늘도 버텨낼 수 있으려나?”

“아마 그렇지 않을까? 아직 2차 방어벽도 안 깨졌는데… 나는 3차 방어벽도 있다고 알고 있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걸음을 옮기는 유저들.

그런데 모든 유저들이 영지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는 이 때, 한 남자는 거꾸로 영지 외곽을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온 몸에 검정색 도복을 입고 두건과 복면으로 얼굴까지 가린 남자.

그는 미리 로터스 영지의 안쪽으로 들어와 있던 림롱이었다.

‘시작이군. 그나저나 정말 이 방법까지 써야 할 줄은 몰랐는데….’

림롱은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움직여 영지 외곽의 성벽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성벽에 도착하자마자 은신 스킬을 사용했다.

스르륵-

허공에서 감쪽같이 사라지는 림롱의 신형.

그는 능숙한 몸놀림으로 빠르게 벽을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어디보자… 여기서 이쪽으로 움직이면 됐었지?’

림롱은 품 속에서 지도를 펼쳐 들고 빠르게 자신의 위치를 한번 확인했다.

여러 번 잠입하며 지도를 그려낸 결과, 파이로 요새의 지도가 그의 손 위에서 거의 정확하게 완성되어 있었다.

‘이 아래쪽에 디텍팅 타워가 하나 있었고….’

아슬아슬하게 디텍팅 타워의 시야 바깥으로 움직이며 요새 안쪽을 헤집고 다니는 림롱.

그리고 그렇게 십여분 정도를 움직이자, 전방에 요란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후후, 제대로 찾았군. 이제 저기만 넘어가면 성문에 근접할 수 있겠어.’

완벽히 경로파악을 끝낸 림롱은, 품 속에 지도를 집어 넣어두고 가볍게 도약하여 2차 방어벽의 근처로 접근했다.

그리고 바로 지근거리에 도착한 그는 로터스 길드 유저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 몸을 숨겼다.

‘생각보다 쉬운데? 다들 공성전에 정신이 팔려 있어서 그런가…?’

중간중간 움직임이 노출 될 만한 구간이 충분히 많았음에도, 림롱은 쉽게 목표했던 위치까지 움직여 갈 수 있었다.

방어병력이 모두 공격해 오는 연합군에 정신이 팔려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리라.

림롱은 몸을 숨긴 채, 때를 기다렸다.

‘지금은 보는 눈이 너무 많아. 최대한 시선이 분산됐을 때, 시작해야겠어.’

그는 느릿느릿하고 조심스러운 움직임으로 품 속에서 쌍륜을 꺼내어 들었다.

마치 석고상처럼 미동조차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림롱.

그렇게 십여분 정도가 지났을까?

방금까지 돌처럼 굳어 있던 사람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림롱의 신형이 빠르게 튀어올랐다.

타탓-!

시뻘건 빛을 머금은 륜의 검날.

그리고 그 주위에 이글거리는 보랏빛 기류가 허공을 수놓기 시작했다.

“흐읍!”

림롱은 최대한 호흡을 짧게 가져가며 2차 방어벽의 관리실 앞에 서 있던 둘의 로터스 병사를 동시에 처치했다.

촤아악-!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움직임과 함께 목덜미 뒤쪽으로 파고드는 림롱의 검날!

130레벨 정도 레벨의 경계병들은 저항 한번 해보지 못한 채 그대로 축 늘어졌고, 림롱은 재빨리 관리실 안쪽으로 들어갔다.

‘후후, 성공이군.’

림롱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관리실 안쪽에 있는 레버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손잡이에 손을 올린 그는 망설임 없이 그것을 잡아당겼다.

드르륵-!

경쾌한 소리를 내며 뽑혀 내려오는 손잡이.

잠시 후, 방어벽 전체에 굉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콰아아아-!

림롱은 관리실 바깥을 한번 확인하고는 만족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이걸로 되었겠지.”

그는 륜을 치켜들어 레버를 향해 빠르게 휘둘렀다.

서걱-

깔끔하게 잘려나가는 레버의 밧줄.

림롱은 중얼거리며 관리실 바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제 문은 다시 닫을 수 없겠지.”

*          *          *

카일란 공식 커뮤니티의 메인 채팅방.

이곳은 며칠 전부터, 사실상 파이로 영지 공성전을 시청하는 시청자들의 실시간 담론장으로 변한지 오래였다.

커뮤니티 메인 화면에 라이브로 재생되고 있는 공성전 영상을 시청하는 모든 유저들이 메인 채팅방으로 몰렸기 때문이었다.

전투 영상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기는 했지만, 누군가와 시답잖은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구경하는 게 더 신났기 때문이었다.

- 키야, 오늘도 기세가 전혀 줄어들지 않았는데요?

- 그러게 말이에요. 오늘도 파이로 영지, 2차 방어벽 지켜 내나요?

- 진짜 미친 방어력이에요. 저거 원소타워들이 너무 강해서 아예 벽을 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데, 그렇다고 투석기로 벽을 허물어버리기엔 공간이 너무 협소해요.

- 윗님 말씀에 동감. 내가 카이몬 연합군 수뇌부였어도, 저건 진짜 답이 안 보임.

- 아니 그래도 숫자가 저렇게 많은데 저걸 못 뚫어요?

- 님아. 화면 보고 계시면 느끼겠지만, 요새 설계 자체가 너무 잘 돼 있어요. 어찌어찌 벽을 타고 올라가는데 성공한다 싶으면, 아래쪽에서 문이 열리고 방어군이 뛰쳐나와서 다 학살하잖아요.

- 그래도 일단 한번 밖으로 나온 방어군들은 다 전멸하는데, 이런식으로 계속 로터스 병력 줄이면, 결국 수적으로 압도적인 연합군이 이길 것 같은데요?

-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버틴 것 자체가 대단하긴 하지만, 곧 있으면 인원도 딸리고 자원도 다 떨어져서 파이로 영지는 결국 함락되겠죠.

신이 나서 공성전에 대해 갑론을박을 펼치던 유저들.

그런데 그 때, 누군가가 당황한 듯 빠르게 채팅을 쳐 올리기 시작했다.

- 님들! 지금 A채널 봐요!

- 네? 왜요? 뭐 있어요?

- 빨리, A채널로 다 바꿔 봐요! 진짜 대박! 저거 왜 저래 지금?

- 뭔데, 뭔데! 지금 B 채널 한참 재밌었는데. 님이 그러니까 봐야 할 것 같잖아요!

공성전이 치러지고 있는 전장은 무척이나 넓다.

그렇기에 공식 커뮤니티에서도 여러 군데 촬영수정을 띄워 놓았고, 그렇기에 총 다섯 개의 채널에서 공성전 영상이 방영중인 것이었다.

A채널의 촬영수정은, 2차 방어벽에서도 가장 대규모 공성전이 펼쳐지고 있는 중앙 지역을 찍고 있는 촬영수정이었다.

- 와, 미친! 저거 지금 왜 열리는 거에요?

- 뭐지? 연합군에서 요새 안쪽에 잠입하는데 성공한거야?

- 아니, 지금 저거 열리면 어떻게 되는 거야? 맙소사!

유저들이 당황한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파이로 요새의 2차 방어벽 정 중앙에 있는 가장 큰 성문이 천천히 위로 올라가며 열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수많은 연합군의 병력이 문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 들어갔다.

원소타워나 원거리 공격에 의해 죽어나가는 유저들도 있었지만, 일단 안쪽으로 진입해야 된다는 생각인지, 카이몬제국 유저들은 멈추지 않고 정문 안쪽으로 계속해서 밀려들어갔다.

- 와씨, 이거 대체 뭐야! 이러면 오늘 이대로 2차 방어벽 뚫리겠는데?

- 돌았다, 진짜. 정문이 열릴 줄은 상상도 못했어!

- 헐… 님들, 혹시 안쪽에 세작이 있었던 거 아닐까요? 카이몬 제국 소속 유저가 부캐 만들어서 로터스 길드에 잠입시켜 놨었다던가….

- 윗님 바보임? 가상현실게임에 부케가 어딨어요?

- 뭐 아니면 돈으로 꼬셨을 수도 있지.

수많은 추측이 난무하는 가운데, 영상 속의 공성전은 점점 알 수 없는 방향으로 치달아 가고 있었다.

*          *          *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한창 전장을 지휘하는 중이던 이안은, 생각지도 못했던 사태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굳건히 닫겨 있어야 하는 방어벽의 정문이 제멋대로 열리고 있는 것이다.

[관리실에서 가장 가깝게 있는 길드원분 있으면 빨리 레버 끌어 올려서 문 닫아요! 지금 메인 도어 열리고 있습니다!]

다급히 명령을 내리는 이안.

하지만 잠시 후 길드채팅을 통해 돌아온 답은 무척이나 절망적이었다.

[이안님! 레버 부숴져 있어서 문 닫을 수가 없는 상황이에요! 누군가 의도적으로 문을 열고 레버를 부숴버린 것 같아요!]

[네?!]

너무 당황스러운 나머지 할 말을 잃어버린 이안.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린 이안은 빠르게 명령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각자 위치에 있던 길드원분들, 20% 정도만 남기고 전부 중앙쪽으로 지원 와 주세요!]

어차피 정문이 열렸다면, 적들도 무리해서 성벽을 오르려고 하지는 않을 터.

그렇다면 열린 중앙의 문 앞에 최대한 많은 전력을 배치시켜 밀려드는 적의 병력을 막아내야만 했다.

‘제기랄, 대체 어떤 놈이 한 짓이야?’

하지만 지금 누가 범인인지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당장의 급한 불을 끄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후방 지원병력은 빨리 3차 방어벽으로 이동해서 방어 준비 시작해요! 최대한 빨리!]

한동안 2차 방어벽을 지켜내는 데 문제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방어군은, 3차 방어벽에 아무런 방어준비도 해놓지 않았던 것이다.

‘이대로 3차 방어벽까지 밀려들어가면, 그쪽 방어시설은 써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함락 당할거야.’

그런 일만은 어떻게든 막아내야 했고, 이안은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제기랄, 내가 어떻게든 막아내고 만다!’

이안은 카이자르를 비롯해, 모든 가신들과 고레벨의 유저들을 불러모았다.

이안은 3차 방어벽을 향해 급하게 이동하는 후방부대들을 힐끗 응시하며,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한 시간, 딱 한 시간만 버텨내면 돼.’

< (4). 사면초가 (下)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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