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테이밍 마스터-179화 (206/1,027)

< (3). 사면초가 (中) -2 >

*          *          *

“어후, 성벽 한번 높게도 쌓아 놨네.”

멀찍이서 전장을 바라보던 세일론이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다크루나가 공략에 실패했다 그래서 비웃었는데… 이 정도로 방어선이 탄탄할 줄이야.”

옆에 있던 에밀리가 그의 말에 동조했다.

“그러게. 제법 많은 병력이 희생됐는데, 아직도 1차 성벽을 제대로 못 뚫었어.”

에밀리의 말에 세일론의 두 눈이 조금 더 커졌다.

“뭐…? 1차…성벽? 그럼 2차 방어벽이 또 있단 말이야?”

“지난번 연합군 회의 때 뭐 했어? 보아하니, 졸았구만?”

“응?”

“다크루나 길드에서 공성전 정보 브리핑 할 때 말이야.”

“아하! 그야 뭐…. 네가 잘 들었을 텐데, 굳이 나 까지 집중해서 들을 필요는 없잖아? 후후.”

타이탄 길드의 수뇌부인 두 사람은 최상급의 랭커였고, 때문에 주요 전력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1차 방어선이 무너지고 나면 전투에 투입되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때, 앞쪽에서 말 없이 전장을 보며 생각에 잠겨있던 샤크란이 슬쩍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세일론, 에밀리. 이제 슬슬 움직일 준비 하도록.”

“예, 마스터.”

“드디어 움직이는 건가요?”

샤크란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제 슬슬 서쪽 성벽이 뚫리는 듯 하니, 바로 진입할 준비를 해야지.”

세 사람의 시선이 전장을 향했다.

언뜻 보기에는 팽팽한 것처럼 느껴지는 최전선의 전황.

하지만 샤크란은 방어벽이 무너지는 순간 얘기가 완전히 달라질 것이라 생각했다.

‘지금이야 높고 굳건한 방어벽 때문에 팽팽해 보이는 거지… 한 군데 뚫리는 순간 균형이 순식간에 무너질 거야.’

균형이 무너진다면, 그것을 기점으로 일방적인 학살이 시작될 것이었고, 그 타이밍에 1초라도 빨리 전장에 진입해서 적들을 쓸어 담아야 할 것이었다.

전장에서 처치하는 적국의 유저들과 npc는 어마어마한 경험치와 보상을 안겨주기 때문이었다.

“너무 시시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는데….”

세일론의 말에 샤크란이 피식 웃으며 핀잔을 주었다.

“무려 다크루나를 패퇴시킨 요새다. 그리고 그 때보다 분명 더 많은 준비를 해 뒀겠지.”

“그건 그렇겠죠?”

에밀리도 한 마디 거들었다.

“저들도 나름 네 자릿수 병력이야. 최소 오늘 하루 정도는 사냥할 사냥감이 넘쳐 날 테니, 시시하지는 않겠지.”

샤크란이 씨익 웃으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후후, 그럼 가볼까?” “예, 마스터.”

샤크란을 필두로, 타이탄 길드의 깃발 아래 모인 일천 정도의 병력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목적지는 무너져가는 서쪽 성벽이었다.

‘그때 그 소환술사놈과 다시 한번 싸워볼 수 있는 건가?’

몇 달 전, 제국 퀘스트 때문에 파스칼 군도의 뇌옥에 갔었던 샤크란.

그리고 그 곳에서 잠시 겨루었던 소환술사 유저가 이안과 동일인물임을, 샤크란은 얼마 전 알게 되었다.

‘후후, 놈이 얼마나 놀랄지 벌써부터 기대되는군.’

반쪽짜리 능력밖에 가지지 못한 분신으로도 호각을 이루었던 상대였기에, 호각을 이룰만한 상대라고는 애초에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안은 묘하게 그의 호승심을 불러일으키는 상대였다.

‘내 손으로 잡았으면 좋겠는데….’

이안에게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보여줄 생각에 벌써부터 흥이 난 샤크란.

하지만 어찌 될지는 지켜봐야 할 일이었다.

*          *          *

겨울방학이라 무척이나 한적한 한국대학교.

하지만 가상현실과의 과실은 무척이나 시끌벅적했다.

“야, 수철아. 치킨 아까 시킨거지?”

“네, 형! 시킨지 20분쯤 됐으니까, 이제 조금 있으면 올 거예요.”

“오케이.”

“민아, 뭐하고 있어! 빨리 프로젝터 틀지 않고!”

“이놈아, 네가 틀던가. 왜 시키고 난리야.”

오늘은 가상현실과의 학생들이 방학 중 오랜만에 만나서 놀기로 한 날이었다.

노는 장소가 학교라는 게 조금 아이러니하기는 했지만, 학교에 있는 과실만큼 아늑한 공간도 없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들이 학교에서 모이기로 한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티이잉-!

민아가 프로젝터를 켜자, 과실의 한쪽 벽에 커다랗게 하얀 화면이 떠올랐다.

“채널은 어디 틀까?”

민아의 물음에, 세원이 재빨리 대답했다.

“어디긴, 당연히 YTBC 틀어야지. 거기가 제일 영상 퀄리티가 높단 말야.”

“맞아, 그리고 거기 캐스터들이 우리 길드 제일 잘 빨아줘서 난 거기가 좋아.”

“알겠어요, 오케이!”

과실에 모인 학생들은, 모두 로터스 길드의 길드원들이었다.

다만 레벨이 너무 낮아서 중부 대륙의 공성전엔 참전을 못하는 인원이었던 것.

그나마 세원은 130레벨에 간당간당하는 수준은 되었지만, 별로 도움될 것 같지 않다는 유현의 일침에, 맘 편히 관전이나 하기로 한 것이었다.

잠시 후 채널이 열리고, 영상이 송출되기 시작하자 민아는 당황스런 표정이 되었다.

“뭐야? 벌써 전투 시작한지 꽤 된 것 같은데?”

수철이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뭐? 그러네. 아니, 한시부터 방송예정이었는데 왜 벌써 시작된 거지?”

“그야, 제국군이 예정보다 빨리 움직여서 그렇게 됐나보지 뭐.”

과실 구석의 냉장고에서 사이다를 한 잔 따라 마신 수철이 말을 이었다.

“그래도 보니까 아직까지 일차 방어벽도 건재하네. 이제 본격적으로 싸우기 시작할 테니까 괜찮아. 지금부터 보면 돼.”

영상이 시작되자, 어느새 여섯 명의 학생들이 옹기종기 쇼파에 앉아 화면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불도 다 꺼놓고, 벽 전체에 쏘아지는 커다란 프로젝터로 영상을 시청하니, 마치 작은 영화관에라도 온 듯한 분위기였다.

쾅- 콰쾅-!

[아아, 저기 드디어 파이로 영지의 일차 방어성벽이 뚫리나요!!]

흥분한 캐스터의 목소리와 함께, 거대한 바윗덩어리들이 무너져가는 성벽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콰쾅!

[그런 것 같죠? 이제 저 정도의 공간이면 병력이 진입하기에 충분할 것 같아요.]

[그렇습니다. 저기 보시면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드는 전투부대가 보이죠?]

[저 깃발은, 타이탄 길드의 깃발인 것 같네요. 선두에는 역시 타이탄 길드의 마스터인 샤크란이 있습니다.]

화면을 보던 민아가 세원을 향해 물었다.

“그런데 세원오빠.”

“왜?”

“원래 공성전에서 저렇게 성벽 자체를 부시고 진입했던가요? 이전에 우리 북부대륙 영지 수성전 할 때는 안 저랬던 것 같은데?”

옆에 있던 수철도 거들었다.

“그러게. 그 때는 토성 쌓거나 사다리차 같은 거 이용해서 기어 올라왔었잖아.”

두 사람의 말에 세원도 의아한 표정이 되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게. 성벽 HP가 무지막지하게 높아서 저렇게 부수는 건 엄청 비효율적일텐데.”

그리고 그들의 대화를 듣기라도 한 듯, 캐스터들이 의문점을 풀어주었다.

[일차 방어벽이 드디어 뚫리기는 했지만, 벌써 두 시간 가까운 시간이 지났죠?]

[그렇습니다. 파이로 영지 방어성의 방어력은 정말 미친 수준이었어요. 중부대륙의 안시성 이라는 별명이 아깝지 않은, 그런 수성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죽했으면 성벽 오르는 걸 포기하고 무너뜨리는 걸 택했겠습니까. 성벽이 워낙 높은 탓도 있었지만, 방어 전략이 정말 체계적이었어요. 쉴 새 없이 낙석이 떨어지고, 성벽 중간 중간에서 트랩이 발동되니 아예 부수는 걸 택해 버린 거죠.]

설명을 들은 세원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 그랬구나. 무식한 놈들….”

민아도 입을 열어 한 마디 거들었다.

“저것들 진짜 징그럽네요.”

“그런데 세원이형, 쟤들 저런 식으로 2차, 3차 방어벽까지 부숴버리는 걸 택하면 우리가 공들여 지은 방어 기관들이 다 쓸모 없어지는 거 아니에요?”

수철의 말에 세원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그건 아닐 거야. 1차 방어벽이야 멀리서 투석기들이 원거리 공격을 할 수 있었지만, 2차 방어벽부터는 투석기의 사거리에 들어가려면 투석기가 1차 방어벽 안쪽으로 들어와야 되거든.”

“아하.”

“아마 투석기는 화염마법 한 방이면 그대로 불타버릴 텐데, 그렇게 가까운 거리까지 접근해 오는 걸 길드원들이 보고만 있진 않겠지?”

민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네요.”

그들이 대화하는 동안, 파괴된 성벽을 잡고있던 카메라의 앵글이 급격히 이동하여, 성 안쪽을 비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곳에서는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때, 뭔가를 발견한 민아의 목소리 톤이 살짝 높아졌다.

“오빠, 저기 진성이 맞죠? 저거!”

민아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그녀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방향을 향해 모아졌고, 그 곳에는 할리의 등에 올라탄 이안이 타이탄의 길드원들과 맞부딪히고 있었다.

“그러네. 진성이 맞네.”

두 사람이 이안의 모습을 발견하고 반가워하는 반면, 수철은 고개를 갸웃 했다.

“그런데 진성이 쟤, 무기는 언제 또 바꾼 거지? 웬 창을 들고 있네?”

*          *          *

깡- 까강-!

무너진 파이로 영지 1차 방어벽의 서쪽 지역.

성벽의 일부분이 무너진 것이었기에 한 번에 몇 천 단위의 병력이 진입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제법 많은 병력이 요새 안쪽으로 들어왔다.

‘뚫리기는 했어도, 이 정도의 좁은 공간이라면 막을 수 있는 데 까지는 최대한 막아내야 해.’

서쪽지역의 성벽이 뚫렸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이안은 빠르게 움직여 서쪽 전장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이제껏 성벽 위에서 전체적인 지휘를 도맡아 하느라 소환하지 않았던 소환수들도 전부 다 소환했다.

“폴린, 세리아. 너희도 날 좀 도와야겠어.”

“알겠습니다, 영주님.”

“예! 영주님!”

카이자르를 제외한 가신들까지 전부 다 데려온 이안은 무너진 성벽으로 진입해 오는 카이몬 제국군과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라이, 항상 그랬던 것처럼 마법사나 궁사, 사제 위주로 제거해줘.”

[알겠다 주인.]

라이는 단일 타겟에 폭발적인 피해를 입히는 데 특화되어 있는 소환수였다.

그랬기 때문에 이런 난전에서 그 능력이 가장 빛나는 소환수였다.

반면에 레이크나 핀은 이런 난전에서는 크게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주요 공격능력인 광역스킬을 사용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핀, 레이크. 너희는 싸우다가 고유스킬 재사용 대기시간 돌아오면 바깥쪽으로 나가서 광역스킬 사용해줘.”

꾸룩- 꾸루룩-!

마지막으로 빡빡이와 세리아를 한 팀으로 붙인 이안은 할리의 등 위에 올라탔다.

“자, 한번 최대한 막아 볼까?”

이안은 모든 버프스킬을 전부 사용했지만, 아직까지 ‘셀라무스 전사의 의지’ 스킬은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셀라무스 전사의 의지는 상대하기 힘든 적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아껴둬야겠어.’

셀라무스 전사의 의지 스킬은, 지속시간에 비해 재사용 대기 시간이 길지 않았다.

오히려 짧은 편.

그렇기에 사실상 아껴둔다는 말은 맞지 않았다.

이안은 스킬이 지속되는 동안 다른 어떤 스킬도 사용할 수 없다는 패널티 때문에 신중하게 사용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안이 전투에 뛰어들자, 많은 유저들이 이안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안이다!”

“정말 이안이야! 저놈 잡으면 보상이 어마어마하겠지?”

적국의 유저를 잡았을 때 얻는 보상은, 상대의 레벨과 명성, 그리고 그가 보유하고 있던 전공 포인트에 비례하게 된다.

그렇기에 누군가 이안을 죽이는 데 성공한다면, 정말 막대한 보상을 얻을 수 있기는 할 것이었다.

이제 이안은, 레벨도 10레벨 이내로 최상위 그룹을 따라잡은 상태였으며 전공 포인트나 명성의 경우는 이라한이나 샤크란보다도 더 높은 수준이었으니까.

이안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카이몬 제국의 유저들을 보며 입 꼬리를 슬쩍 말아 올렸다.

‘어휴, 레벨이 아깝다 이놈들아.’

가상현실 속에서 수많은 유저들을 상대해 온 이안은, 이제 상대가 움직이는 모양새만 대충 보아도 어느 정도 견적이 나왔다.

그리고, 적어도 지금 이안에게 달려드는 유저들 중에는 제대로 된 실력자가 보이지 않았다.

이안은 ‘정령왕의 심판’을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했다.

“내가 창을 잡은 지는 얼마 안 됐지만, 님들 한테 질 것 같진 않네요.”

명백한 도발!

그리고 그 도발에, 카이몬 제국 유저들의 얼굴이 단숨에 시뻘겋게 변했다.

“유명세 좀 타더니, 정신이 나간 거 아니야?”

“미친, 이런 상황에서도 퍼포먼스가 중요한 거야? 진짜 창으로 우리랑 싸우려는 건가본데?”

자고로 게임 못한다는 말은, 남자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도발이었다.

못생겼다는 말보다 최소 열 배는 효과가 좋은 수준!

게다가 적의 분노를 타오르게 하는 도발은 그 어떤 상태이상 스킬보다 확실한 CC기(적의 움직임에 제약을 거는 스킬. crowd control 의 약자)라고 할 수 있었다.

CC기는 캐릭터에 걸리지만, 자존심을 건드리는 도발은 플레이어의 뇌에 걸리기 때문에 해제스킬로 풀 수 조차 없는 것!

이안이 씨익 웃으며 한마디를 더 던졌다.

“한꺼번에 덤비라고. 시간 없으니까 말이야.”

< (3). 사면초가 (中)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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