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사면초가 (中) -1 >
* * *
침략자가 공성전에 승리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넘어야 할 것은, 당연 높다랗게 솟아있는 성벽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국 연합군 측에는, 굳건한 파이로 영지의 성벽을 공략하기 위한 공성병기들이 제대로 갖춰져 있었다.
로터스 길드를 얕봤던 다크루나길드의 공격 때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투석대대 공격대기!”
덜컹- 덜컹-
나무로 만들어진 바퀴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거대한 투석기들이 전방을 향해 움직여 일 열로 늘어섰다.
“장전!”
끼익- 끼이익-!
나무 휘어지는 소리와, 끈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투석기 위에 커다란 바윗덩이들이 올라갔다.
“발사!”
발사 신호가 떨어지자 검을 든 병사들이 일제히 팽팽한 밧줄을 끊어 내었고.
슉- 슈슉-!
거대한 바윗덩이들이 허공을 가로질러 요새 성벽을 향해 날아들었다.
쾅- 콰아앙-!
“땅 속성 계열 마법사는 참호를 흙으로 메우는데 주력하도록!”
무턱대고 성벽을 오르는데 급급했던 다크루나 길드의 공격대와는 달리, 제국군은 사령관의 지휘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원거리 공격 위주로 성벽 위의 방어군을 견제하며, 착실히 성벽을 오르기 위한 사전작업을 진행한 것이다.
병사들과 한 조를 이뤄 흙 포대를 나르기 시작하는 마법사들.
마법사들은 쉴드 마법으로 원거리 공격을 막아내며 병사들을 보호했고, 깊게 파여진 파이로 요새 앞의 참호가 조금씩 메워지기 시작했다.
그리핀의 위에 탄 채, 그 모양을 보고 있던 이안이 재빨리 명령을 내렸다.
[카윈, 지금부터 다섯까지 센 다음 수로 열어!]
[오케이!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안은 참호를 향해 쏟아내던 원거리 화력을 적들의 후방 쪽으로 다시 돌렸다.
[이제 곧 수문이 열리면 참호는 물바다가 될 겁니다. 접근하는 병력들을 그냥 두세요. 최대한 많은 병력이 참호 안으로 들어왔을 때 물벼락을 맞아야 하니까요.]
공성전이 시작 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직까지는 크게 급박한 상황이 연출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안은 최대한 자세히 설명을 부연하며 명령을 내렸다.
[아직 성벽을 오르는 움직임은 없습니다. 최대한 후방에서 접근하는 적들의 생명력을 깎아 주세요!]
파이로 요새의 성벽 위에서는 끊임없이 화살세례가 쏘아지고 있었다.
그 숫자는 파이로 영지를 지키는 방어병력의 규모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많은 수준이었는데, 이것 또한 이안의 치밀한 사전계획 덕분이었다.
이안은 요새 내부에 미리 여분의 활과 화살을 넉넉히 준비해 놓아서 궁수가 아닌 유저들도 전부 활을 들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적들이 성문을 넘기 전까지, 근접 무기를 사용하는 병력은 대부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이로 인해 생기는 딜로스는 생각보다 컸으며, 이를 최소화시키려면 궁수 클래스가 아니더라도 활을 들게 해야 한다는 게 이안의 생각이었다.
‘저들이 성벽을 넘기 시작하면, 그 때 다시 근접무기를 들면 되는 거니까.’
그런데 그 때, 이안을 향해 몇 발의 화살이 날아들었다.
깡- 까강-!
하지만 이안이 비행중인 위치는 일반적인 궁수들의 사거리 바깥쪽이었기 때문에, 화살은 힘을 잃은 상태였고, 이안은 손쉽게 쳐낼 수 있었다.
‘사거리 밖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여기까지 날아오기는 하네?’
이안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화살을 몇 개 더 쳐낸 뒤, 허공으로 더 높이 날아올랐다.
그리고 잠시 후, 커다란 물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콰아아아-!
요새 안쪽으로부터 흘러나온 물줄기가 참호를 향해 쏟아져 나온 것.
“으아악! 피해!”
“참호가 물에 잠긴다! 뒤쪽으로 빠져 나와!”
하지만 숫자가 한둘이 아닌 만큼, 병력의 진퇴가 그리 손쉽게 이뤄질 리 없었고, 대부분의 병사들이 물줄기 속에 잠겨버렸다.
“컥, 커컥-!”
물에 빠져 괴로워 하는 카이몬 제국의 병사들.
그들을 향해 파이로 영지 내부에 있던 마법사들이 빙계 마법을 캐스팅했다.
“글래셜 스파이크!”
“프로즌 헬!”
전쟁에 참여한 이들의 레벨은, npc와 유저를 막론하고 최소 130은 넘는 수준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물에 빠뜨린 정도로는 쉽게 그들을 죽일 수 없었지만, 빙계 마법과 연계된다면 이야기는 달랐다.
쩍- 쩌저적-!
여기저기서 물이 얼어붙는 소리, 그리고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고.
[낙석공격! 개시!]
성벽 위에서 미리 대기중이던 공격조가 커다란 바위를 그 위로 굴려 떨어뜨렸다.
쾅- 콰쾅-!
순식간에 참호를 중심으로 요새의 주변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참호에 쏟아진 물이 워낙 많은 양이었기에, 수면부터 얼려 들어가기 시작했고, 참호에 들어가 있던 대부분의 병력들이 물 속에서 빠져나오기 전, 얼음 안쪽에 갇혀버렸다.
몇 군데 낙석으로 인해 깨진 부분으로 병사들이 탈출을 시도했지만, 계속해서 떨어지는 바위가 그들을 처참히 뭉개버렸다.
쾅-!
전장 위에 떠있는 월드 메시지 창은 쉴 새 없이 갱신되고 있었다.
[낙석으로 인해 카이몬 제국 병사가 사망하였습니다.]
[산소 부족으로 인한 지속데미지로, 카이몬 제국 병사가 사망하였습니다.]
[파이로 영지 동남쪽 (255,304) 지점의 성벽이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리고 이안 또한 고립된 적들을 향해 광역 스킬을 퍼붓기 시작했다.
아직까지 비행이 불가능한 다른 소환수들을 소환하는 것은 무리였기에, 핀의 분쇄 스킬이 주가 되었다.
콰아아아-!
장대비처럼 쏟아지는 ‘분쇄’ 스킬의 도트 데미지!
물 속에 잠긴 채 여러 가지 상태이상에 걸린 적들의 생명력이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카이몬 제국 병사를 처치하여 경험치를 658909만큼 획득합니다.]
[카이몬 제국 소속 유저 ‘오리안’을 처치하여 경험치를 1028789만큼 획득합니다.]
[명성을 1200만큼 획득했습니다.]
‘좋아!’
이안은 떠오르는 시스템 메시지를 확인할 새도 없이, 다시 허공을 향해 빠르게 솟구쳐 올라갔다.
이안이 핀의 분쇄 스킬을 사용하기 위해 지상에 가깝게 내려오자 원거리 폭격이 비 오듯 쏟아진 탓이었다.
슈슈슉-!
새까맣게 쏟아지는 화살은 물론.
펑- 퍼펑-!
마법사들이 쏘아 보낸 원소마법들도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핀아, 저쪽으로…!!”
눈 앞으로 빨려들 듯 쇄도해 오는 화염구체를 발견한 이안이 황급히 핀의 한쪽 어깨를 잡아당겼다.
콰아앙-!
핀은 재빨리 횡으로 한 바퀴 회전하였고, 아슬아슬하게 화염마법을 피해 낸 둘은 곡예를 하듯 원거리 공격들을 피해가며 성벽 위로 다시 올라갔다.
턱-
핀의 등 위에서 내린 이안은 인벤토리에서 장궁을 꺼내어 등에 메었다.
이안의 시선이 접근해 오는 카이몬의 대군을 한번 쭉 훑었다.
‘이제는 얼어붙은 참호 넘어로 접근해서 성벽을 타기 시작할 테지.’
이안은 서둘러 지휘관의 위엄 효과를 활성화 시키고, 임을 열었다.
[이제 적들이 성벽을 타고 오를 겁니다. 근접 클래스 유저 분들께서는 본래의 무기로 바꿔 착용 해 주시고, 마법사 분들께서는 광역마법 캐스팅 준비 해 주세요.]
분주히 여기저기 명령을 내린 이안은 등에 멘 장궁을 잡아 들고는 천천히 활 시위를 당겼다.
‘오랜만에 저격 솜씨 좀 발휘해 볼까…?’
신중한 표정으로 적진을 향해 조준하는 이안.
과거 궁수클래스의 스킬들을 보유하고 있었더라면 지금보다 더 먼 거리에서도 적을 맞춰낼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기본적인 능력치로만 활을 쏘아내야 했다.
이안은 목표한 적들이 사거리 안쪽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신중히 활시위를 놓았다.
피이잉-!
이안의 활 시위를 떠난 화살이, 바람을 가르며 빠르게 적진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 * *
파이로 요새에는 두 개의 성문이 있었다.
이안과 대부분의 병력이 방어전을 벌이고 있는 동남쪽의 성문과, 험한 산지로 둘러싸여 있어 입구가 좁은 북서쪽의 작은 후문.
그리고 이 후문 안쪽에 일단의 병력들이 가지런히 도열해 있었다.
“카이자르님, 준비 되셨습니까?”
헤르스의 물음에, 카이자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는 끝났다. 이제 성문을 열도록.”
카이자르가 이안의 가신이기는 했지만, 그 누구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는 않았다.
사실, ‘않’이 아니라 ‘못’이 맞는 말이겠지만.
헤르스가 허공으로 고개를 치켜들며 입을 열었다.
“로이첸님, 지금 괜찮겠습니까?”
헤르스의 물음에, 성벽 위에서 열심히 방어병력을 지휘중이던 로이첸이 대답 대신 한 손을 번쩍 치켜 들었다.
“마법사들, 전원 광역 마법 발사!”
쾅- 콰콰쾅-!
성문을 향해 접근하는 카이몬 제국군을 뒤쪽으로 물러나게 해서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명령.
로이첸의 의도를 알아 챈 헤르스가 성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성문… 오픈!”
“예, 마스터!”
끼이익-!
헤르스의 명령과 함께 굳건히 닫혀 있던 성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고, 카이자르는 등 뒤에 메고 있던 대감을 뽑아 들었다.
스르릉-!
한혈보마를 비롯해, 이안이 전 재산을 탈탈 털어 구매한 번쩍거리는 장비들을 걸친 카이자르.
성문이 반쯤 열리자, 카이자르가 우렁찬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전원… 진격…!”
둥- 둥- 둥-!
전고가 울려 퍼짐과 동시에 말 고삐를 팽팽히 잡아당긴 기마병들이 일제히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두두두두-
요란한 함성소리같은 것은 없었지만, 정갈한 말 발굽소리들과 함께 5백의 기마병이 순식간에 성문을 빠져나갔다.
성벽 위에서 그 모습을 확인한 로이첸이 헤르스를 향해 물었다.
“헤르스님, 이건 조금 무리수 아닐까요?”
로이첸의 물음에 헤르스가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예?”
“아니, 수적으로 이렇게 열세인 전투에서 성문을 열고 병력을 내보낸다는 상황 자체가 좀 아이러니한 것 같아서 말이죠. 물론 이쪽은 동남쪽처럼 탁 트인 공간은 아니긴 하지만….”
맹렬한 기세로 나아가는 기마병들을 힐끗 본 로이첸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하자, 헤르스는 피식 웃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로이첸님. 적당히 헤집고 나서 돌아올 겁니다.”
“저들이 아무리 170레벨이 넘는 최상위 기마병이라 하더라도, 수적으로 열 배 가까이 차이가 나는데….”
성벽 위로 올라온 헤르스가 기마부대의 선두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우린 카이자르만 믿으면 됩니다.”
“그게 무슨…? 카이자르가 레벨이 높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렇다곤 해도 npc일 뿐이지 않습니까.”
로이첸은 카이자르가 레벨이 좀 높은 npc라는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구체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헤르스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npc는 레벨이 높다고 해도 10~20레벨이 낮은 유저보다 허약한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가신이라는 npc가 레벨이 높아 봐야 200이 넘겠어? 높게 잡아서 190 정도라고 쳐 줘도, 대세에 큰 영향을 주지는 못할 텐데….’
하지만 잠시 후, 로이첸은 자신의 판단을 전면 수정해야만 했다.
“크하아아…!”
괴성을 지른 카이자르가 전장을 휘젓고 다니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쾅- 콰쾅-!
이안으로부터 뺏은 물건 1호인 다크 펜리르의 대검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시커먼 에너지를 폭사시키는 카이자르!
로이첸의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저… 저게…?”
카이자르의 검이 한 차례 휘둘러질 때 마다, 제국 병사들 대여섯이 새까만 재가 되어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었다.
놀라는 로이첸을 보며, 헤르스가 실소를 흘렸다.
“걱정할 필요 없다지 않았습니까. 저쪽은 신경 쓰지 말고, 우리는 성벽 방어나 열심히 하면 됩니다.”
헤르스는 다시 움직여 성벽을 타고 넘어오는 적들을 향해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로이첸의 시선은 한동안 카이자르의 뒷모습에 머물러 있었다.
‘전투력만 뛰어난 게 아니라, 부대 통솔력도 엄청난데…? 이안님은 대체 저런 npc를 어디서 구한거지?’
새까맣게 많은 병력이 군집되어 있는 카이몬제국 연합군의 진영을 무주공산처럼 휘젓고 다니는 카이자르의 기마부대.
카이자르를 선두로 삼각편대를 이루며 맹렬히 돌진하는 기마부대는, 아무리 많은 적들에게 둘러싸여도 그 속도가 줄지 않았다.
삼각편대의 꼭짓점인 카이자르가 방어선을 아예 찢어발겨 버렸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소규모 병력으로 적진 한복판에 뛰어든 형국이었기 때문에, 마법사들은 섣불리 광역마법을 사용하지도 못했다.
자칫 잘못 사용했다가는 카이몬의 병력이 오히려 더 큰 피해를 입는 것이다.
“버러지 같은 카이몬 놈들! 다 가루로 만들어 주마!”
괴물같은 본신의 능력에 자신을 십년 동안 가둬놓았던 카이몬 제국에 대한 분노가 더해지자, 카이자르는 그야말로 전신(戰神)이 빙의하기라도 한 듯 전장을 휘젓고 다녔다.
이안 게임 살림의 기둥뿌리를 뽑아가고 있기는 했지만, 밥값만큼은 확실히 하는 카이자르였다.
< (3). 사면초가 (中)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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